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선생님, 왜 묘지는 지도에 안 그려요?”
루디가 종이 위 빈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끝에는 아침에 만진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아델은 종이가 밀리지 않게 모서리를 눌렀다.
“왜냐하면—아직 거기까지 안 가 봤거든.”
“성 안인데요.”
“성 안이라고 내가 전부 아는 건 아니야.”
“집사님은 알아요.”
“그럼 모르는 곳은 집사님께 물어보고 그리자.”
루디가 의자에서 몸을 길게 뺐다. 책상 위에는 본성과 부엌, 겨울집이 서툰 네모로 그려져 있었다. 뒤 언덕은 비어 있었다.
공부방 창턱에서는 종이새 두 마리가 천천히 돌았다. 작은 날개를 안으로 접은 새가 긴 꼬리의 새와 닿았다가 떨어졌다.
로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 끝을 바로잡았다.
“여기는 있어요.”
로테는 새 아래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이 자리는 아이들이 잘 볼 수 있습니까.」
그 밑에는 로테가 며칠 전 꾹꾹 눌러 쓴 대답이 있었다.
「네.」
루디는 창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지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부방도 그려요. 내 새 있는 데.”
아델은 본성 네모 안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
“여기가 공부방.”
“너무 작아요.”
“종이를 실제 방만큼 크게 만들 수는 없잖아.”
루디가 팔을 벌려 종이 길이를 쟀다.
“방보다 작은 건 맞네.”
로테가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아델이 놓아 둔 분필을 들고 작은 칸 안에 짧은 선을 그었다.
“창.”
“좋아. 창이 어디 있는지 알면 방도 찾기 쉽겠다.”
아델은 문닫는달 16일이라고 적은 석판을 옆으로 밀었다. 오늘 걸어 볼 곳을 적으려던 참이었다.
루디가 빈 언덕에 다시 손을 댔다.
“여기는 걸어서 그려요?”
“응. 눈을 치워 둔 길로만.”
로테의 분필이 멈췄다.
아델은 두 아이를 번갈아 봤다.
“가기 싫은 곳이 있으면 말해 줘. 지도에 빈 곳이 있어도 괜찮아.”
로테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길만.”
“우선 길만 가 보자.”
루디가 곧장 의자에서 내려왔다.
“내가 셀래요!”
◇◆◇
외투를 입히는 동안 루디의 발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아델이 단추 없는 여밈 끈을 묶어 주다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세는 거야?”
“걸음이요.”
“아직 출발 안 했는데.”
“미리.”
“제자리에서 밟은 건 길을 잰 걸음에 넣지 말자.”
루디는 발을 멈췄다. 이번에는 외투 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로테는 제 소매를 혼자 당겼다. 한쪽 주머니가 불룩했다. 아델이 모자를 씌우려 하자 로테가 주머니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건 그대로 두고 모자만 쓸게.”
로테가 턱을 조금 들었다.
복도로 나서자 알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팔에는 늘 그렇듯 흰 수건이 걸려 있었다.
아델이 접은 종이를 보여 줬다.
“아이들과 성 안 지도를 그리려고 해요. 뒤 언덕까지 가도 될까요?”
“길은 치워 두었습니다. 아그네스가 함께 갈 겁니다.”
알빈은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부엌으로 이어지는 선을 짚었다.
“이쪽은 돌아가는 길입니다.”
루디가 바로 끼어들었다.
“빵 냄새 나는 길인데요.”
“빵을 찾으신다면 맞는 길입니다. 부엌 문을 찾으신다면 이쪽이 더 가깝습니다.”
알빈이 다른 복도를 짚었다.
루디는 두 길을 번갈아 봤다.
“둘 다 그리면 안 돼요?”
“그럼 길을 찾는 사람이 헷갈리지 않게 표시해 둬야지.”
아델이 분필을 내밀었다.
루디는 돌아가는 길 옆에 작은 빵을 그렸다. 길쭉한 모양 끝에 줄을 여러 개 긋다가 종이를 들어 알빈에게 보였다.
“이걸 보면 돼요.”
알빈이 고개를 숙여 살폈다.
“빵을 먹고 싶은 날에는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로테가 빵 그림을 봤다.
“생선 같아.”
루디는 그림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대신 끝에 그은 선 하나를 지웠다.
“이제 빵.”
아델은 웃음을 누르며 지도를 접었다.
◇◆◇
계단 아래에서 세드릭을 만났다.
검은 외투 깃에 수놓인 흰까마귀가 가까이 보였다. 세드릭은 아이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뒤로 뺐다.
“어디 가십니까.”
루디가 아델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리켰다.
“성 그리러요. 길도요. 그런데 부엌 길이 둘이에요.”
세드릭은 종이를 보고 아델을 봤다.
“밖에서 하겠다는 뜻입니까.”
“성벽 안에서요. 걸음으로 거리를 재 보려고 합니다.”
세드릭이 계단 아래 창으로 눈길을 옮겼다.
“돌계단 끝은 얼었습니다.”
아델은 석판을 꺼내 짧게 적었다.
「돌계단 끝. 돌아가기.」
루디가 발끝을 내려다봤다.
“큰 걸음으로 넘으면요?”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공작님도요?”
“나도 미끄러집니다.”
루디가 세드릭의 장화를 한참 봤다. 제 장화보다 훨씬 컸다.
“그럼 돌아가요.”
세드릭은 계단 옆으로 비켜섰다. 아델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자 마지막 낮은 층계에 외투 자락이 걸렸다.
아델이 손을 뻗기 전에 세드릭이 한쪽으로 발을 물렸다. 자락이 바닥에 풀렸다.
“감사합니다.”
“……길을 보십시오.”
아델은 종이와 석판을 한 손으로 모았다.
“돌아오면 지도 보여 드릴게요.”
세드릭이 아델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봤다.
“알았다.”
루디가 벌써 안뜰 문으로 몸을 돌렸다.
“공작님 방도 그릴 거예요. 문이 어디인지 알아요!”
“노크하고 들어오십시오.”
“지도 그릴 때도요?”
세드릭이 잠깐 말을 멈췄다.
아델은 문고리를 잡으며 대신 답했다.
“종이에는 문만 그려도 돼.”
◇◆◇
안뜰의 눈은 길 양옆으로 밀려 있었다. 장화 밑에서 얇게 남은 눈이 눌렸다.
아그네스가 부엌 문에서 나왔다. 앞치마 대신 두꺼운 외투를 입고, 손에는 아이들 장갑을 들고 있었다.
“이걸 두고 가셨더라고요.”
루디가 양손을 뒤로 감췄다.
“안 추운데.”
“걸으면서 손까지 셀 건 아니잖아.”
아델이 손을 내밀었다.
루디는 아델 손등을 만져 보더니 제 손을 앞으로 내놓았다.
“선생님 손도 차가워요.”
“그러니까 나도 낄 거야.”
로테는 말없이 장갑을 받아 꼈다. 오른손을 넣을 때 주머니를 다시 한 번 눌렀다.
아델은 부엌 문 앞 눈 위에 장화로 짧은 선을 그었다.
“여기서 겨울집 문까지 세어 보자. 루디는 왼쪽으로 달리지 않고 내 옆에서.”
“큰 걸음으로요?”
“평소처럼. 걸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 거리를 비교하기 어려워.”
루디는 첫발을 길게 내밀었다가 도로 당겼다.
“이만큼?”
“응. 네가 걷기 편한 만큼.”
루디가 큰 소리로 세기 시작했다.
아델은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걸었다. 로테는 뒤에서 아그네스와 나란히 왔다.
겨울집 문 앞에 도착하자 루디가 두 손을 들었다.
“마흔둘!”
아델은 석판에 적었다.
「부엌에서 겨울집. 루디 42걸음.」
로테가 숫자 앞을 가리켰다.
“루디?”
“사람마다 걸음 크기가 다르니까. 내 걸음으로 재면 다른 수가 나와.”
루디가 아델의 장화를 봤다.
“선생님은 조금만 걷겠네.”
“걸음 수는 적겠지만 같은 곳에 도착하지.”
루디는 제 장화 두 개를 아델 장화 옆에 모았다.
“그럼 나는 많이 걸어도 느린 거 아니죠?”
“응. 네 걸음으로 잘 온 거야.”
겨울집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노인이 지도를 보고 발을 멈췄다.
“뭘 그리시나?”
루디가 대답하려고 종이를 찾았다. 아델은 접은 종이를 펴서 두 아이 앞에 들었다.
“아이들과 성 안 길을 그리고 있어요.”
노인은 장갑 낀 손으로 뒤 언덕을 가리켰다.
“저 돌 있는 데도?”
“길이 이어지면 가 보려고요.”
노인은 아이들을 한 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밖에선 저기 흰 돌이 해마다 는다고들 하지. 성문은 닫혀 있고 새 돌이 선다니, 듣기만 하는 사람은 별말을 다 해.”
아델은 지도를 내렸다.
“해마다요?”
“멀리서 전해 듣는 말이 그렇다는 거요. 나도 하나하나 센 적은 없고.”
아그네스가 겨울집 문을 닫아 찬바람을 막았다.
“안에서 말씀하세요. 손이 빨개지셨어요.”
노인은 손을 외투 안에 넣고 들어갔다.
루디가 뒤 언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많은데요?”
아델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로테는 아그네스의 손을 잡지 않은 채 주머니를 만지고 있었다.
“가서 볼까? 로테는 길에서 기다려도 돼.”
로테가 잠깐 뒤 언덕을 봤다.
“같이.”
◇◆◇
뒤 언덕으로 가는 길은 겨울집 옆에서 갈라졌다.
루디는 갈림길을 지도에 넣어야 한다며 멈췄다. 아델이 석판을 받쳐 주자 분필로 선을 길게 그었다.
“이쪽은 뒤로.”
“무엇의 뒤인지도 표시해 줘야지.”
루디가 겨울집 네모에 작은 문을 그렸다. 이번에는 아델에게 맞는지 묻지 않고 실제 문과 종이를 번갈아 봤다.
로테가 선 끝을 짚었다.
“아직 안 왔어요.”
“그럼 여기까지만.”
루디는 길 끝을 지웠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는 쉰까지 거침없이 셌다. 예순을 넘자 숨이 조금 빨라졌다. 아델은 아이 보폭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일흔여덟, 일흔아홉, 여든.”
루디가 돌담 위 쌓인 눈을 올려다봤다.
“저기 새 발자국 있어요!”
고개를 들고 걷던 발이 멈췄다.
아델도 함께 멈췄다.
“발자국 보고 갈까?”
루디는 눈에 찍힌 작은 자국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발자국은 돌담 끝에서 끊겨 있었다.
“이 다음은 날았나 봐요.”
“그럴 수도 있겠다.”
루디가 다시 발을 들려다가 아델을 봤다.
“나 몇이었죠?”
“여든까지 셌어.”
“여든 하나!”
루디는 한 걸음씩 다시 세었다. 아델은 돌담과 길이 만나는 곳에 석판으로 짧은 표시를 남겼다. 아그네스가 그 자리를 봐 주었다.
백을 세고 나자 루디가 뒤를 돌아봤다.
겨울집 문이 멀어져 있었다.
“선생님, 백 다음은요?”
아델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왜냐하면—백까지 셌어도 길은 더 남았으니까. 다음은 백 하나.”
“백 하나?”
“응. 백에 하나를 더한 거야.”
루디가 아델 손을 잡고 한 발을 내디뎠다.
“백 하나!”
다음 발도 곧바로 나갔다.
“백 둘!”
아그네스가 옆에서 웃자 루디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많아도 안 끝나요!”
로테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길은 끝나요.”
앞에는 낮은 언덕과 흰 돌들이 보였다.
◇◆◇
로테는 묘지 앞에서 멈췄다.
아델도 손을 놓아 둔 채 기다렸다. 로테의 오른손이 외투 주머니 위를 느리게 문질렀다. 안에서 깃털 끝 하나가 올라왔다.
루디는 두 걸음 먼저 갔다가 돌아왔다.
“여기까지 몇 걸음이에요?”
“네가 센 수를 말해 줘.”
루디가 입술을 움직였다. 마지막 수를 찾는 동안 손가락도 조금씩 접혔다.
“백 열일곱.”
아델은 석판에 적었다. 로테는 적힌 숫자보다 묘지 안쪽을 보고 있었다.
길 가장자리에는 눈이 낮게 쌓여 있었다. 흰 돌 앞만 둥글게 눈을 걷어 둔 자리들이 보였다.
아델이 무릎을 굽혀 로테와 눈높이를 맞췄다.
“여기서 기다릴까?”
로테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요.”
“내 손 잡을래?”
로테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장갑 끝에 걸린 흰 깃털을 안으로 밀어 넣고 아델의 손가락을 잡았다.
루디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채 묻다가 아그네스가 가까이 서자 입을 다물었다.
아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는 천천히 말하자. 다른 사람도 조용히 다녀가는 곳이니까.”
루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도 셀 수 있어요?”
“손대지 않고 눈으로 세어 보자. 줄마다 나누면 놓치지 않아.”
아델은 길 왼쪽부터 짚었다.
루디는 돌 사이를 뛰어다니지 않고 길 위에 서서 셌다. 한 줄을 마칠 때마다 아델이 석판에 짧은 선을 그었다.
로테는 숫자를 따라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델이 다음 줄을 짚기 전에 앞줄 끝을 가리켰다.
“저기 하나.”
낮은 돌 하나가 높은 돌 뒤에 가려져 있었다.
아델은 놓친 돌을 더 적었다.
“잘 봤네. 그것까지 세자.”
마지막 줄을 센 뒤 루디가 석판을 들여다봤다.
“전부 몇이에요?”
“32개.”
“백 하나보다 적네.”
“걸음과 돌은 다른 걸 센 거야. 돌 하나까지 가는 데 여러 걸음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루디는 가장 가까운 돌을 보고 제 발을 봤다.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아델은 석판을 낮췄다. 오래된 돌에는 모서리가 닳고 글씨 사이에 눈이 남아 있었다. 뒤쪽 돌 둘은 모서리가 반듯했다.
“아그네스, 저 두 개는 다른 돌보다 나중에 놓였나요?”
아그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장 나중에 세운 거예요.”
“올겨울에요?”
“아니요. 3년 전에요.”
아델은 흰 돌들을 다시 봤다.
“그 뒤로는 새 돌이 없고요?”
“없어요.”
루디가 아델 손에 들린 석판을 잡아당기지 않고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해마다 늘어난다면서요.”
“그 말과 여기 있는 돌은 다르네.”
아델은 지도 뒷면에 짧게 적었다.
「흰 돌 32개. 가장 새 돌 둘은 3년 전. 그 뒤에는 없음.」
루디가 입을 열었다가 로테를 봤다.
로테는 아델의 손을 놓고 있었다.
◇◆◇
로테가 두 돌 쪽으로 걸어갔다.
서두르지 않았다. 눈이 남은 곳에서는 발을 골라 디뎠다. 아델은 바로 뒤에서 따라갔다.
루디도 석판을 아그네스에게 맡기고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숫자를 세던 입이 닫혔다.
아델은 지도를 접으려다 멈췄다. 아이들이 선 앞에서 종이가 작게 바스락거렸다.
로테의 장갑 낀 손이 다시 주머니에 들어갔다.
흰 깃털 하나를 꺼냈다가 손바닥 안에 감췄다. 돌 위에 놓지는 않았다.
루디는 로테 옆에 섰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델은 아이들 뒤에 멈춰 섰다.
두 돌 앞의 눈은 다른 곳보다 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한쪽에는 작은 장화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델이 고개를 숙여 글씨를 읽었다.
「리디아 아른바흐」
그 옆 돌에도 이름이 있었다.
「에밀 헬드」
아델은 접다 만 지도를 두 손으로 눌렀다.
아그네스가 곁으로 와 섰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 어머니하고 아버지예요.”
(7화 끝)
“선생님, 공작님은 왜 전쟁 책만 읽어요?”로테가 서재 문 옆에 서서 물었다. 아델은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문틈으로 세드릭의 검은 외투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책이 보였다.며칠 전 그 창 앞에서 봤던 공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델은 문 안쪽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로테에게 몸을 낮췄다.“왜냐하면—공작님께 필요한 책인가 봐. 다른 책도 읽으시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여쭤볼까?”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책은 안 읽어요.”“읽어 달라고 해 봤어?”“전에.”로테가 양손을 벌렸다. 꽤 두꺼운 책을 나타내는 듯했다.“큰 거 가져왔어요.”안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들어오십시오.”아델이 문을 열자 루디도 뒤에서 뛰어왔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볼이 빨갰다. 손에는 양철 나팔 대신 작은 석판이 들려 있었다.“나도 숙제 다 했어요!”“뛰지 않기로 했지.”루디가 문턱에서 걸음을 줄였다. 남은 두 걸음은 발뒤꿈치부터 천천히 내려놓았다.“이제 안 뛰어요.”“돌아갈 때도 그렇게 하자.”세드릭은 책을 덮고 아이들을 봤다. 로테가 곧장 책상 가까이 갔다. 책등의 글자를 짚던 손가락이 중간에서 멈췄다.“전투.”“그렇다.”“또요.”세드릭이 책을 내려다봤다. 루디는 옆에서 까치발을 들었다.“싸우는 거예요? 몇 명이요?”
“선생님, 왜 책장 뒤에 책이 있어요?”루디가 책장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닥에 댄 볼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을 틈으로 밀어 넣었다.아델은 젖은 천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왜냐하면—떨어졌을 수도 있고, 누가 넣어 두었을 수도 있어. 꺼내 봐야 알겠네. 먼저 손은 빼자.”“거의 닿아요.”“손이 들어간다고 팔도 들어가는 건 아니야.”루디가 팔꿈치를 한 번 더 밀었다. 책장 모서리에 소매가 걸렸다.“팔은 안 들어가요.”“직접 확인했구나. 이제 나와.”아델이 소매를 빼 주자 루디는 바닥에 앉은 채 손을 폈다. 손끝에 회색 먼지가 붙어 있었다.“책도 잡았어요. 조금.”“어디 다친 데는 없어?”루디가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였다. 아델은 손바닥까지 살핀 뒤 천으로 닦아 줬다.깊은눈달 3일의 공부방에는 의자가 모두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짧은 분필과 종이, 천 조각이 따로 놓였다. 겨울 동안 수업할 방을 정리하자고 했더니 루디가 의자 밑에 먼저 들어갔다.로테는 그 옆에서 종이 모서리를 맞추고 있었다. 아델이 준 작은 수건도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로테, 그 천은 닦으라고 준 건데.”로테가 접힌 천을 내려다봤다.“깨끗해요.”“맞아. 그런데 먼지를 닦으면 더러워질 거야.”“다시 빨아요?”“응. 빨아서 말리면 또 쓸 수 있어.”로테는 잠깐 생각하더니 가장 가까운 의자 다리를 닦았
“선생님, 왜 공작님이 선생님을 불러요?”로테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세수하고 온 아이의 옷깃을 바로 펴 주다가 손을 멈췄다.「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밤에 문 밑으로 들어왔던 종이는 어머니께 쓴 편지 옆에 놓여 있었다.“왜냐하면—내가 물어본 것에 답해 주시려는 것 같아.”“편지요?”“응.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로테가 종이 끝을 눌렀다.“안 된다고 또 하면요?”“왜 안 되는지 다시 물을 거야.”루디는 의자를 당겨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종이를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고개도 함께 기울였다.“성벽에서요?”“그렇게 적혀 있네.”“높은 데서 말하면 더 잘 들려요?”“왜냐하면—높아서 잘 들리는 건 아니야. 가까이 서서 말해야 잘 들리지.”루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델 바로 앞에 섰다.“편지 보내 주세요.”“나는 아주 잘 들었어.”“공작님한테도 이렇게 해요.”로테가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선생님은 커.”루디는 아델의 머리까지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안 올라가도 되잖아요.”아델은 웃음을 삼키며 종이를 접었다.“성벽에서 보여 주실 게 있는 모양이야. 너희도 아래까지 같이 가자. 나는 올라가고, 너희는 아그네스와 기다리는 거야.”로테가 곧장 물었다.“다녀와요?”“응. 아래로 돌아올게.”“해 지면.”“해가 진 뒤에도 돌아와.”로테는 그제야 소매를 놓았다.아델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였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 옆에 답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문닫는달 26일의 해는 안뜰 돌바닥을 길게 비췄다.아델은 아이들과 성벽 아래까지 걸었다. 루디는 눈을 치운 길 가장자리만 골라 밟았다. 발자국 하나가 어긋나자 뒤로 돌아가 다시 디뎠다.“이건 안 센 거예요.”“걸은 건 걸은 거지.”“그럼 두 번이에요?”“뒤로 갔다가 앞으로 왔으니 두 걸음 더 걸었네.”루디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돌아가면 많아져요.”“그
“선생님, 편지는 겨울에 못 가요?”루디가 아델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아델은 잉크병을 안쪽으로 옮긴 뒤 종이를 바로 놓았다.“왜냐하면—사람이 가져가야 하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보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어.”“종이는 작잖아요.”루디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이만큼 접으면 문 밑으로 가요.”“문 밑으로 나가도 우리 어머니 집까지 혼자 걸어가지는 못하지.”“내가 던지면요?”“네가 던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어.”루디는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눈이 치워진 안뜰 너머로 흰까마귀 문이 보였다.“아주 세게.”“그럼 편지를 주우러 안뜰에 내려가야 할걸.”루디가 제 팔을 한번 흔들어 보다가 돌아왔다.문닫는달 25일이었다. 창가에 놓아둔 물그릇이 차가워서 아델은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로테는 맞은편에 앉아 깃펜 끝을 살피고 있었다.“이걸로 써요?”“응. 처음에는 내가 손을 잡아 줄게. 너무 힘주면 끝이 벌어지거든.”루디가 의자를 당겼다.“분필은요?”“분필은 종이에 쓰고 접으면 다른 쪽에 묻어. 편지 받은 사람이 읽기 어려워져.”“안 접으면 돼요.”“그럼 가져가는 사람이 다 읽을 수도 있지.”루디가 종이를 양손으로 가렸다.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였다.“읽으면 안 돼요.”“그럼 다 쓴 뒤에는 접자.”아델은 작은 종이 두 장을 아이들 앞에 놓았다. 제 앞의 종이는 조금 더 컸다. 남부에 있는 어머니께 쓸 편지였다.로테가 아델의 종이를 보고 물었다.“누구한테요?”“우리 어머니.”“선생님 엄마.”“맞아.”루디가 고개를 기울였다.“선생님도 엄마한테 수업해요?”“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가르쳐 주셨지.”“편지도요?”“응. 글씨를 너무 작게 쓰면 읽기 힘들다고 하셨어.”루디가 제 종이를 당겼다.“나는 크게 써요.”“그러다 한 글자로 종이를 다 쓰면?”루디가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내밀었다.“큰 종이 주세요.”◇◆◇아델은 루
“선생님, 공작님은 왜 우유 안 마셔요?”로테가 쟁반 끝에 놓인 빈 잔을 가리켰다. 부엌 문 옆에 선 아델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잔을 봤다.“왜냐하면—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공작님이 우유 안 드시는 걸 봤니?”“잔은 놓아요.”“마시지는 않고?”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엌 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문닫는달 20일, 해가 진 뒤부터 공부방 돌바닥까지 차가워졌다. 양말을 신은 루디가 발을 번갈아 들기에 아델은 따뜻한 것을 마시고 자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루디가 발뒤꿈치를 들고 쟁반을 들여다봤다.“내 잔이에요?”“아직 아무 잔도 정하지 않았어.”“그럼 큰 거.”“두 손으로 잡기 편한 걸 고르자.”루디는 가장 큰 잔에 손을 뻗었다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잔을 잡았다. 양손으로 감싸니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이건 안 떨어져요.”“뜨거울 때는 잡지 말고. 내가 식힌 다음에 줄게.”아델은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화덕 위에 냄비를 올렸다. 빵집 할머니가 불을 줄여 주고 긴 나무 주걱을 건넸다.“바닥에 붙지 않게 저어요.”“이렇게요?”“그렇지. 아이들 입 데지 않게만 하고.”루디가 냄비 쪽으로 코를 내밀었다.“벌써 먹으면 안 돼요?”아델은 주걱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찬 우유를 따뜻하게 만드는 중이야.”“따뜻하면 바로요?”“너희가 마실 수 있을 만큼 식으면.”루디가 입술을 내밀었다.“따뜻하게 했다가 식혀요?”“펄펄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다르거든.”로테는 냄비 위로 올라오는 김을 보고 있었다. 앞머리 아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공작님도.”아델이 주걱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같이 마시자고 부를까?”“네.”“안 드실 수도 있어.”로테가 아델을 올려다봤다.“왜요?”“왜냐하면—싫어하는 음식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거든. 불러 보고 여쭤보자.”루디가 제 잔을 내려놓았다.“내가 불러요!”“계단에서 뛰지 않기.”“걸어서 빨리!”“그건 뛰는 거랑 어떻게 다를까
“선생님, 왜 묘지는 지도에 안 그려요?”루디가 종이 위 빈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끝에는 아침에 만진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아델은 종이가 밀리지 않게 모서리를 눌렀다.“왜냐하면—아직 거기까지 안 가 봤거든.”“성 안인데요.”“성 안이라고 내가 전부 아는 건 아니야.”“집사님은 알아요.”“그럼 모르는 곳은 집사님께 물어보고 그리자.”루디가 의자에서 몸을 길게 뺐다. 책상 위에는 본성과 부엌, 겨울집이 서툰 네모로 그려져 있었다. 뒤 언덕은 비어 있었다.공부방 창턱에서는 종이새 두 마리가 천천히 돌았다. 작은 날개를 안으로 접은 새가 긴 꼬리의 새와 닿았다가 떨어졌다.로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 끝을 바로잡았다.“여기는 있어요.”로테는 새 아래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이 자리는 아이들이 잘 볼 수 있습니까.」그 밑에는 로테가 며칠 전 꾹꾹 눌러 쓴 대답이 있었다.「네.」루디는 창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지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공부방도 그려요. 내 새 있는 데.”아델은 본성 네모 안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여기가 공부방.”“너무 작아요.”“종이를 실제 방만큼 크게 만들 수는 없잖아.”루디가 팔을 벌려 종이 길이를 쟀다.“방보다 작은 건 맞네.”로테가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아델이 놓아 둔 분필을 들고 작은 칸 안에 짧은 선을 그었다.“창.”“좋아. 창이 어디 있는지 알면 방도 찾기 쉽겠다.”아델은 문닫는달 16일이라고 적은 석판을 옆으로 밀었다. 오늘 걸어 볼 곳을 적으려던 참이었다.루디가 빈 언덕에 다시 손을 댔다.“여기는 걸어서 그려요?”“응. 눈을 치워 둔 길로만.”로테의 분필이 멈췄다.아델은 두 아이를 번갈아 봤다.“가기 싫은 곳이 있으면 말해 줘. 지도에 빈 곳이 있어도 괜찮아.”로테는 분필을 내려놓았다.“길만.”“우선 길만 가 보자.”루디가 곧장 의자에서 내려왔다.“내가 셀래요!”◇◆◇외투를 입히는 동안 루디의 발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하나, 둘, 셋.”아델이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