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소란스럽네."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난 존재의 첫마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태평한 목소리였다.
라일라는 신전 앞에 펼쳐진 참상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피로 물든 대지.
곳곳에 쓰러진 기사들.
그리고 아직도 무기를 놓지 않은 이천여 명의 타르베트군.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긴장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 귀찮다는 듯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오랜만의 계약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해물이 올 줄이야."
라일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지 않니? 라스, 카이."
왼편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기사가 입을 가리며 길게 하품했다.
"하암…… 깨자마자 전투인가요? 라일라님……."
라스였다.
반면 짙은 푸른 머리의 카이는 전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쓰러진 디에프롤의 기사들과 피투성이가 된 카일에게 향해 있었다.
"라일라님. 일단 치료부터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네."
라일라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듯—
탁.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신전 주변을 황금빛 광휘가 뒤덮었다.
"……어?"
테일러의 눈이 커졌다.
상처를 붙잡고 신음하던 기사들의 몸 위로 황금빛 입자가 내려앉았다.
찢어진 살이 붙었다.
부러졌던 뼈가 제자리를 찾았다.
피가 멎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아무리 심각한 상처라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게……."
한 기사가 멍하니 자신의 복부를 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에 꿰뚫렸던 곳이었다.
그러나 상처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테일러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수호룡의 힘…….'
그러나 정작 기적을 일으킨 라일라는 기사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카일 앞에 서 있었다.
"……."
라일라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양손으로 카일의 얼굴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뭐, 뭘……!"
테일러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가려 했지만 카이가 팔을 뻗어 그를 막았다.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카일이—"
"라일라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라일라는 눈을 감았다.
희미한 황금빛이 손끝에서 흘러나와 카일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사라졌다.
라일라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다시 한번 마나를 흘려보냈다.
결과는 같았다.
카일의 육체가 라일라의 마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흠."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라일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겼다.
"마나가 듣지 않는 체질이구나."
그녀의 엄지가 카일의 피 묻은 뺨을 가볍게 쓸었다.
"이번 나의 계약자는……."
카일의 흐릿했던 은빛 눈동자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라……일라……님?"
라일라의 눈이 살짝 휘었다.
"응~"
마치 오래 기다렸던 사람을 마침내 만난 것처럼.
"나의 계약자여."
카일은 그녀가 누구인지 물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눈이 감기려 했다.
"일단은……."
라일라가 자신의 손끝에 작은 상처를 냈다.
붉은 피 한 방울이 맺혔다.
"라일라님?"
카이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변했다.
라일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앉아 카일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그리고 상처 낸 손을 그의 입술 위로 가져갔다.
톡.
한 방울.
붉은 피가 카일의 입안으로 떨어졌다.
"삼키거라."
카일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본능적으로 그것을 삼켰다.
순간—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
두근!
카일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듯 황금빛이 번뜩였다.
그 순간이었다.
철컥.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남은 이천의 타르베트군 사이가 갈라졌다.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적갈색 머리카락.
온몸을 감싼 검붉은 갑옷.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혼란에 빠졌던 타르베트 병사들이 다시 무기를 움켜쥐었다.
"전열을—!"
기사들이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라일라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카일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이천의 군대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카일을 바라보던 부드러운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차갑게 가라앉은 살의만이 남아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쿵!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전장을 짓눌렀다.
"……?!"
검을 들려던 병사의 팔이 멈췄다.
앞으로 내딛던 발이 그대로 굳었다.
누군가는 이를 악물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천 명.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라일라는 그제야 적갈색 머리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하."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의 계약자는 단 한 명뿐이란다."
라일라의 품 안에서 의식을 잃은 카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황금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초대의 왕, 카이프의 영혼을 이어받은 자만이 나의 계약자이며."
라일라가 카일을 조금 더 편하게 안아 들었다.
"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다."
순간 주변에 있던 디에프롤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테일러도 마찬가지였다.
"……초대왕?"
그 이름을 모르는 디에프롤 사람은 없었다.
천 년 전.
수호룡 라일라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디에프롤 최초의 왕.
카이프.
테일러의 시선이 천천히 카일에게 향했다.
'카일이…… 초대왕의 영혼을……?'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그의 생각을 끊었다.
라스가 검을 뽑았다.
조금 전까지 하품이나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눈동자가 타르베트군을 향했다.
카이 역시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그제야 라일라는 타르베트군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거두었다.
마치 이미 끝난 일이라는 듯.
"너희들도 따라오거라."
라일라가 디에프롤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휴식할 수 있는 장소를 내어줄 테니."
그녀는 정신을 잃은 카일을 품에 안은 채 천천히 신전으로 향했다.
테일러가 당황해 라스와 카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들은……."
이천 명이었다.
아무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아직 이천 명의 병사가 남아 있었다.
고작 두 사람에게 맡기기에는—
"저들은."
라일라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저 아이들에게 맡기면 된다."
"……아이들?"
테일러가 멍하니 라스와 카이를 바라보았다.
라스의 귀가 움찔했다.
"……라일라님."
검을 어깨에 걸친 라스가 뒤를 돌아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천 년이 지났는데 이제 슬슬 아이 취급은 그만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라일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 눈에는 아직 아이란다."
"거 참……."
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카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포기해라."
"너는 안 억울하냐?"
"천 년 전에도 네가 같은 말을 했다."
"……그랬나?"
"그랬다."
두 사람 앞에는 이천 명의 적군이 있었다.
그런데도 두 기사의 대화에는 조금의 긴장감도 없었다.
카이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제야 라스 역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뭐."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라일라님께서 오랜만에 계약자를 찾으셨는데."
라스가 검 끝을 적들에게 향했다.
"첫날부터 기분 잡치게 둘 수는 없지."
그 순간.
라일라를 따라 신전으로 들어가던 테일러는 아직 알지 못했다.
천 년 동안 용의 신전 앞에 서 있던 두 석상은 라일라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식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라일라가 잠들기 전 직접 남겨둔 두 명의 기사였다.
아르페르트는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디에프롤르 성의 끝자락이었다.울창한 숲속.그곳에는 오래전 붕괴되어 이제는 형체만 겨우 남아 있는 장소가 있었다.“…….”아르페르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한동안 그곳을 바라보던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무언가 확인하려는 듯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아르페르트의 움직임이 멈췄다.자신의 몸에 기대어 잠든 카일 때문이었다.카일은 여전히 부드러운 황금빛 털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르페르트는 그런 카일을 내려다보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아…… 저기였군.’그는 다시 한번 먼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러나 이내 카일을 바라보더니 움직이려던 몸을 다시 편하게 눕혔다.“…….”당장은 움직일 수 없겠군.아르페르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일단 카일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한편, 라일라는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며 보수가 필요한 곳을 살피고 있었다.낡은 결계를 강화하고, 공간이 부족한 곳에는 확장 마법을 걸며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음?”어느 방 앞을 지나던 라일라가 걸음을 멈췄다.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 때문이었다.“오…… 서류가…….”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카일을 대신해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테일러가 있었다.“어?”익숙한 목소리에 테일러가 고개를 들었다.“라일라 님?”라일라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바라보다 혀를 찼다.“이것 참…… 레시아에게 정령 사용법도 배웠을 텐데?”“……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테일러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흠?”라일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딱—사아아—순간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어?”테일러의 눈이 커졌다.수많은 서류가 공중에서 움직이더니 종류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흩어져 있던 서류들은 순서대로 정렬되어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그 모든 과정이
카일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아직도 머릿속이 시끄럽게 울리는 기분이었다.꿈속에서 보았던 광경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고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마치 몸과 영혼이 잠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쳐진 듯한 기묘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윽.”카일이 미간을 찌푸리자 아르페르트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툭—거대한 주둥이가 카일의 어깨를 밀었다.“……아르페르트?”아르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카일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푹.카일은 얼떨결에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아르페르트가 그런 카일을 가만히 내려다봤다.‘…….’잠시 침묵하던 그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보였구나…… 영혼에 새겨진 기억을.’“……영혼에 새겨진…… 기억?”카일이 멍하니 되물었다.아르페르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흥!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조율자가 되었어야 할 너다. 그러니 평범할 리가 있나.’“…….”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문득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손끝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분명 자신의 손인데도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바라보던 카일은 무언가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아르페르트가 그런 그를 내려다봤다.‘……좀 더 자거라.’“…….”‘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영혼에 새겨진 기억을 본 반동이다.’카일은 잠시 아르페르트를 바라봤다.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잠들면…… 또…….”말끝이 흐려졌다.아르페르트는 카일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린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그럴 리 없다.’“……?”‘중요한 부분만 보여줬을 테니.’“…….”카일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꿈속에서 보았던 광경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이었다.아르페르트는 그런 카일을 잠시 바라봤다.그러더니 거대한 몸을 조금 움직였다.스윽—“……?”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
카일은 아주 오래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꿈속의 자신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는 않았다.그리고 언제나 곁에는 두 존재가 있었다.라일라와 아르페르트.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어느 순간에는 드넓은 들판을 걷고 있었고, 또 어느 순간에는 낯선 숲과 산을 지나고 있었다.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저—그들과 함께 어디든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라일라가 무언가 이야기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주변의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마치 소리 없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그렇게 수많은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어느 순간.“…….”카일은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있었다.언제 왕이 되었는지, 어떻게 이곳에 서 있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을 뿐이었다.곁에는 여전히 라일라가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라스가 서 있었다.자신의 곁에는 레시아와 카이가 있었다.모두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어느새 눈앞에는 전쟁터가 펼쳐져 있었다.카일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수많은 병사가 움직이고 있었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만이 보일 뿐이었다.그러던 순간—“……?”문득 시야가 이상해졌다.조금 전까지 선명했던 풍경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카일은 눈을 깜빡였다.하지만 흐려진 시야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그때였다.레시아가 갑자기 바람을 일으켰다.그리고 다급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근처에 있던 카이 역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카일은 의아했다.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레시아가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달려왔다.그녀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무언가를 외치고
창고를 나온 라일라는 다시 저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어느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카일의 방과 마주 보고 있는, 바로 자신의 방이었다. “…….” 라일라는 잠시 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열었다. 끼이익—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엉망이었던 방은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트러졌던 가구들은 제자리를 찾았고, 어질러졌던 물건들도 모두 정돈되어 있었다. 라일라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 황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창가에 놓인 소파. 가구의 색상과 배치. 그리고 작은 장식품들의 위치까지. 모든 것이 익숙했다. 천 년 전 자신이 사용하던 방과 똑같았다. 자신이 좋아하던 가구의 색도, 위치도, 방의 분위기까지. 어느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후후.” 라일라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창가에 놓인 소파로 다가가 천천히 앉았다. 사락— 편안하게 몸을 기댄 라일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조금 전 창고에서 발견했던 낡은 일기장이 떠올랐다. 카이프가 남긴 일기장. 천 년 전, 그가 일기장을 작성하고 가장 먼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순간이었다. 그 안에 적혀 있던 문장들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구나…… 나여.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드디어 마지막 순례가 시작되었겠지. 기억이 없다고 해서 억지로 떠올리려 하지 마렴. 라일라 또한……. 네가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길 원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영혼으로 이어진 반려니까…….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문득 느껴지는 순간이 있겠지. 네가 지금껏 느껴왔던 감정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순례가 완전히 끝나면……. 그저 원래 돌아갈 자리로 돌아갈 뿐이야. 그러니 지금의 인생을 즐기렴. ……나여.』 “…….” 라일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
라일라는 한동안 손에 들린 낡은 일기장을 바라봤다.“…….”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표지는 여전히 온전했다.손끝에서 익숙한 마력이 느껴졌다.오래전 자신이 직접 걸어두었던 훼손 방지 마법이었다.“후후…….”라일라가 손가락으로 표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그리고 가볍게 손끝을 움직였다.우우웅—희미한 황금빛이 일기장을 감쌌다.오래전 걸어두었던 훼손 방지 마법이 더욱 견고해졌다.마법이 완성되자 라일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후후…… 잘 보관해둬야겠구나.”그녀가 일기장을 레시아에게 건넸다.“레시아, 부탁하마.”“네, 라일라 님.”레시아가 일기장을 받아 들었다.그러다 문득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그런데…….”“응?”“안 펼쳐보셔도 괜찮으시겠어요?”라일라가 눈을 깜빡였다.그러더니 작게 웃었다.“후후…….”“……?”“이미 알고 있단다.”“네?”라일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일기장으로 향했다.“그 녀석이 가장 먼저 보여준 게 나였으니.”“……아.”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라일라는 더 이상 일기장을 바라보지 않았다.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천 년 전, 카이프가 직접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기록이었으니까.레시아는 일기장을 들고 창고 안쪽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남아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며 물었다.“그런데 라일라 님.”“음?”“카일 님께는 안 물어보실 건가요?”“무엇을 말이냐?”“일기장 말이에요. 어떻게 가지고 계셨는지라든가…….”라일라가 잠시 레시아를 바라봤다.그러더니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후후…… 물어볼 필요가 있겠느냐?”“……네?”“저것을 카일이 가지고 있었다는 건, 이미 펼쳐보았다는 소리일 테니.”레시아가 손을 멈췄다.“……아.”라일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저 안에 적힌 글은 신의 언어란다.”“신의 언어요?”“그래.”라일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인간이 아무리 들여다본들 읽을 수 없는 글이지.”“…….”“하지만 카일이라면 다르지 않겠느냐?
카일의 방을 나온 라일라는 천천히 저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복도를 지나며 기존에 설치해둔 결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공간이 부족해 보이는 방에는 확장 마법을 덧씌웠다.딱—가볍게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황금빛 마력이 벽과 바닥을 타고 퍼져나갔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녀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라, 라일라 님…….”“음?”“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후후. 괜찮단다. 그저 조금 손보는 것뿐이니.”라일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하지만 시녀들이 보기에는 결코 '조금'이 아니었다.방 하나의 크기가 순식간에 넓어지고, 복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결계가 겹겹이 형성되고 있었다.라일라는 그런 시녀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창고는 어디에 있느냐?”“아! 이쪽입니다!”시녀들이 황급히 앞장섰다.잠시 후.라일라가 도착한 곳은 바이소 대공저의 창고였다.그곳에서는 레시아가 한창 선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사아아—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수많은 상자와 물건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레시아는 손끝을 가볍게 움직이며 물건들을 차례차례 내려놓았다.“어머, 라일라 님?”“레시아.”“카일 님은요?”“잠들었단다. 아르페르트가 곁에 있으니 괜찮을 게야.”“후후. 그렇군요.”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그런데—“……?”그녀의 걸음이 멈췄다.황금빛 눈동자가 창고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뭐냐?”한쪽 벽면에는 몇몇 장식품과 보석함이 놓여 있었다.그러나 그뿐이었다.창고의 대부분은 텅 비어 있었다.라일라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허…….”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이게 전부란 말이냐?”마침 뒤따라 들어오던 테일이 그 말을 듣고 움찔했다.“…….”그는 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그게…….”라일라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말해보거라.”“대공 각하께서…….”테일이 잠시 말을 골랐다.“창고에 있던 보석과 예술품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