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채이]
금요일 저녁 일곱 시. 캐리어를 끌고 31층으로 돌아왔다. 체크아웃 열네 시간 만의 재입실. 호텔이었으면 위약금 대신 사과문을 받았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자 집이 그대로였다. 회색 소파, 유리 탁자, 통유리. 그런데 달라져 있었다. 뭐가 다른지 한참 봤다.
버팀이 화분 받침에 물이 고여 있었다.
"……물 얼마나 줬어요."
뒤에서 들어오던 그가 멈췄다.
"어제 반 컵. 오늘 아침 반의반 컵."
"이틀에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
"메모는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 어제는 몰랐습니다."
"어제는 왜 줬는데요."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었다.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지도 않고 서재에 가지도 않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디 서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한복집 옷감 두루마리 옆에서처럼.
"……불안하면 물을 줍니다. 요즘 알았습니다."
웃음이 터졌다. 받침에 고인 물을 휴지로 찍어 냈다. 버팀이는 멀쩡했다. 올리브나무는 물을 좀 많이 먹어도 버틴다. 이름값을 한다.
저녁은 탁 실장님 반찬통이었다. 원장님이 은비 편에 보냈다. 반찬통 뚜껑에 매직으로 한 줄. 돌아왔으면 밥부터.
식탁에 마주 앉았다. 오늘은 기본 세팅이 없었다. 그가 젓가락 두 벌만 놓았다. 배우는 사람이다.
밥을 먹다가 그가 말했다.
"방은."
"……네."
"따로입니다. 아직."
아직, 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밥알이 목에 걸렸다. 물을 마셨다. 그가 물잔을 내 쪽으로 밀어 줬다. 나이프 끝 위쪽 대각선 자리로. 기본 세팅은 몸에 남는다.
[재헌]
주말 내내 그녀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연습이 아니었다. 부를 이유가 없을 때도 불렀다. 이유가 없는 게 이유였다.
일요일 오후, 할머니 전화.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
"……안 갑니다. 연회 준비가."
"그래. 연회 끝나고 가라. 그 전에 가면 네 형이 그 틈에 뭘 할지 모른다."
할머니는 늘 반만 말하고 끊는다. 이번엔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재헌아. 네 방 서재 소파가 작다고 소율이가 그러더구나."
"……소율이가 그걸 어떻게."
"네 처가 말했단다. 네 처는 소율이한테 말하고, 소율이는 나한테 말하고. 이 집은 이제 그렇게 돌아간다."
끊겼다. 소파를 봤다. 작았다. 석 달째 작았다. 할머니까지 아는 작음이었다.
[채이]
월요일. 봄빛. 출근하자마자 단체방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채이 잡아라»에서 «채이 잡았다»로. 은비 짓이다.
로비에서 원장님이 나를 보고 한마디만 했다.
"숨 쉬고 왔니."
"네."
"그럼 됐다."
그게 전부였다. 원장님 결론은 늘 짧다.
점심때 주방 뒤 폐백실에서 폐백 이모님을 만났다. 탁 실장님 부인. 이십 년 전 이 홀에서 도망간 두 번째 신부. 삼 년 뒤에 돌아온 사람. 쉰 가까운 나이에 머리를 단정하게 쪽 찌고 대추를 고르고 있었다.
"채이 씨. 이리 와 봐."
이모님이 대추 한 줌을 내 손바닥에 올렸다.
"그날 폐백상에서 몰래 먹은 거. 나 다 알아. 대추가 두 알 비었더라."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모님이 웃었다.
"폐백상에서 대추 빼 먹은 신랑 신부는 처음 봤어. 근데 그게 좋은 거야. 던지는 사람 없이 둘이 나눠 먹은 거. 그런 집은 안 깨져."
"……이모님도 그러셨어요?"
"나는 도망갔잖아. 대추 먹을 틈도 없이."
이모님이 대추를 계속 골랐다. 알이 굵고 흠 없는 것만.
"근데 돌아와서 탁 씨랑 둘이 부엌에서 대추차를 끓여 먹었어. 삼 년 만에. 그게 우리 폐백이었어."
손바닥의 대추를 봤다. 굵고 붉었다. 도망갔다 돌아온 사람이 고른 대추.
"이건 다음 폐백 때 쓰라고 주는 거야. 제대로 받아. 치마 넓게 펴고."
다음 폐백. 그런 게 있을까. 대추를 파우치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안전핀 일곱 개 옆에.
[채이]
화요일. 22층 소회의실. 40주년 준비단 첫 회의.
긴 탁자에 여섯 명. 윤 팀장, 홍보팀 과장, 총지배인 오경민 님. 연경 부주방장 엄하늘. 서른여덟, 말이 없고 칼이 빠르다고 지호가 귀띔한 사람. 그리고 부단장, 강민혁 전무. 할머니 결정이었다. 공동 준비. 둘이 치러라, 에는 형도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단장은 재헌 씨. 그 옆이 내 자리. 연회 자문.
민혁이 먼저 발표했다. 화면에 해외 호텔 연회 사진이 넘어갔다.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40주년은 대외 이미지입니다. 글로벌 VIP 초청 갈라. 투자자, 외신. 도원호텔이 아직 가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합니다."
가치. 파는 사람이 쓰는 단어다. 상견례 때 작은아버지의 점유율 얘기가 생각났다.
내 차례였다. 나는 화면 대신 수첩을 폈다.
"저는 처음 그날을 하고 싶어요. 40년 전 개관 연회. 그날 메뉴, 그날 답례품, 그날 하객. 그리고 지금 이 호텔에서 일하는 분들 가족을 초대했으면 해요. 하우스키핑 이십 년 차 이순옥 님 가족, 벨 데스크 지호 씨 어머님. 이 호텔 40년을 버틴 사람들이요."
홍보팀 과장이 눈을 깜빡였다. 오경민 총지배인이 안경을 고쳐 썼다. 엄하늘 부주방장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민혁이 웃었다.
"감동적이네요. 그런데 제수씨, 그걸로 투자자가 옵니까."
"투자자는 안 올 수도 있어요. 대신 이 호텔에서 결혼한 사람들은 와요. 돌잔치 한 사람들도요. 그 사람들이 다음 40년 손님이에요."
"그 숫자, 증명할 수 있어요?"
증명. 예식장 오 년에 증명은 늘 결과로 했다. 결과는 행사 날 나온다.
재헌 씨가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
"두 안 다 준비합니다. 결정은 다음 달에."
회의가 끝나고 엄하늘 부주방장이 복도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자문님. 개관 연회 메뉴, 기록이 있습니까."
"아직요. 찾아볼게요."
"찾으시면 저한테 먼저 주세요."
그 말만 하고 갔다. 말이 없는 사람의 한 줄. 이 호텔은 한 줄짜리 사람이 많다. 나는 그 한 줄들을 모으는 중이다.
[재헌]
목요일 새벽 세 시. 강원도.
차로 네 시간. 백 실장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백 실장이 운전한다.
농장은 산 중턱이었다. 저온 창고 옆 비닐하우스. 농장 주인이 손전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순은 넘어 보였다. 잠옷 위에 조끼.
"진짜 오셨네. 전화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직접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비닐하우스 한구석. 작은 화분 스무 개. 그중 여섯 개에서 꽃대가 올라와 있었다. 종 모양 흰 꽃이 한 줄에 대여섯 개씩 매달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은방울꽃이었다. 칠월 끝, 팔월 첫 주. 철이 아닌 꽃.
"억지로 깨웠더니 여섯 대가 올라왔어요. 다 가져가요."
주인이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랐다. 신문지에 쌌다. 젖은 솜을 줄기 끝에 감았다.
"신부 부케 다시 해 준다고 했죠."
"네."
"……이거 받는 신부는 좋겠네. 한여름에 봄꽃."
값을 치르려고 했다. 주인이 손을 저었다.
"꽃값은 됐고. 나중에 그 신부 사진 한 장 보내 줘요. 이 꽃 든 거."
돌아오는 네 시간 동안 조수석에 꽃을 앉혔다. 안전벨트까지 맸다. 어이없었다. 그래도 맸다.
[채이]
목요일 저녁 여섯 시. 봄빛 뒷문. 은비가 옆구리를 찔렀다. 이제 설명도 안 한다. 턱으로 뒷문만 가리켰다.
나가자 그가 쓰레기통 옆에 서 있었다. 오늘은 양복 대신 셔츠 차림. 눈 밑이 조금 거뭇했다. 손에 신문지 뭉치.
"뭐예요, 그게."
그가 신문지를 벗겼다.
작고 하얀 종 모양 꽃. 여섯 대. 흰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리본 매듭이 서툴렀다.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은방울꽃.
숨이 멈췄다. 칠월 끝. 팔월. 꽃집엔 없다고 했는데. 소율이 그랬는데.
"그날 부케를 테이블 장식으로 묶게 했습니다. 신부가 직접. 그게 계속 걸렸습니다."
"……어디서 났어요."
"강원도요. 새벽에."
"새벽에 강원도를 왜 가요. 미쳤어요?"
"네."
망설임 없이. 우산 밑에서처럼. 이 사람은 중요한 질문엔 네, 한 음절로 대답한다.
"신혼여행은 못 갑니다. 할머니가 연회 끝나고 가라고 하셔서. 대신 꽃입니다."
꽃을 받았다. 가벼웠다. 작은 종들이 흔들렸다. 향이 났다. 은은하고 차가운 향. 그날 식장에선 긴장해서 향을 못 맡았다.
위에서 창문 여는 소리. 음향실. 준수와 은비가 나란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은비가 손으로 입을 막고, 준수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준수야, 찍지 마!"
"누나, 이건 찍어야 돼요! 식 스케치 이어서 편집할 거예요!"
그가 위를 올려다봤다. 준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찍어도 된다는 뜻인지 고맙다는 뜻인지. 둘 다일 것이다.
리본 매듭을 봤다.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이거 누가 묶었어요?"
"……제가요. 차 안에서. 세 번 풀었다 묶었습니다."
다시 묶어 주지 않았다.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의 커프스 단추 뒤 흰 매듭처럼. 서툰 매듭이 제일 오래 간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그가 물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됩니까. 꽃 든 거."
"왜요."
"농장 주인이 꽃값 대신 달랍니다. 신부가 이 꽃 든 사진."
꽃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가 신호 대기 중에 한 장 찍었다. 찍고 나서 한참 화면을 봤다.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보내요?"
"……보냅니다. 한 장 더 찍고 나서."
한 장 더는 그의 휴대폰에만 남았다. 농장에는 첫 번째 사진이 갔다. 두 번째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나는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면 보여 줄 것 같아서. 보면 내 얼굴이 어땠는지 알게 될 것 같아서.
그날 밤 두 대를 골라 봄빛 수첩 사이에 끼웠다. 이백열세 번째 상견례 페이지. 무거운 책을 위에 올렸다. 말려 두면 봄이 와도 남는다. 1년이 지나도.
[채이]
금요일 오후. 원장님이 원장실로 불렀다. 문을 닫았다. 원장님이 문을 닫는 건 드문 일이다.
"채이야. 앉아."
원장님 손에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건물주가 이 건물을 판대."
"……네?"
"예순한 해 동안 세 들어 산 건물이야. 주인이 두 번 바뀌었어. 이번이 세 번째. 사는 데가."
원장님이 봉투를 내 쪽으로 밀었다. 매수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원개발.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