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율은 정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 이미 경찰에 신고했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연결되었다.하지율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당황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밖에 미친 남자가 문을 부스고 있어요. 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 너무 무서워요... 여기는 지금 5살짜리 아이와 70세가 넘은 노인이 있어... 아예 상대가 안 돼요.”이렇게 말하면서 하지율은 스피커폰을 켰다.쿵쿵쿵!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찰은 이 소리를 듣고 목소리가 엄숙해졌다.“일단 안전한 곳에 숨어 주변에 방어할 수 있는 물건을 찾아보세요. 저희가 최대한 빨리 도착할 겁니다.”전화를 끊은 후 정시온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지율을 바라봤다.“지율 이모, 우리 경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하지율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분명히 될 거야.”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단종건을 바라보았다.“어르신, 여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약이 있어요?”단종건은 바로 하지율의 의도를 알아차렸다.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 늙은이의 집에서 깽판을 치는 건 이 자식이 처음이야. 내가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줘야겠어.”말을 마친 후 그는 약병들을 몇 개 꺼내 뒤섞기 시작했다.쾅!이때 문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단종건은 방금 섞은 약을 모조리 장하준의 얼굴에 뿌리며 하지율과 정시온을 향해 말했다.“빨리 입과 코를 막아.”두 사람은 그대로 했다.장하준이 방으로 쳐들어오려고 했을 때 약 가루가 날라왔다.이 약 가루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장하준의 눈은 불에 타는 것처럼 화끈거리며 아프기 시작했다.눈은 인체에서 가장 취약한 부위다. 장하준은 눈을 비비며 바닥을 뒹굴더니 비명을 질렀다.곧 그의 몸에는 빨간 반점이 하나둘씩 생겼다.장하준은 미친 듯이 긁기 시작했고 얼굴과 몸에는 핏자국이 나기 시작했다.“아파! 가려워! 아아아악!”장하준은 죽어가는 개처럼 비명을 질렀
“내가 너무 무능해서 다친 거야... 하지율 씨와는 상관없어.”장하준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늙다리랑 하지율이 아는 사이야. 바보만이 이 일이 하지율과 연관이 없다고 믿을 거야.”말이 끝나자마자 장하준은 노기등등해서 쳐들어왔다.“하지율, 경고하는데 또 채아를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옆에 있던 단종건이 눈살을 찌푸렸다.“왜 아침부터 화를 내? 입이 더러운 걸 보니 변비에 걸렸어?”장하준은 사람만 보면 물려는 미친개처럼 단종건을 향해 덤벼들었다.그는 단종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흉악한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늙다리, 잘 들어요. 감히 채아 털끝 하나 건드린다면 당신의 모든 뼈를 뽑아버릴 거예요.”“그리고 꼬맹이! 채아를 또 모욕하면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아마도 이렇게 흉포한 사람을 처음 본 탓인지 정시온은 놀라서 몸을 떨며 하지율 뒤로 숨었다.장하준은 자신의 협박이 통한 것 같아 의기양양해졌다.그는 정시온을 노려보며 흉악한 얼굴로 독설을 퍼부으려 했다.그 순간 뜨거운 차 한 잔이 장하준의 얼굴에 쏟아지자 그는 너무 뜨거워 비명을 질렀다.“아아악! 이게 뭐야? 감히 나에게 차를 뿌려? 죽고 싶어?”하지율이 정시온과 단종건 앞을 가로막으며 차갑게 말했다.“꺼져. 약자만 골라 덤비는 비겁한 놈.”이 찻물은 하지율이 조금 전 단종건에게 드리려고 준비한 거라 아직 뜨거웠다.장하준의 얼굴은 즉시 빨개졌고 시야도 흐려졌다.그는 하지율에게 여러 번 당한 적이 있어 이미 그녀를 극도로 증오했다.정시온과 단종건에게도 여러 번 조롱당한 터라 이 두 사람 역시 눈엣가시였다.오늘 그가 한의원에 난동을 부리러 온 것은 임채아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것 외에,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며 혼내줄 생각도 있었다.지금 장하준이 제일 아끼는 얼굴이 하지율 때문에 화상을 입게 되자 그는 두 눈이 시뻘게지며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하지율, 이 미친년아! 오늘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나는 성을 갈아버릴 거야.”정시온은 재미있
임채아는 그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창백해졌다.“선생님, 오해하셨어요... 저, 저는 점심을 못 먹어서 지후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가려던 것뿐이에요...”단종건은 냉정하게 말했다.“한 시간만 줄게. 한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오늘 두 시간 늦게 퇴근할 거야. 두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네 시간 늦게 퇴근해.”고지후가 눈살을 찌푸렸다.“선생님, 요구가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규칙이 없으면 안 돼. 너도 회사의 대표인데 직원이 지각하거나 조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어?”고지후가 말했다.“하지만 채아는 선생님의 직원이 아니잖아요.”단종건이 쌀쌀하게 웃었다.“난 지금 돈도 받지 않고 채아의 불치병을 치료해주는데 며칠 허드렛일을 하는 것도 힘들어? 스스로도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최선을 다해 구해주길 바라지 마.”고지후는 할 말을 잃었다.임채아는 목구멍에 솜털이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녀는 지금 이 늙다리와 싸우며 고지후에게 이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이 늙은이가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참아야 했다. 지금 싸우면 그녀의 거짓말이 들통날 테니까.‘하지율, 분명 하지율이 이 늙다리와 함께 나를 괴롭히는 거야.’이 생각에 임채아는 하지율에 대한 증오가 한층 더 깊어졌다.고지후가 임채아를 바라보았다.“채아야, 넌 나와 함께 검사받으러 갈 거야? 아니면 여기에 남을 거야?”고지후도 바보가 아니니 임채아 손에 난 상처가 그리 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병원에 갈 필요도 없을뿐더러 치료할 필요도 없었다.이미 상처가 다 아물었기 때문이다.임채아는 이 기회를 빌려 도망치려 했지만 단종건이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떠날 수 없었다.이곳에서 반나절을 보냈는데 지금 떠나면 또 하루를 보충해야 하니 전혀 이득이 없었다.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지후 너는 돌아가 봐. 나는... 괜찮아.”고지후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서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여기서 임
임채아는 비록 이간질을 잘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니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항상 고지후의 편을 들던 임채아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상황은 더욱 어색해졌다.이때 정시온의 어린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아저씨, 지율 이모를 모함했는데 사과하지 않으세요?”하지율은 고개를 숙여 정시온을 바라봤다.정시온은 익살스럽게 그녀를 향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아이고, 귀여운 시온이.’어떤 말은 그녀가 직접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하는 효과가 달랐다.단종건이 이 말을 했다면 그녀의 편을 든다는 의심을 샀을 것이다.하지만 정시온은 어린아이였기에 아무리 하지율의 편을 들어준다 해도 이런 상황을 직접 듣지 않았다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지후는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눈빛이 어두워진 고지후는 목젖을 굴리며 애써 참았다가 한참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오해했어.”하지율이 그를 흘겨보았다.“임채아 씨가 그렇게 특별한 상황이라면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봐. 치료를 지체하면 안 되잖아.”임채아도 계속 이곳에 있기 싫어 하얀 손을 내밀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지후야, 내 손가락이 약재 다듬다가 많이 다쳤어. 이러다 앞으로 바이올린 연주도 못 하게 될 것 같아.”임채아의 손에는 가늘고 얕은 상처가 몇 군데 있었다. 비록 엄중한 상처는 아니지만 평소 관리를 꾸준히 하던 손 치고는 꽤 눈에 띄는 편이다.이때 단종건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어. 지율이가 여기서 오래 도와줬어도 바이올린을 못 연주하지는 않았으니까. 난 그저 약재를 고르라고 했지 손을 자르라고는 하지 않았어.”고지후는 눈빛을 반짝이며 단종건을 바라보았다.“선생님도 지율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을 아셨나요?”단종건이 눈살을 찌푸렸다.“왜? 결혼한 지 5년이 됐는데도 아내가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몰랐어?
말을 마친 후 해지율은 고지 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임채아는 하지율의 이 돌발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지율이 이 전화를 건 이유는 뭐지? 설마 나를 구실로 지후에게 들러붙으려는 건가? 하지만 지후가 온다고 해도 어차피 나를 보러 오는 건데 하지율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전화를 끊은 후 하지율은 단종건과 고윤택을 불러 계속 점심을 먹었다.임채아는 홀쭉해진 배를 어루만졌다.고지후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아침부터 걸렀는데 단종건 때문에 이곳에 발이 묶인 것이다.‘다행히 조금 있으면 지후가 나를 데리러 올 거야.’이것이 바로 하지율이 전화할 때 그녀가 막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임채아는 고지후에게 자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를 알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한 시간 후 고지후가 도착했다.하지율을 비롯한 세 사람은 식사를 마쳤다.정시온은 약재를 고르고 있었고 하지율은 한약을 갈고 있었지만 환자인 임채아는 걸상에 앉아 문 쪽만 바라봤다.늘씬한 키를 가진 남자가 긴 다리를 움직이며 들어오는 모습을 본 임채아는 눈빛이 밝아졌다.“지후야, 왔어!”고지후는 그녀의 손을 보며 물었다.“손가락에 난 상처는 엄중해?”임채아는 놀란 토끼처럼 손을 등 뒤로 숨겼다.“아니야. 그저 조금 긁혔을 뿐이야. 이젠 다 나았어...”고지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숨긴 손을 잡아당겼다.그러자 그는 멍해졌다.임채아의 손에는 그녀가 말한 대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고지후는 갑자기 한약을 갈고 있는 하지율을 노려보며 어눌한 목소리로 물었다.“일부러 날 놀린 거야?”하지율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정시온이 입을 열었다.“아저씨, 왜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지율 이모를 탓해요? 분명 아줌마가 스스로 와서 아프다고 소리쳤잖아요. 지금 특별한 상태라 출혈이 쉽게 멎지 않을 수 있다고 했어요.”“지난주에 아줌마가 손가락을 베었을 때 아저씨가 너무 걱정해서 기어코 병원에 데려갔고 수혈 준비까지 미리 했다고
단종건은 임채아의 손을 흘끗 보고는 비꼬아 말했다.“그럼 어서 병원에 가. 조금만 늦게 가면 상처가 아물테니까.”정시온도 말했다.“아줌마, 그저 살짝 스쳤을 뿐인데 그렇게 아프세요? 난 평소에 상처 입거나 다쳐도 울지 않아요... 왜 5살 어린이보다도 못하세요?”임채아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연기를 펼치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은 살아있었다.“꼬마야, 난 너희 정상인들과 몸 상태가 달라... 지난주에 부주의로 손가락을 베었을 뿐인데 피가 많이 났어. 지후는 내가 후유증이 생길까 봐 기어코 병원에 가자고 했어.”“지후는 내가 지금 특별한 상태라 조금만 다쳐도 피가 멎기 어렵다는 걸 알거든. 나중에 수혈이 필요할 때 혈액이 부족할까 봐 미리 준비해 두기도 했어...”“내가 병원에 갔을 때 병원에서는 대출혈 환자를 긴급 구급하고 있었어. 나를 위해 준비해 둔 혈액을 먼저 그 환자에게 썼더라고.”“지후가 알고 난 후 크게 화를 냈어. 만약 내가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어. 그러면서 그날 밤 자기 멋대로 나를 위해 준비한 혈액을 써버린 의료진을 다 해고했어.”“아이참, 지후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던 거야. 손가락이 조금 베였을 뿐인데 수혈할 필요까지 있겠어?”임채아의 이 말들은 하지율에게 고지후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리기 위함이었다.그리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고지후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했다.하지율은 임채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임채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바로 고지후에게 전화해 당신을 데리러 오라고 할게요.”임채아는 잠시 멍해졌다. 하지율이 화를 내기는커녕 고지후에게 전화를 걸려 한다니?“하지율 씨, 괜찮아요. 그냥 작은 상처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하지율은 임채아의 말을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고지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상황을 본 임채아의 두 눈에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내가 상처 입었다는 구실로 지후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네. 하지만 지후는 절대 네 전화를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