Mag-log in[채이]
새벽 다섯 시 사십 분. 한복집 셔터 밑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빠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아빠는 늘 이미 일어나 있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자 아빠가 인두를 든 채 나를 봤다. 캐리어를 봤다. 다시 나를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벽에 걸린 앞치마 하나를 턱으로 가리켰다.
"손 씻고. 옷감 걷어."
앞치마를 둘렀다. 가슴께 바늘꽂이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풀 먹여 말린 무명을 걷었다. 무거웠다. 이 무게를 그 사람이 들었구나. 새벽 네 시에. 채훈이 앞치마를 두르고.
재봉틀이 돌았다. 아빠의 오래된 발틀. 말을 할 수 없는 소리. 다행이었다. 할 말을 고를 시간이 생겼다. 고르다 보니 고를 게 없었다.
재봉틀이 멈췄다. 아빠가 다듬잇돌 위에 무명을 폈다.
"아빠. 나 체크아웃했어."
"……뭐?"
"그 집에서. 1년 약속, 내가 먼저 끝냈어. 오늘 이사회에서 녹음 튼대. 가짜 결혼이라고. 내가 없으면 그 녹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신부 두 번 도망간 불쌍한 신랑이 되는 거야. 그게 제일 나아."
아빠가 다듬이 방망이를 들었다. 내리치지 않았다. 공중에서 멈췄다.
"그 사람이 여기서 다듬이질 백 번 할 때. 뭐라고 했는지 아냐."
"……뭐라고 했는데."
아빠가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이 집 사람들은 싫으면 방망이를 내려놓는다. 아빠가 싫은 건 지금 나였다.
"내가 먼저 들은 거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네가 섭섭해할 거라고. 근데 말해야겠다."
돋보기를 벗었다. 이마를 훔쳤다.
"1년이 짧다더라."
옆에 달궈 둔 다리미가 김을 뿜었다. 앞이 흐려졌다. 김 때문이었다.
뒷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내 캐리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도망가는 건 세라 하나로 충분해."
원장님이랑 똑같은 말이었다. 이 동네 어른들은 대본을 돌려 보는 모양이다.
"엄마, 나 도망 아니야. 체크아웃."
"그게 그거야. 바보야."
언니랑도 똑같았다. 대본이 확실하다.
아빠가 방망이를 다시 들었다. 이번엔 내리쳤다. 탁.
"채이야. 너 식장에서 뭐 하는 사람이냐."
"……매니저."
"매니저가 뭐 하는데."
"신부 옆에 서."
탁.
"그럼 서. 좋아하면 옆에 서. 네 일이잖아."
시계를 봤다. 여덟 시 사십 분. 이사회 열 시.
앞치마를 벗을 틈이 없었다.
[재헌]
아침 일곱 시. 반지와 메모.
메모를 세 번 읽었다. 세 번 읽어도 글자는 안 바뀌었다. 그녀가 옳았다. 동정표는 녹음보다 세다. 신부가 두 번 도망간 신랑. 이사회는 나를 불쌍하게 볼 것이다. 표가 올 수도 있다.
그 표는 받지 않기로 했다.
반지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왼쪽. 심장 위. 거기엔 이미 명찰이 들어 있었다. 결혼식 날 그녀가 맡긴 것. 두 달 동안 지갑에서 꺼내지 못한 것. 오늘 아침 지갑에서 꺼내 반지 옆에 넣었다.
커프스 단추를 채웠다. 흰 매듭. 버팀이에게 물을 반 컵 줬다. 이틀에 한 번이라고 했는데 어제도 줬다. 오늘은 반의반 컵.
구십 분 뒤 2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호가 서 있었다. 벨보이 모자. 할 일 없는 얼굴로.
"부사장님. 사모님은요?"
"……곧 오실 겁니다."
거짓말이었다. 처음으로 그녀 일로 거짓말을 했다. 아니, 희망이라고 해 두자. 희망은 거짓말과 문법이 같다.
복도에서는 하우스키핑 여섯 명이 카펫을 샴푸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반장님이 나를 보고 걸레를 멈췄다. 회의실 앞에서는 윤 팀장이 대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복주머니. 오색 비단.
전부 그녀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나까지.
[재헌]
오전 열 시. 22층 대회의실.
할머니가 상석. 그 옆으로 이사 여섯 명. 형이 일어섰다.
"안건 1호에 앞서 자료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스피커. 삼 초.
[1년만 해 주세요. 부부로.]
웅성거림. 형이 웃지 않았다. 오늘은 웃지 않는 게 연출이었다.
"결혼식 당일 오후 두 시, 신부대기실입니다. 대표 후보는 식장에서 급하게 구한 신부와 1년짜리 약속을 했습니다. 호텔 대표 자리를 위해서. 저는 이걸 진정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게다가."
형이 잠깐 멈췄다.
"오늘 아침 여섯 시, 그 신부가 캐리어를 끌고 레지던스를 나갔다는 확인이 있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방준기. 흰 이어폰. 새벽에도 일하는 사람이다.
일어섰다.
"맞습니다. 제 목소리입니다."
형의 눈썹이 올라갔다. 부정할 줄 알았던 얼굴.
"처음엔 1년이었습니다. 식장이 무너지지 않게, 그리고 제 자리를 지키려고. 그 사람은 자기 예식장을 지키려고. 서로 필요해서 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 사람이 먼저 나갔습니다. 저를 지키려고."
USB를 꽂았다. 스크린. 봄빛 그랜드홀. 삼 분 이십 초.
신부가 아버지 팔을 잡고 걸어온다. 실밥 묻은 소매. 길 끝. 아버지가 신부 손을 신랑 손 위에 올린다. 확대.
신랑 손이 떨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녹음은 목소리만 남습니다. 목소리는 연습할 수 있습니다. 손은 연습이 안 됩니다."
윤 이사님 말을 빌렸다. 윤 이사님이 찻잔을 들었다.
안주머니에서 명찰을 꺼냈다. 탁자 위에 놓았다. 봄빛웨딩홀 매니저 하채이.
"이건 그날 신부가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저한테 맡긴 겁니다. 식 끝나면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두 달이 지났는데 못 돌려줬습니다. 돌려주면 끝날 것 같아서."
명찰 옆에 반지를 놓았다. 흰 실 열 바퀴.
"가짜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채이]
아홉 시 이 분. 택시. 시장 앞에서 잡았다. 기사님이 앞치마를 보고 물었다.
"한복 배달이세요?"
"……비슷해요."
강변도로가 막혔다. 금요일 아침은 원래 막힌다. 예식장 사람은 토요일만 걱정해서 금요일 교통을 모른다.
휴대폰에 단체방 알림이 쏟아졌다. 은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방. 방 이름은 «채이 잡아라». 멤버는 은비, 언니, 준수, 소율, 반장님, 지호. 원장님까지.
[은비: 한복집에서 출발했대 어머님이 방금 알려 주심]
[소율: 언니 22층이에요 22층!!]
[지호: 엘리베이터 잡고 있을게요]
[반장님: 카펫 아직 반 남았어 천천히 밀고 있어]
[언니: 양 갈래 머리 풀기 싫으면 빨리 가]
[원장님: 숨 쉬고]
마지막 메시지에서 웃었다. 원장님은 문자로도 숨 쉬라고 한다.
백 실장님한테 전화했다.
"실장님. 저 지금 가요. 이사회 들어갈 수 있어요?"
"직원 출입구로 오십시오. 부사장님은 모르십니다. 알면 안 됩니다. 표정 관리를 못 하십니다."
칠 년 치 통역이 한 줄에 들어 있었다.
강변도로가 풀렸다. 창밖으로 한강이 지나갔다. 할 말을 연습해 봤다. 처음 어땠는지 묻는 사람한테는 지금 어떤지. 윤 여사님 말. 지금 어떤지. 연습하면 할수록 문장이 짧아졌다. 결국 한 줄이 남았다. 연습이 안 되는 말은 원래 짧다.
[채이]
직원 출입구로 들어왔다. 택시 기사님이 앞치마 입은 손님을 두 번 쳐다봤다. 지호가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었다. 22층에서 반장님이 회의실 문을 열어 줬다. 윤 팀장이 복주머니 바구니를 든 채 길을 비켰다.
문이 열리자 방 안의 눈이 전부 나한테 왔다. 조명 받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엔 원해서 왔다.
나는 한복집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가슴께에 바늘꽂이. 실밥이 소매에, 앞섶에, 아마 눈썹에도.
탁자 위에 내 명찰이 있었다. 그 옆에 내 반지.
그가 나를 봤다. 표정이 없었다. 그런데 커프스 단추가 멈춰 있었다. 돌리는 것도 잊은 사람.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듬이질하다 왔어요."
할머니가 찻잔을 들었다. 기다린다는 뜻. 명단에 그렇게 적혀 있다.
"처음 어땠는지 물으시면, 녹음 들으신 그대로예요. 1년. 말로 했어요. 저도 좋다고 했어요."
민혁의 입꼬리가 올라가다 멈췄다.
"그런데 지금 어떤지 말씀드릴게요. 이 사람, 새벽 네 시에 저희 한복집 와서 다듬이질 백 번 했어요. 풀을 한 바가지 더 먹여서 옷감이 좀 우글거렸어요. 그리고 저희 아빠한테 1년이 짧다고 했대요."
그를 봤다.
"저한테는 아직 안 했어요."
방 안에서 누군가 웃음을 참았다. 윤 여사님이었다.
"저도 짧아요. 1년."
말하고 나니 다리가 떨렸다. 입장할 때처럼. 그가 탁자를 돌아 걸어왔다. 내 옆에 섰다. 손을 잡았다. 떨렸다. 둘 다.
할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결론.
"선임은 보류한다. 가을 사십 주년 연회를 둘이 치러라. 그날 다시 정한다."
윤 여사님이 손을 들었다.
"나는 삼 분 이십 초로 충분했어요. 그래도 연회는 보고 싶네요. 복주머니가 나온다면."
작은아버지가 뭔가 말하려다 할머니 눈을 보고 삼켰다. 민혁은 웃지 않았다. 녹음기를 챙겨 들고 먼저 일어섰다. 나가면서 나를 봤다. 앞치마, 실밥, 반지 없는 손. 이상한 얼굴이었다. 이긴 사람을 보는 얼굴이 아니라, 모르는 걸 본 얼굴.
할머니가 일어서며 나를 불렀다.
"채이야."
"네, 할머니."
"앞치마가 잘 어울린다. 네 할머니 같구나."
할머니가 내 소매의 실밥을 손끝으로 한 번 떼었다. 오십구 년 전 폐백실에서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 한복을 꿰맨 손. 그 손녀 소매를 이제 할머니가 털었다. 빚은 그렇게 옮겨 붙는 모양이다. 실밥처럼.
[재헌]
회의실 밖 복도. 카펫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하우스키핑 여섯 명이 아주 천천히 걸레를 밀며 멀어졌다. 일부러.
그녀 왼손을 들었다. 반지를 끼웠다. 흰 실 열 바퀴. 딱 맞았다.
"좋아합니다."
짧았다. 방망이 소리 없이도 나왔다.
그녀가 웃었다. 눈썹에 실밥.
"알아요. 방망이 소리로 들었어요."
허리를 숙였다. 이마에 입을 맞췄다. 풀 먹인 옷감 냄새가 났다. 다리미 김 냄새도. 조금 달았다. 오늘은 예외가 많은 날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채이]
그가 할머니를 모시러 들어갔다. 나는 비상계단 쪽 창가에서 숨을 골랐다. 안전핀을 열려다 말았다. 열 필요가 없었다.
계단참 아래에서 목소리가 올라왔다. 낮게. 전화하는 목소리.
강민혁이었다.
"네, 아버지. 보류요. ……아뇨. 할머니는 처음부터 재헌이 편이었어요. 당연하죠."
잠깐의 침묵. 그리고 웃음기 없는 목소리.
"우린 어차피 둘째잖아요, 아버지."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