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서진그룹 방문, 복원 인계서 원본 전달』
“안 간다는 말씀, 지금도 같아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이헌 쪽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
“같아요.”
“오늘 회의에서 정한다면서요.”
“안건에 올라온 거예요. 정해진 건 아니고.”
수장고 문 앞에서 들었던 대답과 다르지 않았다. 그날 나는 당분간 따로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헌은 이유를 물었다. 혼자 확인할 일이 있다고 하자 잠깐 나를 보다가 알겠다고 했다.
그 뒤로는 시집의 표지 천을 정하는 문자만 주고받았다.
회전문이 멈췄다. 나는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벽 쪽으로 비켜섰다.
“저 도착했어요. 안내 데스크에 맡기고 갈게요.”
“조 비서가 내려갈 거예요.”
“직접 안 내려오셔도 돼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알아요.”
나는 유리벽에 비친 외투 깃을 눌렀다. 가방 안에는 재단에 제출할 복원 인계서 원본이 있었다. 지난주에 받은 사본의 사진 첨부가 빠져 오늘 다시 서명한 서류였다.
담당 직원이 본사 비서실로 보내 달라고 했고, 솔빛동으로 나가는 길이라 직접 가져왔다.
“회의 들어가셔야죠.”
“밖에 추워요. 기다리게 되면 안쪽에 앉아 있어요.”
“오래 안 있을 거예요.”
전화를 끊었다. 화면에는 오전 일정 아래로 이헌과 나눈 문자가 남았다. 나는 화면을 끄고 안내 데스크로 갔다.
◈
“전략기획실에 서류 전달하러 왔어요.”
안내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함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윤나경이에요.”
직원이 방문 명단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옆에 놓인 수화기부터 집었다.
“사모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던 손이 멈췄다.
직원은 이미 내게서 시선을 떼고 내선 번호를 누르려 하고 있었다.
“아직 아니에요.”
직원의 손끝이 버튼 위에서 멎었다.
“네?”
“결혼 안 했어요. 윤나경이라고 불러 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전달받은 내용을 보고…….”
직원은 명단을 내려다봤다. 아래쪽에 손을 대고 가리려다가 다시 거뒀다. 나는 봉투를 데스크 위에 놓았다.
“서류 전달하러 왔다고만 말씀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직원이 통화하는 동안 옆자리 직원이 의자를 당겨 줬다. 앉으려다 봉투 모서리가 들린 게 보였다. 나는 접착된 부분을 손톱으로 누르지 않고 손바닥으로 잠깐 눌렀다.
풀을 덜 말린 채 가져온 탓이었다.
통화를 마친 직원이 내 손을 봤다.
“테이프 드릴까요?”
“괜찮아요. 금방 붙어요.”
“혹시 서류가 열리면 안 되는 거라면 보안 봉투도 있습니다.”
“책 사진하고 인계서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직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나는 가방을 의자 옆에 세웠다.
뒤쪽 출입구에서 남자들이 들어왔다. 직원들이 일어나 인사했고, 남자 하나가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이사회 아직 안 끝났죠?”
“네. 진행 중입니다.”
나는 봉투 위에 올려 둔 손을 뗐다.
로비 벽의 시계는 오전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
조현석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장 데스크로 왔다. 한 손에는 결재판이 들려 있었다.
“직접 가져오셨네요.”
“근처에 올 일이 있었어요. 이건 재단 담당자한테 보내 주시면 돼요.”
나는 봉투를 건넸다. 조현석이 받는 사람 이름을 확인했다.
“실장님 확인란도 있어서요. 끝나면 서명받아 보내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일어서는데 조현석이 결재판을 고쳐 들었다. 벌어진 덮개 사이로 인쇄된 종이가 보였다.
해외 법인 운영 정상화 및 책임자 파견.
바로 아래에는 강이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나는 읽은 곳에서 눈을 뗐다.
조현석이 덮개를 닫았다.
“기다리시겠습니까?”
“서명만 받는 거면 제가 있을 필요는 없죠?”
“담당자 쪽에서 사진 설명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하나 더 왔습니다. 책 번호가 하나 중복돼 있어서요.”
“어느 책이요?”
조현석이 봉투를 내려다봤다.
“첨부한 목록에 표시돼 있을 겁니다.”
나는 다시 앉았다. 봉투를 열어 사진 대장을 꺼냈다. 마지막 장에 책 번호 하나가 동그라미로 둘러져 있었다.
사진은 달랐다. 앞에서 찍은 책과 뒤에서 찍은 책에 같은 번호를 붙여 놓았다.
“이건 제가 잘못 붙였네요. 원본 사진으로 확인할게요.”
휴대폰에서 작업 사진을 찾았다. 책등의 터진 자리가 달랐다. 나는 날짜가 적힌 파일을 열어 기록지와 대조했다.
“뒤쪽 사진이 맞아요. 이 번호는 그대로 두고 앞쪽을 고치면 돼요.”
“담당자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적어 드릴게요. 말로 전하면 또 헷갈려요.”
조현석이 펜을 내밀었다. 수정한 번호 옆에 이름을 쓰고 휴대폰으로 한 장 찍었다. 조현석은 결재판을 펴지 않은 채 기다렸다.
나는 펜을 돌려주면서 물었다.
“파견 기간이 1년이에요?”
조현석이 펜을 받아 안주머니에 넣었다.
“안건에는 그렇게 올라갔습니다.”
“실장님이 낸 건 아니죠?”
“부회장님 쪽에서 올렸습니다.”
로비에서 출입증을 찍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조현석은 그쪽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직 회의 중입니다. 결과가 나오면 실장님이 직접 말씀하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말은 더 있었지만, 조현석이 대신 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봉투 입구를 접어 건넸다.
“사진은 제가 담당자에게도 보내 둘게요.”
“감사합니다.”
조현석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가방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번호를 바로잡은 사진이 전송되기를 기다렸다. 화면의 표시가 끝난 뒤에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데스크 직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돌아갈 길을 확인했다. 지금 나가면 다은이 점심을 먹기 전에 작업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집의 표지 원단도 오늘은 재단해야 했다.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을 때 이헌이 내려왔다.
뒤에는 회의 자료를 든 직원들이 있었다. 이헌은 내 앞에서 멈추지 않고 데스크 옆 통로까지 걸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회전문을 나간 뒤에야 나를 봤다.
“서류 받았어요.”
“사진 번호가 잘못돼서요. 고쳐 놨어요.”
“조 비서한테 들었어요.”
나는 로비 가운데를 봤다. 안내 직원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이헌과 내 사이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회의는요?”
“끝났어요.”
“어떻게 됐어요?”
이헌이 들고 있던 얇은 파일을 옆구리로 옮겼다.
“회장님이 다음에 다시 보자고 했어요.”
“그럼 아직 정해진 건 없네요.”
“네.”
“실장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못 받는다고 했어요.”
이헌은 짧게 대답했다. 나는 가방 끈의 접힌 곳을 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는 자리예요?”
“내 발령을 정하는 자리니까요.”
“제가 잘 몰라서 물었어요.”
“물어도 돼요.”
이헌의 시선이 내 손에 잠깐 머물렀다. 가방 끈을 너무 당겨 손등이 눌려 있었다.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오늘 나올 줄은 몰랐어요.”
“서류만 전하고 가려고 했어요.”
“알아요.”
지난주에도 했던 대답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발을 옮기지 않았다.
직원이 데스크 밖으로 나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이헌이 먼저 파일을 들고 몸을 돌렸다.
“실장님, 차량 준비됐다고 합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해요.”
직원은 나를 보고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답했다. 직원이 돌아간 뒤에도 이헌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거예요?”
“네.”
“차 필요하면 말해요.”
“버스 타면 바로 가요.”
“그럼 밖에 나갈 때 장갑 껴요.”
가방 겉주머니에 장갑 끝이 나와 있었다. 나는 꺼내 들었다. 이헌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오른손부터 끼웠다.
왼손 검지가 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굳은살이 안감의 실에 걸린 모양이었다. 손을 빼려는데 이헌의 손이 조금 들렸다가 멈췄다.
나는 안감을 펴고 다시 손가락을 넣었다.
“됐어요.”
이헌이 손을 내렸다.
로비 바닥을 구두 굽이 두드렸다. 뒤쪽 통로에서 나온 직원 둘이 걸음을 늦췄다. 나는 이헌을 보던 얼굴을 데스크 쪽으로 돌렸다.
“인계서는 확인하신 다음에 재단으로 보내 주세요, 실장님.”
“그렇게 할게요.”
직원들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인사를 받는 동안 이헌의 얼굴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가방 끈을 잡았다.
이헌이 아주 낮게 물었다.
“아직 할 말 있어요?”
“없어요.”
입구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가 멈췄다. 이헌은 내가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약혼 정리하겠다는 말은 그대로예요.”
안내 데스크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나는 그 소리가 그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이헌이 파일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나한테 확인받지 않아도 돼요.”
“확인받는 거 아니에요. 알고 계시라고요.”
“알겠어요.”
나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출입구로 걸었다. 이헌은 따라오지 않았다.
◈
회전문 앞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 며느릿감.”
석진이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석진 뒤에는 비서로 보이는 직원이 서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비켜섰다.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여기는 웬일이니?”
“재단에 보낼 서류가 있어서요.”
“복원 일 끝났다더니.”
“인계서 확인이 남았어요.”
석진이 내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장갑을 끼느라 밖으로 나온 외투 소매를 나는 그대로 뒀다.
“주원이는 네가 온 거 알고?”
“업무 때문에 잠깐 들른 거예요.”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말 안 했어요.”
석진은 대답을 듣고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뒤에 선 직원이 출입구를 봤다.
“차에서 기다려요.”
직원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석진은 금색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로비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헌은 엘리베이터 앞에 있었다. 조현석이 건넨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석진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고 앞을 봤다.
“바쁜 사람 붙들지 말고 나한테 얘기해도 돼.”
“어떤 걸요?”
“해윤 일 말이야. 기환 씨가 요즘 전화를 잘 안 받더구나.”
“공장에 계실 때는 못 받으실 때가 있어요.”
“네가 대신 듣고 전해 주면 되겠네.”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남기실 말씀 있으면 적을게요.”
석진의 입가에 있던 웃음이 멎었다가 돌아왔다.
“가족끼리 무슨 회의록을 쓰니.”
“빠뜨릴까 봐요.”
화면을 켰지만 메모장은 열지 않았다. 석진은 내 손을 보다가 외투 단추를 잠갔다.
“이헌이 발령 얘기 들었니?”
“네.”
“자꾸 미뤄져서 곤란해. 해외 쪽은 책임자가 필요하고, 이헌이도 한번 다녀와야 할 때고.”
“회의에서 결정하실 일 아닌가요.”
“맞아. 집안일하고 섞으면 안 되지.”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석진은 출입구 쪽으로 발을 옮기지 않았다.
“주원이가 호텔에서 잘하고 있어. 이제 가정만 꾸리면 되는데.”
“주원 씨 일은 주원 씨한테 들을게요.”
“너도 고생 그만해야지. 작업실 오가랴, 공장 챙기랴.”
“제 일이에요.”
석진이 안경 다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회전문 밖에 검은 차가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이 뒷문을 열었지만 석진은 손을 들어 기다리게 했다.
“날짜 잡고 나면 괜한 생각 안 하게 돼.”
“이미 날짜는 정하셨잖아요.”
내 말끝에 석진이 로비 안쪽을 봤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다가 몇 걸음 뒤에서 멎었다.
석진이 다시 나를 봤다.
“5월까지 기다리기엔 네 아버지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텐데.”
나는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 정도는 알지.”
“저한테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아서요.”
석진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비켜 줬던 자리에서 발을 더 옮기지 않았다. 뒤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석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석진이 손목시계를 한 번 더 보고 내게 물었다.
“결혼, 좀 앞당기는 건 어때?”
(45화 끝)
『오늘 일정: 10월 21일 화요일, 호텔 약속』“조건부터 들을게요.”주원은 흰 휴대폰을 쥔 채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앉아서 이야기해요. 여기서는 누가 들을지 몰라요.”이헌이 보안실 쪽을 돌아봤다. 안에서 의자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고 열린 승강기에 탔다.주원은 22층을 눌렀다.층 표시가 올라가는 동안 흰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주원은 알림을 확인하지 않고 옆 단추를 눌렀다. 검어진 화면에 천장 등이 비쳤다.“그걸로 계속 녹음한 거예요?”“전부는 아니고요.”주원은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아버지하고 따로 만날 때요.”이헌은 층 표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문이 열리자 주원이 먼저 나갔다. 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회의실은 비어 있었다. 주원은 출입증으로 문을 열고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나는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이헌은 내 옆 의자를 빼다가 한 칸 건너에 앉았다. 주원은 맞은편에 휴대폰을 놓고 창가로 갔다.창 손잡이가 돌아갔다. 주원은 창을 2cm쯤 열고 손을 뗐다. 커튼 끝이 창틀에 끼자 다시 빼냈다.전에 둘이 이야기할 때도 녹음이 나오기 전 저렇게 창을 조금 열었었다.“많이 열면 문이 덜컹거려요.”묻지 않았는데 주원이 말했다.“안 열면 답답하고.”코트를 벗어 의자에 건 주원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코트 단추만 풀었다. 가방은 무릎에 두었다.주원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결혼식 날, 파혼은 내가 직접 할게요.”나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오늘 일정: 10월 21일 화요일, 호텔 약속』“그날 밤에도 제가 근무했거든요.”바텐더가 빈 잔을 치웠다. 주원은 계산서에 서명하고 펜을 돌려주었다.“기억력이 좋으시네요.”“책을 두고 가실 뻔해서요.”이헌이 내 옆에서 입을 열었다.“그때 챙겨 주셔서 고마웠습니다.”“아닙니다. 편히 쉬다 가십시오.”바텐더는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나는 남은 물을 마시지 않고 잔에서 손을 뗐다. 주원은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갈까요.”“어디로요?”“아래에요. 보여 줄 게 있어요.”이헌이 주원의 앞을 막지 않은 채 물었다.“여기서 말할 수 없는 거야?”“삼촌도 같이 보면 돼.”주원은 검정 휴대폰을 챙겼다. 나는 코트를 입고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주원이 바깥으로 먼저 나갔다.이헌은 내가 소매에 손을 다 넣을 때까지 기다렸다. 코트 안감이 접혀 손목에서 걸렸다. 내가 옷깃을 당기자 이헌의 손이 올라왔다가 멈췄다.“괜찮아요.”나는 안감을 펴고 팔을 내렸다.주원이 복도에서 돌아봤다.“안 와요?”“가요.”나는 주원을 따라갔다.승강기 앞에 서자 주원이 버튼을 눌렀다. 거울에 셋의 모습이 비쳤다. 내 손가락의 반지가 복도 조명 아래 보였다.문이 열리자 내가 먼저 탔고, 이헌은 문 옆에 섰다.주원은 지하층 버튼을 눌렀다.&l
『오늘 일정: 10월 21일 화요일, 호텔 약속』“제가 주원 씨 대신 결정할 수는 없어요.”나는 작업대에서 풀그릇을 옮기고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경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서랍 닫는 소리가 났다.“알아. 네가 대신 살아 달라는 말은 아니었어.”“잘못한 일이 있으면 확인할 거예요. 하지 않은 일까지 묻지는 않을게요.”“그거면 됐다.”나는 앞치마에 묻은 풀을 젖은 천으로 닦았다. 마른 줄 알았던 자리가 손가락에 붙었다.“식사는 하셨어요?”“너는?”“아직요. 이 책 덮고 먹으려고요.”“풀 묻은 손으로 전화 받지 말고. 끊어.”통화가 끝났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등에 붙인 천을 눌렀다. 들뜬 곳이 없는지 살핀 뒤 프레스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주원의 문자였다.『오늘 저녁 시간 돼요? 호텔에서 봐요.』나는 화면을 한동안 들여다보다 답을 적었다.『몇 시예요?』『7시. 31층 바. 삼촌도 올 거예요. 셋이 봐요.』풀그릇을 들던 손이 멈췄다. 주원과 단둘이 앉은 적도, 이헌과 그곳에 간 적도 있었다. 셋이 같은 자리에 앉는 건 처음이었다.『무슨 일인데요?』『와서 이야기해요. 식사 안 했으면 먹고 와요. 오늘은 술 강요 안 할게요.』나는 주원의 문자 아래로 답을 보냈다.『갈게요.』다은이 맞은편 작업대에서 고개를 들었다.“누구 만나?”“주원 씨. 호텔에서.”
『오늘 일정: 10월 18일 토요일, 본가 제사』경란은 내 손목을 잡은 채 서재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저예요, 아버님. 물 여쭈러 왔다가 그냥 갈게요.”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경란의 시선이 내 손과 서재 문 사이를 오갔다.“아버님께서 연말에 말씀하신다는 데까지 들었어요.”“그 뒤는?”“못 들었어요.”문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더 묻지 않고 복도 끝을 가리켰다.“따라와.”나는 장식장 위의 가방을 집어 어깨에 걸었다. 경란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뒤따르는 내 구두 소리만 계단에서 났다.2층 방에는 화장대 위 조명만 켜져 있었다. 경란이 문을 닫고 손잡이를 잠갔다. 잠금쇠가 걸리는 소리에 나는 문을 돌아봤다.“앉아. 오래 세워 둘 말은 아니니까.”화장대 옆 의자를 내주고 경란은 귀에서 귀걸이를 뺐다. 진주 한 짝이 유리 쟁반에 놓였다. 반대쪽 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경란이 쟁반을 들춰 보았다가 내려놓았다.“나머지는 어디 뒀는지 모르겠네.”“오늘 끼셨던 거예요?”“아니. 내려가기 전에 하나만 있길래 이것만 했어. 머리로 가리면 안 보이니까.”나는 가방을 발밑에 놓았다. 화장대 아래에 진주 빛이 보였지만, 몸을 숙여 확인하니 서랍 손잡이에 박힌 장식이었다.“찾지 마. 사람 불러서 찾으면 돼.”“바닥에 있으면 의자에 눌릴 수도 있어서요.”경란이 의자를 조금 밀었다. 나는 그 아래까지 보고 일어났다. 지난번
『오늘 일정: 10월 18일 토요일, 본가 제사』회장이 식탁에 놓인 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석진은 의자 뒤에 선 채 기다렸다.“여기서 하면 안 되는 얘기냐.”“식사들 하시는데 길어질 것 같아서요.”회장이 수건을 내려놓았다. 이헌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너도 와.”회장의 말에 이헌이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안경을 고쳐 쓰고 식당을 나갔다. 회장이 뒤따랐고, 이헌은 회장이 문턱을 넘는 것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나는 식탁 위에 남은 물병을 들었다. 이헌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쯤 찬 잔이 놓여 있었다. 잔 밑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았다.주원이 수저를 내려놓았다.“나경 씨는 더 먹어요.”“다 먹었어요.”“밥 그대로인데.”나는 밥그릇을 내려다봤다. 남은 밥을 한술 떠서 먹었다. 주원은 재촉하지 않고 빈 접시를 모았다.경란이 주원의 손을 막았다.“넌 들어가 봐. 아버지 또 부르실 수 있으니까.”“서재에요?”“거기 말고 거실에 있어.”주원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경란은 회장 자리의 잔을 들어 안을 확인했다.“물도 안 드셨네.”“새로 가져다드릴까요?”“조금 있다가. 지금 들어가면 싫어하셔.”경란은 잔을 쟁반에 올리고 식당을 나갔다. 나는 밥그릇을 비운 뒤 주방으로 옮겼다. 접시를 받던 사람이 뜨거운 물을 틀려다 내 손을 보고 수도꼭지를 돌렸다.“찬물 먼저 쓰세요.”&ldquo
『오늘 일정: 10월 18일 토요일, 본가 제사』본가 대문 앞에서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휴대폰에 이헌이 보낸 답장이 떠 있었다.『먼저 들어가요. 조금 늦어요.』지난 토요일 숙소에서 나온 뒤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달걀을 먹었는지 묻던 문자 아래로 내가 보낸 본가 도착 시간이 남아 있었다. 화면을 끄고 가방 안쪽에 넣었다.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주원이 안에서 나왔다.“일찍 왔네요.”“도울 일 있을까 해서요.”주원이 내 가방을 받으려다 손을 내렸다.“그거 함부로 놓으면 안 되는 거죠?”“칼 들어 있어요.”“그래서 안 받는 건 아닌데.”주원이 신발장 옆을 비켜 줬다. 나는 가방을 들고 들어갔다. 거실에는 향을 꽂지 않은 향로가 놓여 있었다. 식당 쪽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경란은 상 위에 놓인 접시를 살펴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흔들렸다.“왔니. 손 씻고 이것 좀 해.”경란이 밤이 담긴 쟁반을 가리켰다. 옆에는 껍질을 벗긴 밤과 작은 칼이 따로 놓여 있었다.“모서리만 쳐. 너무 많이 깎지 말고.”“네.”앞치마를 받아 허리에 둘렀다. 주원이 맞은편 의자를 당기자 경란이 손을 저었다.“너는 아버지 오시면 모시고 들어와.”“문 앞에서 기다리라고요?”“현관에 구두 널어 놓은 것부터 치우고.”주원이 의자를 밀어 넣었다.“제 건 가지런히 뒀는데.”경란이 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