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재헌]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로비 한가운데. 지나가는 투숙객들이 우리를 흘끗 봤다. 부자가 서서 결혼 반대 얘기를 하는 장면. 호텔 로비에서 흔하지 않다.
아버지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급하게 한 결혼은 급하게 끝난다."
"……"
"나랑 네 엄마처럼. 할머니가 정한 결혼이었지. 선 세 번 보고. 너도 세 번 봤다더구나, 원래 신부를. 그러고 식장에서 신부가 바뀌었다. 더 급하게."
아버지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열두 해 동안 전화로만 듣던 목소리. 전화로 들을 때보다 덜 차가웠다. 얼굴이 붙어 있으니까.
"제 결혼은 할머니가 정한 게 아닙니다."
"그럼."
"식장만 정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정했습니다. 식장에서. 사십 분 만에."
아버지가 나를 봤다. 오래. 그리고 가방을 다시 들었다.
"방은 1207호로 줘라. 여기 있는 동안."
심장이 한 번 멈췄다. 1207호. 아홉 시에 형이 오기로 한 방.
"……다른 방도 있습니다. 스위트가."
"1207호."
아버지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할머니 아들이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휴대폰을 꺼냈다. 형한테 문자.
[아홉 시 미룹니다.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1207호로.]
답장이 바로 왔다.
[알아. 나도 로비 이층에서 봤어. 큰아버지 늙으셨네.]
그리고 한 줄 더.
[스테이크 얘기는 나중에. 도망 안 가.]
형이 도망 안 간다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채이]
월요일 오전 열한 시. 봄빛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1207호에 묵으신답니다. 세 시 체크인."
"……1207호요?"
"네."
"지금 그 방 어때요?"
"스탠다드 객실입니다. 그냥 호텔 방."
전화를 끊고 원장님께 반차를 받았다. 원장님은 이유도 안 물었다. 가라. 시아버지 방이면 가야지. 실 라인은 이미 돌았다.
호텔 직원 출입구. 반장님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실 라인은 빠르다.
"채이 씨. 1207호 맞지."
"네. 반장님, 그 방. 재헌 씨 어릴 때 모습 기억하세요?"
반장님이 나를 한참 봤다. 그리고 하우스키핑 창고 쪽으로 턱짓을 했다.
"따라와."
창고 맨 안쪽 선반. 먼지 쌓인 상자 두 개. 매직 글씨. 1207. 버리지 마시오.
"도련님 방 짐이야. 열여덟에 나갈 때 총지배인이 버리라고 했어. 못 버렸어. 열네 해 동안 여기 있었어."
상자를 열었다. 그림일기 세 권. 블록 장난감으로 만든 호텔 모형. 방 번호까지 붙은. 탁상 스탠드. 초록 갓. 그리고 누렇게 바랜 룸서비스 메뉴판 한 장. 스테이크 칸에 크레파스로 동그라미가 두 개 쳐져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 두 개. 형아꺼. 내꺼.
그리고 카드 한 장. 생일 카드. 서명 여섯 개. 하우스키핑. 그중 하나가 정미자.
숨이 막혔다. 반장님이 카드를 집어 들었다.
"여덟 살 생일. 도련님이 이걸 방에 안 붙이고 서랍에 넣더라. 나중에 청소하다 봤어."
"……반장님. 세 시 전까지 이 방을 그때처럼 해 주실 수 있어요?"
"그때처럼?"
"네. 원상 복구요."
반장님이 웃었다. 이십 년 만에 제일 큰 웃음이었다.
"그 말 열네 해 기다렸어."
[채이]
열두 시부터 두 시 반까지. 1207호.
반장님이 기억하는 대로 가구를 옮겼다. 책상은 창가로. 도련님이 창밖 보면서 숙제했어. 스탠드는 책상 왼쪽. 왼손잡이였어, 어릴 땐. 고쳤지만. 침대 머리맡에 블록 호텔. 이순옥 님이 와서 이불을 갈았다. 호텔 흰 이불 대신 창고에서 꺼낸 파란 체크 이불. 도련님이 이거 아니면 못 잤어.
나는 메뉴판을 책상 유리 밑에 끼웠다. 스테이크 동그라미 두 개가 보이게. 그림일기는 책상 위에. 생일 카드는 서랍 말고 벽에. 붙였다. 이십 몇 년 만에 제자리로.
그림일기 한 권을 펼쳐 봤다. 반장님이 말리지 않았다. 여덟 살 글씨. 받침이 자주 틀렸다.
[오늘 반장님이 밥을 퍼다 주셨다. 룸서비스보다 맛있었다. 비밀이다.]
[오늘 형아가 놀러 왔다. 스테이크를 시켰다. 혼났다. 형아는 웃었다. 나도 웃었다.]
[오늘도 엄마는 안 왔다. 괜찮다.]
마지막 줄에서 일기장을 덮었다. 괜찮다, 는 여덟 살한테 너무 큰 단어였다. 이 사람은 그때부터 괜찮은 척을 했다. 나랑 같은 병이다.
두 시 반. 반장님과 나란히 문간에 섰다. 방이 달라져 있었다. 호텔 방이 아니라 누군가의 방이었다. 여덟 살짜리의.
"도련님은 이 방을 싫어했어. 어제가 없는 방이라고. 근데 오늘은 어제가 있네."
반장님이 문을 닫았다. 조용히.
[채이]
두 시 사십 분. 12층 복도. 반장님이 1207호 문을 열어 둔 채 환기를 시키고 있었다. 나는 복도 끝 창가에서 휴대폰으로 원장님께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강민혁이었다. 혼자. 방 과장 없이. 흰 이어폰 없이.
아홉 시 약속 장소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미뤄진 약속. 1207호.
민혁이 열린 문 앞에서 멈췄다. 안을 봤다. 창가 책상, 초록 스탠드, 파란 체크 이불. 그리고 책상 유리 밑의 메뉴판.
민혁이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오래 서 있었다. 나를 못 봤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웃지 않는 얼굴. 커피도 안 들었다. 방패 없는 얼굴.
그가 한 발 들어가 책상 앞에 섰다. 메뉴판을 내려다봤다. 스테이크 칸. 크레파스 동그라미 두 개. 형아꺼. 내꺼.
손가락으로 형아꺼, 세 글자를 한 번 쓸었다.
"……아직 있었네."
혼잣말이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섰다. 복도 끝의 나를 봤다. 표정이 순식간에 닫혔다. 문이 닫히듯이.
"제수씨 작품이에요?"
"반장님 작품이에요. 열네 해 동안 창고에 안 버리고 두신 거."
민혁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갔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말했다. 나를 보지 않고.
"그 크레파스. 빨간 거. 내가 줬어요. 재헌이 초록 크레파스밖에 없어서."
문이 닫혔다.
[재헌]
오후 세 시. 1207호 앞. 아버지가 카드키를 댔다. 나는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그녀가 뭘 했는지 몰랐다. 반장님이 문자 한 줄만 보냈다. 도련님, 놀라지 마세요.
문이 열렸다.
아버지가 문턱에서 멈췄다. 나도 멈췄다.
창가 책상. 초록 스탠드. 파란 체크 이불. 블록 호텔. 벽에 생일 카드.
여덟 살의 방이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들어갔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책상 앞에 섰다. 유리 밑 메뉴판을 봤다. 스테이크, 동그라미 두 개, 형아꺼, 내꺼.
아버지 손이 그림일기 위에 올라갔다. 펼치지 않았다. 표지만 쓸었다.
벽의 카드 앞에서 아버지가 오래 서 있었다. 서명 여섯 개. 아버지 이름은 없었다. 어머니 이름도.
"……이 방이 이랬구나."
아버지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청구서로만 봤다. 열 해 동안. 1207호, 객실료, 룸서비스. 달마다."
나는 문간에서 한 발도 들어가지 못했다.
[재헌]
저녁 여덟 시. 1207호. 아버지와 둘이. 룸서비스. 스테이크 두 개. 아버지가 시켰다.
아버지가 스테이크를 썰다가 멈췄다.
"네 엄마가 널 여기 둔 게 아니다."
포크가 멈췄다.
"네 엄마는 널 데려가겠다고 했다. 갤러리 이층에 방을 만들어 놓고. 내가 반대했다. 강씨 집 장손은 호텔에서 커야 한다고. 호텔을 물려받을 애는 호텔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내 아버지가 나한테 그랬듯이."
"……"
"틀렸다. 이 방 보니까 알겠다. 여덟 살짜리가 서랍에 생일 카드를 숨기는 방이었구나."
서른두 해 동안 어머니가 나를 두고 간 줄 알았다. 어머니는 그 오해를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붓을 씻었을 뿐이다. 밤마다.
아버지가 스테이크를 한 점 내 접시에 옮겼다.
"먹어라. 형아꺼는 없으니까."
[채이]
밤 열한 시. 그가 집에 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는 부엌에서 누룽지를 데우고 있었다. 뒤집개를 내려놓고 갔다. 현관에 같이 쪼그려 앉았다.
그가 말했다. 아버지 얘기. 어머니 얘기. 갤러리 이층 방. 청구서. 형아꺼는 없으니까.
그리고 한참 말이 없다가 나를 봤다. 현관 센서 등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그가 불렀다.
"채이야."
숨이 멈췄다.
처음이었다. 씨 없이. 존댓말 없이. 반 박자 낮은 목소리로.
센서 등이 다시 켜졌다. 내가 움직여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귀 끝이 빨갰다. 자기가 방금 뭘 했는지 아는 얼굴.
"……고마워. 그 방."
반말이 두 문장 이어졌다.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안전핀을 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가 그 손을 잡았다.
[채이]
화요일 아침 일곱 시.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받았다.
"하채이 씨. 강태성입니다."
시아버지였다.
"1207호로 아침 먹으러 오겠소. 혼자. 재헌이 빼고."
여덟 시. 1207호. 창가 책상에 룸서비스 아침 두 개. 시아버지가 파란 체크 이불이 덮인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나를 위아래로 봤다. 옷으로 한 번. 정장, 허리의 남색 파우치.
"예식장 매니저."
"네."
"이 방, 당신이 했다고 반장한테 들었소."
"반장님이 다 기억하셨어요. 저는 옮기기만 했어요."
시아버지가 커피를 들었다. 마시지 않고 창밖을 봤다.
"하나 묻겠소. 내 아들을 뭘 보고 결혼했소. 사십 분 만에."
대답은 짧게. 이 집 어른들한테는 그게 규칙이다.
"손이요."
"손."
"길 끝에서 제 손을 받는데 떨렸어요. 저도 떨렸고요. 떨리는 사람 둘이 서 있으니까 좀 덜 떨렸어요. 그게 다예요. 사십 분 동안 본 건."
"그다음은."
"그다음은 넉 달 동안 봤어요. 누룽지 태우는 거, 버팀이 물 주는 거, 다듬이질 백 번, 우산 기울이는 거. 그건 사십 분짜리가 아니에요."
시아버지가 나를 봤다. 처음으로 오래.
"영상 봤소. 결혼식. 반대하러 오면서 비행기에서 스무 번 봤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 집 사람들은 다 잔으로 말을 끝낸다. 찻잔이든 커피잔이든.
"신부 손이 떨리더구나. 신랑 손도."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