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내내 성유리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계속 뒤척거렸지만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너무 피곤해 스르르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유리는 자신의 옆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아직 제대로 정신이 들지 않아 눈을 열심히 뜨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잘 안됐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을 때 성유리는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악!” 깜짝 놀란 성유리가 비명을 지르자 이윽고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힘없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서서히 정신이 들었고 다리를 들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리려 했다. 어쩌다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깨버렸으니 사람이라면 다 화가 날 만한 상황 아닌가! 성유리가 다리를 치켜들자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의 다리를 손으로 꽉 잡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 밑에 누워있던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다리를 잡히는 순간, 너무 추워졌다. “이거 놔요! 손이 너무 차잖아요.” 성유리가 박한빈에게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말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다리를 더 꽉 잡더니 바로 성유리에게 쓰러지듯 안겨버렸다. “저기...” 성유리가 뭐라 하려고 입을 떼려고 하니 박한빈은 머리를 한껏 숙인 채로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성유리는 자신의 이불을 잡고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강한 박한빈의 힘에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박한빈의 머리를 잡으려는 그때, 성유리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왜 이렇게 축축하지?’ 창문을 통해 은은하게 들어오는 불빛으로 박한빈의 머리를 자세히 본 성유리는 빨간색 피를 발견했다. 너무도 놀라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성유리는 박한빈을 마구 흔들며 물었다. “다쳤어요? 머리에 왜 피가 나는 거예요? 박한빈 씨, 일어나 봐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조급해졌고 박한빈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
박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밤에 할머니랑 어머니가 엄청 크게 싸웠어. 왜 싸운 줄 알아?” 그의 말에 성유리는 몸이 잔뜩 굳었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물었다. “네? 왜죠?” 박한빈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연애를 해서.” 비록 성유리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성유리가 무슨 대답을 하기 전,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알고 있었던 거네?” “네?” “성유리, 나한테 거짓말하려고 하지 마.”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전처럼 싸늘했다. 입술을 꽉 물고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박한빈이 또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말하라고.” “그게 지금 중요해요?” 그 순간, 성유리가 되물었다. “사실 제 생각에 이 일은요...” “당연히 중요하지.”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더니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고 있었으면서 나를 속인 거네? 너는 네 선택이 얼마나 멍청한 선택인지 알아?” “네가 미리 알려줬으면 난 준비라도 해뒀을 거야. 이렇게 오늘처럼 갑자기 어머니가 할머니께 들킬 일은 없게 만들었을 거라고!”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우리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사생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했던 말. 우리 엄마가 여태까지 나를 박씨 가문에 남겨둔 이유가 바로 지화그룹과 지분들 때문이라고.” “오늘 같이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나게 하다니. 너 진짜 우리 할머니가 밖에 있는 새끼들한테 지분을 넘기는 꼴을 나한테 보여주려고 그랬어?” 박한빈이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자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어쩌면 성유리는 조금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 자기 앞에서 이런 사적인 일들은 하지 않던 박한빈이 지금 이
박한빈은 성유리의 집을 또다시 떠났다. 그날 밤 뒤로 박한빈은 며칠간 미화로 쪽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성유리는 이번에 박한빈이 단단히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이제 진짜 끝인 건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성유리는 방 안 곳곳에 남아있는 박한빈의 흔적들을 살폈다. 소파에 한참을 멍때리고 앉아 있던 성유리는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이 시간 동안 성유리는 혼자서 요리를 해 먹기를 즐겼다. 비록 그녀의 요리 실력은 좋지가 않지만 박한빈은 늘 성유리가 해준 음식들을 남기지 않고 싹 먹어 치웠었다. 성유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음식을 두 가지나 준비해 지화그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막상 지화그룹 대문에 서 있으니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사모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성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이라는 칭호는 이미 성유리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성유리의 발걸음을 늘 멈췄었다. 서훈은 성유리에게 빠르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사모님이시군요! 어떻게 이곳에 다 오셨습니까?” “그게...” “아! 박 대표님 뵈러 오신 거지요? 마침 잘 됐습니다. 저랑 함께 가시죠.” 서훈은 아주 기뻐하며 성유리를 안내했다. “박 대표님 위에 계십니다. 사모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아신다면 무조건 저처럼 기뻐하실 겁니다.” 성유리는 서훈의 뒤를 따라가며 몇 번이나 거절을 하려했지만 그의 환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사무실로 도착했지만 성유리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고개를 돌려 서훈에게 물었다. “오늘 박 대표님 기분은 어때 보여요?” 서훈은 예상치 못한 성유리의 질문에 당황하더니 곧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모님 얼굴을 보신다면 꼭 좋아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말이네요?” 성유리는 서훈의 말에서 답안을 알아차렸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박한빈은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안 드실 거예요?” 성유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박한빈에게 되묻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상위에 놓인 도시락을 쳐다봤다. “가지볶음이랑 닭고기 좀 했어요.” 박한빈의 시선을 확인한 성유리는 재빨리 그에게 무슨 음식인지를 알려줬다. “그래?” 박한빈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거절은 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도시락을 들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도시락을 내려놓자마자 박한빈이 갑자기 손을 뻗어 성유리를 덥석 잡아 자기 무릎에 앉히고는 말했다. “성유리, 난 네가 전부터 나를 계속 속인다고 생각했어.” 박한빈은 복수라도 하듯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제가 뭘 속이는데요?” “정말 진심으로 나를 좋아했어?” 박한빈의 물음에 성유리는 바로 굳어버렸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 사무실 밖에서 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무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윽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김서영이었지만 성유리는 다행히 서훈의 목소리를 들듣은는 순간 박한빈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김서영의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성유리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녀가 성유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는 박한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맞지?” 박한빈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서훈을 쳐다봤다. 그러자 서훈은 빠르게 김서영에게 다가가 빌 듯이 말했다. “사모님, 저랑 함께 손님 실로 갑시다. 이곳은...” “지금 나는 꼭 답을 알아야겠다. 박한빈, 네가 한 짓이 맞아?” 김서영은 잔뜩 화를 내며 박한빈에게 따졌다. “네가 일부로 사람을 시켜 그 사람 회사를 그딴 식으로 대한 거야? 네가 어떻게 그래?” “왜 그러면 안 됩니까?” 서훈이 김서영을 데리고 나
성유리가 다시 김서영을 만났을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김서영이 먼저 주동적으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카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의 목적을 몰랐기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 금성을 떠나려고 해.”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은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줬다. 김서영의 말에 놀란 성유리는 눈이 두 배로 커지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세요?” “그냥 그런 뜻이지.” “저번에 그 일 때문에 그러세요? 어머님 지금 한빈 씨한테 화가 나셔서...” “아니야.”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을 끊어버리며 대답했다. “내가 왜 떠나려는지 말해줄게. 그 사람은 저번에 한빈이가 했던 테스트를 통과했기 때문이야.” 김서영의 대답에 성유리는 천천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어머님 생각은...” “금성에는 우리 둘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게다가 수년 동안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질릴 대로 질려서 숨도 잘 안 쉬어져. 나도 더 이상 이렇게 살기는 싫어서 정한 거야.” “아무도 우리 둘을 모르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어.” “요즘 말로는 야반도주한다고 할 수 있지. 사랑을 위해서.” 김서영은 말만 해도 행복한지 환하게 웃었다. 성유리는 예전부터 늘 김서영의 미모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박한빈이 김서영을 닮아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잘생겼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늘 김서영은 한 폭의 그림 속에 사는 여인처럼 그 아름다움은 그저 외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성유리는 오늘 처음으로 김서영의 웃음에서 그녀의 진심과 진짜 감정을 알아보았다. ‘저렇게 웃으시는 걸 보니까 심장이 너무 빨리 뛰네.’ 한참 뒤,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한빈 씨는 이 일을 아나요?” “모르지. 알려줄 생각도 없고.” “그러시면 안 되지 않나요?” 성유리가 김서영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그래도 한빈 씨 어머니신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숨기면 안 되잖아요.” “만약 걔가
성유리는 김서영이 건넨 편지봉투가 마치 폭탄같이 느껴져 자신의 서랍 안에 넣어두는 것이 불안했다. 결국 성유리는 편지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책꽂이 사이에 넣어두었다. 책들 사이에 작은 편지봉투가 껴있었지만 성유리는 편지봉투가 제일 눈에 잘 들어왔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온 박한빈은 그 편지봉투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요즘 그의 컨디션은 거의 최상을 찍고 있었는데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았다. 성유리가 이 집에서 떠나기를 계속 거부하자 박한빈은 그냥 그녀의 옆에 있는 빈집을 월세를 내며 살았다. 그래서 현재, 더 이상 그 어떤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늘 밤 금성에는 올해 첫눈이 내려 박한빈은 유독 신나 했지만 성유리는 무관심했다. 박한빈은 성유리를 창가로 끌고 가더니 “강박적”으로 그녀를 내리는 눈을 보게 만들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요구 하나를 제안했다. “여보라고 불러. 그러면 생각해 볼게.” “여보. 여보 우리 제발 돌아가요.” 성유리가 박한빈을 몇 번이나 “여보”라고 불러준 후에야 그는 다시 성유리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이 거의 끝이 날 때쯤에 성유리는 이미 잠에 들기 직전인 상태였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 성유리를 바라보던 박한빈은 그녀를 업고는 욕실로 향했다. “며칠 뒤에 우리 둘이 도인국 한번 갈까?” 박한빈이 물었다. “갑자기 도인국은 왜요?” “휴가. 가서 눈도 보고.” 그의 대답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해가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표정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그 뜻이 아니라 진짜로 눈 구경하러 가자고.”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대답했다. “관심 없어요.” “난 관심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줘.” 말을 마친 박한빈은 성유리를 욕실 구석까지 가둬두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깊은 밤의 병원은 늘 유난히 이상하게 느껴진다.복도 끝의 그 빛나는 구조등은 마치 빨간 피처럼 마음을 졸이게 했다.성유리는 의외로 지금 응급실 앞에 박한빈의 비서 외에 성유정도 함께 앉아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그녀의 몸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는 듯했는데 안색이 창백한 채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한빈 오빠!”긴장의 끈이 풀린 듯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나... 오빠 왔어? 어떻게 해? 아줌마가 많이 다치셨어. 그러다가...”박한빈은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이내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눈길을 돌렸다.“아직 사고 조사를 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도로에는 다른 차량은 없었고 사모님의 차는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돌진해 버렸다고 합니다.”비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차에는... 진성민 씨도 계셨는데 방금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처치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비서는 말을 돌려 하느라 노력했지만 박한빈의 안색은 지극히 보기 힘들었다.성유정은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한빈 오빠, 지금... 언론 쪽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안 좋은 기사가 쏟아질 게 뻔해.”“뭐라고?”그녀를 돌아보며 묻는 박한빈의 한마디는 진지한 질문 같기도 하고 협박 같기도 했다.하지만 성유정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아줌마가 낯선 남자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언론에서 함부로 추측할 거야.”말을 마친 성유정이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언니, 언니는 사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왜 아줌마를 말리지 않았어?”성유리는 이럴 때 자신이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한빈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는데 성유정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어리둥절해졌다.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성유정은 이미 계속 말했다.“아줌마가 오늘 밤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성유정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자기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 날카로운 눈빛
그러고 나서 박한빈의 비서도 앞으로 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뭐라고 말했다.박한빈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 대표님, 이 여론이 내일 인터넷에 터지면...”“사람 찾아 일단 눌러. 그리고 진성민의 가족에게 연락해.”박한빈의 목소리는 매우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냉정했다.“박씨 저택 쪽은 내가 직접 가서 말할 거야.”말을 던진 그는 이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다가 성유리 곁을 지날 때 문득 무슨 생각이 난 듯 말했다.“내가 먼저 데려다줄게.”“전... 오늘 밤에 병원 쪽에 남을게요.”사모님이 ICU에 계셔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성유리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박한빈과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졌다.방금 한 성유정의 말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김서영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는 김서영이 정말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내 말대로 해.”박한빈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따라갔다.“몰랐어요...”차에 오른 성유리는 결국 입을 열었다.“한빈 씨 어머니가 그럴 줄은...”“성유정이 방금 한 말, 너에게 뭘 줬다고 했어.”박한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게 뭐야?”“서류예요...”“어디 있어?”미화로에 돌아온 성유리는 가장 먼저 그 서류를 박한빈에게 건넸다.그런 물건이 눈에 확 띄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본 박한빈은 자기도 모르게 쌀쌀하게 웃었다.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건만 들고 돌아섰다.“한빈 씨!”성유리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그는 발걸음은 멈췄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당신... 괜찮아요? 한빈 씨 어머니 일은 제가 설명할 수 있어요...”“설명할 필요 없어.”이 말을 던진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나갔다.성유리는 그 자리에 혼자 서 있다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온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