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주변을 둘러보았다.“요요는 어딨어? 왜 안 보이냐?”우청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요요는 아빠랑 같이 있어요. 지금쯤 운성에 도착했을 거예요. 아마 별장에 묵고 있을 거예요.”성연희가 덧붙였다.“요요는 화동으로 나올 예정이에요. 할아버지, 내일이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그래, 그래!” 강재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그때 강솔이 다가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스승님, 요요만 찾으시고 저, 강솔이는 안 찾으시나요?”강재석은 웃으며 강솔을 가리키며 도경수에게 말했다.“이 아이 좀 봐. 결혼을 앞둔 주제에 요요랑 애들처럼 관심을 얻으려고 하네!”도경수는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어쩌겠어, 사람은 커도 마음은 여전히 아이 같은걸.”방 안은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양재아 역시 함께 웃으며 강솔을 쳐다봤지만, 그 시선의 끝은 어딘가 차가웠다.대화가 이어지던 중, 소희는 연희와 청아, 유정을 데리고 뒷마당 숙소로 안내했다.그 사이 강재석은 도경수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강재석은 재아에게 일행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라고 권했으나, 재아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는 사이에요. 차라리 외할아버지와 강재석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말에 강재석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도경수를 보며 말했다.“오늘 아침에 도도희와 통화했어. 내일 소희의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하더군.”도경수는 차를 들던 손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곧 고개를 들어 물었다.“도희가 온다고?”강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운성에 온 지 조금 됐다고 하더라고. 아이들에게 강의하고 있다던데, 수업이 끝나면 강성으로 돌아가서 양재아와 친자 확인도 할 예정이라 했어.”도경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그런 건 나중에 해도 돼. 그저 돌아와 주기만 하면 돼.”그러고는 재아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재아야, 내일 네가 엄마를 볼 수 있을 거야.”재아는 전화에서
도경수는 강재석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알면 됐어. 아직 친자 확인도 안 했는데, 도도희가 양재아에게 감정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지. 모든 건 결과가 나온 후에 결정해야지.”“괜히 조바심 내서 도도희를 다시 화나게 하지 말게.” 강재석은 한숨을 내쉬며 단호히 말하자, 도경수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네가 보기에도 내가 그때 잘못한 건가?”강재석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인데.”도경수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지금의 결과를 보면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건지 생각하게 돼.”강재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말했다.“당신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명이 잔인했던 거지.”도경수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시며, 쓴맛을 꾹 삼켜냈다....양재아는 강씨 집안의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긴 회랑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렸다.“강씨 집안에 도착. 내일 소희의 결혼식 준비 완료.”재아의 SNS에는 이미 많은 친구가 등록되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양재아, 너 운성 강씨 집안에 있다고? 너 King을 아는 거야?][같이 일한 지 오래됐는데, 너 재벌이었어? 헐, 내 인생 다시 생각해야겠네.][강씨 집안이 회랑을 전부 자단목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진짜야? 게다가 연못에 있는 연꽃 항아리도 전부 골동품이라던데? 사진 좀 더 찍어줘 봐!]...권수영과 지아윤 역시 댓글로 반가움을 표현했다.[양재아, 우리 집도 초대장 받았어. 내일 결혼식에서 보자!][재아야, 셀카 하나 찍어줘요. 이틀 동안 못 봤더니 너무 보고 싶네요!]재아는 계속 알림이 뜨는 메시지를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후원에 도착하자, 툇마루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강솔과 마주쳤다.“나
“강솔!”성연희가 마당을 지나며 다가왔다. 그녀의 밝은 눈빛이 강솔의 굳은 얼굴을 스치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까 소희가 널 찾더라. 가 봐.”“응.”강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양재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연희는 바로 떠나지 않고,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재아를 바라보았다.“재아 씨는 강솔을 어떻게 생각해요?”재아는 연희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눈빛이 잠깐 흔들리더니 순진한 미소로 대답했다.“강솔 언니는 참 좋아요. 성격도 좋고, 참 따뜻한 사람이죠.”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강솔이 성격이 좋은 건, 어려서부터 잘 배워왔고, 진석에게 보호받아 왔기 때문이에요.”“갖은 권모술수와 갈등을 겪지 않아서 사람과 다투는 걸 잘 못하죠. 하지만.”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미소가 변했다.“성격이 좋다고 약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결국 강솔은 강 씨 집안의 외동딸이고, 진 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죠.”“이렇게 든든한 배경이 있으니, 만약 강솔을 만만히 본다면, 그건 뇌를 다쳤거나, 생각이 없는 거겠죠.”재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으나, 연희는 개의치 않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소희의 좋은 날인데, 더 말은 안 할게요. 재아 씨도 이 중요한 날에 소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요.”“다른 사람한테 잘못할 수는 있어도, 소희에게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되잖아요?”재아는 얼굴빛이 푸르스름해졌다가 하얘지기를 반복하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연희 씨가 너무 걱정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강솔 언니랑 대화를 나눴을 뿐이고, 소희의 결혼식을 방해할 리 없어요.”“그러면 다행이네요.”연희는 우아하고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경수 할아버지를 잘 모셔요. 그게 당신의 유일한 역할이니까요.”재아는 마음이 단단하다고 자부했지만, 연희의 말에 얼굴빛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희는 어깨에 닿는 짧은 머리를 부드럽게 웨이브로 말고, 화려한 귀걸이를 낀 채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연희가 신은 하
소희는 문득 심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강성대학교 정문 앞에서였다. 그날도 지금처럼 깔끔하게 차려입고,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소희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한가득 실린 꽃을 받아달라고 강요했다.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 차 한가득 담긴 붉고 화려한 장미들이 떠오른다. 마치 그의 존재처럼 불타오르는 듯 강렬했다.만약 그날이 시작이었다면, 오늘은 끝이리라. 심명은 여전히 인생을 놀이처럼 살아가도 좋고, 누군가와 사랑하며 한 명의 따뜻한 여자를 사랑해도 좋았다. 그러나 더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면 했다.고요한 복도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심명은 느긋하게 몸을 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심명의 길고 선명한 속눈썹에 드리우며 교차했고,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엔 물결이 이는 듯했다. 또한, 연한 분홍빛이 눈가에 스쳐 지나가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상케 했다. 심명은 눈을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분홍과 흰색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어깨에 닿는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왔다.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고, 여전히 순수하고 맑은 기운을 내뿜었다.그 순간, 주변의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는 모두 멀어졌다. 내일 있을 결혼식도, 바깥의 축하객들도 사라진 듯했다. 그는 단지 이곳 운성에 들렀다가 우연히 소희를 보러 온 것 같았다.소희는 그를 차갑게 쫓아낼 수도 있었고, 아니면 한 끼 식사하자며 그를 초대할 수도 있었다. 만약 식사하게 된다면,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었다. 소희는 심명을 바람둥이라 조롱하고, 심명은 소희가 자신처럼 완벽한 남자를 두고 임구택 같은 쓰레기를 선택한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소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현실이 빠르게 다가왔다. 의식이 뚜렷해지며 심명의 마음을 일깨웠다. 심명이 사랑하는 이 여자는 내일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심명은 선명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빛났다.“원래는 내일 결혼식에 바로 가려고 했
“내가 결혼할 땐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네가 결혼하려고 하니 마음이 묘하네.”소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냥 하나의 의식일 뿐이야.”그러자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결혼식은 단순히 의식이 아니야.”소희는 잔 속의 술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연희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소희야,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지?”소희는 대답했다.“굉장히 오래됐지. 굳이 정확한 숫자를 기억할 필요는 없어.”연희는 잔을 들어 소희와 부딪치며 말했다.“그 말이 맞아!”연희는 잔을 비우고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기억나. 네가 강성에 처음 왔을 때 우리가 같이 밥을 먹던 날. 네가 결혼했다고 해서 내가 너무 놀라 마시고 있던 물을 뿜었잖아!”“그리고 네가 임구택과 결혼했다고 했을 때, 나는 당장이라도 네 집에 달려가 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말렸지. 네가 자발적으로 결혼한 거라면서.”“그때는 정말 믿기지 않았어.”연희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소희야, 내가 가장 존경하는 게 바로 너의 그 침착함이야!”소희는 잔을 쥔 채로 미소를 지었다.“한 번에 성공할 수 없을 때는 기다려야 해. 가장 좋은 시기를 잡을 때까지.”연희는 찡그리며 물었다.“그런데 만약 그 3년 동안 임구택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려고?”소희는 시선을 낮추며 답했다.“그 사람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러지 않았을 거야.”연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렇게 자신 있어?”소희는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 나도 도박을 한 거야.”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이때 우청아가 다가와 물었다.“둘이 무슨 얘기길래 웃어? 크게 웃어봐. 우리도 듣게.”연희는 눈을 들어 맑게 웃으며 말했다.“너, 왜 아직도 장시원 오빠랑 결혼 안 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유정을 쳐다보며 말했다.“나랑 소희는 결혼했으니, 다음은 누구 차례지?”유정은 바로 대답했다.“난 절대 아니야!”유정은 조백림과의
모두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청아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신비한 대기업 사장을 경계해야겠네. 빈틈을 보여선 안 되겠어!”연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지만 그가 빈틈을 노리는 걸 막긴 어려울걸!”청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작업실을 안 여는 게 낫겠어!”연희는 농담처럼 말했다.“그러면 시원 오빠가 네 회사를 인수해 버릴지도 몰라!”청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결국 평생 그 사람 밑에서 일해야 하는 운명인가 봐?”연희는 청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내가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게. 그 사람과 결혼해서 네 밑에서 일하게 만들어.”이에 청아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보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줄 수 없어?”유정이 대화를 이어받으며 말했다.“연희의 방법은 간단해. 침대에서 이기는 거야!”연희는 유정을 향해 눈길을 보내며 환하게 웃었다.“침대에서 이기는 게 뭐가 나빠? 간단하고 확실하지. 너 지금은 웃고 있지만, 언젠간 너도 그 맛을 알게 될걸?”유정은 급히 대답했다.“아니, 나는 절대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존경하는 거야!”연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그럼 내가 방법 하나 가르쳐줄까? 확실히 조백림이 너에게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어!”유정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됐어. 나는 그 사람을 굴복시킬 생각도 없어.”옆에서 강솔은 음료를 조심스레 홀짝이며 얼굴이 살짝 붉어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에 화영이 웃으며 말했다.“너희들 다 술에 취한 거 아니야? 이런 대화까지 하다니! 강솔은 이제 막 남자친구를 사귄 순수한 아가씨인데, 너희 말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잖아!”“어?”강솔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더욱 붉어진 얼굴로 당황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순진한 모습에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웃음이 잦아든 뒤, 청아가 물었다.“그런데 양재아는? 오늘 여기 안 오기로 했어?”소희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대답했
소희는 초점을 달빛에 맞추었다. 달빛은 맑고 고요하게 비추었고, 담벼락과 꽃나무는 서로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고풍스럽고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희미하게 번져 한데 모였고,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과 음식 역시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였다.임구택이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너는?]소희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이틀 동안 우리는 못 보잖아.][사진도 보면 안 돼?][응! 아니면 애틋함이 적어지잖아.][안 적어질 텐데. 일단 알겠어.]소희는 구택의 장난스러운 메시지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중, 유정이 조백림과 연결된 영상을 틀었다. 화면 속 백림은 높은 곳에 서서 별장에서 진행되는 결혼식 전야제의 장관을 비추고 있었다.유정이 핸드폰을 높이 들어 모두가 보게 했고, 연희는 즉시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우리 노명성 어디 있어? 남편 보고 싶어!”유정은 웃으며 외쳤다.“연희가 남편을 보고 싶다네!”백림의 차분한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전해졌다.[자기 남편 보고 싶은 사람 더없나? 다 보여줄게!]강솔이 손을 번쩍 들었다.“나! 진석 보고 싶어!”강솔이 들러리로 나섰기 때문에 진석은 자청해서 들러리 역할을 맡았다. 지금 그도 별장에 있었다.백림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화면이 살짝 흔들렸다. 화면에는 잔디밭 위에 사람들이 보였다. 저녁 만찬을 즐기고, 폭죽을 터뜨리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축제의 장을 방불케 했다.잔디밭 아래에는 길게 늘어선 식탁이 있었고, 각종 술과 음식이 가득 차 있었다. 구택은 상석에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시원은 요요를 품에 안고 있어 더욱 눈에 띄었다. 요요는 핸드폰 화면을 보자마자 흥분해서 외쳤다.[아빠! 엄마가 보여요!]장시원은 핸드폰을 향해 미소 지으며 요요의 손을 흔들어 보였다.[우리 여기 있어, 자기야!]시원이 공공연히 청아를 자기야 라고 부르자, 청아는 얼굴에 붉은
조백림이 웃으며 말했다.[나는 다 같이 즐기라고 하는 건데, 너희는 너희 집 간미연 보고 싶지 않아?]오늘 모두 약속했던 것은, 누구도 전화를 하거나 영상을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과연 누가 먼저 참지 못할지 보자는 것이다.장명원이 곧바로 외쳤다.[미연아, 여보! 보고 싶어!]소희 쪽에서 미연이 우청아와 대화 중이었다. 명원의 외침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뒤돌아보았다.“조용히 좀 해!”이에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소희는 임구택을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둘은 따로 대화하자.”구택은 아쉬운 눈길로 소희를 한 번 더 바라보고 나서야 핸드폰을 노명성에게 넘겼다.명성은 의자에 기대며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금테 안경이 은은한 빛을 반사했다. 얇은 회색 V넥 셔츠를 입고 있어 더욱 차분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특별히 할 말 없으면 술 좀 줄여.]연희는 소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걱정 마. 소희가 여기 있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하겠어?”그 말에 소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아무리 말려도 네가 들을지는 모르겠네.”연희는 눈을 부릅뜨며 소희를 쳐다보았다.“소희야, 내가 너 술 마신 거 임구택에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내 편을 안 들어줄 거야?”소희는 연희를 향해 장난스럽게 손에 묻은 양념을 얼굴에 바르려 하며 말했다.“그럼 난 네 비밀을 지킬 필요도 없네!”연희는 큰소리로 웃으며 피했다.“임구택 사장님! 소희가 화가 났으니 어서 와서 아내 좀 다독여요!”그때 소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구택이 전화를 건 것이다. 소희는 손을 닦고 연희를 내버려둔 채,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구택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진짜 술 마셨네?]소희는 대답했다.“조금 마셨어. 다들 즐거운 분위기라서 깨기 싫었거든.”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질문하려고 전화 건 건 아니야.]소희는 의아하게 물었다.“그럼 왜?”[너한테 전화 걸 핑계가 필요했어.]구택의 목소리가 점점 감미로워졌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