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선생님, 공작님은 왜 우유 안 마셔요?”
로테가 쟁반 끝에 놓인 빈 잔을 가리켰다. 부엌 문 옆에 선 아델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잔을 봤다.
“왜냐하면—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공작님이 우유 안 드시는 걸 봤니?”
“잔은 놓아요.”
“마시지는 않고?”
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 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문닫는달 20일, 해가 진 뒤부터 공부방 돌바닥까지 차가워졌다. 양말을 신은 루디가 발을 번갈아 들기에 아델은 따뜻한 것을 마시고 자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루디가 발뒤꿈치를 들고 쟁반을 들여다봤다.
“내 잔이에요?”
“아직 아무 잔도 정하지 않았어.”
“그럼 큰 거.”
“두 손으로 잡기 편한 걸 고르자.”
루디는 가장 큰 잔에 손을 뻗었다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잔을 잡았다. 양손으로 감싸니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
“이건 안 떨어져요.”
“뜨거울 때는 잡지 말고. 내가 식힌 다음에 줄게.”
아델은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화덕 위에 냄비를 올렸다. 빵집 할머니가 불을 줄여 주고 긴 나무 주걱을 건넸다.
“바닥에 붙지 않게 저어요.”
“이렇게요?”
“그렇지. 아이들 입 데지 않게만 하고.”
루디가 냄비 쪽으로 코를 내밀었다.
“벌써 먹으면 안 돼요?”
아델은 주걱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찬 우유를 따뜻하게 만드는 중이야.”
“따뜻하면 바로요?”
“너희가 마실 수 있을 만큼 식으면.”
루디가 입술을 내밀었다.
“따뜻하게 했다가 식혀요?”
“펄펄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다르거든.”
로테는 냄비 위로 올라오는 김을 보고 있었다. 앞머리 아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공작님도.”
아델이 주걱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같이 마시자고 부를까?”
“네.”
“안 드실 수도 있어.”
로테가 아델을 올려다봤다.
“왜요?”
“왜냐하면—싫어하는 음식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거든. 불러 보고 여쭤보자.”
루디가 제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불러요!”
“계단에서 뛰지 않기.”
“걸어서 빨리!”
“그건 뛰는 거랑 어떻게 다를까?”
루디가 문까지 빠른 걸음으로 갔다. 문턱 앞에서는 발을 멈추고 아델에게 보여 줬다.
“한 발씩.”
“좋아. 아그네스랑 같이 가.”
아그네스가 행주를 내려놓으며 문으로 다가왔다.
“공작님이 서재에 계시면 조용히 말씀드리는 거예요.”
루디는 벌써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유 식어요, 빨리 오세요.”
“아직은 뜨거워.”
아델이 바로잡자 루디가 말을 바꿨다.
“우유 뜨거워요, 천천히 오세요!”
◇◆◇
식당 한쪽 작은 탁자에 잔을 놓자 로테가 의자를 당겼다. 아델은 로테가 앉은 뒤 잔을 조금 멀리 밀어 뒀다.
“손을 대기 전에 김부터 보자.”
로테가 두 손을 무릎에 올렸다.
“보여요.”
“응. 지금은 입을 대면 안 돼.”
아델은 우유를 조금 덜어 따로 식혔다. 잔 안쪽을 따라 흰 자국이 남았다.
루디가 아그네스보다 먼저 식당 문에 나타났다. 뛰지는 않았지만 말은 숨보다 빨랐다.
“오신대요. 지금 오신대요. 서류 놓고요. 나 빨리 안 하라고 안 했어요.”
“잘 전했네.”
루디는 의자에 올라앉자마자 잔으로 손을 뻗었다.
로테가 한마디 했다.
“김.”
루디의 손이 멈췄다.
“보고 있었어요.”
“손으로?”
아델이 묻자 루디가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아델은 아이들 잔에서 조금씩 덜어 온도를 살폈다. 아직 마시기에는 뜨거웠다. 루디는 의자 다리에 발뒤꿈치를 가볍게 부딪쳤다.
“언제요?”
“기다리는 동안 식히는 노래를 해 볼까?”
루디의 발이 멈췄다.
“노래하면 식어요?”
“왜냐하면—노래만으로 식는 건 아니지만, 부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고 바람도 닿거든. 가까이 대지는 말고.”
아델은 제 잔을 앞에 놓았다. 입을 잔에서 조금 떼고 천천히 숨을 내보냈다.
“후, 하나. 후, 둘.”
루디가 곧장 입을 크게 벌렸다.
“후우!”
우유 표면이 흔들렸다. 아델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촛불 끄듯 세게 말고. 살짝.”
루디가 이번에는 입술을 작게 모았다.
“후. 셋.”
“나는 아직 둘이야.”
“내가 하나 먼저 했어요.”
로테가 제 잔을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후. 하나.”
세드릭이 들어온 것은 로테가 셋까지 셌을 때였다.
검은 외투 깃의 흰까마귀가 등불 아래에서 보였다. 세드릭은 탁자 옆에 멈춰 아이들 앞의 잔을 봤다. 두 손은 등 뒤에 있었다.
“무엇을 하십니까.”
루디가 입을 떼자마자 답했다.
“우유를 불어요. 노래로요. 공작님도 하세요.”
아델이 빈 의자를 조금 빼 줬다.
“뜨거워서 식히는 중입니다. 잠깐 앉으실래요?”
세드릭이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로테가 맞은편 빈자리를 짚었다.
“여기.”
“……알겠습니다.”
세드릭은 로테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아델이 잔을 건네자 오른손으로 받았다. 손등의 흰 흉이 잔 아래로 잠깐 드러났다.
루디가 세드릭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공작님은 하나부터예요.”
“하나부터.”
“후 해야 돼요.”
세드릭이 잔을 내려다봤다.
아델은 루디의 의자를 바로잡아 줬다.
“각자 속도가 달라도 괜찮아. 대신 숫자를 빼먹지 않기.”
루디가 다시 제 잔으로 돌아왔다.
“후, 넷. 후, 다섯.”
로테는 말 사이에 숨을 조금씩 쉬었다. 느린 소리가 아델의 노래와 나란히 이어졌다.
세드릭은 잔을 두 손 사이에 뒀다. 김이 손가락 가까이 올라왔지만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
루디가 열을 세자마자 잔을 들려 했다.
아델은 손을 잔 위에 얹지 않고 옆에서 멈춰 세웠다.
“아직 확인해야 해.”
“열 했는데요.”
“열 번 불었다고 늘 똑같이 식지는 않아. 우유가 많으면 더 오래 걸리기도 하거든.”
루디가 제 잔과 로테의 잔을 번갈아 봤다.
“내가 더 많아요?”
“비슷해. 그래도 먼저 살펴보자.”
아델은 따로 덜어 둔 우유를 확인한 뒤 아이들 잔을 조금 더 식혔다. 뜨거운 김이 옅어지고 나서야 가까이 놓아 줬다.
“이제 아주 조금씩.”
루디가 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첫 모금은 조심스러웠다. 그다음에는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잔을 내려놓았을 때 윗입술에 하얀 자국이 붙어 있었다.
아델이 냅킨을 집어 들었다.
“잠깐, 입에—”
루디가 손을 들었다.
“안 닦아요.”
“붙은 채로 둘 거야?”
루디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턱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세드릭을 향해 등을 꼿꼿하게 폈다.
“노래 당번 들어갑니다.”
우유 수염이 달린 입에서 요른의 말투가 나왔다.
로테가 잔을 든 채 멈췄다.
“루디.”
“왜.”
루디가 대답하자 수염이 조금 갈라졌다.
로테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입술을 다물었는데도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염.”
루디가 코밑을 더 내밀었다.
“단장님이요.”
이번에는 로테가 소리를 내 웃었다.
아델의 손에 들린 냅킨이 그대로 멈췄다. 로테가 웃을 때 앞니 사이가 조금 벌어지는 것도, 웃음을 참으려 하면 코끝이 찡그려지는 것도 처음 봤다.
루디는 그 소리를 듣고 곧장 잔을 다시 들었다.
“더 길게 만들 거예요.”
“우유는 마시는 거지 수염 재료가 아니야.”
“마셨어요. 수염도 생겼어요.”
“그건 맞네.”
아델도 웃으며 냅킨을 내려놓았다.
로테는 루디를 보다가 자기 입술을 손등으로 만졌다. 아델이 깨끗한 냅킨을 건네자 손등 대신 그것으로 닦았다.
세드릭은 잔 옆에 손을 놓고 있었다.
루디가 세드릭에게 몸을 돌렸다.
“공작님도 수염 만들어요.”
세드릭의 손가락이 잔 손잡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
“수염이 싫어요?”
“우유를 마시지 않습니다.”
루디는 제 잔을 내려다봤다.
“그럼 남아요.”
“네가 더 마시고 싶으면 식힌 뒤에 주겠다.”
아델이 끼어들었다.
“공작님 잔은 아직 많이 뜨거워. 지금은 네 것부터 마시자.”
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테는 세드릭 앞의 잔을 한 번 보고 자기 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아델은 세드릭의 잔을 빼앗듯 치우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팔을 뻗어 건드리지 않도록 탁자 안쪽으로 옮겼다.
“다른 따뜻한 걸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세드릭은 앉아 있었다. 루디가 우유 수염을 끝내 닦고, 로테가 마지막 모금을 마실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
아이들을 방으로 데려가는 계단에서 루디는 자꾸 윗입술을 만졌다.
“내일도 생겨요?”
“왜냐하면—같은 식으로 마시면 생길 수는 있지. 하지만 일부러 얼굴에 묻히지는 말자.”
“오늘은 일부러 아닌데요.”
“처음에는 아니었어.”
루디가 웃으며 계단 하나를 올랐다.
로테는 난간을 잡고 그 뒤를 따라왔다. 세드릭이 몇 계단 아래에서 걸음을 맞췄다. 아이들이 멈추면 세드릭도 멈췄다.
방에 들어와 아델이 이불을 펴자 루디는 침대 위에서 턱을 내밀었다.
“노래 당번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수염이 없었다.
로테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지워졌어.”
루디는 아쉬운 듯 입술을 만졌다가 베개에 머리를 댔다.
아델이 아이들 양말을 벗겨 가지런히 놓았다. 로테는 이불 끝을 손가락으로 접었다 폈다.
“우유 노래.”
“한 번 더 불러 줄까?”
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은 침대 사이에 앉아 목소리를 낮췄다.
“후, 하나. 후, 둘.”
루디가 눈을 감고 셋을 보탰다. 로테는 넷을 말하다가 작은 하품을 했다.
열에 닿기도 전에 루디의 대답이 끊겼다.
세드릭은 문 가까이 서 있었다. 아델이 일어나자 몸을 옆으로 비켜 줬다.
로테가 반쯤 감긴 눈으로 문을 봤다.
“공작님.”
세드릭이 고개를 숙였다.
“네, 로테 양.”
“오늘 수업.”
아델이 다시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엇으로 할까?”
로테가 이불 위에 손을 올렸다.
“뜨거운 우유 식히는 법.”
“좋아. 내일 적어 두자.”
로테의 눈이 감겼다.
아델은 등불을 낮추고 문을 조금 열어 뒀다. 복도로 나오니 세드릭이 안쪽을 한 번 더 살핀 뒤 천천히 문에서 떨어졌다.
“수염은 내일 아침이면 잊을까요.”
아델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드릭이 닫히지 않은 문을 봤다.
“요른에게 해 달라고 할 겁니다.”
아델은 웃음이 날 것 같아 입술을 눌렀다.
“그건 단장님께 맡겨야겠네요.”
“미리 말해 두겠다.”
◇◆◇
아델은 방에서 숄을 가져와 어깨에 둘렀다. 아이들 잔을 부엌에 돌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안뜰 문 앞에서 멈췄다.
식당에서는 눈을 뜨기 힘들 만큼 따뜻했는데,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코끝부터 식혔다. 잠깐 찬 공기를 쐬면 졸음이 가실 듯했다.
아델은 장화를 단단히 신고 문을 열었다.
눈이 치워진 길로 몇 걸음 나가자 바로 생각이 달라졌다.
숄을 여민 손가락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시니 코 안이 시렸다. 아델은 어깨를 움츠리고 손을 바꿔 숄 끝을 잡았다.
‘잠깐은 안 추울 줄 알았지.’
돌아가려고 발을 돌렸을 때 등 뒤에서 옷감이 닿았다.
검은 외투가 어깨 위에 놓였다.
아델이 고개를 들자 세드릭이 한 걸음 옆에 서 있었다. 외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깃을 바로잡은 손은 곧 떨어졌다.
“공작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지금 들어가려던 참이에요.”
아델은 외투 안에서 숄을 여몄다. 어깨를 덮은 옷감이 두꺼웠다. 깃 가까이에서 아직 남아 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세드릭은 아델의 얼굴을 봤다가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북쪽 성 겨울은 남부 사람 겁니다.”
아델이 외투를 붙잡은 채 눈을 깜빡였다.
“……남부 사람 몸이라고요?”
“몸에는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겨울이요?”
“추위가.”
세드릭의 말이 짧아졌다. 아델은 빨개진 코끝을 숄에 잠깐 묻었다.
“남부 사람 몸도 따뜻하게 입으면 버텨요.”
“지금은 따뜻하게 입지 않았습니다.”
“그건 맞는 말씀이네요.”
세드릭이 아델의 숄을 봤다.
“그 옷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 알아요.”
아델은 외투 자락을 내려다봤다. 제 것보다 훨씬 길어 장화 위까지 닿았다. 걸을 때 밟지 않도록 한쪽을 조금 들어 올렸다.
세드릭이 문 쪽으로 먼저 반걸음 움직였다가 멈췄다. 아델이 따라오자 다시 걸었다.
안뜰의 등불은 모두 한 높이에서 밝았다. 돌벽 아래 눈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짧게 이어졌다.
아델은 문 앞에 닿아 외투를 벗으려 했다.
세드릭이 문을 열며 말했다.
“방까지 입고 가십시오.”
“공작님은요?”
“나는 곧 서재로 갑니다.”
“서재로 가셔도 복도는 차가운데요.”
세드릭이 잠깐 아델을 봤다.
“내 방에 다른 외투가 있습니다.”
아델은 깃을 놓았다.
“그럼 내일 돌려드릴게요.”
“알았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어깨가 조금 펴졌다. 아델은 외투에 묻은 눈이 없는지 소매를 살폈다. 검은 옷감 끝에 분필 가루가 아주 조금 묻어 있었다.
손으로 털려다가 더 번질까 봐 그만뒀다.
“아이들이 오늘은 금방 잠들었어요.”
세드릭이 열린 문을 닫았다.
“많이 웃었습니다.”
“로테가 소리 내 웃는 건 처음 들었어요.”
세드릭은 계단 쪽을 봤다. 아델도 같은 쪽을 바라봤다. 위층은 조용했다.
“다음에는 공작님도 같이 드실 수 있는 걸 준비할게요.”
세드릭이 몸을 돌리다 멈췄다.
아델은 외투를 여민 손에 힘을 조금 뺐다.
“우유가 싫으시면 다른 걸로요. 아이들도 같이 드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세드릭의 시선이 아델의 손에서 얼굴로 올라왔다.
잠깐 말을 기다렸지만 잔에 손만 대고 내려놓았을 때처럼 대답이 늦었다.
이윽고 세드릭이 계단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우유는… 마시지 않습니다. 이유는 묻지 마십시오.”
아델의 손이 외투 깃에서 멈췄다.
‘이 집은 묻지 말라는 게 왜 이렇게 많아.’
(8화 끝)
“선생님, 공작님은 왜 전쟁 책만 읽어요?”로테가 서재 문 옆에 서서 물었다. 아델은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문틈으로 세드릭의 검은 외투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책이 보였다.며칠 전 그 창 앞에서 봤던 공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델은 문 안쪽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로테에게 몸을 낮췄다.“왜냐하면—공작님께 필요한 책인가 봐. 다른 책도 읽으시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여쭤볼까?”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책은 안 읽어요.”“읽어 달라고 해 봤어?”“전에.”로테가 양손을 벌렸다. 꽤 두꺼운 책을 나타내는 듯했다.“큰 거 가져왔어요.”안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들어오십시오.”아델이 문을 열자 루디도 뒤에서 뛰어왔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볼이 빨갰다. 손에는 양철 나팔 대신 작은 석판이 들려 있었다.“나도 숙제 다 했어요!”“뛰지 않기로 했지.”루디가 문턱에서 걸음을 줄였다. 남은 두 걸음은 발뒤꿈치부터 천천히 내려놓았다.“이제 안 뛰어요.”“돌아갈 때도 그렇게 하자.”세드릭은 책을 덮고 아이들을 봤다. 로테가 곧장 책상 가까이 갔다. 책등의 글자를 짚던 손가락이 중간에서 멈췄다.“전투.”“그렇다.”“또요.”세드릭이 책을 내려다봤다. 루디는 옆에서 까치발을 들었다.“싸우는 거예요? 몇 명이요?”
“선생님, 왜 책장 뒤에 책이 있어요?”루디가 책장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닥에 댄 볼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을 틈으로 밀어 넣었다.아델은 젖은 천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왜냐하면—떨어졌을 수도 있고, 누가 넣어 두었을 수도 있어. 꺼내 봐야 알겠네. 먼저 손은 빼자.”“거의 닿아요.”“손이 들어간다고 팔도 들어가는 건 아니야.”루디가 팔꿈치를 한 번 더 밀었다. 책장 모서리에 소매가 걸렸다.“팔은 안 들어가요.”“직접 확인했구나. 이제 나와.”아델이 소매를 빼 주자 루디는 바닥에 앉은 채 손을 폈다. 손끝에 회색 먼지가 붙어 있었다.“책도 잡았어요. 조금.”“어디 다친 데는 없어?”루디가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였다. 아델은 손바닥까지 살핀 뒤 천으로 닦아 줬다.깊은눈달 3일의 공부방에는 의자가 모두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짧은 분필과 종이, 천 조각이 따로 놓였다. 겨울 동안 수업할 방을 정리하자고 했더니 루디가 의자 밑에 먼저 들어갔다.로테는 그 옆에서 종이 모서리를 맞추고 있었다. 아델이 준 작은 수건도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로테, 그 천은 닦으라고 준 건데.”로테가 접힌 천을 내려다봤다.“깨끗해요.”“맞아. 그런데 먼지를 닦으면 더러워질 거야.”“다시 빨아요?”“응. 빨아서 말리면 또 쓸 수 있어.”로테는 잠깐 생각하더니 가장 가까운 의자 다리를 닦았
“선생님, 왜 공작님이 선생님을 불러요?”로테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세수하고 온 아이의 옷깃을 바로 펴 주다가 손을 멈췄다.「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밤에 문 밑으로 들어왔던 종이는 어머니께 쓴 편지 옆에 놓여 있었다.“왜냐하면—내가 물어본 것에 답해 주시려는 것 같아.”“편지요?”“응.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로테가 종이 끝을 눌렀다.“안 된다고 또 하면요?”“왜 안 되는지 다시 물을 거야.”루디는 의자를 당겨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종이를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고개도 함께 기울였다.“성벽에서요?”“그렇게 적혀 있네.”“높은 데서 말하면 더 잘 들려요?”“왜냐하면—높아서 잘 들리는 건 아니야. 가까이 서서 말해야 잘 들리지.”루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델 바로 앞에 섰다.“편지 보내 주세요.”“나는 아주 잘 들었어.”“공작님한테도 이렇게 해요.”로테가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선생님은 커.”루디는 아델의 머리까지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안 올라가도 되잖아요.”아델은 웃음을 삼키며 종이를 접었다.“성벽에서 보여 주실 게 있는 모양이야. 너희도 아래까지 같이 가자. 나는 올라가고, 너희는 아그네스와 기다리는 거야.”로테가 곧장 물었다.“다녀와요?”“응. 아래로 돌아올게.”“해 지면.”“해가 진 뒤에도 돌아와.”로테는 그제야 소매를 놓았다.아델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였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 옆에 답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문닫는달 26일의 해는 안뜰 돌바닥을 길게 비췄다.아델은 아이들과 성벽 아래까지 걸었다. 루디는 눈을 치운 길 가장자리만 골라 밟았다. 발자국 하나가 어긋나자 뒤로 돌아가 다시 디뎠다.“이건 안 센 거예요.”“걸은 건 걸은 거지.”“그럼 두 번이에요?”“뒤로 갔다가 앞으로 왔으니 두 걸음 더 걸었네.”루디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돌아가면 많아져요.”“그
“선생님, 편지는 겨울에 못 가요?”루디가 아델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아델은 잉크병을 안쪽으로 옮긴 뒤 종이를 바로 놓았다.“왜냐하면—사람이 가져가야 하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보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어.”“종이는 작잖아요.”루디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이만큼 접으면 문 밑으로 가요.”“문 밑으로 나가도 우리 어머니 집까지 혼자 걸어가지는 못하지.”“내가 던지면요?”“네가 던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어.”루디는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눈이 치워진 안뜰 너머로 흰까마귀 문이 보였다.“아주 세게.”“그럼 편지를 주우러 안뜰에 내려가야 할걸.”루디가 제 팔을 한번 흔들어 보다가 돌아왔다.문닫는달 25일이었다. 창가에 놓아둔 물그릇이 차가워서 아델은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로테는 맞은편에 앉아 깃펜 끝을 살피고 있었다.“이걸로 써요?”“응. 처음에는 내가 손을 잡아 줄게. 너무 힘주면 끝이 벌어지거든.”루디가 의자를 당겼다.“분필은요?”“분필은 종이에 쓰고 접으면 다른 쪽에 묻어. 편지 받은 사람이 읽기 어려워져.”“안 접으면 돼요.”“그럼 가져가는 사람이 다 읽을 수도 있지.”루디가 종이를 양손으로 가렸다.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였다.“읽으면 안 돼요.”“그럼 다 쓴 뒤에는 접자.”아델은 작은 종이 두 장을 아이들 앞에 놓았다. 제 앞의 종이는 조금 더 컸다. 남부에 있는 어머니께 쓸 편지였다.로테가 아델의 종이를 보고 물었다.“누구한테요?”“우리 어머니.”“선생님 엄마.”“맞아.”루디가 고개를 기울였다.“선생님도 엄마한테 수업해요?”“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가르쳐 주셨지.”“편지도요?”“응. 글씨를 너무 작게 쓰면 읽기 힘들다고 하셨어.”루디가 제 종이를 당겼다.“나는 크게 써요.”“그러다 한 글자로 종이를 다 쓰면?”루디가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내밀었다.“큰 종이 주세요.”◇◆◇아델은 루
“선생님, 공작님은 왜 우유 안 마셔요?”로테가 쟁반 끝에 놓인 빈 잔을 가리켰다. 부엌 문 옆에 선 아델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잔을 봤다.“왜냐하면—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공작님이 우유 안 드시는 걸 봤니?”“잔은 놓아요.”“마시지는 않고?”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엌 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문닫는달 20일, 해가 진 뒤부터 공부방 돌바닥까지 차가워졌다. 양말을 신은 루디가 발을 번갈아 들기에 아델은 따뜻한 것을 마시고 자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루디가 발뒤꿈치를 들고 쟁반을 들여다봤다.“내 잔이에요?”“아직 아무 잔도 정하지 않았어.”“그럼 큰 거.”“두 손으로 잡기 편한 걸 고르자.”루디는 가장 큰 잔에 손을 뻗었다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잔을 잡았다. 양손으로 감싸니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이건 안 떨어져요.”“뜨거울 때는 잡지 말고. 내가 식힌 다음에 줄게.”아델은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화덕 위에 냄비를 올렸다. 빵집 할머니가 불을 줄여 주고 긴 나무 주걱을 건넸다.“바닥에 붙지 않게 저어요.”“이렇게요?”“그렇지. 아이들 입 데지 않게만 하고.”루디가 냄비 쪽으로 코를 내밀었다.“벌써 먹으면 안 돼요?”아델은 주걱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찬 우유를 따뜻하게 만드는 중이야.”“따뜻하면 바로요?”“너희가 마실 수 있을 만큼 식으면.”루디가 입술을 내밀었다.“따뜻하게 했다가 식혀요?”“펄펄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다르거든.”로테는 냄비 위로 올라오는 김을 보고 있었다. 앞머리 아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공작님도.”아델이 주걱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같이 마시자고 부를까?”“네.”“안 드실 수도 있어.”로테가 아델을 올려다봤다.“왜요?”“왜냐하면—싫어하는 음식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거든. 불러 보고 여쭤보자.”루디가 제 잔을 내려놓았다.“내가 불러요!”“계단에서 뛰지 않기.”“걸어서 빨리!”“그건 뛰는 거랑 어떻게 다를까
“선생님, 왜 묘지는 지도에 안 그려요?”루디가 종이 위 빈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끝에는 아침에 만진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아델은 종이가 밀리지 않게 모서리를 눌렀다.“왜냐하면—아직 거기까지 안 가 봤거든.”“성 안인데요.”“성 안이라고 내가 전부 아는 건 아니야.”“집사님은 알아요.”“그럼 모르는 곳은 집사님께 물어보고 그리자.”루디가 의자에서 몸을 길게 뺐다. 책상 위에는 본성과 부엌, 겨울집이 서툰 네모로 그려져 있었다. 뒤 언덕은 비어 있었다.공부방 창턱에서는 종이새 두 마리가 천천히 돌았다. 작은 날개를 안으로 접은 새가 긴 꼬리의 새와 닿았다가 떨어졌다.로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 끝을 바로잡았다.“여기는 있어요.”로테는 새 아래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이 자리는 아이들이 잘 볼 수 있습니까.」그 밑에는 로테가 며칠 전 꾹꾹 눌러 쓴 대답이 있었다.「네.」루디는 창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지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공부방도 그려요. 내 새 있는 데.”아델은 본성 네모 안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여기가 공부방.”“너무 작아요.”“종이를 실제 방만큼 크게 만들 수는 없잖아.”루디가 팔을 벌려 종이 길이를 쟀다.“방보다 작은 건 맞네.”로테가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아델이 놓아 둔 분필을 들고 작은 칸 안에 짧은 선을 그었다.“창.”“좋아. 창이 어디 있는지 알면 방도 찾기 쉽겠다.”아델은 문닫는달 16일이라고 적은 석판을 옆으로 밀었다. 오늘 걸어 볼 곳을 적으려던 참이었다.루디가 빈 언덕에 다시 손을 댔다.“여기는 걸어서 그려요?”“응. 눈을 치워 둔 길로만.”로테의 분필이 멈췄다.아델은 두 아이를 번갈아 봤다.“가기 싫은 곳이 있으면 말해 줘. 지도에 빈 곳이 있어도 괜찮아.”로테는 분필을 내려놓았다.“길만.”“우선 길만 가 보자.”루디가 곧장 의자에서 내려왔다.“내가 셀래요!”◇◆◇외투를 입히는 동안 루디의 발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하나, 둘, 셋.”아델이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