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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선반 사이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30 17:00:00

『오늘 일정: 토요일 밤, 대출 원본 확인』

손잡이가 내려간 채 잠깐 멎었다.

이헌이 가리킨 곳은 선반 뒤의 막힌 통로였다. 나는 상자 뚜껑을 덮고 그쪽으로 들어갔다. 운반대까지 치울 시간은 없었다.

철문이 열렸다.

이헌이 외투를 팔에 걸고 내 뒤로 들어왔다. 선반 끝에서 발을 멈추자 가방 바닥이 상자에 닿았다. 나는 끈을 당겨 가방을 배 앞으로 올렸다.

“안에 계십니까?”

문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가 멈췄다. 나는 옆으로 비켜 안쪽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이헌이 그 자리에 섰다.

얼굴 사이가 20cm였다.

고개를 바로 들면 이헌의 입술이 보였다. 나는 시선을 셔츠 단추로 내렸다. 소매를 두 번 접은 팔이 선반 모서리 옆에 있었다.

경비의 무전기에서 잡음이 났다.

“지하 보관실 확인 중입니다. 불 켜져 있고요.”

나는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현석의 출입증으로 들어온 기록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갈 경비는 아니었다.

이헌도 문 쪽을 보고 있었다.

구두 소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철문이 닫힌 뒤 잠금장치가 맞물렸다.

“작업 중이시면 대답해 주세요.”

이헌이 입을 열려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상자 너머를 가리켰다. 경비가 바로 옆 통로에 있는지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경비는 아직 입구에 있었다. 무전기 소리가 같은 자리에서 났다.

“출입 확인 한번 부탁합니다. 조금 전에 찍힌 게 있을 텐데.”

나는 이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서류 보러 왔다고 하면요.”

목소리가 목 안에서 작게 났다.

이헌이 귀를 가까이 대지는 않았다. 내 입이 보이는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출입증 주인부터 부를 거예요.”

현석이 안내대에서 카드 끈을 풀던 손이 떠올랐다. 나는 가방 안의 수첩을 눌렀다.

“그렇다고 계속 숨어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알아요.”

이헌이 통로 바깥을 살폈다.

“나가면 내가 먼저 말할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이 움직이기 전에 문 쪽에서 무전 소리가 다시 났다.

“조현석 비서 맞습니까?”

경비가 대답을 듣고 있었다.

이헌의 손이 선반 끝에서 멈췄다. 나는 가방 끈을 짧게 당겨 어깨에 걸었다. 나가게 되면 가방부터 걸리지 않아야 했다.

발소리가 움직였다.

경비는 곧장 안쪽으로 오지 않았다. 첫 통로부터 확인하는지 구두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멈췄다. 상자 표지를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도 났다.

이헌이 내 발밑을 보았다.

가방 끈 끝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끈을 접어 손에 쥐었다. 이헌은 자기 외투 자락을 팔 위로 더 올렸다.

복도 쪽에서 빛이 들어왔다.

손전등 불빛이 선반 아래를 지나갔다. 나는 발끝을 안으로 당겼다. 뒤꿈치가 벽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이헌과 내 사이에 가방이 끼었다.

숨을 내쉴 때 가방 가죽이 셔츠에 닿았다. 나는 가방을 옆으로 세우려다 멈췄다. 금속 고리가 선반에 부딪칠 수 있었다.

이헌이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두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리를 손바닥 안에 넣었다. 이헌은 나를 보지 않고 선반 틈을 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숨소리만 들렸다.

경비가 다른 통로로 돌아갔다.

나는 참았던 숨을 코로 내쉬었다. 이헌의 어깨도 조금 내려갔다.

“사진은 저장됐어요?”

입술만 움직여 물었다. 이헌이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휴대폰에요.”

나는 가방의 열린 지퍼를 내려다보았다. 사진을 찍은 뒤 수첩을 넣느라 지퍼를 끝까지 닫지 못했다. 휴대폰은 그 안에 있었다.

무음으로 바꿨지만 진동은 껐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 손이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폰 옆에 자와 접지칼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잡아당기면 서로 닿을 수 있었다. 나는 휴대폰 윗부분만 잡고 천천히 올렸다.

그때 발소리가 멎었다.

운반대가 있는 쪽이었다.

“이거 누가 꺼내 놨는데.”

나는 휴대폰을 반쯤 꺼낸 채 굳었다.

경비가 운반대 바퀴를 건드렸다. 바닥에 고무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깔았던 종이는 걷었지만 상자는 그대로 올려 두고 왔다.

뚜껑도 잠그지 못했다.

이헌이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보았다. 이어서 가방 안쪽을 살폈다. 나는 엄지로 휴대폰 옆면을 찾았다.

화면이 켜졌다.

손가락 사이로 빛이 새자 이헌이 손을 올렸다. 내게 손바닥을 보인 뒤 휴대폰 위를 가리켰다.

나는 손을 조금 벌렸다.

이헌의 손이 휴대폰을 덮었다. 손바닥이 화면을 가리고 손가락이 기기 양옆을 눌렀다. 진동이 와도 가방 속 자에 닿지 않게 잡아 주었다.

내 손은 휴대폰 아래에 남았다.

액정 위에 알림이 떴다. 이헌의 손가락 틈으로 현석의 이름이 보였다.

『확인 끝나시면 연락 주십시오.』

짧은 진동이 손 안에서 울렸다.

나는 휴대폰을 더 세게 쥐려다 힘을 풀었다. 이헌이 잡은 기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반에도, 가방 고리에도 닿지 않았다.

진동이 멎었다.

내가 이헌을 보자 이헌은 기다렸다. 휴대폰을 가져가거나 대신 조작하지 않았다.

나는 엄지로 설정 창을 열었다. 화면 밝기를 내리고 진동을 껐다. 잘못 누르지 않았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뒤 화면을 닫았다.

이헌이 손을 뗐다.

손등에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지퍼가 없는 쪽이었다. 꺼낼 때도 소리가 나지 않을 자리였다.

“고마워요.”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헌의 눈이 내 입술에 머물렀다가 문 쪽으로 옮겨갔다. 나는 주머니 밖으로 손을 뺐다.

운반대 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경비가 상자를 열었다.

나는 선반 너머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상자 옆면만 보였다. 해윤제지 이름이 붙은 쪽은 반대편이었다.

“대출 서류 같은데요. 담당자 확인됩니까?”

무전기 너머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경비는 대답을 기다리며 상자 뚜껑을 운반대에 내려놓았다.

딱딱한 소리가 났다.

나는 손가락으로 이헌의 소매 끝을 가리켰다. 이헌이 나를 보았다.

“순서는 찍어 뒀어요.”

“네.”

“혹시 바뀌어도 알아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가 서류철을 꺼내는지 잠금쇠가 달그락거렸다. 나는 가방 안에 둔 수첩을 다시 떠올렸다. 대출 번호와 빛의 방향을 적어 놓았다. 지금 나가서 돌려 달라고 해도 본 것을 잊지는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선반 끝으로 발을 옮겼다.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 다만 먼저 고개를 내밀어 경비가 어디 있는지 살폈다. 나는 이헌의 어깨 뒤에 멈췄다.

아직 나갈 수는 있었다.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온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류를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현석에게 우리 이름을 말하라고 해 놓고 여기서 계속 대답하지 않는 건 맞지 않았다.

“나가요.”

내가 속삭였다.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경비의 무전기가 다시 울렸다.

“예. 잠깐만요.”

경비가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출입증은 비서실 건데 서류는 해윤제지입니다. 위에 보고 먼저 드릴까요?”

나는 발을 멈췄다.

이헌도 움직이지 않았다. 석진이 원본부터 치우면 다음에는 같은 자리를 찾지 못할 수 있었다. 사진 속 눌린 자국을 설명할 때도 원본이 필요했다.

경비는 잘못한 게 없었다. 토요일 밤에 불이 켜진 창고와 열린 상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함부로 나가서 일을 키울 수 없었다.

“원본을 다른 데로 보내면요.”

내가 물었다.

“위치 확인할 거예요.”

“사진만으로는 부족해요.”

“알아요.”

이헌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 이름은 내가 말할게요. 왜 왔는지도.”

“제 얘기는 제가 해요.”

이헌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현석의 대화창을 열었다. 진동을 껐으니 답이 와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원본 확인했습니다. 창고 안에 경비가 와 있습니다.』

보내기를 누르기 전 문장을 다시 읽었다. 현석이 돌아 들어오려고 할까 봐 한 줄을 덧붙였다.

『오시지는 마세요. 저희가 설명하겠습니다.』

보낸 뒤 화면을 껐다.

이헌은 내가 주머니에 넣을 때까지 기다렸다. 가방 끈도 다시 확인했다. 이번에는 바닥에 닿는 게 없었다.

경비가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서류철을 상자에 넣는 소리가 났다. 잠금쇠는 닫지 않았다. 뚜껑이 운반대 가장자리에 걸리며 짧게 긁혔다.

나는 입술을 벌렸다.

“저…….”

이헌의 손이 올라왔다. 내 입을 막지는 않았다. 선반 너머를 가리킨 손끝에 멈춰 섰다.

손전등 불빛이 바닥에 닿았다.

경비가 우리 쪽 통로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빛은 바퀴 아래를 지나 선반 다리에서 멎었다. 이어서 빈 상자 밑을 비췄다.

나는 발을 옮기지 않았다.

이헌과 나란히 서기에는 통로가 좁았다. 이헌이 앞에 서면 내 얼굴이 가려졌다. 나는 어깨를 벽 쪽으로 돌려 밖을 볼 자리를 만들었다.

이헌의 셔츠가 가방 모서리에 걸렸다.

나는 고리를 잡아 천을 빼냈다. 손가락에 소매 안쪽이 닿았다. 이헌이 팔을 조금 들었다가 내가 손을 거두자 내렸다.

바로 앞에서 이헌의 숨이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숨을 쉬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까지 의식하고 있다는 게 싫었다. 바깥에서는 경비가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가면 현석과 아버지 이름부터 말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헌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눈이 그쪽으로 갔다.

이헌이 내 가방 고리를 보았다.

손에 너무 오래 쥐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헌은 손을 펴 보였다. 대신 잡아 주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헌은 더 권하지 않았다. 손을 내린 채 문 쪽을 살폈다.

철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열쇠가 아니었다. 출입 장치가 짧게 울린 뒤 손잡이가 내려갔다.

경비의 손전등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누구십니까?”

문이 바로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고 경비가 운반대 옆을 돌아갔다.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가방을 벽에서 떼었다.

이헌도 선반 끝으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들어오면 더 숨을 곳은 없었다. 나는 입구에서 무슨 말을 먼저 할지 골랐다. 원본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말보다 확인하러 왔다는 말을 먼저 해야 했다.

경비가 문을 열었다.

“여기는 외부인 출입이 안 됩니다. 혹시 비서실에서…….”

말이 중간에 끊겼다.

나는 선반 틈으로 문 쪽을 보았다. 운반대가 시야를 가려 구두 앞코만 보였다. 뒤이어 바지 자락이 보였다.

경비가 한 걸음 물러섰다.

“아, 부사장님.”

가방 끈이 손 안에서 미끄러졌다.

나는 고쳐 잡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이헌이 나를 보았다. 내 앞을 막거나 더 안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

문밖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제가 들어오라고 했어요. 가 보세요.”

“안쪽에 계신 분들 말씀입니까?”

“네. 제가 확인할게요.”

경비가 무전기 소리를 낮췄다. 상자를 가리키며 뭐라고 더 설명했다. 주원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주머니 속 휴대폰에 손을 댔다가 뗐다.

경비의 구두 소리가 문밖으로 나갔다. 철문이 닫혔다.

주원이 운반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뚜껑 열린 상자를 내려다본 뒤 고개를 들었다.

주원의 시선이 우리가 선 선반 사이에서 멎었다.

(5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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