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태소는 조씨 노부인 앞으로 다가가 무언가 조용히 이야기했다."강유영,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조씨 노부인이 돌연 불호령을 내렸다."저는 할머니의 명을 받들어, 부모님과 국공부의 평안을 빌고자 산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인사를 올리러 왔는데,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무릎을 꿇으라 하시는 겁니까?"강유영은 맑고 검은 눈동자를 들어 노부인을 마주 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뽀얀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불안했다.조씨 노부인이 갑자기 저리 당당하게 호통을 치니, 혹시 뭔가 눈치라도 챈 것일까 두려웠다.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호주와 인주는 경성에서 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조씨 노부인이 세자의 곁에 첩자를 심어두지 않은 이상, 그녀가 세자를 따라 먼 길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세자의 수하들, 청운과 청류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들이 조씨 노부인의 명을 따를 리도, 주군을 배신할 리도 만무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내가 너더러 사십구 일을 머물라 하였거늘, 오늘로 따지면 무려 열흘 넘게 지체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잘못이 아니란 말이냐?"조씨 노부인이 싸늘하게 추궁했다.지금 노부인은 태소에게 몹시 심기가 뒤틀려 있었다.단순히 강유영이 십여 일이나 더 머물다 와서가 아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밖을 떠돌았는데도, 강유영이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생기가 넘쳤고, 무릎을 꿇으라는데도 꿇지 않으며 감히 말대꾸까지 하지 않는가.예전 같으면 호통 한 번에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을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의 강유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고 있었다.반면 강유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노부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트집을 잡아 기를 꺾으려는 것뿐이었다.그녀가 태소 도사님을 힐끗 보고는 할 말을 곱씹어 보았다.돌아오는 길에 조원철이 일러둔 바가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오래 머
"유영 아씨, 또 저와 함께 걷게 해드려 송구합니다."태소는 앞장서 걸으며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 "도사님께서는 굳이 이러실 것 없습니다."강유영은 머쓱해하며 말했다."제게 이리 깍듯하게 대하시면, 국공부로 돌아간 뒤 노부인께서 의심하실 겁니다."태소는 조씨 노부인과 엇비슷한 연배였다. 강유영은 이렇게 나이 지긋한 어른이 자신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대단한 신분이 아니지 않은가.태소가 이토록 몸을 낮추는 것도 결국 조원철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아씨, 염려 마십시오. 진국공부에 당도하면 자연히 그리하지 않을 것입니다."태소는 웃으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이번 여정에서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습니다?""그런가요?"강유영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살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살이 찌든 빠지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몸이 건강하면 그만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경성으로 들어섰다.태소는 길을 나설 때처럼 간식을 드시겠냐고 물었고 강유영은 당연히 거절했다.번화한 저잣거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밖으로 떠돈 지 꽤 지났으니, 경성이 조금 그립기도 했다.만약 전당포를 되찾고 조원철이 자신을 놓아주기만 한다면, 이대로 경성에 머물며 평생을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도착했습니다."진국공부 정문에 다다르자 태소의 태도가 돌변했다. 팔에 도복을 걸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니, 영락없이 속세를 벗어난 고고한 도사의 태가 났다.강유영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예전에는 그녀도 절이나 도관을 찾아 신령께 가호를 빌었고, 승려와 도사들을 존경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들 중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알 길이 없었다.어찌 됐든, 적어도 눈앞의 태소는 가짜 도사가 확실했다."누구시오?"젊은 문지기가 다가와 물었다."댁의 아씨를 모셔왔으니 노부인께 전해주시게."태소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두 사람을 알아본 문지기는
말을 마친 정기삼은 책상 위의 처방전을 집어 강유영 앞에 내밀었다.강유영은 처방전을 받아 들고 대충 훑어보았다. 예전 약방에서 지낸 적이 있어 약리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과연 처방전에는 귀한 약재들만 적혀 있었고, 그중에는 끊어지는 명줄을 간신히 이어주는 아주 값비싼 약재도 섞여 있었다."가불을 부탁해 보았으나, 장방에서는 그런 전례가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은자를 빌리려 해도 가난한 친척들뿐인데, 그 큰 은자를 단숨에 누가 내어주겠습니까? 오늘 여동생이 자신을 어느 대갓집 노비로 팔아 은자를 마련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세상에 남은 혈육이라곤 우리 셋뿐인데, 동생이 노비로 팔려 가는 것을 어찌 눈뜨고 본단 말입니까...."말을 잇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오열했다."자, 이제 해결되지 않았습니까."강유영은 그를 다독이며 위로했다.엽전 한 푼에 영웅도 무릎을 꿇는 법이다. 예전의 그녀 역시 백 냥의 은자를 모으기 위해 오랜 세월을 아등바등 버텼다. 정작 국공부에서 자립하기 전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임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대인, 제가 차용증을 써드리겠습니다."한참을 울던 정기삼은 조금 진정이 되자 책상으로 다가가 붓을 들었다."지금은 소인이 곤경에 처해 있으나 훗날 은자를 모으면 대인께 반드시 갚겠습니다.""일단 급한 데 쓰시지요. 차용증은 필요 없습니다."강유영은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정기삼은 과연 정이 깊고 의리 있는 사내였다. 정기삼이 거듭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차용증을 받아야 했다."강유영."멀지 않은 곳에서 조원철이 그녀를 불렀다.강유영은 부름에 짧게 답하고는 정기삼에게 말했다."오라버니가 부르시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조심하고 두 동생을 잘 돌보시지요.""예, 대인. 감사합니다."정기삼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깊이 굽혀 예를 행했다.강유영은
그곳에는 연녹색 관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있었다. 아마도 식량 창고를 지키는 말단 관리인 듯했다.그는 강유영을 등지고 서서, 곡식이 담긴 마대에 이마를 기댄 채 조용히 흐느끼며 어깨를 떨고 있었다.그의 옆에는 장부가 놓인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가 공무를 보는 자리인 듯했다."괜찮으십니까?"강유영은 한참을 지켜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관아 소속인 것이 확실해 보이니, 위험한 사람은 아닐 거라 판단했다.갑작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란 관원은 황급히 몸을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누... 누구십니까?"꽤 젊어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 밑은 퀭하게 죽어 있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기력이 쇠해 보였다."저는 조 대인의 여동생입니다."강유영은 그를 찬찬히 살피며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곤란한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관원은 잠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대인께 흉한 꼴을 보였습니다....""저는 대인이 아닙니다."강유영이 손사래를 치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제 오라버니는 강직하고 공정한 분이십니다. 억울한 일이 있다면 그분께 말씀해 보시지요."혹시 이 식량 창고에 무슨 남모를 비리라도 있는 것일까. 멀쩡한 관원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지 궁금했다."아닙니다. 집안일 때문에 그럽니다."관원이 고개를 푹 숙이며 낙담한 얼굴로 답했다."은자가 부족하신 겁니까?"강유영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사람이 이렇게까지 절망을 느끼고 있다면 십중팔구 돈 문제일 것이다.관원은 흠칫 놀라며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인, 저는...."그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제가 빌려드리지요."강유영이 은표를 꺼내 들며 물었다."백 냥이면 되겠습니까?"지난번 받은 오천 냥 중 아직 남은 은자가 꽤 남았는데 이번에 길을 나서며 조금 챙겨왔다.하지만 조원철과 함께 다니니 딱히 그녀가 은자를 쓸 일이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놓인 곡식 냄새를 맡았다. 건조된 곡물 특유의 고소한 향기만 날 뿐, 이상한 곰팡이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조원철은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며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세자, 겉보기에는 규정에 어긋나는 점이 전혀 없습니다."청운이 그의 뒤를 따르며 보고했다.강유영도 호기심에 이리저리 고개를 빼고 살폈다. 하지만 식량 창고가 돌아가는 규칙을 알 리 없는 그녀로서는 그저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식량 창고를, 그것도 이리 거대한 창고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내심 신기할 따름이었다."천리향을 뿌려라. 입구 쪽 마대 무더기에 더 많이 묻혀두고."조원철이 청운에게 나직하게 지시했다.그 말을 들은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대체 무얼 하려는 것일까. 천리향이 무엇이길래. 태자의 수작을 대비해 쓰려는 물건일까?"예."청운은 명을 받들고는 잰걸음으로 나갔다.조원철이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강유영은 얌전히 다가가 얼굴을 들어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조원철이 몸을 숙여 다가왔다.짙은 감송 향기가 훅 끼쳐오자 강유영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산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조원철은 두 번 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자신이 얌전히 굴며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그가 함부로 괴롭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요 며칠은 제법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하지만 지난 일들 탓에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조원철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불쑥 거리를 좁혀올 때면 반사적으로 겁이 났다."천리향은 사람의 코로는 맡을 수 없는 향료다."조원철은 그녀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속삭였다."오직 취풍매라는 사냥매만이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식량이 어디로 빼돌려지는지 추적할 때 쓰는 것이다.""오라버니가 기르시는 그 매들 말입니까?"강유영은 그가 억지를 부리려 다가온 것이 아니
"필요 없다."조원철이 앞을 주시하며 답했다."호주의 일은 암행을 해야만 진상을 밝힐 수 있었으나, 식량 창고는 그저 국법에 따라 비축량을 순찰하는 것일 뿐 딱히 캐낼 것이 없지."그제야 의문이 풀린 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그럼 식량 창고를 순찰할 때는 무엇을 합니까?"그녀는 관아가 돌아가는 규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가장 먼저 장부를 대조해야지. 총장부와 입출고, 그리고 재고 장부를 살피는 것이다."조원철은 그녀가 이해하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다음은 식량을 직접 검수한다. 창고 지붕의 통풍 상태를 확인하고, 쥐나 벌레가 파먹은 흔적이 없는지 살피지. 마지막으로 관원과 창고 관리인, 경비병들을 따로 불러 심문하여 그들의 대답이 일치하는지 대조해 규정을 제대로 지켰는지 확인한다. 이 세 가지를 마치면 결론을 내려 창고 문을 봉인하고, 문서를 작성해 조정에 보고하는 것이다.""그리 말씀하시니 인주에서는 며칠 머물지 않겠군요?"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가 거느린 수하들이 많으니 그 정도 일은 금방 끝날 터였다."사흘이면 충분하다."조원철이 대답했다."그럼 전 객잔에 머물며 기다려도 되겠습니까?"강유영은 조심스레 묻고 나서 입술을 꾹 깨문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혼자 저잣거리를 둘러보며 이곳의 풍습과 인심을 알아두고 싶었다. 훗날 경성을 떠날 때를 대비한 준비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떠날 테니 시기의 문제일 뿐이었다. 어차피 식량 창고에서 할 일은 조원철이 이미 다 설명해주었으니 굳이 따라갈 이유도 없었고, 조정의 일에는 애초에 흥미도 없었다."너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조원철은 단호하게 그녀의 청을 잘랐다.강유영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지만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어차피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가 데려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쉽게 고집을 꺾을 리 없었다. 정 그렇다면 따라가서 구경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인주 관아에 들어서자 관원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네 오라비는?”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