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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안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박시온이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박시온의 진심이 장난으로 들렸나 보다.
"저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요?"
"어차피 실직자가 할 거라고는 숨 쉬는 거밖에 더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이곳에 더 있어봤자 저런 실없는 소리만 들을 것이 뻔했다. 저 얼굴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괴롭다. 이시안이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섰지만 발걸음은 움직이지 못했다.
"족제비부대의 병기."
"………."
"그러니까 다른 일은 못 할 걸요?"
흥미로운 발언이었다.
"이주 예전에 삼촌 서재에서 보고서를 읽었거든요."
"한지훈도 다 죽었네. 어린애에게 서재도 털리고."
"평화는 사람을 무르게 하니까요."
일리 있다.
한지훈이 거짓을 말하지 않은 이상,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세상은 평화를 찾아,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저랑 가죠? 세상 구경하러. 궁금하지 않아요? 병기가 필요 없어진 세상."
박시온이 거들먹거리며 말하고 있지만, 눈은 초조해하고 있다. 그것이 보였다. 박시온에게는 보이는 이 흔들림이 왜 박도윤에게는 보이지 않았는지. 이시안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을 아끼자, 박시온은 입술을 꽉 물며 이시안의 입술을 노려봤다.
제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뱉기를 바라며.
"박도윤도 너처럼 솔직하면 좋았을 텐데."
이건 박시온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럼 엄마 닮았나 보죠."
"여자 취향 독특하네."
"그럴지도."
"왜,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 봐?"
달갑지 않은지 비꼬며 말하는 이시안의 말에 박시온이 제 옷 속에서 꺼내자 달칵하고 열린 오래된 펜던트에는 이시안의 눈에 익숙하고 앳된 박도윤의 사진이 있었다.
"이렇게 금욕적이게 생긴 남자가 여자 취향이 유별나다고 했거든요."
박시온의 말에 이시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 이게 어린 애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그런 웃긴 소릴 애 앞에서 하다니. 정안용 같은 녀석인가?"
"맞아요. 그 사람."
이번에 가늘게 뜬 눈으로 박시온을 쳐다봤다.
"언제?"
"… 아마, 10년 전."
김이 빠졌다.
혀를 강하게 차며 이시안이 표정을 구겼다.
10년 전이라면 이 아이가 5살이나 6살쯤이다.
보통의 어린애가 그때 일을 제대로 기억할 리가 없다.
"저 기억력 굉장히 좋거든요? 삼촌도 가끔 말하고는 했는데. 아빠도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 곤란했던 적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고."
박시온이 여유로운 척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괜히 긴장됐다.
이시안은 한지훈과는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다.
"삼촌도 나름 쉬쉬하며 나를 키워줬지만, 나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바보도 아니고."
"그러냐."
안타깝게도 이시안은 흥미가 없어 보였다.
"옛 전우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박시온은 다급했다.
"당신이 동행해 준다면…! 삼촌도 못 말릴 거예요!"
도대체 이 박시온은 이시안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
"그렇게 됐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너, 너, 너희 둘이서… 무슨 여행을 한 다는 건데!?"
한지훈이 경악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불안해?"
"당연한 거 아니냐! 10년도 더 전부터 기억이 없는 이시안과! 아직 밖의 생활을 모르는 미성년자인 박시온이!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같이 여행을 한다니! 그것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옛 동료를 만나러 간다고!?"
"그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담담한 말에 한지훈이 답답한 듯이 가슴을 쳤다.
"그 뜻이 아니잖아!"
"그러면 네가 서재 관리를 잘했어야지."
"………!"
"그리고 걱정 마. 죽이지 않아."
그 말에 정곡이 찔린 건지, 한지훈이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홱 돌리며 시끄러운 입이 닫혔다.
"너무 유별난 거 아냐? 전쟁도 끝났다며? 왜 애를 가둬서 키워?"
"아, 아니 그게…!"
"좀 풀어주고 그래. 넌 여기저기 다니고 싶은 곳도 많아했으면서."
"아오! 박시온이가 세상 구경하고 싶다고 너를 꼬셨지!? 그거 거짓말이야!"
그 말에 이시안의 고개가 갸웃했다.
"지 아빠, 만나러 가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윤이를? 만나면 되잖아."
"… 뭐야, 도윤이가 선택한 여자니까 잘 지내볼 생각이 있는 거야?"
"아니?"
"뭐!?"
"아들만 던져주고 나는 내 길을 갈 건데?"
15년 만에 다시 살아난 주제에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한지훈이 오히려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시안을 보며 말을 아꼈다.
"시안아."
"왜."
한지훈이 진지하게 이시안을 불렀다. 그리고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발끝을 이리저리 흔들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린 시절부터 할 말이 있을 때 나오던 버릇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 나오던 말은 항상 자신에게 좋지 않던 말이기에 썩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 도윤이 말인데."
"뭐."
"실종 상태야."
"뭐?"
"시온이, 자기 아빠 찾으려고 너 이용하는 거라고."
"그런데?"
한지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용당하는 게, 내 일 아니었나?"
픽 웃으며 묻는 말에 한지훈이 한숨을 잘게 흘렸다.
"여긴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니야."
"알아."
"너에게는 17년의 공백이 있고."
"그래,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워?"
"그런 게 아니라고!"
한지훈이 결국 소리치며 이시안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어느새 그 두 눈은 또 붉게 물들어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
"……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이미 짐을 챙기고 온 박시온이 무슨 촌극을 하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유난스러운 사람이 유난의 끝을 보여주면 이렇게 되는 건가?
"걱정 마. 전화기 들고 갈게. 삼촌 카드도 들고 갈게."
자연스럽게 이시안의 옆에선 박시온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한지훈의 걱정을 더욱 자극했다.
"둘이… 싸우면 안된다?"
"너, 나이 들면서 겁이 너무 많아졌어."
"잔소리도 더 심해졌어요."
"야, 니들…."
그래, 이런 부분 말이다.
주소를 받아 든 박시온은 마침내 나온 '허가'에 올라간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주기적으로 연락해."
"알았어요."
"가자, 꼬맹아."
"아니, 내 이름 박시온이라고요."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에 한지훈의 울컥함은 두통으로 변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 미안해."숨 막히는 침묵은서윤재의사과로 깨졌다. 그제야서윤재의팔을 잡은이시안의손에 힘이 풀렸고, 한지훈이 애써 웃으며 둘 사이로 쏙 들어가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자이시안의어깨를 둘러맸다."둘 다 머리 좀 식혀. 둘이 너무 예민하잖아~ 일 때문인가~?""그래, 그래. 좀 쉬자."이시안은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고, 박도윤이 차마 그 손을 잡을 수 없어 멈칫하자, 한지훈이 대신 가겠다는 듯 손을 허공에서 흔들며이시안을따라갔다. 그리고서윤재도긴장이 풀린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죄송해요.""그건 내가 아니라시안이에게해야지.""……….""도윤아,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싸우는 애에게 스스로 죽겠다고 하는 건… 너무 심하잖아."서윤재의말에 박도윤은 잘못을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은 조금 진정하게 두고, 너 본부로 보내는 것도 내가 시안이랑 다시 이야기해 볼 게. 그러니까, 너도 진심으로 사과해. 알았지?""… 네."*****누가 저 모습을 보고 병기라고 할까?천막 틈 사이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이시안은시간이 흘러도 어릴 적, 그이시안과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한지훈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리를 긁적이
박도윤이 움찔했다.불과얼마 전에발견한 시체의 옷에서 나온 쪽지를 보고 샘플을 보냈었다. 그걸윤재이보다이시안이더 빨리 눈치챌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내가 잘못 본거라고 해. 그거 다른 사람이라고 하라고!"박도윤이얼어붙은듯, 대답하지 못했다. 눈이 동그래진 박도윤을 보며이시안의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적진 한가운데서 있는 것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에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널뛰었다."미쳤어? 무슨 생각이야? 그 송 효라고. 뭘 믿고보낸 거야!?""내가 약해서 의지 할 수 없으면… 내가 강해지면 의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겨우 입을 연 박도윤의 말은이시안이이해할 수 없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항상, 함께 있고 싶다는 소리야."요즘 늘 내던 짜증이나 화가 아닌, 덤덤하게 말하는 모습에이시안이잡은 팔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지금이시안의온몸을 지배하는 이 감정을 박도윤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나도 뒤가 아닌, 네 옆에서….""말이 되는 소리를 해!""………!""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어!? 애초에 그 송 효가 진짜일 거라는 확신도 없어!""진짜가 아니면 단순히 피를 보낸 거야. 나도 나름대로 생각도 각오도 하고 보낸 거야."이시안이입을 틀어막으며고장 난듯이 멍하니 박도윤을 바라봤다.
송 효.전쟁이 막 시작될 때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는 전쟁을 이기게 해 주겠다며 실험체를받아 가서는인체공학으로 '병기'를 만들어 낸 개발 책임자.모두그를 송 박사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하지만 송 효는 마지막으로 김정우를 만들어 낸 1년 이후, 돌연 잠적했다. 그의 행방은 여전히 추적 중이지만윤재이도실마리를 잡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본부에서도 소수만 아는 그 이름이 주 학에게서 나오니 의아했다."요즘 부대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 송 효라는 사람이 제2의 병기를 만들기 위해실험 대상을모집한다고 샘플로 피를 모으고 있다나 봐.""뭐?"이시안이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주 학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닌, 송 효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 믿을 수없다는 것에가까웠다."의도적인가? 이쪽은 그런 소문 없어. 있었다면 위에서 그냥 있었을 리 없어.""역시 그렇게 생각하지?""그 리스트, 알 수 있어?""사실이라면.""최대한 빠르게."주 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려고 하자, 먼저 일어선이시안이주 학에게 손을 뻗었다. 기꺼이 그 손을 잡아 일어섰다.*****"야!!!빡도! 너도 들었지!?이씨완전 무리 중이라고!!! 걱정도 안 돼!? 그냥 네가 먼저 사과하라니까!?""…… 안돼. 지금 내가 먼저
"멋대로 행동하면서?"그 말에 퉁명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반박하지 않는 것에 화는 조금 누그러든 것 같아 한숨을 들이 쉬었다."그보다 뭐야~?시안이는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길래, 새삼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말해주면 안돼~? 비밀로 할 게!""안돼.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고서는 말했잖아.""아니, 그건 네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어. 말해주라. 이번엔 진짜로 비밀로 할 게."*****"큰 형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둘이 살벌하게들어간 지한 시간이 넘었어! 저러다 시안이고장 나면어쩔 거야~! 형님이 가서 말려 봐~!!!"정안용이꿈적하지 않는김상팔의 팔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자, 김상팔이 퍽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내가 말리면 시간이 더 길어질 거 같은데.""이거 완전 아내에게 꽉 잡혀 사는 힘없는 남편 아니야!?"정안용이가슴팍을퍽퍽 치며괜히 얌전히 있던 김상팔에게 소리치고는 맞은 편에 얌전히앉아 있던김정우의 얼굴을 꼬집으며 제 불안감을 표출한다는 명목으로 괴롭혔다."전 혼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위험한 행동이잖습니까.""그래.얼마 전의피로도 회복되지 않을 건데.""이게 전부 공주님 때문이다.하아~ 시안아, 힘없는 나를 용서해!""윽!"정안용이&
받은 쪽지의 글씨체는 분명윤재이의글씨체다.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웠다.이시안의미간이 오만상으로 찌푸려지자, 오태성이 웃음을 꾹 참으며 폼을 잡았다."박도윤은 그곳에 있어.""…… 다른 의미로 놀라운데.""뭐?"박도윤과윤재이가친했냐고 물으면,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이시안이손아귀에 있는 쪽지를 강하게 쥐며 구겼다.지금 이 모든 상황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다. 지금이시안의머릿속에서 이 상황의 조각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조각이라면 박도윤의 여자가, 박시온의 엄마가윤재이와관련 있는 여자라는 것이라는 것.그것 하나뿐이다."화, 화 난 건 아니지? 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야! 가게 엉망으로 만들면 안 된다!?"특히 지금 자신이 걸어온 이 여정이윤재이가만들어 놓은 것이란 찝찝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박도윤 성격에 자신의 아이를 한지훈에게 맡길 이유가 있나?이시안의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그것은 표정으로 드러났다."복잡해 보이네?"오태성이 술을 슬쩍 권하며 묻자,이시안은술잔을 툭 쳐버리고 의자에 앉았다."여러모로."오태성이 구레나룻을 긁적이며이시안을바라봤다. 그리고는이시안이툭 쳐버린 술잔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뭐… 나도 살쾡
안으로 들어오자, 술집인 듯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있는 술병과 특이한 물건들에 박시온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슬쩍 손가락으로 툭 건들이자, 남자가 혀를 차며 아무거나 만지지 말라고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이시안의 시선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크흠.""말해. 너 뭐야? 재이의 지인?"아무리 생각해도 유추할 수 있는 건 그쪽뿐이었다."재이? 아아, 그래, 맞아. 그쪽도 재'희'처럼 '병기'인가?"남자는 선반에서 파는 것으로 보이는 술병을 들고 뚜껑을 따더니 입으로 쑤셔 넣었다. 알싸한 냄새가 너저분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하여간에 귀신같은 놈이네. 내 이름은 오태성. 이 가게의 주인이지."이시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오태성을 바라봤다. 지저분한 머리와 정리되지 않은 수염을 긁적이며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양은 윤재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런 이름 들은 적 없어. 윤재이는? 재이에게 직접 들어야겠어.""그건 곤란하네. 이야기가 통할 줄 알았는데, 너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트림을 '꺽' 하는 모습에 뒤에 있던 박시온도 인상을 찌푸리며 흥미롭게 보던 책을 그대로 두고 슬금슬금 이시안의 뒤로 바짝 붙었다."재희 말로는 의심이 많을 거라더니… 진짜네. 일단 물어는 둘게. 저 애는 박도윤과 무슨 관계?""…… 아들… 인데요…….""진짜냐고."오태성이 입을 막으며 탄성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가게의 과자를 박시온에게 던지자, 과자를 받아 든 박시온은 의아하게 과자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