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젊은 여자의 웃음이 사라졌다.
“뭐?”
“누구냐고.”
정하은은 담담하게 다시 물었다.
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 집에서 꽤 대접받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적어도 이벨리아 앞에서는 굳이 자신을 소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첫 질문이 중요하다.
당신이 누구냐.
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네가 내 앞에서 이름 없이 통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다.
헬가가 급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분은 클라라 로세트 님입니다.”
로세트.
같은 가문.
정하은은 클라라를 찬찬히 보았다. 화려한 드레스, 정성 들인 머리, 손에 쥔 부채, 목에 걸린 진주.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이벨리아를 조롱하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태도.
집안에서 제법 대접받는 위치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주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
정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어.”
클라라의 표정이 조금 풀리려는 순간, 정하은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길 비켜.”
클라라는 부채를 접었다.
탁.
짧은 소리가 울렸다.
“정말 머리를 다쳤나 보네.”
“그 말은 아까도 들었어.”
“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할 말이 많지는 않은 모양인데.”
클라라의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정하은은 그녀를 더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헬가.”
“예, 아가씨.”
“집사장에게 간다고 했지.”
“……예.”
“계속 가.”
정하은은 다시 걸었다.
클라라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벨리아!”
정하은은 멈추지 않았다.
“야!”
그제야 정하은의 걸음이 멈췄다.
홀 전체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정하은은 천천히 돌아섰다.
클라라는 턱을 치켜든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벨리아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정하은은 조용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클라라가 이를 악물었다.
“너 지금 감히 나를 무시해?”
“아니.”
정하은은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확인하는 중이야.”
“뭘?”
“로세트 가문의 장녀를 공개된 홀에서 ‘야’라고 부른 게 너의 개인 무례인지, 아니면 이 집안의 공식 서열인지.”
클라라의 표정이 굳었다.
정하은은 한 걸음 다가갔다.
“둘 중 어느 쪽이지?”
클라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정하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 무례라면 네가 사과하면 끝나는 일이고.”
그녀의 시선이 헬가에게 잠시 닿았다가 다시 클라라에게 돌아왔다.
“공식 서열이라면 집사장에게 확인해야겠네. 로세트 가문 장녀의 호칭이 언제부터 ‘야’가 됐는지.”
클라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말장난하지 마.”
“말장난으로 들려?”
정하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장사꾼 집안에서 말은 약속이 되고, 약속은 계약이 되고, 계약은 돈이 되지.”
몇몇 상단 직원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클라라는 억지로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클라라는 한 걸음 다가왔다.
“상단 장부 한 장 제대로 넘겨본 적 없는 애가 갑자기 주인 행세를 하네.”
정하은은 클라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방금 말.”
클라라의 웃음이 멎었다.
“헬가, 네가 증인이야.”
헬가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예?”
“클라라 로세트가 공개된 홀에서 말했다. 이벨리아 로세트는 상단 장부 한 장 제대로 넘겨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클라라의 눈이 흔들렸다.
정하은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 네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야?”
“뭐?”
“아니면 누가 그렇게 말했어?”
클라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
정하은은 거기서 답을 읽었다.
클라라는 자신이 본 것을 말한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들은 말을 자신의 권위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정치판에도 많았다. 대표가 그렇게 생각한다더라. 장관님 뜻이 그렇다더라. 윗선에서 싫어한다더라.
권력자의 이름을 빌려 약자를 누르는 인간들.
하지만 그런 말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당사자에게 확인하면 무너진다.
정하은은 조용히 말했다.
“카이든?”
클라라의 표정이 굳었다.
“카이든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했나 보네.”
“나는 그런 말 안 했어.”
클라라는 급히 부정했다.
“나는 그냥 네가……!”
“내가?”
정하은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상단 일을 모른다고?”
클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하은은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을 보았다.
“좋아. 다들 들었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때로 대답보다 정확했다.
정하은은 다시 클라라를 바라봤다.
“클라라 로세트는 장남의 판단을 근거로, 공개된 장소에서 로세트 가문 장녀의 자격을 부정했다.”
클라라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정정해.”
“뭘?”
“네가 방금 한 말.”
정하은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네 개인 생각인지, 카이든의 뜻인지.”
클라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쪽을 골라도 손해였다. 개인 생각이라고 하면 자신이 장녀를 모욕한 것이 된다. 카이든의 뜻이라고 하면 장남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끌어들인 것이 된다.
정하은은 기다렸다.
클라라는 결국 화를 내는 쪽을 택했다.
“네가 뭔데 나를 몰아붙여?”
“이벨리아 로세트.”
정하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가 방금 모욕한 사람.”
클라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이든 오라버니가 알면 가만 안 둘 거야.”
그 말에 주변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장남.
카이든 로세트.
이 집에서 그 이름은 꽤 무거운 모양이었다.
정하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클라라가 멈칫했다.
“뭐?”
“나도 만나보고 싶었거든.”
정하은은 홀 안쪽의 큰 문을 바라봤다. 문 너머가 상단 회의실인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그쪽으로 서류를 든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저쪽인가?”
정하은은 걸음을 옮겼다.
“가서 확인하자.”
클라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확인?”
“네가 장남 이름으로 나를 협박했잖아.”
“협박이 아니라…….”
“그럼 뭐지?”
클라라는 입을 다물었다.
정하은은 웃지 않았다.
“말을 조심했어야지.”
그녀는 다시 회의실 쪽으로 걸었다.
헬가가 거의 비명처럼 말했다.
“아가씨, 회의실은 안 됩니다.”
“왜.”
“가주님과 카이든 도련님께서 외부 상단 사람들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런 일로 들어가셨다간 가주님의 노여움을 사게 될 겁니다.”
정하은은 클라라를 돌아봤다.
“그럼 누가 그 노여움을 사게 될지 확인해보면 되겠네.”
정하은은 회의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클라라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멈춰!”
클라라의 손이 정하은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네.”여자들의 목소리가 겹쳤다.정하은은 방금 붙인 머리카락을 다시 떼어냈다.딸각.딸각.이번에는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뒤로 물러났던 사람들이 정하은의 손끝을 따라 가까이 왔다.정하은은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양옆에 붙였다.원래 머리는 뒤로 말아 올리고, 짧은 가닥을 얼굴 옆으로 내렸다.미라가 빗으로 몇 번 정리했다.몇 분 전과 또 다른 모습이 됐다.정하은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이건요?”주방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자기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목덜미 위로 올려봤다.하녀 하나도 같은 행동을 했다.“저도 저렇게 할 수 있습니까?”“머리 길이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요.”“이 색 말고 제 머리색으로도요?”“있어요.”“끝이 더 말린 건요?”“네. 그것도 있어요.”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머리숱이 적은 곳에만 붙일 수도 있어요?”“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까?”“매일 바꿔도 됩니까?”“긴 것과 짧은 걸 같이 써도 돼요?”“저 붉은색 좀 보여주세요.”조금 전까지 식탁 위의 머리카락을 꺼리던 사람들이었다.이제는 상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미라가 머리카락을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이쪽이 더 밝습니다.”“그건 뒤에 붙이는 길이예요.”“끝이 말린 건 눌리지 않게 잡아주세요.”주방 여자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자기 얼굴 옆에 대봤다.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너무 밝아.”“그래?”“붉은색이 더 나아.”“붉은색은 너무 튀잖아.”“그게 좋은 거 아니야?”두 사람은 벌써 자기 물건처럼 고르고 있었다.그렌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탁 한쪽으로 몰리자 접시를 먼저 치웠다.“음식 위로 넘기지는 마세요.”그는 빈 공간을 만들어 상자를 옮겨놓았다.여자들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따라갔다.엘린은 식탁 끝에 기대 서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며칠 동안 자신이 본 건 작은 금속 조각과 머리카락 묶음뿐이었다.정하은이 몇 번 붙였다 떼는 것도 봤다.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며칠 만에 식당 안이 제법 북적였다.그동안 모두 각자 맡은 일로 저택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작은짐 사업은 마일로가 맡았고, 로웬을 비롯한 실무진이 그 일을 도왔다. 카시안과 베라, 야라는 로세트 상단 일로 바빴다. 실렌과 노아도 단풀 마을의 사전 조사를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동쪽 창고에서 지내던 엘린은 그사이 식당을 오가며 블랙우드 사람들과 제법 얼굴을 익혔고, 비를 막는 마차 덮개도 완성했다.그렇게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정하은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베라가 카시안을 봤다.“새 마님은 오늘도 안 오십니까?”“곧 와.”카시안은 정하은의 빈 의자를 당겨놓았다.“오늘은 같이 먹겠다고 했어.”노아가 빵을 뜯다가 고개를 들었다.“새 마님 얼굴 본 지 꽤 된 것 같습니다.”“너도 며칠 없었잖아.”베라가 말했다.“떠나기 전부터 못 뵀습니다.”노아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요즘은 식당에 아예 안 오십니까?”음식을 내려놓던 주방 하녀가 말했다.“그동안은 일하시는 곳으로 가져다드렸어요.”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맞은편의 엘린을 봤다.“엘린은 알고 있습니까?”“뭘.”“새 마님이 그동안 뭘 하셨는지요.”엘린은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알아.”노아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뭡니까?”“곧 보면 알 텐데.”“조금만 먼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안 돼.”노아는 아쉬운 얼굴로 빵을 다시 뜯었다.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먼저 들어온 건 미라였다. 길쭉한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그 뒤로 정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갈색 머리카락이 등을 가득 덮은 채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짙은 갈색 사이에는 조금 밝은 가닥이 섞여 있었고, 끝부분은 부드럽게 말려 있었다.식탁 위의 말소리가 하나둘 끊겼다.평소 입던 드레스에, 분명 같은 얼굴이었다.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노아는 입에 넣으려던 빵을 멈췄고, 베라도 잔을 내려놓았다.정하은은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식당을 가로질렀다. 카시안 옆에 멈춰 선
“버려.”“뭔지는 봐야죠.”베라가 노아를 봤다.“문제는 너 하나로 충분해.”노아는 억울한 얼굴로 정하은을 보았다.“새 마님, 물건은 죄가 없습니다.”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사람이 문제죠.”노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베라가 짧게 웃었다.노아는 못 들은 척 첫 번째 물건을 내밀었다.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이었다. 둥근 나무판 가운데에 얇은 쇳조각이 들어가 있었다.“이건 생선 경매장에서 씁니다.”그가 엄지로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생각보다 크고 또렷한 소리가 났다.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노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이렇습니다.”그가 다시 눌렀다.딸각.몇 사람이 미간을 찌푸렸다.노아의 엄지가 세 번째로 움직이려는 순간 베라가 말했다.“손가락 접어.”노아가 멈췄다.“아직 설명이 남았습니다.”“입으로 해.”노아는 딸각쇠를 정하은에게 건넸다.“경매를 시작할 때도 쓰고, 살 사람이 참여한다고 알릴 때도 씁니다. 생선 공판장이 워낙 시끄러워서 목소리보다 이게 낫답니다.”정하은이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손끝에 얇은 쇠가 꺾였다 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이거 하나면 사람들이 돌아봐요?”“예. 저도 돌아봤습니다.”“그래서 사버렸어요?”“예.”“잘 만든 물건이네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그렇죠?”“소리 한 번에 손님 하나를 잡았잖아요.”노아가 잠깐 생각했다.“저는 손님이 아니라 조사하러 간 겁니다.”“돈을 냈으면 손님이에요.”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아.”노아는 딸각쇠를 바라보았다. 조금 배신당한 얼굴이었다.정하은은 한 번 더 눌렀다.딸각.그렌이 식당 문밖에서 들어오다가 멈췄다.“부르셨습니까?”정하은은 손안의 물건을 내려다봤다.“아뇨.”그렌은 노아를 봤다.“또 뭘 사 왔나 보군.”“또라니요. 오늘 처음 보여드리는 겁니다.”“네가 없는 동안 조용했다.”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딸각쇠를 보류 쪽으로 밀었다.“남
블랙우드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흩어졌다.정하은이 일주일을 줬지만, 정말 일주일을 다 쓰려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첫 번째 물건은 엘린이 온 날 저녁이 되기도 전에 들어왔다.마구간에서 일하는 소년이 작은 자루를 들고 식당으로 찾아왔다. 자루 안에서는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정하은은 자루와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뭘 잡아 왔어요?”“잡은 건 아닙니다.”“그럼 주웠어요?”“샀습니다.”소년은 제법 당당하게 자루를 열었다.안에는 손바닥만 한 잿빛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표면이 거칠고 군데군데 흰 결정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정하은이 하나를 집었다.“돌이네요.”“예.”정하은은 돌을 한 번 뒤집어봤다.“좋아요. 시작부터 예상 밖이네.”소년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말들이 좋아합니다.”“돌을요?”“계속 핥습니다.”정하은은 돌을 다시 보았다.“먹어봤어요?”소년이 손가락 끝을 조금 들어 보였다.“이만큼만요.”“왜요?”“말들이 너무 좋아해서.”정하은은 잠깐 소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해요. 남이 맛있게 먹으면 궁금하죠.”소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짭니다.”“소금이네요.”“예.”“말들이 좋아하고요?”“묶어두면 이것만 봅니다.”정하은은 돌을 자루에 내려놓았다.“좋네요.”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팔 수 있습니까?”“말한테요?”소년이 눈을 깜빡였다.“말은 돈이 없는데요.”정하은이 웃었다.“그러니까 주인한테 팔아야죠.”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말을 키우는 사람이면 삽니다.”“말이 좋아하는 걸 보여주면 더 잘 사겠네요.”“보여드릴 수 있습니다.”“그럼 이거 하나로 며칠이나 먹는지 알아와요.”정하은은 자루 안의 돌을 한 번 더 보았다.“말이 몇 번이나 쳐다보는지도.”소년이 잠깐 멈췄다.“쳐다보는 것도 셉니까?”“좋아한다면서요.”“예.”“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아야죠.”소년은 진지한 얼굴로 자루를 안았다.“세겠습니다.”그가 돌아가자 카시안이 물었
정하은은 조용히 엘린을 보았다.엘린은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그 말은 너무 솔직했다.망하면 바로 들킨다.정하은은 말했다.“망해도 돼.”엘린의 눈빛이 거칠어졌다.“그딴 말 쉽게 하지 마.”“쉽게 하는 말 아니야.”“망하면 욕먹는 건 나야.”“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시킨 거잖아.”곧 마차 한 대가 동쪽 창고 앞으로 들어왔다. 마차에는 빈 나무상자들이 실렸다. 그렌이 물통을 준비했고, 하인 둘이 옆에 섰다.정하은은 뒤로 물러났다.“시작해.”엘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그녀는 바로 감추듯 손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마차 위로 올라갔다. 접힌 나무틀을 펼치고, 짐과 옆판 높이에 맞춰 양쪽 받침의 위치를 조절했다. 틀이 자리를 잡자 기름 먹인 천을 씌우고, 끈을 당겨 마차 옆판 아래에 묶었다.움직임은 빨랐다.끈을 당기고, 고리를 맞추고, 천의 기울기를 보고, 앞쪽을 눌러 고정했다. 그다음 마차 바닥에 받침판을 깔고, 빈 상자들을 올렸다.엘린은 마차에서 내려와 말했다.“물.”하인 하나가 물통을 들었다.“위에서 한 번에 붓지 마.”정하은이 하인에게 말했다.“조금씩. 넓게.”물이 천 위로 떨어졌다.물방울은 천을 타고 양옆으로 내려갔고, 고리 아래 달린 끈을 따라 땅으로 떨어졌다. 짐 위로 떨어지는 물은 없었다.정하은은 마차 안쪽을 봤다.빈 상자들은 마른 상태였다.엘린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그때 그렌이 물었다.“마차가 움직일 때도 확인하시겠습니까?”엘린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정하은은 마차를 보았다.“천천히 움직여주세요. 물은 계속 붓고요.”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하인 둘은 양옆을 따라 걸으며 천 위로 물을 뿌렸다.처음 몇 걸음은 괜찮았다. 물은 그대로 양쪽으로 흘러내렸다.그러나 앞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팽팽하던 천이 순간 들렸다.그 틈으로 물방울 몇 개가 안쪽에 튀었다.“그만.”엘린이 소리치자 마차가 멈췄다.엘린은 말없이 올라가 안쪽 상자를 확인했다
블랙우드 저택의 문지기는 문 앞에 선 여자를 한참 바라보았다.여자는 젖어 있었다.비가 온 것은 아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아직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자의 머리카락 끝과 소매 끝은 눅눅했고, 치맛자락에는 마른 진흙과 새로 묻은 흙이 뒤섞여 있었다.뒤에는 작은 손수레 하나가 있었다. 수레 위에는 천으로 덮은 길쭉한 물건과 낡은 가방 두 개가 실려 있었다.여자는 문지기를 노려보았다.“이벨리아를 보러 왔어.”문지기는 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엘린.”“약속이 있으십니까?”엘린의 입술이 굳었다.없었다.없다고 말하는 순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엘린은 턱을 들었다.“전할 게 있어.”“무엇을 말입니까?”“그 여자가 말한 거.”“부인께서 말씀하신 것 말입니까?”부인.엘린은 그 호칭을 듣고 잠깐 표정이 굳었다. 로세트가 아니라 블랙우드. 정말 그렇게 됐나 보다.“그래. 그 부인이 말한 거.”문지기는 엘린 뒤의 수레를 보았다.“물건입니까?”“물건이든 뭐든, 네가 볼 건 아니야.”문지기는 더 묻지 않았다.“기다려주십시오.”문이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다. 작은 쪽문만 열리고, 안쪽으로 사람이 들어갔다.엘린은 닫힌 문 앞에 남았다.그녀는 수레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지만, 오늘은 그 위에 또 물집이 잡혔다.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동안 수레는 두 번이나 옆으로 기울었고, 진흙에 바퀴가 박혔을 때는 길가의 돌을 주워 받쳐야 했다.엘린은 이를 악물었다.쪽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집사처럼 보이는 마른 남자가 나왔다. 눈썹이 거의 없고,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였다. 손에는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그렌 모트입니다. 부인께 전달했습니다.”엘린은 바로 물었다.“그래서?”“부인께서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그렌은 수레 쪽을 보았다.“물건은 제가 옮기도록 하겠습니다.”“손대지 마.”그렌은 멈췄다.엘린은 수레 손잡이를 더 세게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