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오늘 일정: 해윤제지 방문, 아버지와 서류 확인』
“앞당길 생각 없어요.”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석진은 회전문 밖을 보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날짜야 양쪽 집에서 의논하면 되지.”
“제 결혼인데 저한테도 물으셔야죠.”
뒤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석진이 내 어깨 너머를 봤다.
“이헌아. 아직 안 갔니?”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장갑 안에서 굽혔던 손가락을 펴고 회전문으로 걸었다. 문을 밀기 전에 석진에게 고개만 숙였다.
“아버지한테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밖으로 나오자 코끝이 찼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 장갑을 벗고 확인했다.
『날짜는 혼자 결정하게 두지 않을 거예요.』
이헌이었다. 나는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대신 아버지에게 수요일에 공장으로 가겠다고 보냈다.
◈
노조실 문에 붙은 종이는 아래쪽 테이프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문을 열기 전에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안에서 의자를 미는 소리가 났다.
“사장님 딸 왔네.”
염 반장이 문을 열었다. 작업복 소매가 젖어 있었다. 안에는 직원들이 앉아 있었고, 가운데 탁자에는 종이컵과 귤껍질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 여기 계세요?”
“현장 돌고 있어. 전화했더니 금방 온대.”
빈 의자를 끌어 주던 직원이 내 얼굴을 보고 물었다.
“공장 팔리는 거 맞아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이었다. 염 반장이 직원을 쳐다봤다.
“들어오자마자 뭘 묻고 그래.”
“반장님도 아까 물어보신다면서요.”
“제가 아는 건 아직 없어요.”
나는 의자에 앉지 않고 탁자 앞에 섰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출하 쪽에 아는 사람이 있대요. 서진건설에서 여기 땅을 본다고.”
다른 직원이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우린 팔려도 일만 하면 돼요. 그런데 기계까지 넘기는 건지, 땅만 파는 건지 알아야죠.”
“지난번에도 납품처에서 먼저 물었어요. 이제 주문 안 받느냐고.”
나는 외투 단추를 풀었다. 탁자 아래에 놓인 상자에는 작업 장갑이 들어 있었다. 손끝이 해진 장갑과 새 장갑이 섞여 있었다.
“아버지께 들은 매각 얘기는 없어요. 모르는 걸 아니라고 말씀드릴 순 없고요.”
염 반장이 턱을 문질렀다.
“그 말이면 됐어. 모른다는데 붙들고 뭘 더 듣겠어.”
“대신 확인할게요. 주문을 안 받는다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도요.”
직원 하나가 휴대폰을 꺼냈다. 납품 담당자에게 받은 문자를 내게 보여 줬다. 공장 정리 소문이 있는데 다음 달 물량은 보장되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름과 연락처는 가리고 보내 달라고 했다.
“소문이라고만 넘기진 않을게요.”
직원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내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하자 그제야 염 반장이 의자를 당겼다.
“앉아. 서 있으면 우리가 따지는 것 같잖아.”
“앉아서도 물어보셔도 돼요.”
염 반장이 짧게 웃었다. 내 앞에 껍질을 벗기지 않은 귤을 놓았다.
◈
아버지는 작업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직원들이 말을 멈추자 입구에서 장갑부터 벗었다.
“얘기들 하세요. 나경이 데리러 왔습니다.”
“사장님도 앉아요.”
염 반장이 옆 의자를 발로 밀었다.
“사람들이 묻는 게 같은데 따로 대답하면 말만 달라져.”
아버지는 의자 끝에 앉았다. 내가 받은 문자를 보여 주자 화면을 한참 봤다.
“공장을 팔겠다고 내놓은 적은 없습니다.”
“서진에서 보는 건 뭡니까?”
“채권 때문에 자료를 요구한 게 있어요. 제가 보낸 건 생산 내역하고 설비 목록입니다.”
“땅 보겠다는 얘기는요?”
아버지는 무릎 위에 장갑을 겹쳐 놓았다.
“그건 저한테도 정식으로 온 말이 없어요.”
나는 탁자 밑에서 가방 지퍼를 열었다. 해윤 부지에 그어진 선을 봤던 날이 떠올랐다. 아파트 동과 진입로가 들어갈 자리였다. 직원들 앞에서 확정된 계획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서진 쪽에 내보낸 자료, 저도 볼게요.”
“사무실에 있어.”
“회사 주식에 관한 서류도요.”
아버지가 나를 봤다. 나는 탁자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누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인지부터 알아야겠어요.”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뒤 염 반장은 의자에 걸친 점퍼를 집었다. 오른손 약지가 짧았다. 손끝이 없는 자리는 오래전에 아문 채였다.
“반장님은 잠깐 계세요. 여쭤볼 게 있어요.”
“갔다 올게. 기계 덮개가 잘 안 닫힌다 해서.”
“다른 분 부르시면 안 돼요?”
“멈춰 놨어. 손만 보고 올 거야.”
염 반장은 소매를 걷으며 나갔다. 아버지가 내 앞의 귤을 만지다가 내려놨다.
“괜히 왔지.”
“서류 보러 왔어요. 괜히 온 거 아니에요.”
“직원들한테 네가 대답할 일은 아닌데.”
“아버지도 혼자 대답하지 마세요. 모르시는 건 같이 확인해요.”
아버지는 벗어 둔 장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
사무실에서 파일을 꺼내는데 밖이 소란했다.
“약 상자 어디 갔어?”
나는 문을 열었다. 염 반장이 오른손을 들고 서 있었다. 손등에 피가 났다. 옆에 선 직원이 종이 휴지를 뜯고 있었다.
“그걸로 누르지 마세요. 보풀이 붙어요.”
싱크대 위에 구급함이 있었다. 나는 뚜껑을 열어 거즈를 꺼냈다. 염 반장이 손을 빼려 했다.
“조금 긁힌 거야.”
“물로 먼저 씻어요.”
“서류나 봐. 이런 건 맨날 있어.”
나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염 반장은 내 손과 수도를 번갈아 보더니 손등을 물 아래에 댔다. 피가 씻겨 내려가자 베인 곳이 보였다.
옆 직원이 기계를 멈추고 덮개를 열었는데 가장자리 철판에 스쳤다고 했다.
“벌어진 데는 병원에서 봐야겠어요.”
“이걸 가지고 병원까지 가?”
“계속 피 나잖아요.”
나는 거즈를 접어 상처 위에 올렸다. 염 반장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 누르고 계세요.”
테이프를 뜯으려는데 손가락이 젖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옆에서 끝을 잡아 줬다. 나는 거즈 양옆을 붙이고 붕대를 감았다.
약지 쪽으로 붕대가 비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걸리지 않게 방향을 바꿨다. 염 반장이 내 손을 내려다봤다.
“네 엄마도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어.”
“다치지 말라는 게 잔소리예요?”
“그럼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
“한 번 더 할게요. 오늘 그 기계 만지지 마세요.”
옆 직원이 웃었다. 염 반장은 붕대를 감은 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 기사 불러서 모서리부터 갈게.”
“병원도요.”
“가서 꿰매라면 꿰맬 거야. 됐냐?”
나는 테이프 끝을 눌러 붙였다.
“됐어요.”
아버지가 차 열쇠를 꺼냈다. 염 반장은 혼자 간다고 하다가 손등에 다시 배어 나온 피를 보고 외투를 집었다.
문을 나서기 전 염 반장이 내 쪽으로 돌아섰다.
“예전 주주 서류는 아래 칸에 있어. 네 엄마가 묶어 둔 거.”
아버지는 대답 대신 책상 서랍을 가리켰다.
◈
서랍 안에는 종이끈으로 묶인 봉투들이 있었다. 나는 책상 위 먼지를 닦고 봉투를 올렸다.
겉에 적힌 글씨는 엄마 글씨였다. 받침을 좁게 붙여 쓰고 날짜 끝에 짧은 선을 긋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최근 명부부터 펼쳤다. 아버지 이름을 찾고, 다음 봉투에서 꺼낸 명부와 나란히 놓았다. 주식 수가 적힌 칸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내려갔다.
엄마 이름은 없었다.
다른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있었다.
한연옥.
나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엄마 이름이 있는 명부 위에 없는 명부를 포갰다. 작성 날짜가 보이게 위쪽만 조금 내렸다.
이상했다.
엄마 이름이 빠진 명부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든 명부였다.
나는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이름이 남은 날짜와 사라진 날짜를 따로 적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 정리된 줄 알았는데 그보다 앞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이었다.
나는 노조실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복도 끝에서 직원들이 하는 말이 들려 문은 닫았다.
“지금 통화 괜찮아요?”
“네. 공장에 있어요.”
“아버님 만나러 갔어요?”
“회사 서류 좀 보려고요.”
잠깐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노조실 문에 난 유리를 봤다.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의 어깨가 보였다.
“날짜 얘기 때문에 간 거면 내 쪽에서 들은 건 없어요.”
“그것만 보러 온 건 아니에요.”
“네.”
이헌은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귤껍질이 남은 탁자에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아버지 회사인데.”
“확인하다 막히는 게 있으면 말해요.”
“제가 먼저 볼게요.”
“그래요.”
전화기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 더 붙였다.
“회의 가세요?”
“조금 뒤에요.”
“그럼 끊을게요.”
“나경아.”
문밖으로 그림자가 지나갔다. 나는 대답을 늦췄다. 이헌도 재촉하지 않았다.
“밥은 먹었어요?”
아침에 가방에 넣은 빵이 그대로였다.
“아직요.”
“다친 손은 없고?”
나는 아까 피를 씻어 낸 왼손을 봤다.
“제 손은 괜찮아요.”
“제 손?”
“염 반장님이 조금 다치셔서요. 아버지랑 병원 가셨어요.”
문고리가 내려갔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뗐다. 직원이 얼굴을 내밀고 안을 살폈다.
“사장님 아직 안 오셨죠?”
“네.”
“오시면 출하실에 들러 달라고 좀 전해 주세요.”
직원이 나간 뒤에도 나는 문 쪽을 봤다. 문이 닫히고 3초쯤 지나 이헌이 물었다.
“아직 거기 있어요?”
“네.”
“점심 먹고 봐요. 서류는.”
나는 탁자 모서리에 놓인 귤을 집었다.
“이헌 씨도요.”
말하고 나서 문을 봤다. 이번에는 밖에 아무도 없었다.
◈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나는 명부 사이에 메모지를 끼워 놓고 기다렸다.
“꿰매셨어요?”
“꿰맸다. 공장으로 데려다 달라는 걸 집에 내려 주고 왔다.”
나는 의자를 빼 줬다. 아버지는 앉기 전에 책상 위를 봤다.
“그것까지 꺼냈구나.”
“엄마도 주주였죠?”
“그랬지.”
“언제까지요?”
아버지가 파일을 당겼다. 나는 엄마 이름이 있는 쪽을 먼저 펼쳤다. 그다음에는 이름이 없는 쪽을 놓았다.
“여기부터 없어요.”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안경을 쓰고 명부를 들여다봤다. 종이를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돌렸다.
“이때는 있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엄마가 살아 계실 때잖아요.”
아버지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나는 적어 둔 날짜를 보여 줬다.
“엄마가 주식을 정리하셨다는 얘기 들으신 적 있어요?”
“없어.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럼 원래 서류를 찾아봐야겠어요. 이건 사본이에요.”
이름 칸의 글씨와 도장이 함께 복사돼 있었다. 종이에는 도장을 찍고 말린 자국이 없었다. 나는 투명 덮개를 씌우고 파일을 닫았다.
“누가 가져갔다는 뜻이야?”
“아직은 몰라요. 명부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요. 원본이랑 주식 옮긴 기록부터 볼게요.”
아버지가 사무실 안의 캐비닛을 봤다. 나는 최근 명부를 따로 챙겼다. 아버지 이름 옆의 주식 수는 엄마 이름이 사라진 뒤에도 그대로였다.
“집에도 서류가 있지?”
“회사 건 여기 있는 게 다야.”
“엄마가 보관하던 건요?”
아버지가 안경을 벗었다.
“공방 물건하고 같이 넣었을 거야.”
◈
작업실에 돌아오니 다은은 퇴근하고 없었다. 나는 불을 켜고 창가 선반 맨 아래 칸에서 천으로 싼 상자를 꺼냈다.
호두나무 상자였다. 약혼식 날 아버지에게 받은 뒤로 경첩만 손보고 그 자리에 두었다.
공방에서 엄마 무릎 옆에 있던 상자였다. 모서리를 닦은 천에 먼지가 묻었다. 나는 놋쇠 자물쇠를 앞으로 돌렸다. 뚜껑은 조금도 벌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열면 나무부터 상할 수 있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자물쇠를 찍어 아버지에게 보냈다. 전화가 바로 왔다.
“그 상자는 왜.”
“엄마 서류가 공방 물건하고 같이 있을 거라면서요. 작은 열쇠 묶음 같은 건 없었어요?”
“네 엄마 쓰던 서랍은 그때 다 봤어. 없었다.”
“할아버지 공방에 남은 건요?”
“거기까진 모르겠다. 공방 물건은 할머니가 정리하셨으니까.”
전화를 끊고 상자를 무릎 앞에 놓았다. 열쇠 구멍에 묻은 먼지를 붓으로 털었다.
아버지도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46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