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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오늘의 수업: 편지 쓰는 법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21:15:06

“선생님, 편지는 겨울에 못 가요?”

루디가 아델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

아델은 잉크병을 안쪽으로 옮긴 뒤 종이를 바로 놓았다.

“왜냐하면—사람이 가져가야 하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보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어.”

“종이는 작잖아요.”

루디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

“이만큼 접으면 문 밑으로 가요.”

“문 밑으로 나가도 우리 어머니 집까지 혼자 걸어가지는 못하지.”

“내가 던지면요?”

“네가 던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어.”

루디는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눈이 치워진 안뜰 너머로 흰까마귀 문이 보였다.

“아주 세게.”

“그럼 편지를 주우러 안뜰에 내려가야 할걸.”

루디가 제 팔을 한번 흔들어 보다가 돌아왔다.

문닫는달 25일이었다. 창가에 놓아둔 물그릇이 차가워서 아델은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로테는 맞은편에 앉아 깃펜 끝을 살피고 있었다.

“이걸로 써요?”

“응. 처음에는 내가 손을 잡아 줄게. 너무 힘주면 끝이 벌어지거든.”

루디가 의자를 당겼다.

“분필은요?”

“분필은 종이에 쓰고 접으면 다른 쪽에 묻어. 편지 받은 사람이 읽기 어려워져.”

“안 접으면 돼요.”

“그럼 가져가는 사람이 다 읽을 수도 있지.”

루디가 종이를 양손으로 가렸다.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였다.

“읽으면 안 돼요.”

“그럼 다 쓴 뒤에는 접자.”

아델은 작은 종이 두 장을 아이들 앞에 놓았다. 제 앞의 종이는 조금 더 컸다. 남부에 있는 어머니께 쓸 편지였다.

로테가 아델의 종이를 보고 물었다.

“누구한테요?”

“우리 어머니.”

“선생님 엄마.”

“맞아.”

루디가 고개를 기울였다.

“선생님도 엄마한테 수업해요?”

“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가르쳐 주셨지.”

“편지도요?”

“응. 글씨를 너무 작게 쓰면 읽기 힘들다고 하셨어.”

루디가 제 종이를 당겼다.

“나는 크게 써요.”

“그러다 한 글자로 종이를 다 쓰면?”

루디가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큰 종이 주세요.”

◇◆◇

아델은 루디에게 종이를 더 주는 대신 먼저 무슨 말을 보낼지 물었다.

루디는 책상에 팔꿈치를 올렸다.

“내 나팔 소리요.”

“누가 읽었으면 좋겠니?”

“선생님 엄마.”

“우리 어머니께 나팔 소리를 보내고 싶어?”

“여기는 잘 들려요. 거기는 멀어서 못 듣잖아요.”

루디가 의자 옆에 놓인 양철 나팔을 집었다. 아델이 손바닥을 펴 보이자 입에 대기 직전에 멈췄다.

“안 불었어요.”

“알아. 종이에 어떻게 쓸지 생각해 보자.”

루디가 입으로 짧게 소리를 냈다.

“빵.”

“좋아. 그 소리를 글자로 적으면 되겠네.”

아델은 남는 종이에 글자를 크게 써 줬다. 루디는 그 아래에서 깃펜을 쥔 손을 움직였다.

처음 획을 긋자 잉크가 둥글게 번졌다.

루디가 눈을 크게 떴다.

“구멍 났어요?”

“아니. 잉크가 많이 묻었어. 여기서 조금 덜고 쓰자.”

아델은 잉크병 가장자리에서 펜 끝을 가볍게 털어 보였다. 루디가 따라 하다가 병을 기울일 뻔해 다른 손으로 잡아 줬다.

“병은 두고. 펜만 움직이기.”

“얘도 같이 왔어요.”

“네가 끌고 온 거야.”

루디는 이번에는 잉크병을 쳐다보며 펜만 움직였다.

글자가 다 써졌을 때 아래쪽에 검은 얼룩이 하나 남았다. 루디가 입술을 내밀었다.

“나팔보다 작아요.”

“소리는 큰데 글자는 작을 수 있어.”

아델은 종이를 들어 아이에게 보여 줬다.

「빵」

루디가 곧장 나팔을 무릎 위로 올렸다.

“똑같아요.”

“그럼 그 밑에 누가 보냈는지도 적자.”

루디는 아델이 써 준 이름을 보며 천천히 옮겼다. 자기 이름을 다 쓰고는 펜을 높이 들었다.

로테가 몸을 뒤로 뺐다.

“떨어져.”

펜 끝에서 잉크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델이 미리 받쳐 둔 천 위에 검은 점이 생겼다.

“다 쓴 펜은 여기 내려놓기.”

루디는 천을 들여다봤다.

“내 이름에도 점 있어요.”

“이 점까지 편지에 넣지는 말자.”

맞은편 로테의 종이에는 짧은 글씨가 놓여 있었다.

「약속」

아델은 종이를 가까이 끌어당기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누구에게 보내는 약속이야?”

로테가 펜을 내려놓았다.

“아직.”

“아직 안 정했어?”

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이 종이 위쪽을 가리켰다.

“그럼 받는 사람을 적을 자리는 남겨 두자. 정하면 여기에 쓰면 돼.”

루디가 로테의 종이를 넘겨다봤다.

“아무한테도 안 보내?”

로테는 종이 위 빈 곳을 손으로 덮었다.

“내 거야.”

“내 것도 내 거예요.”

루디가 자기 종이를 얼른 당겼다.

아델은 두 종이 사이에 잉크병을 놓지 않았다. 병은 여전히 제 손 가까이에 뒀다.

“편지는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돼. 지금 당장 정할 필요는 없어.”

로테는 아델의 얼굴을 살핀 뒤 손을 뗐다.

◇◆◇

글씨가 마르는 동안 루디는 펜을 닦았고, 로테는 벽에 붙은 약속판 앞에 섰다.

아델은 어머니께 쓸 첫 문장을 적었다.

「어머니,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다음 말을 고르는 사이 로테가 돌아왔다.

“선생님.”

“응.”

“밑에.”

로테가 약속판 아래를 가리켰다. 세 가지 약속과 이름들 밑에 종이가 조금 남아 있었다.

“오늘 수업을 거기에 쓰고 싶어?”

로테가 고개를 저었다.

“비워요.”

아델은 펜을 내려놓고 아이 옆으로 갔다.

“이 자리를?”

“한 줄.”

로테는 손가락으로 종이 맨 아래를 천천히 그었다. 글씨를 쓸 만큼의 높이였다.

루디가 닦던 펜을 천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또 이름 쓰면 안 돼?”

“루디 이름은 여기 있잖아.”

아델이 이미 적힌 이름을 가리켰다.

루디는 제 이름 아래의 세드릭 아른바흐를 봤다.

“공작님은 길어서 더 내려왔어요.”

“이름이 길면 그럴 수도 있지.”

로테가 다시 말했다.

“밑에는 안 돼요.”

아델은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왜 비워 두고 싶어?”

로테가 제 주머니 입구를 눌렀다. 시선은 빈 곳에 그대로 있었다.

“그냥.”

“나중에 적을 게 있어?”

대답이 없었다.

아델은 더 묻지 않고 일어섰다.

“좋아. 이 한 줄은 비워 둘게.”

로테가 고개를 돌렸다.

“약속.”

“응. 다만 이 자리에 쓰고 싶어지면 먼저 말해 주기야. 나는 네 생각을 다 알 수는 없거든.”

루디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알아요.”

로테가 루디를 봤다.

루디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빈 줄인 건 알아요.”

“그건 나도 알아.”

아델이 답하자 루디는 웃으며 의자에 돌아갔다.

로테는 약속판 맨 아래를 한번 더 살폈다. 그러고는 책상으로 돌아와 자기 편지 위쪽의 빈 곳도 손끝으로 눌렀다.

아델은 어머니께 쓰던 종이에 다음 말을 적었다.

「아이들은 둘이에요. 한 아이는 나팔 소리를 편지에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루디가 의자에서 몸을 길게 뺐다.

“내 얘기예요?”

“응. 같이 보내도 될까?”

“읽으면 불어야 해요.”

“그 말도 적어 줄까?”

루디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은 웃으며 펜을 다시 들었다. 북부는 춥지만 따뜻한 빵을 먹고 있고, 손가락이 얼 만큼 추운 날에는 실내에서 수업한다고 적었다.

검은 외투를 걸쳤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대목만 다시 읽으실걸.’

◇◆◇

편지의 잉크가 마르자 아델은 종이를 접었다. 루디의 작은 종이도 안쪽에 넣었다.

로테는 자기 편지를 넣지 않았다. 아델이 접는 법을 보여 주자 같은 방향으로 모서리를 맞춘 뒤 공부방 서랍에 뒀다.

“보내고 싶을 때 꺼내자.”

로테가 서랍을 닫았다.

“안 버려요.”

“네가 버리자고 하지 않으면 안 버려.”

루디는 접힌 편지를 양손으로 들고 문까지 갔다.

“내가 줘요.”

“알빈께 전달하는 방법을 여쭤보자.”

아델이 아이들과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알빈은 식당 앞에서 수건을 갈고 있었다. 루디가 편지를 내밀었다.

“선생님 엄마한테요.”

알빈은 수건을 팔에 걸친 뒤 편지를 받았다.

“받으시는 분 주소는 쓰셨습니까?”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부로 가는 분이 계시면 부탁드리고 싶어요. 급한 편지는 아닙니다.”

알빈은 편지 앞면을 살폈다. 그러고는 아델에게 다시 건넸다.

“봄까지는 아무것도 나가지 않습니다.”

아델의 손이 편지 아래에서 멈췄다.

“사람만 못 나가는 게 아니었어요?”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디가 아델을 올려다봤다.

“작아도요?”

알빈이 아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작아도 같습니다.”

“종이인데요.”

“예. 종이도 그렇습니다.”

아델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접힌 귀퉁이를 엄지로 눌렀다.

“급한 소식도요? 누가 아프거나 집에 일이 생겨도 봄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알빈은 수건 끝을 바로잡았다.

“제가 예외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공작님께 여쭤볼게요.”

“서재에 계십니다.”

루디가 아델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같이 가요?”

아델은 아이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내가 다녀올게. 너희는 아그네스와 손을 씻고 식당에서 기다려.”

“왜요?”

“왜냐하면—보낼 수 있는지 어른끼리 확인할 이야기가 있어. 다녀와서 들은 대로 말해 줄게.”

로테가 아델 손의 편지를 봤다.

“못 가면요?”

“봄까지 내가 가지고 있을 거야.”

루디가 편지 끝을 만졌다.

“안에 나팔도요.”

“그것도 같이.”

아델은 아이들을 아그네스에게 맡기고 계단을 올랐다.

◇◆◇

서재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아델이 문을 두드리자 세드릭의 짧은 대답이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세드릭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검은 외투는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아델이 들어서자 읽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카스펠 선생.”

아델은 책상 앞까지 가서 편지를 내밀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입니다. 성 밖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세드릭은 편지에서 아델로 시선을 옮겼다.

“안 됩니다.”

대답은 바로 나왔다.

아델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지 않았다.

“겨울에 사람이 나갈 수 없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편지까지 못 보낸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요.”

“편지도 나갈 수 없습니다.”

“왜요?”

세드릭이 책상 가장자리에 손을 놓았다. 오른손의 흰 흉이 등불 아래 드러났다.

대답이 늦어졌다.

아델은 기다렸다. 밖에서 바람이 창을 두드렸다.

“제가 들어온 지 제법 지났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무사히 도착했는지도 모르세요.”

“편지는 봄에 보낼 수 있습니다.”

“봄까지 기다리라는 이유를 여쭙는 겁니다.”

세드릭이 아델 손에 들린 편지를 봤다.

“지금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델은 편지를 책상 위에 놓았다. 모서리를 맞추려다 손을 뗐다.

“어려운 말이어도 듣겠습니다.”

세드릭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델은 턱을 조금 들었다.

“이유 없는 안 됨은 아이들에게도 안 통해요.”

세드릭의 손이 책상에서 떨어졌다.

아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이 물으면 저는 답합니다. 모르면 알아보고 말해 주겠다고 하고요. 그런데 이 집에서는 제가 알아볼 수 있는 것부터 막혀 있어요.”

“선생이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온 게 아닙니다.”

아델의 말이 평소보다 빨라졌다.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이었다.

“제가 지켜야 할 일이면 왜 지켜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아이들이 오늘도 물었습니다. 종이는 작은데 왜 밖으로 못 나가냐고요.”

세드릭은 창 쪽을 봤다가 다시 아델을 봤다.

“오늘은 보내지 마십시오.”

“설명도 오늘은 못 듣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델은 책상 위 편지를 집었다.

접은 자리에 손톱이 걸렸다. 아델은 튀어나온 종이 끝을 안으로 넣고 가방 대신 손에 그대로 쥐었다.

“그럼 아이들에게는 제가 답을 못 들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아델은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고 잠깐 멈췄다.

“저는 규칙을 깨려고 여쭤본 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델은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었다.

◇◆◇

식당에 내려갔을 때 루디는 제 앞의 빈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델이 다가가자 의자를 당겨 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걸려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요.”

“고마워.”

아델이 의자를 마저 빼서 앉았다.

로테는 손에 쥔 빵을 내려놓았다.

“편지.”

아델은 무릎 위에 편지를 올렸다.

“봄까지 못 보낸대.”

루디의 어깨가 내려갔다.

“공작님도요?”

“응.”

“왜요?”

아델은 아이의 눈을 봤다.

“왜냐하면—아직 그 이유를 듣지 못했어. 오늘은 설명하기 어렵다고 하셨어.”

로테가 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선생님도 몰라요.”

“응.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는 않을게.”

루디는 아델 무릎 위의 편지를 봤다.

“내 나팔 소리 오래 기다려야 해요?”

“종이에 있으니까 없어지지는 않아.”

“작아지지도요?”

“글씨가 마르면 그대로 있을 거야.”

루디가 조금 안심한 얼굴로 빵을 집었다.

세드릭은 아델이 수프를 반쯤 먹었을 때 들어왔다. 아이들 옆에 멈춰 식탁을 살폈다.

“식사하고 계십니까.”

루디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은 같이예요.”

“……그렇습니다.”

세드릭이 맞은편에 앉았다.

알빈은 묻지 않고 접시를 놓았다. 아델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세드릭 쪽으로 밀려 있던 물병을 제 가까이 가져왔다.

루디가 아델과 세드릭을 번갈아 봤다.

“공작님도 편지 못 보내요?”

“나도 보내지 않습니다.”

“봄까지요?”

“그렇습니다.”

루디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럼 같이 기다리네요.”

세드릭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은 수프를 떠먹었다. 건너편에서 접시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물병을 되돌려 놓을 때에도 세드릭을 보지는 않았다.

◇◆◇

아이들이 잠든 뒤 아델은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 쓴 편지를 서랍에 넣으려다가 다시 꺼냈다. 루디의 글씨가 접힌 안쪽에서 조금 보였다.

아델은 종이를 찢지 않고 원래대로 접었다.

책상 위에 두고, 그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 내일은 알빈에게 부모님 소식을 받을 방법이라도 있는지 물을 생각이었다.

벽에 붙은 약속판 맨 아래는 비어 있었다.

아델은 가까이 가서 들뜬 종이 끝을 눌렀다. 낮에 로테가 짚었던 한 줄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델은 손을 떼고 문을 봤다. 아이들이 깼나 싶어 다가갔지만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문 밑으로 종이 한 장이 천천히 들어왔다.

아델의 발끝에서 멈춘 종이는 반으로 접혀 있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날에도 쪽지가 있었다. 아델은 잠깐 문고리를 봤다가 몸을 숙였다.

종이를 펼치자 약속판에 적힌 이름과 같은 글씨가 나타났다.

「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

(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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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왜 공작님이 선생님을 불러요?”로테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세수하고 온 아이의 옷깃을 바로 펴 주다가 손을 멈췄다.「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밤에 문 밑으로 들어왔던 종이는 어머니께 쓴 편지 옆에 놓여 있었다.“왜냐하면—내가 물어본 것에 답해 주시려는 것 같아.”“편지요?”“응.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로테가 종이 끝을 눌렀다.“안 된다고 또 하면요?”“왜 안 되는지 다시 물을 거야.”루디는 의자를 당겨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종이를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고개도 함께 기울였다.“성벽에서요?”“그렇게 적혀 있네.”“높은 데서 말하면 더 잘 들려요?”“왜냐하면—높아서 잘 들리는 건 아니야. 가까이 서서 말해야 잘 들리지.”루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델 바로 앞에 섰다.“편지 보내 주세요.”“나는 아주 잘 들었어.”“공작님한테도 이렇게 해요.”로테가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선생님은 커.”루디는 아델의 머리까지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안 올라가도 되잖아요.”아델은 웃음을 삼키며 종이를 접었다.“성벽에서 보여 주실 게 있는 모양이야. 너희도 아래까지 같이 가자. 나는 올라가고, 너희는 아그네스와 기다리는 거야.”로테가 곧장 물었다.“다녀와요?”“응. 아래로 돌아올게.”“해 지면.”“해가 진 뒤에도 돌아와.”로테는 그제야 소매를 놓았다.아델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였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 옆에 답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문닫는달 26일의 해는 안뜰 돌바닥을 길게 비췄다.아델은 아이들과 성벽 아래까지 걸었다. 루디는 눈을 치운 길 가장자리만 골라 밟았다. 발자국 하나가 어긋나자 뒤로 돌아가 다시 디뎠다.“이건 안 센 거예요.”“걸은 건 걸은 거지.”“그럼 두 번이에요?”“뒤로 갔다가 앞으로 왔으니 두 걸음 더 걸었네.”루디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돌아가면 많아져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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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편지는 겨울에 못 가요?”루디가 아델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아델은 잉크병을 안쪽으로 옮긴 뒤 종이를 바로 놓았다.“왜냐하면—사람이 가져가야 하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보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어.”“종이는 작잖아요.”루디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이만큼 접으면 문 밑으로 가요.”“문 밑으로 나가도 우리 어머니 집까지 혼자 걸어가지는 못하지.”“내가 던지면요?”“네가 던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어.”루디는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눈이 치워진 안뜰 너머로 흰까마귀 문이 보였다.“아주 세게.”“그럼 편지를 주우러 안뜰에 내려가야 할걸.”루디가 제 팔을 한번 흔들어 보다가 돌아왔다.문닫는달 25일이었다. 창가에 놓아둔 물그릇이 차가워서 아델은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로테는 맞은편에 앉아 깃펜 끝을 살피고 있었다.“이걸로 써요?”“응. 처음에는 내가 손을 잡아 줄게. 너무 힘주면 끝이 벌어지거든.”루디가 의자를 당겼다.“분필은요?”“분필은 종이에 쓰고 접으면 다른 쪽에 묻어. 편지 받은 사람이 읽기 어려워져.”“안 접으면 돼요.”“그럼 가져가는 사람이 다 읽을 수도 있지.”루디가 종이를 양손으로 가렸다.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였다.“읽으면 안 돼요.”“그럼 다 쓴 뒤에는 접자.”아델은 작은 종이 두 장을 아이들 앞에 놓았다. 제 앞의 종이는 조금 더 컸다. 남부에 있는 어머니께 쓸 편지였다.로테가 아델의 종이를 보고 물었다.“누구한테요?”“우리 어머니.”“선생님 엄마.”“맞아.”루디가 고개를 기울였다.“선생님도 엄마한테 수업해요?”“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가르쳐 주셨지.”“편지도요?”“응. 글씨를 너무 작게 쓰면 읽기 힘들다고 하셨어.”루디가 제 종이를 당겼다.“나는 크게 써요.”“그러다 한 글자로 종이를 다 쓰면?”루디가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내밀었다.“큰 종이 주세요.”◇◆◇아델은 루

  • 악당 공작가 쌍둥이의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8화. 오늘의 수업: 뜨거운 우유 식히는 법

    “선생님, 공작님은 왜 우유 안 마셔요?”로테가 쟁반 끝에 놓인 빈 잔을 가리켰다. 부엌 문 옆에 선 아델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잔을 봤다.“왜냐하면—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공작님이 우유 안 드시는 걸 봤니?”“잔은 놓아요.”“마시지는 않고?”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엌 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문닫는달 20일, 해가 진 뒤부터 공부방 돌바닥까지 차가워졌다. 양말을 신은 루디가 발을 번갈아 들기에 아델은 따뜻한 것을 마시고 자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루디가 발뒤꿈치를 들고 쟁반을 들여다봤다.“내 잔이에요?”“아직 아무 잔도 정하지 않았어.”“그럼 큰 거.”“두 손으로 잡기 편한 걸 고르자.”루디는 가장 큰 잔에 손을 뻗었다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잔을 잡았다. 양손으로 감싸니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이건 안 떨어져요.”“뜨거울 때는 잡지 말고. 내가 식힌 다음에 줄게.”아델은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화덕 위에 냄비를 올렸다. 빵집 할머니가 불을 줄여 주고 긴 나무 주걱을 건넸다.“바닥에 붙지 않게 저어요.”“이렇게요?”“그렇지. 아이들 입 데지 않게만 하고.”루디가 냄비 쪽으로 코를 내밀었다.“벌써 먹으면 안 돼요?”아델은 주걱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찬 우유를 따뜻하게 만드는 중이야.”“따뜻하면 바로요?”“너희가 마실 수 있을 만큼 식으면.”루디가 입술을 내밀었다.“따뜻하게 했다가 식혀요?”“펄펄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다르거든.”로테는 냄비 위로 올라오는 김을 보고 있었다. 앞머리 아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공작님도.”아델이 주걱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같이 마시자고 부를까?”“네.”“안 드실 수도 있어.”로테가 아델을 올려다봤다.“왜요?”“왜냐하면—싫어하는 음식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거든. 불러 보고 여쭤보자.”루디가 제 잔을 내려놓았다.“내가 불러요!”“계단에서 뛰지 않기.”“걸어서 빨리!”“그건 뛰는 거랑 어떻게 다를까

  • 악당 공작가 쌍둥이의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7화. 오늘의 수업: 성 안 지도 그리는 법

    “선생님, 왜 묘지는 지도에 안 그려요?”루디가 종이 위 빈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끝에는 아침에 만진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아델은 종이가 밀리지 않게 모서리를 눌렀다.“왜냐하면—아직 거기까지 안 가 봤거든.”“성 안인데요.”“성 안이라고 내가 전부 아는 건 아니야.”“집사님은 알아요.”“그럼 모르는 곳은 집사님께 물어보고 그리자.”루디가 의자에서 몸을 길게 뺐다. 책상 위에는 본성과 부엌, 겨울집이 서툰 네모로 그려져 있었다. 뒤 언덕은 비어 있었다.공부방 창턱에서는 종이새 두 마리가 천천히 돌았다. 작은 날개를 안으로 접은 새가 긴 꼬리의 새와 닿았다가 떨어졌다.로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 끝을 바로잡았다.“여기는 있어요.”로테는 새 아래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이 자리는 아이들이 잘 볼 수 있습니까.」그 밑에는 로테가 며칠 전 꾹꾹 눌러 쓴 대답이 있었다.「네.」루디는 창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지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공부방도 그려요. 내 새 있는 데.”아델은 본성 네모 안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여기가 공부방.”“너무 작아요.”“종이를 실제 방만큼 크게 만들 수는 없잖아.”루디가 팔을 벌려 종이 길이를 쟀다.“방보다 작은 건 맞네.”로테가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아델이 놓아 둔 분필을 들고 작은 칸 안에 짧은 선을 그었다.“창.”“좋아. 창이 어디 있는지 알면 방도 찾기 쉽겠다.”아델은 문닫는달 16일이라고 적은 석판을 옆으로 밀었다. 오늘 걸어 볼 곳을 적으려던 참이었다.루디가 빈 언덕에 다시 손을 댔다.“여기는 걸어서 그려요?”“응. 눈을 치워 둔 길로만.”로테의 분필이 멈췄다.아델은 두 아이를 번갈아 봤다.“가기 싫은 곳이 있으면 말해 줘. 지도에 빈 곳이 있어도 괜찮아.”로테는 분필을 내려놓았다.“길만.”“우선 길만 가 보자.”루디가 곧장 의자에서 내려왔다.“내가 셀래요!”◇◆◇외투를 입히는 동안 루디의 발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하나, 둘, 셋.”아델이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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