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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도망 안 갈게

Auteur: 데이지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22 10:44:41

공원을 벗어나 도로로 나왔을 때,

이미 밤은 완전히 내려와 있었고 낮 동안 남아 있던 빛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가로등 아래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빛이 잠깐씩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시간은 끝났고, 그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빠르게 흘러갔다고 해서 가벼웠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 안에서 정리된 것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빈이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둘은 더 이상 시선을 자주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

이수는 잠시 입을 열었다.

“오늘…”

말을 꺼냈다가,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필요했던 것 같아.”

하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충분한 공감이 담겨 있었다.

이수는 말을 이어갔다.

“도망친 건 아닌데.”

그녀의 시선이 정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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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262. 같은 높이에서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 어제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 같은 공간이었고, 같은 구조였으며,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안을 걷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면 공간이 주는 압력도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이수는 멈추지 않았다.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버튼을 누르는 동작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전날에는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짧은 준비가 필요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끝까지 갔다가 돌아온 상태였고, 그 사이에서 무엇을 놓고 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빈은 옆에 서 있었다.둘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긴장이 아니라 정렬에 가까웠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두 사람은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이수는 층 버튼을 눌렀다.짧은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위로.어제와 같은 방향.하지만, 이번에는 올라가는 감각이 달랐다.도망치지 않고 올라가는 쪽. 하빈은 벽에 기대지 않았다.이수도 마찬가지였다.둘은 중심을 스스로 잡고 서 있었다.거울처럼 반사되는 벽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였지만, 시선을 그쪽으로 두지 않았다.이수는 정면만 보고 있었다.그리고 말했다.“들어가면…”말을 멈추지 않았다.“…이번엔 내가 끝까지 말할게.”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문이 열렸다.복도는 어제와 같았다.길지 않은 거리,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 일정한 밝기의 조명.이수는 방향을 확인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었다.걸음을 옮겼다.멈추지 않았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번에는 멈춤이 길지 않았다.노크를 하지 않았다.손잡이를 잡았다.돌렸다.그리고, 문이 열렸다.안쪽 공기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그곳에는 민준이 있었다.어제와 같은 위치.창가 쪽.빛을 등지고 있는 자리.이수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하빈도 뒤따라 들어왔다.문이 닫혔다

  • 불륜해드립니다.   261. 도망 안 갈게

    공원을 벗어나 도로로 나왔을 때, 이미 밤은 완전히 내려와 있었고 낮 동안 남아 있던 빛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가로등 아래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빛이 잠깐씩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이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하루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시간은 끝났고, 그 시간은 의외로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빠르게 흘러갔다고 해서 가벼웠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 안에서 정리된 것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하빈이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둘은 더 이상 시선을 자주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이수는 잠시 입을 열었다.“오늘…”말을 꺼냈다가,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필요했던 것 같아.”하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응.”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충분한 공감이 담겨 있었다.이수는 말을 이어갔다.“도망친 건 아닌데.”그녀의 시선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잠깐 멈춘 느낌.”그 표현이 가장 가까웠다.하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이제 다시 가면 되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녀의 대답에는 이전과 같은 망설임이 남아 있지 않았다.그저 순서대로 이어가는 느낌에 가까웠다.두 사람은 길을 건넜다.신호가 바뀌는 타이밍에 맞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고,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이수의 시선이 잠깐 위로 올라갔다.하늘은 완전히 어두웠고, 구름이 조금씩 흩어지면서 군데군데 별이 드러나고 있었다.그녀는 그 장면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하빈.”그가 고개를 돌렸다.이수는 잠시 말을 고르지 않았다.이번에는 바로 이어갔다.“내일… 아니면 오늘.”그녀의 말은 시간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은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다.“…다시 갈 거야.”하빈은 질문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민준.”이수가 덧붙였다.그 이름이 다시 한 번

  • 불륜해드립니다.   260. 남겨두는 말들

    해가 기울면서 공원의 색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낮 동안 밝게 드러나 있던 것들이 서서히 부드럽게 가라앉고 있었다. 빛이 직접적으로 닿던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고, 대신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이수는 벤치에 앉은 채로 한 번도 자세를 크게 바꾸지 않았다.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움직이는 쪽이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태였다.하빈도 마찬가지였다.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것, 같은 시간 위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였다.이수는 손가락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미세하게 떨리다가 멈췄고, 그 움직임이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라는 걸 인지한 순간, 다시 힘을 풀었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생각보다…”말을 꺼냈다가, 잠시 멈췄다.하빈이 고개를 돌렸다.이수는 이어갔다.“…안 괜찮아 보이네.”그 말은 의외라는 의미에 가까웠다.하빈은 잠시 그 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수는 시선을 정면에 둔 채 계속 말했다.“아까… 거기서.”민준과 마주한 자리.봉투를 열던 순간.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난 장면들.“거기서 나도 순간 무너질 줄 알았어.”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은 분명했다.“끝이라고 생각했거든.”하빈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수는 말을 이어갔다.“근데…”그녀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다시 고정됐다.“…안 끝나더라.”그 말은 체념이 아니라, 인식에 가까웠다.끝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이, 사실은 중간이었다는 사실.하빈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그럼 아직 남아 있는 거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짧은 대답이었다.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책임, 선택, 관계, 그리고 앞으로

  • 불륜해드립니다.   259. 내가 만약 사라지면

    건물을 나왔을 때, 바깥 공기는 예상보다 밝았다. 흐리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늘은 이미 어느 정도 개어 있었고, 젖어 있던 바닥도 햇빛을 받아 서서히 색을 되찾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안쪽에 있던 공기와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이수는 몇 걸음 정도를 그대로 걸었다.멈추지 않았고, 그렇다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방향이 없는 게 아니라, 방향을 급하게 정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 가까웠다.하빈이 옆에 있었다.둘은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일부러 속도를 맞추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같아졌고, 그게 더 편한 거리였다.한 블록 정도를 지나고 나서야 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말을 꺼냈다가, 잠시 멈췄다.하빈이 시선을 옮겼다.이수는 다시 이어갔다.“시간 있어?”그 질문은 가볍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하빈은 짧게 답했다.“응.”망설임이 없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미 정해진 말을 꺼내는 쪽에 가까웠다.“…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말자.”하빈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이수는 말을 이어갔다.“뉴스도 안 보고, 연락도 안 받고.”그녀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그냥 하루만.”그 말은 부탁처럼 들리지 않았다.필요한 시간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방식에 가까웠다.하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은 거부가 아니라 이해에 가까웠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짧은 대답이었다.둘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그대로 걷다가, 자연스럽게 사람이 많은 쪽으로 들어갔다.점심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거리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었고, 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디든 들어갈 수 있었지만, 둘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결국 아무 계획 없이 들어간 건, 골목 안쪽에 있는 작은 식당이었다.간판도 크지 않았고, 내부도 넓지 않았다.그

  • 불륜해드립니다.   258. 같은 자리

    천천히.서두르지 않는 걸음.서랍을 열었다.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이미 준비되어 있던 물건.그는 돌아섰다.봉투를 손에 든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이 정도까지 왔으면…”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일정했다.“…이건 봐야지.”그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툭.작은 소리.하지만 그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이수는 움직이지 않았다.시선만 내려갔다.봉투.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미 알고 있는 종류의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그럼에도 이번에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재촉하지도 않았다.대신 기다렸다.이수가 직접 선택하기를.이수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봉투 위에 닿았다.손끝이 잠깐 멈췄다.숨이 한 번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그리고, 봉투가 열렸다.봉투가 열리는 순간, 종이는 가볍게 펼쳐졌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이수의 손끝에서 멈춘 건 종이가 아니라, 그 안에 붙잡혀 있던 장면들이었고, 눈으로 확인하는 동시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감각이 따라붙었다.첫 장을 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시선이 완전히 고정됐다.병실 복도.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대신 시선만 움직였다.사진 속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그리고,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민준.시선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이수는 두 장면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그녀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다음 장으로 손이 넘어갔다.병실 안. 산소호흡기.그리고, 하빈. 이수의 손이 멈췄다.이번에는 사진 때문이 아니라, 옆에 서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하빈. 지금 이 자리.그리고..그날.두 장면이 겹쳤다.이수의 시선이 흔들렸다.“너…”이번에는 말이 끊기지 않았다.“…거기 있었어?”하빈은 피하지 않았다.짧은 침묵이 있었지만, 그 침묵은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응.”그 한 마디가 바로 떨어졌다.이수의 호흡이 어긋났다.사

  • 불륜해드립니다.   257. 내가 보여줄 타이밍이거든

    로비는 예상보다 조용했다.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소리가 크게 부딪히지 않는 구조였다. 발걸음과 대화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간격으로 흩어져 있었고, 천장이 높아서인지 공기가 아래로 눌리지 않고 위로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덕분에 공간 전체가 이상할 만큼 정돈되어 있었다.이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입구를 지나며 한 번 주변을 훑었지만,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은 없었다. 처음부터 찾고 있는 대상은 하나였고, 그 외의 것들은 지금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엘리베이터 앞.버튼을 누르는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 위의 숫자를 잠시 바라봤다. 내려오는 중이라는 표시가 켜져 있었고, 숫자가 한 칸씩 줄어들고 있었다.이수는 숫자를 보지 않았다.이미 올라가야 할 층을 알고 있었고,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도착음이 울렸다.문이 열렸다.둘은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안은 더 조용했다.닫히는 문 사이로 로비의 빛이 한 줄로 들어왔다가 끊어졌고, 그 순간 공간이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외부와의 연결이 끊긴 상태.이수는 층 버튼을 눌렀다.짧은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위로.아주 일정한 속도였다.하빈이 벽에 기대지 않은 채 서 있었다.이수도 마찬가지였다.둘 다 중심을 스스로 잡고 있었다.거울처럼 반사되는 벽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었지만, 한 화면 안에 들어와 있었다.이수는 그 모습을 잠깐 봤다가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말했다.“들어가면…”그녀의 말이 잠시 멈췄다.하빈이 시선을 옮겼다.이수는 이어갔다.“내가 먼저 말할게.”그 말은 순서를 정하는 것이었다.누가 먼저 움직일지, 누가 흐름을 잡을지에 대한 결정.하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는 더 묻지 않았다.이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이미 충분했다.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층 숫자

  • 불륜해드립니다.   8. 느려진 생각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 불륜해드립니다.   7. 문 앞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 불륜해드립니다.   10. 탐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 불륜해드립니다.   9. 거리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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