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절친이 미리 작성해 둔 이혼 합의서를 내게 건넸다. “5년이나 쫓아다녀서 겨우 유주원과 결혼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이혼하려는 거야?”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같이 밥을 안 먹어주니까.” 5시간 전, 나는 레스토랑 주소를 유주원에게 보냈다. “결혼 3주년이잖아. 여기 예약해 뒀어.”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바빠. 시간 없어.” 5년 동안 쫓아다니고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며 내가 돌려받은 것은 고작 그 한마디였다. 그날 회사 건물 아래에서, 나는 유주원이 단발머리 여자를 조심스럽게 챙겨 차에 태우는 모습을 봤다. 유주원을 5년 동안 쫓아다니는 동안 그의 답장은 처음엔 시큰둥한 한두 마디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이제는 며칠 걸러 한 번씩 바쁘다며 시간이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나는 내가 예전만큼 잘하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저 유주원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 것뿐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레스토랑에서 온 전화였다. “강서안 씨, 오늘 몇 분이 함께 오시나요?” 나는 이혼 합의서를 가방에 넣었다. “한 명이요.” 유주원이 그 여자와 그 레스토랑에 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잘됐네. 오늘부터 네가 누구와 그 집의 시그니처 메뉴를 나눠 먹든 나와는 상관없어. 난 오롯이 나만을 위해 즐길 테니까.’
View More“나 지금 잘 지내. 매일 사람을 살리고, 뜻이 맞는 친구들도 곁에 있어. 누구 입맛에 맞춰줄 필요도 없고,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어. 유주원, 난 이제 너 안 사랑해.”그 말이 나오는 순간 유주원은 마지막 남은 힘마저 빠져나간 듯 무너져 내렸다.그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중얼거리며, 미련을 못 버리고 만류했다.“괜찮아, 괜찮아. 서안아. 기다릴게. 네가 돌아오고 싶어질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나는 더는 아무 의미 없는 후회를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문을 밀고 나왔다.그날 이후 유주원은 캠프 근처에 머물렀다.작은 방 하나를 빌린 뒤 매일 캠프 문 앞에 와서 나를 기다렸다.아침밥을 가져다주고 물을 챙겨주며 의료 장비를 옮기는 일까지 도왔다.그는 소예원과 완전히 정리했다고 말했다.국내에 있던 집 두 채도 모두 팔았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유주원은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끊임없이 문자를 보내왔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그 문자들은 바람처럼 내 휴대폰 안으로 스쳐 들어왔다가, 먼지처럼 가라앉았다.나는 여전히 제시간에 출근하고 수술하며, 동료들과 순회 진료를 다니며 그라딘의 노을을 함께 바라봤다.유주원은 아직 과거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미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또 한 번의 우기가 지나고 의료 구호팀의 임기가 끝났다.나는 짐을 정리하며 귀국 준비를 했다.소식을 들은 유주원이 아침 일찍 캠프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빗물이 맺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흰 장미가 들려 있었다.“서안아, 나도 너랑 같이 돌아갈게.”“네가 아직 나를 보기 싫은 거 알아. 괜찮아, 난 기다릴 수 있어. 네가 언젠가 날 용서할 마음이 생기면 그때 다시 나타날게.”나는 그의 손에 들린 흰 장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유주원, 그럴 필요 없어. 나 다음 의료 구호 활동도 신청했어. 여기서 2년 더 있을 거야.”유주원의 손에서 장미가 툭 떨어졌다.꽃잎이 바닥에
탁.전화가 거칠게 끊겼다.유주원은 휴대폰을 든 채 일방적으로 욕을 들었지만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오직 나를 찾는 것, 나를 직접 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게 말하고 싶었다. 후회한다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이다.그라딘에 온 지 2년째 되던 해, 나는 이미 의료 구호팀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그날 오후 캠프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유주원이 텐트 밖에 서 있었다.그는 몰라볼 만큼 초췌했다. 수염은 덥수룩했고 눈빛은 흐렸으며, 피부는 햇볕에 새까맣게 타 있었다. 한때 자신감 넘치던 건축 디자이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유주원이 찾아올 줄 알았다.그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고 임서희가 이미 말해줬기 때문이다.동료들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하나둘 내 주변으로 모여들어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여기서는 얘기하기 불편해. 앞에 카페 있더라. 우리도 이제 제대로 얘기할 때가 된 것 같아.”그라딘의 오후 햇살은 눈이 부실 만큼 뜨거웠다.나는 커피 대신 얼음물 한 잔만 주문했다.유주원은 컵을 감싼 내 손을 바라보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작년 겨울에 내가 야간 근무하다가 환자 보호자한테 밀려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던 거 기억해?”“그때 내가 너한테 전화했더니, 소예원이 천둥을 무서워해서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 동료한테 부탁하라고 했잖아.”유주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눈가가 금세 붉어지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세 글자를 뱉어냈다.“미안해.”나는 그 사과에 반응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우리 두 번째 집 인테리어할 때도 기억나? 소예원이 가끔 와서 지낼 거니까 걔 취향대로 꾸미자고 했지.”“결혼 3주년 기념일도 기억나? 바빠서 나랑 밥 먹을 시간은 없다면서, 정작 소예원을 데리고 내가 예약한 레스토랑에 갔잖아.”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앞의 이 남자를 바라보며 문득 이 상황이 실감 나
유주원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조금 전까지 연결되던 전화가 다시 기계적인 안내 음성으로 바뀌자, 그는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유주원은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의료 구호팀에서의 일상은 바쁘고 알찼다.매일 수술을 하거나 순회 진료를 나가다 보니 침대에 닿기만 하면 곯아떨어질 만큼 피곤해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동료들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위해 이곳에 모여 있었다.아무도 내 과거를 몰랐고, 유주원과 소예원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나는 드디어 유주원의 아내가 아닌, 사람을 살리는 외과 의사 강서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임서희는 이틀에 한 번씩 영상 통화를 걸어와 국내의 가십을 들려주며 유주원이 천벌을 받을 짓을 했다고 욕했다.부모님은 단 한 번 나를 탓하지 않았다.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안전 조심하고, 제때 밥을 먹으라고 당부할 뿐이었다.누군가가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보살펴 준다는 온기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유주원이 없다고 해서 내 삶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오히려 유주원이 없는 내 삶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그날, 유주원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내가 예전에 일하던 병원을 찾아왔다.간호사 스테이션에 있던 주성미 간호사가 유주원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했다.“강서안 선생님이요? 사직하셨어요.”유주원이 멈칫하며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사직했다고요? 언제요? 어디로 가셨는지 말씀하신 건 없나요?”“꽤 됐는데요.”주성미 간호사는 그제야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두 눈에는 비아냥거리는 눈빛이 가득했다.“어디로 가셨는지까지는 저도 모르죠. 그런데 강서안 선생님 남편이시잖아요. 이런 걸 왜 저 같은 외부인한테 물으세요? 아, 제가 깜빡했네요. 요즘은 온 신경을 다른 여자한테만 쓰신다면서요.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으셨겠네요.”유주원은 할 말을
새벽, 비행기 안은 고요했다.나는 몽롱한 잠결에 그날 절친 임서희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너는 그저 밥 한 끼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그런 밥을 수없이 먹어왔으니까 그렇지. 서안아, 이제 더는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마.”그날 나는 예쁜 노을을 사진으로 남겼지만 유주원에게 보내며 구질구질한 잡담을 늘어놓지는 않았다.그저 사진첩에 저장했을 뿐이다.나는 언젠가 내 시시한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주고, 함께 노을을 봐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비행기가 나이로비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 시간으로 새벽 4시였다.나는 너무 지쳐 눈꺼풀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곧바로 의료 구호팀 차량에 몸을 싣고 캠프로 향했다.딱딱한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텐트 밖 햇빛이 눈 부실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휴대폰을 충전하고 인터넷에 연결하자 벌 떼가 몰려드는 듯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화면이 미친 듯 깜빡였고, 부재중 전화는 70통이 넘게 찍혀 있었다. 유주원의 이름이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카카오톡을 열자 읽지 않은 문자가 99통이 넘었다.몇 개는 임서희와 부모님이 보낸 걱정 어린 연락이었지만, 대부분은 유주원에게서 온 문자였다.아마 공항에서 내가 올린 SNS 게시물을 보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제야 내가 의사이고, 이혼 같은 일로 농담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을 테니까.그 시각, 국내에서.불안감에 휩싸인 유주원은 소예원에게 대충 둘러댄 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집 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서안아? 강서안.”유주원은 목소리를 높여 두 번이나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변명은 그 순간 전부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알 수 없는 불안함이 치밀어 오르자, 그는 다급히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방 문을 활짝 열어젖힌 순간 유주원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소예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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