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선생님, 왜 공작님이 선생님을 불러요?”
로테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세수하고 온 아이의 옷깃을 바로 펴 주다가 손을 멈췄다.
「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
밤에 문 밑으로 들어왔던 종이는 어머니께 쓴 편지 옆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내가 물어본 것에 답해 주시려는 것 같아.”
“편지요?”
“응.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
로테가 종이 끝을 눌렀다.
“안 된다고 또 하면요?”
“왜 안 되는지 다시 물을 거야.”
루디는 의자를 당겨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종이를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고개도 함께 기울였다.
“성벽에서요?”
“그렇게 적혀 있네.”
“높은 데서 말하면 더 잘 들려요?”
“왜냐하면—높아서 잘 들리는 건 아니야. 가까이 서서 말해야 잘 들리지.”
루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델 바로 앞에 섰다.
“편지 보내 주세요.”
“나는 아주 잘 들었어.”
“공작님한테도 이렇게 해요.”
로테가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
“선생님은 커.”
루디는 아델의 머리까지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안 올라가도 되잖아요.”
아델은 웃음을 삼키며 종이를 접었다.
“성벽에서 보여 주실 게 있는 모양이야. 너희도 아래까지 같이 가자. 나는 올라가고, 너희는 아그네스와 기다리는 거야.”
로테가 곧장 물었다.
“다녀와요?”
“응. 아래로 돌아올게.”
“해 지면.”
“해가 진 뒤에도 돌아와.”
로테는 그제야 소매를 놓았다.
아델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였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 옆에 답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
문닫는달 26일의 해는 안뜰 돌바닥을 길게 비췄다.
아델은 아이들과 성벽 아래까지 걸었다. 루디는 눈을 치운 길 가장자리만 골라 밟았다. 발자국 하나가 어긋나자 뒤로 돌아가 다시 디뎠다.
“이건 안 센 거예요.”
“걸은 건 걸은 거지.”
“그럼 두 번이에요?”
“뒤로 갔다가 앞으로 왔으니 두 걸음 더 걸었네.”
루디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
“돌아가면 많아져요.”
“그래서 목적지에 가려면 앞을 보는 게 좋지.”
성벽 계단 입구에는 세드릭이 서 있었다. 검은 외투 깃의 흰까마귀 수가 바람에 조금 움직였다.
세드릭은 먼저 아이들을 봤다.
“루디 군, 로테 양.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루디가 자기 뒤의 발자국을 가리켰다.
“많이 걸었어요. 되돌아가서요.”
“……그렇습니까.”
로테는 아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아델은 아그네스에게 아이들을 부탁했다. 세드릭이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다시 멈췄다.
“계단 가장자리가 얼었습니다. 안쪽으로 오르십시오.”
아델이 발을 놓을 곳을 살폈다. 바깥쪽 돌에는 얇게 얼음이 붙어 있었다.
세드릭은 앞서 가지 않고 아델이 안쪽에 서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한 계단 아래에서 함께 올라왔다.
‘계단은 미리 알려 주시면서.’
아델은 접어 둔 쪽지가 든 주머니를 눌렀다. 오늘은 내려가기 전에 다른 것도 듣고 갈 생각이었다.
성벽 위에는 등불 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등불 유리 안으로 기름빛이 비쳤다.
기사 하나가 기둥 아래를 살피다가 몸을 일으켰다. 큰 키에 짧은 수염을 기른 사람이었다.
“요른입니다. 겨울 문지기를 맡고 있소.”
“아델 카스펠입니다.”
요른이 아델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생이 아이들 수업을 맡았다 들었소.”
“네. 저보다 아이들이 제 수업을 더 자주 정하는 것 같지만요.”
요른의 수염 아래로 웃음이 잠깐 보였다. 세드릭은 북쪽을 향해 서 있었다.
“노래 당번 들어갑니다.”
요른이 말하자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이 등불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는 장갑 대신 두 손을 비볐고, 누군가는 외투 깃을 세웠다.
아델은 요른이 옆을 지날 때 물었다.
“밤마다 들리던 노래를 여기서 부르시는 거군요.”
“그렇소. 옛 북부 자장가요.”
“아이들 재우는 노래를요?”
“아는 사람이 많고, 오래 불러도 목이 덜 아프지.”
요른은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시작하면 노래가 끊기지 않아야 하오. 말씀은 조금 떨어져서 나누시는 게 좋겠소.”
세드릭이 등불 기둥에서 안쪽으로 물러났다. 아델도 따라섰다.
아래에서 루디가 양철 나팔을 들었다. 높은 곳에 선 아델을 발견한 얼굴이었다.
“선생님, 이거 봐요!”
나팔이 입으로 향했다.
“루디, 지금은 내려놓자.”
아델이 난간 안쪽에서 손바닥을 펴 보였다. 루디는 입술에 닿기 직전 나팔을 멈췄다.
“아직 안 불었어요!”
“응. 지금부터는 기사님들 노래를 들어야 해.”
“내 것도 노래예요.”
“네 소리도 들려줄 수 있지. 하지만 지금은 목소리가 이어져야 한대. 놀라서 멈추게 하면 안 되니까, 나팔은 수업 끝나고.”
루디가 요른을 올려다봤다.
“안 놀라면요?”
요른이 아래를 향해 대답했다.
“내가 안 놀랄 자신은 없소.”
루디는 한참 요른의 덩치를 보더니 나팔을 배 앞에 내렸다.
아그네스가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로테는 이미 아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델은 손을 한번 흔들어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
해가 북쪽 눈벌 끝에서 내려앉았다.
아델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지 않고 눈을 좁혔다. 낮에는 평평해 보이던 눈밭에 길게 어두운 자리가 생겼다.
그때 성 안의 등불이 한꺼번에 켜졌다.
안뜰, 겨울집 앞, 본성 창가까지 불빛이 들어왔다. 아델이 가까운 등불로 눈을 돌렸을 때는 그 안에도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기사들의 낮은 노래가 시작됐다.
한 사람이 숨을 들이쉬는 동안 옆 사람이 이어 불렀다. 바람이 돌벽에 부딪쳤지만 목소리는 그 아래에서 계속 들렸다.
세드릭이 북쪽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십시오.”
눈벌 멀리 검은 것이 있었다.
아델은 처음에는 눈 위의 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눈이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검은 것만 옆으로 길어졌다.
아델의 손이 난간 위에서 멈췄다.
“……움직이네요.”
“겨울마다 저것이 내려옵니다.”
세드릭의 목소리는 노래에 묻히지 않을 만큼만 낮게 들렸다.
“사람 그림자에 붙어 들어오고, 그래서 겨울엔 아무것도 성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편지도.”
아델이 세드릭을 봤다.
“편지를 가져갈 사람이 나가야 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성문을 열어야 합니다.”
“종이만 넘겨 보낼 수는 없고요?”
“문밖에서 받아 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도 겨울에는 움직여선 안 됩니다.”
아델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것은 아까보다 조금 다른 자리에 있었다. 얼마나 멀리 있는지 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아래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루디는 나팔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고, 로테는 아그네스의 앞치마 끝에 손을 얹고 있었다. 등불 아래에서 두 아이의 작은 그림자가 발 가까이에 머물렀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보낸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델은 손끝에 힘을 풀었다.
“그럼 그렇게 말씀하셨어야죠.”
세드릭이 아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명하기 어려우셨다는 건 이제 알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모르는 채로 기다리는 것과, 알고 지키는 건 달라요.”
세드릭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외투 자락을 흔들었다.
“……그렇다.”
“아이들한테도요. 못 나간다고만 하면 문이 얼마나 두꺼운지부터 궁금해해요.”
“루디 군이 문 밑을 살펴보는 것을 봤습니다.”
“편지도 그 밑으로 보낼 수 있다고 했어요.”
세드릭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틈은 막혀 있습니다.”
“그것도 말씀해 주시면 되죠. 들은 규칙을 지켜 보려다가 다른 방법을 찾는 거니까요.”
노래가 한 소절 더 이어졌다. 아델은 북쪽을 다시 봤다. 검은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가 지금 알아야 할 건, 문을 열지 않는 이유가 저것 때문이라는 거네요.”
“예. 오늘은 그것부터 알아 주십시오.”
“그럼 편지는 봄까지 보관하겠습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께서 기다리신다는 것을 늦게 생각했습니다.”
아델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봄에 보낼 때는 도착했다는 말보다 봄이 됐다는 말을 먼저 써야겠어요.”
“먼저 보낼 수 있도록 알빈에게 일러두겠습니다.”
“그건 부탁드릴게요.”
둘 사이로 찬 바람이 지나갔다. 세드릭이 반걸음 옆으로 옮겨 섰다. 아델의 외투 자락이 덜 흔들렸다.
아델은 난간 아래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 아이들은 조카예요.”
세드릭이 다시 아래를 봤다.
“알고 있습니다.”
“루디, 로테라고 부르세요.”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아델은 이어 말했다.
“루디 군, 로테 양이라고 하시면 아이들도 똑같이 격식을 차려야 할 것 같잖아요.”
“예의를 갖추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건 좋죠. 그런데 이름을 짧게 불러도 예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세드릭은 뒷짐을 졌다. 오른손이 왼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어떻게 말하면 됩니까.”
“그냥요. 루디, 로테. 밥 먹자. 잘 자라. 오늘은 뭘 했느냐.”
“……한꺼번에 말합니까?”
아델이 세드릭을 봤다.
세드릭도 아델을 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수업을 한 명 더 맡았네.’
“그때 필요한 말만 하시면 됩니다.”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에서 루디가 다시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나팔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 나 안 불었어요!”
아델이 몸을 돌렸다.
“응, 보고 있어. 이제 내려갈게.”
로테가 아그네스의 앞치마를 놓았다.
◇◆◇
공부방에 돌아오자 루디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편지는요?”
아델은 책상에서 접힌 편지를 집었다.
“봄까지 여기 두어야 해.”
루디의 입이 벌어지기 전에 아델이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편지를 가져갈 사람이 성문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겨울에는 밖에 위험한 것이 있대.”
로테가 아델의 얼굴을 살폈다.
“봤어요?”
“응. 멀리서 봤어.”
“선생님한테 와요?”
“나는 성벽 안에 있었고, 공작님과 기사님들도 함께 계셨어. 안전한 곳에서 보고 돌아왔어.”
로테는 아델의 손을 만져 봤다.
“차가워.”
“바람이 찼거든. 이건 따뜻한 방에 있으면 나아져.”
루디가 양철 나팔을 책상에 놓았다.
“그럼 봄에 내 소리도 가요.”
“응. 편지 안에 같이 넣어 뒀잖아.”
“내가 먼저 썼어요.”
“어머니께서도 그건 알아보실 거야. 글씨가 크니까.”
루디는 만족한 듯 의자를 당겼다.
아델은 편지를 넣을 자리를 만들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접기 수업에 쓰고 남은 종이와 짧아진 분필이 뒤섞여 있었다.
“종이는 이쪽, 분필은 통 안에. 함께 정리하자.”
루디는 짧은 분필을 길이대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로테는 종이를 펴서 모서리를 맞췄다.
아델이 서랍 안쪽을 닦으려 천을 넣자 작은 책 하나가 걸려 나왔다. 얇은 표지를 묶은 실이 느슨해져 있었다.
글자를 가르칠 때 쓰던 책인가 싶어 펼쳤다.
줄을 나눈 작은 장부였다.
「루디: 외삼촌 싫다고 함」
아델은 손을 멈췄다.
바로 아래에는 다른 글씨가 이어져 있었다.
「로테: 겨울에 나갈 수 없다고 함」
“루디, 이런 말을 적는 수업을 했니?”
루디가 분필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길게 못 써요.”
“네가 썼냐고 묻는 게 아니야. 누가 네 말을 적었어?”
루디는 장부를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들었다.
“전에 선생님.”
로테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말하면 써요.”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리면요?”
“틀렸다고 고쳐 주셨어?”
“아니요. 그냥.”
아델은 장부 첫 장으로 돌아갔다. 이름이나 수업 제목은 없었다. 아이들 말이 짧게 적혀 있었다. 그게 다였다.
수업을 살피려고 남긴 기록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앞뒤 말이 없으니 언제, 왜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델이 루디에게 물었다.
“공작님이 싫다고 했을 때는 어떤 일이 있었니?”
루디가 입술을 모았다.
“몰라요. 전쟁 책이었나.”
“그럴 수도 있겠네. 기억 안 나면 안 난다고 해도 돼.”
로테가 장부 끝을 만졌다.
“선생님도 써요?”
아델은 아이 쪽으로 장부를 낮췄다.
“수업하면서 기억해 둘 것은 적어. 하지만 네가 한 말을 적을 때는 뜻을 물어볼게. 말만 잘라 쓰면 다른 뜻이 될 수 있으니까.”
로테가 손을 뗐다.
아델은 장부를 덮었다. 버릴 물건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전 선생이 남긴 다른 종이가 있는지 나중에 살펴볼 생각으로 서랍 안쪽에 따로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그 앞에 두었다.
루디는 늘어놓은 분필을 통에 쏟아 넣었다. 가장 짧은 하나가 손바닥에 남았다.
“얘는 누우면 안 보여요.”
“그럼 맨 위에 놓자.”
루디가 아주 조심스럽게 분필을 올렸다.
◇◆◇
밤에는 공부방에서 짧은 글자를 읽었다.
루디는 낮에 잘 참았다는 이유로 나팔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아델은 불어도 되는 때를 정해 줬지만, 루디는 이제 들고만 있겠다고 했다.
“자는 데도 같이 가요.”
“침대에서는 옆에 내려놓기야. 자다가 얼굴에 닿으면 아프잖아.”
로테가 석판에 쓰인 글자를 손끝으로 짚었다.
“문.”
“맞아.”
루디가 재빨리 다음 글자를 봤다.
“밥.”
“그것도 맞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로테가 석판을 내려놓으려다가 문 쪽을 봤다.
세드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낮과 같은 검은 외투 차림이었다. 아델은 읽던 종이를 모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은 이제 자러 갑니다.”
“……알았습니다.”
세드릭은 들어오지 않았다. 뒷짐을 지려던 손을 옆으로 내렸다.
루디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높이 들었다.
“공작님도 자요?”
“조금 뒤에.”
루디가 아델을 봤다. 아델은 대답을 대신하지 않고 기다렸다.
로테는 석판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세드릭의 시선이 루디에게 갔다가 로테에게 옮겨졌다.
잠깐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아델은 종이 모서리를 맞추던 손을 멈췄다.
세드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루디. 로테. ……잘 자라.”
로테의 손끝이 석판 가장자리에서 멎었다.
루디는 대답하려고 입을 벌렸다.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도 함께 벌어졌다.
루디의 손에서 양철 나팔이 떨어졌다.
(10화 끝)
“선생님, 공작님은 왜 전쟁 책만 읽어요?”로테가 서재 문 옆에 서서 물었다. 아델은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문틈으로 세드릭의 검은 외투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책이 보였다.며칠 전 그 창 앞에서 봤던 공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델은 문 안쪽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로테에게 몸을 낮췄다.“왜냐하면—공작님께 필요한 책인가 봐. 다른 책도 읽으시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여쭤볼까?”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책은 안 읽어요.”“읽어 달라고 해 봤어?”“전에.”로테가 양손을 벌렸다. 꽤 두꺼운 책을 나타내는 듯했다.“큰 거 가져왔어요.”안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들어오십시오.”아델이 문을 열자 루디도 뒤에서 뛰어왔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볼이 빨갰다. 손에는 양철 나팔 대신 작은 석판이 들려 있었다.“나도 숙제 다 했어요!”“뛰지 않기로 했지.”루디가 문턱에서 걸음을 줄였다. 남은 두 걸음은 발뒤꿈치부터 천천히 내려놓았다.“이제 안 뛰어요.”“돌아갈 때도 그렇게 하자.”세드릭은 책을 덮고 아이들을 봤다. 로테가 곧장 책상 가까이 갔다. 책등의 글자를 짚던 손가락이 중간에서 멈췄다.“전투.”“그렇다.”“또요.”세드릭이 책을 내려다봤다. 루디는 옆에서 까치발을 들었다.“싸우는 거예요? 몇 명이요?”
“선생님, 왜 책장 뒤에 책이 있어요?”루디가 책장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닥에 댄 볼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을 틈으로 밀어 넣었다.아델은 젖은 천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왜냐하면—떨어졌을 수도 있고, 누가 넣어 두었을 수도 있어. 꺼내 봐야 알겠네. 먼저 손은 빼자.”“거의 닿아요.”“손이 들어간다고 팔도 들어가는 건 아니야.”루디가 팔꿈치를 한 번 더 밀었다. 책장 모서리에 소매가 걸렸다.“팔은 안 들어가요.”“직접 확인했구나. 이제 나와.”아델이 소매를 빼 주자 루디는 바닥에 앉은 채 손을 폈다. 손끝에 회색 먼지가 붙어 있었다.“책도 잡았어요. 조금.”“어디 다친 데는 없어?”루디가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였다. 아델은 손바닥까지 살핀 뒤 천으로 닦아 줬다.깊은눈달 3일의 공부방에는 의자가 모두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짧은 분필과 종이, 천 조각이 따로 놓였다. 겨울 동안 수업할 방을 정리하자고 했더니 루디가 의자 밑에 먼저 들어갔다.로테는 그 옆에서 종이 모서리를 맞추고 있었다. 아델이 준 작은 수건도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로테, 그 천은 닦으라고 준 건데.”로테가 접힌 천을 내려다봤다.“깨끗해요.”“맞아. 그런데 먼지를 닦으면 더러워질 거야.”“다시 빨아요?”“응. 빨아서 말리면 또 쓸 수 있어.”로테는 잠깐 생각하더니 가장 가까운 의자 다리를 닦았
“선생님, 왜 공작님이 선생님을 불러요?”로테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세수하고 온 아이의 옷깃을 바로 펴 주다가 손을 멈췄다.「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밤에 문 밑으로 들어왔던 종이는 어머니께 쓴 편지 옆에 놓여 있었다.“왜냐하면—내가 물어본 것에 답해 주시려는 것 같아.”“편지요?”“응.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로테가 종이 끝을 눌렀다.“안 된다고 또 하면요?”“왜 안 되는지 다시 물을 거야.”루디는 의자를 당겨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종이를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고개도 함께 기울였다.“성벽에서요?”“그렇게 적혀 있네.”“높은 데서 말하면 더 잘 들려요?”“왜냐하면—높아서 잘 들리는 건 아니야. 가까이 서서 말해야 잘 들리지.”루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델 바로 앞에 섰다.“편지 보내 주세요.”“나는 아주 잘 들었어.”“공작님한테도 이렇게 해요.”로테가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선생님은 커.”루디는 아델의 머리까지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안 올라가도 되잖아요.”아델은 웃음을 삼키며 종이를 접었다.“성벽에서 보여 주실 게 있는 모양이야. 너희도 아래까지 같이 가자. 나는 올라가고, 너희는 아그네스와 기다리는 거야.”로테가 곧장 물었다.“다녀와요?”“응. 아래로 돌아올게.”“해 지면.”“해가 진 뒤에도 돌아와.”로테는 그제야 소매를 놓았다.아델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였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 옆에 답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문닫는달 26일의 해는 안뜰 돌바닥을 길게 비췄다.아델은 아이들과 성벽 아래까지 걸었다. 루디는 눈을 치운 길 가장자리만 골라 밟았다. 발자국 하나가 어긋나자 뒤로 돌아가 다시 디뎠다.“이건 안 센 거예요.”“걸은 건 걸은 거지.”“그럼 두 번이에요?”“뒤로 갔다가 앞으로 왔으니 두 걸음 더 걸었네.”루디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돌아가면 많아져요.”“그
“선생님, 편지는 겨울에 못 가요?”루디가 아델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아델은 잉크병을 안쪽으로 옮긴 뒤 종이를 바로 놓았다.“왜냐하면—사람이 가져가야 하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보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어.”“종이는 작잖아요.”루디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이만큼 접으면 문 밑으로 가요.”“문 밑으로 나가도 우리 어머니 집까지 혼자 걸어가지는 못하지.”“내가 던지면요?”“네가 던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어.”루디는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눈이 치워진 안뜰 너머로 흰까마귀 문이 보였다.“아주 세게.”“그럼 편지를 주우러 안뜰에 내려가야 할걸.”루디가 제 팔을 한번 흔들어 보다가 돌아왔다.문닫는달 25일이었다. 창가에 놓아둔 물그릇이 차가워서 아델은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로테는 맞은편에 앉아 깃펜 끝을 살피고 있었다.“이걸로 써요?”“응. 처음에는 내가 손을 잡아 줄게. 너무 힘주면 끝이 벌어지거든.”루디가 의자를 당겼다.“분필은요?”“분필은 종이에 쓰고 접으면 다른 쪽에 묻어. 편지 받은 사람이 읽기 어려워져.”“안 접으면 돼요.”“그럼 가져가는 사람이 다 읽을 수도 있지.”루디가 종이를 양손으로 가렸다.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였다.“읽으면 안 돼요.”“그럼 다 쓴 뒤에는 접자.”아델은 작은 종이 두 장을 아이들 앞에 놓았다. 제 앞의 종이는 조금 더 컸다. 남부에 있는 어머니께 쓸 편지였다.로테가 아델의 종이를 보고 물었다.“누구한테요?”“우리 어머니.”“선생님 엄마.”“맞아.”루디가 고개를 기울였다.“선생님도 엄마한테 수업해요?”“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가르쳐 주셨지.”“편지도요?”“응. 글씨를 너무 작게 쓰면 읽기 힘들다고 하셨어.”루디가 제 종이를 당겼다.“나는 크게 써요.”“그러다 한 글자로 종이를 다 쓰면?”루디가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내밀었다.“큰 종이 주세요.”◇◆◇아델은 루
“선생님, 공작님은 왜 우유 안 마셔요?”로테가 쟁반 끝에 놓인 빈 잔을 가리켰다. 부엌 문 옆에 선 아델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잔을 봤다.“왜냐하면—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공작님이 우유 안 드시는 걸 봤니?”“잔은 놓아요.”“마시지는 않고?”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엌 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문닫는달 20일, 해가 진 뒤부터 공부방 돌바닥까지 차가워졌다. 양말을 신은 루디가 발을 번갈아 들기에 아델은 따뜻한 것을 마시고 자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루디가 발뒤꿈치를 들고 쟁반을 들여다봤다.“내 잔이에요?”“아직 아무 잔도 정하지 않았어.”“그럼 큰 거.”“두 손으로 잡기 편한 걸 고르자.”루디는 가장 큰 잔에 손을 뻗었다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잔을 잡았다. 양손으로 감싸니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이건 안 떨어져요.”“뜨거울 때는 잡지 말고. 내가 식힌 다음에 줄게.”아델은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화덕 위에 냄비를 올렸다. 빵집 할머니가 불을 줄여 주고 긴 나무 주걱을 건넸다.“바닥에 붙지 않게 저어요.”“이렇게요?”“그렇지. 아이들 입 데지 않게만 하고.”루디가 냄비 쪽으로 코를 내밀었다.“벌써 먹으면 안 돼요?”아델은 주걱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찬 우유를 따뜻하게 만드는 중이야.”“따뜻하면 바로요?”“너희가 마실 수 있을 만큼 식으면.”루디가 입술을 내밀었다.“따뜻하게 했다가 식혀요?”“펄펄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다르거든.”로테는 냄비 위로 올라오는 김을 보고 있었다. 앞머리 아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공작님도.”아델이 주걱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같이 마시자고 부를까?”“네.”“안 드실 수도 있어.”로테가 아델을 올려다봤다.“왜요?”“왜냐하면—싫어하는 음식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거든. 불러 보고 여쭤보자.”루디가 제 잔을 내려놓았다.“내가 불러요!”“계단에서 뛰지 않기.”“걸어서 빨리!”“그건 뛰는 거랑 어떻게 다를까
“선생님, 왜 묘지는 지도에 안 그려요?”루디가 종이 위 빈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끝에는 아침에 만진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아델은 종이가 밀리지 않게 모서리를 눌렀다.“왜냐하면—아직 거기까지 안 가 봤거든.”“성 안인데요.”“성 안이라고 내가 전부 아는 건 아니야.”“집사님은 알아요.”“그럼 모르는 곳은 집사님께 물어보고 그리자.”루디가 의자에서 몸을 길게 뺐다. 책상 위에는 본성과 부엌, 겨울집이 서툰 네모로 그려져 있었다. 뒤 언덕은 비어 있었다.공부방 창턱에서는 종이새 두 마리가 천천히 돌았다. 작은 날개를 안으로 접은 새가 긴 꼬리의 새와 닿았다가 떨어졌다.로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 끝을 바로잡았다.“여기는 있어요.”로테는 새 아래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이 자리는 아이들이 잘 볼 수 있습니까.」그 밑에는 로테가 며칠 전 꾹꾹 눌러 쓴 대답이 있었다.「네.」루디는 창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지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공부방도 그려요. 내 새 있는 데.”아델은 본성 네모 안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여기가 공부방.”“너무 작아요.”“종이를 실제 방만큼 크게 만들 수는 없잖아.”루디가 팔을 벌려 종이 길이를 쟀다.“방보다 작은 건 맞네.”로테가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아델이 놓아 둔 분필을 들고 작은 칸 안에 짧은 선을 그었다.“창.”“좋아. 창이 어디 있는지 알면 방도 찾기 쉽겠다.”아델은 문닫는달 16일이라고 적은 석판을 옆으로 밀었다. 오늘 걸어 볼 곳을 적으려던 참이었다.루디가 빈 언덕에 다시 손을 댔다.“여기는 걸어서 그려요?”“응. 눈을 치워 둔 길로만.”로테의 분필이 멈췄다.아델은 두 아이를 번갈아 봤다.“가기 싫은 곳이 있으면 말해 줘. 지도에 빈 곳이 있어도 괜찮아.”로테는 분필을 내려놓았다.“길만.”“우선 길만 가 보자.”루디가 곧장 의자에서 내려왔다.“내가 셀래요!”◇◆◇외투를 입히는 동안 루디의 발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하나, 둘, 셋.”아델이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