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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서류창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9 19:00:00

『오늘 일정: 토요일 밤, 대출 원본 확인』

“위험하다는 말 듣고도 보겠다는 거예요.”

나는 가방에서 손을 뗐다. 이헌은 탁자 옆에 선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모르는 건 알려 주세요. 보고도 모르겠으면, 그때는 모른다고 할게요.”

이헌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문 하나 밖에서 현석의 통화가 끝났다.

“원본을 볼 방법을 찾고 있어요.”

“해윤 대출 서류요?”

“네. 사본으로는 당신이 보겠다는 걸 확인하기 어려우니까.”

“찾으면 같이 가요.”

이헌은 잠깐 문을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정해지면 연락할게요.”

나는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이헌은 내가 가방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

◈

토요일 밤, 서진캐피털 건물 앞에서 휴대폰 일정을 껐다. 유리문 안쪽에 이헌이 서 있었다. 나는 갈색 가방을 어깨에 고쳐 메고 들어갔다.

이헌은 검은 외투를 팔에 걸고 있었다. 셔츠 소매는 아직 접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어요?”

“방금 왔어요.”

현석이 안내대 옆에서 출입증을 꺼냈다. 목에 거는 끈이 카드에 감겨 있었다.

“자료 위치는 문자로 보내 드렸습니다. 보관 목록은 지난달에 확인한 겁니다.”

이헌이 휴대폰을 열었다.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거죠.”

“네. 옮겼다면 선반에 이동표가 있을 겁니다.”

나는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다 멈췄다.

“출입 기록은 남죠?”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출입증으로 찍힙니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럼 누가 물으면 저희가 갔다고 말씀하세요.”

현석이 카드 끈을 풀었다. 이헌은 출입증을 받기 전에 현석을 보았다.

“내가 가져갔다고 해요. 윤나경 씨도 함께 왔다고.”

현석은 대답 대신 카드를 내밀었다.

“원본을 밖으로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보고 제자리에 둘 거예요.”

내가 말하자 현석이 가방을 잠깐 보았다. 열린 주머니에 붓과 자, 흰 접지칼이 꽂혀 있었다.

“사진으로 확인이 됩니까?”

“눌린 자국은 빛을 바꿔 봐야 해요. 사진에 안 잡히는 것도 있어요.”

현석은 휴대폰으로 보관 목록을 다시 보냈다. 이어서 돌아갈 때 연락해 달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헌이 출입증을 댔다. 문이 열리자 나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에 이헌의 손과 카드가 비쳤다. 그 손이 내 뒤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문이 닫힌 뒤에야 이헌이 물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돼요.”

“원본 못 보고 돌아가면 월요일에 또 오고 싶을 거예요.”

이헌이 외투를 고쳐 들었다.

“그럼 오늘 제대로 봅시다.”

◈

서류창고 앞 복도에는 불이 절반만 켜져 있었다. 환풍기 소리가 천장 쪽에서 났다. 나는 발밑의 안내선을 따라 걸었다.

철문 옆 출입 장치에 현석의 이름이 떴다. 이헌이 손잡이를 내렸고,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불이 켜지자 선반마다 붙은 번호가 보였다. 종이 상자가 위아래로 쌓여 있었다. 통로 끝에는 바퀴 달린 운반대가 세워져 있었다.

이헌이 문이 닫히는 걸 확인했다.

“사진부터 찍어요?”

“찾고 나서요. 꺼내기 전 자리부터 남길게요.”

나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가방에 넣었다. 지퍼는 열어 뒀다. 이헌은 외투를 운반대 손잡이에 걸고 소매를 두 번 접었다.

그 손을 보고 있다가 나는 목록을 다시 열었다.

해윤제지 이름 옆에 대출 번호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처음 받은 대출과 뒤에 붙은 추가 대출이었다.

“여기예요.”

이헌이 선반 표지를 짚었다. 목록과 같은 번호였지만 상자 앞면에는 다른 회사 이름이 붙어 있었다.

나는 상자를 당기지 않고 아래쪽을 살폈다. 선반 모서리에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보관 위치 변경』

바뀐 번호가 손으로 적혀 있었다. 이헌이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안쪽이네요.”

“이것도 찍어 둘게요.”

사진을 찍고 종이를 원래대로 끼웠다. 이헌이 먼저 통로를 확인한 뒤 비켜섰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돌려 선반에 닿지 않게 했다.

안쪽에는 창문이 없었다. 천장의 불빛 아래로 상자 테두리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해윤제지 이름을 찾았을 때는 통로를 한 번 더 돌아야 했다. 상자는 내 어깨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이헌이 손을 올리자 나는 바닥을 가리켰다.

“잠깐만요. 내려놓을 데부터요.”

운반대 위에 깔린 종이를 걷었다. 아래 판은 마른 천으로 닦은 자국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가져온 종이를 펴고 모서리를 눌렀다.

“이제 주세요.”

이헌이 상자를 내렸다. 바닥이 닿기 전에 먼지가 일었다.

코 안이 간질거렸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입술을 다물었다. 눈을 두 번 감았지만 코끝이 더 따가워졌다. 급히 가방을 더듬자 이헌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받아서 코를 가렸다.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재채기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조금 맺혔다.

이헌이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들다가 멈췄다.

“괜찮아요?”

“먼지요. 조금만요.”

나는 손수건의 깨끗한 귀퉁이로 눈 밑을 눌렀다. 이헌은 상자를 내 쪽에서 멀리 밀고 뚜껑을 열었다.

“세탁해서 드릴게요.”

“천천히 줘요.”

손수건을 접어 외투 주머니에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내 외투가 아니었다. 이헌도 내가 잡은 주머니를 보았다.

나는 손을 거두고 가방 안쪽에 넣었다.

“가방이 이쪽에 있었네요.”

이헌은 대답하지 않고 상자 안의 서류철을 세웠다. 귀 끝이 뜨거워져 나는 보관 목록으로 눈을 내렸다.

◈

서류철 등에는 회사 이름과 대출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꺼내기 전 모습을 찍었다. 이헌이 휴대폰 화면과 철의 순서를 함께 확인했다.

“맨 앞이 처음 대출이에요.”

원금 40억 원이 적힌 서류였다. 그 뒤에 추가 대출 서류가 따로 묶여 있었다. 나는 차례를 바꾸지 않고 운반대에 나란히 놓았다.

종이를 만지기 전에 손을 닦고 완전히 말렸다. 이헌이 내가 꺼내 놓은 장갑을 보았다.

“그건 안 껴요?”

“지금 종이는 맨손이 나아요. 장갑 끼면 모서리를 세게 잡을 수 있어서요.”

나는 손톱이 닿지 않게 첫 장을 넘겼다. 아버지 이름이 나온 곳에서 손을 멈췄다.

윤기환.

공장 납품 장부에서도 여러 번 본 서명이었다. 나는 원금이 적힌 장보다 그 아래 서명을 더 오래 보았다.

이헌이 내 맞은편으로 오려다 통로 폭을 확인하고 옆에 섰다. 팔 사이에 가방 끈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나는 끈을 운반대 아래로 밀었다.

“이게 아버님 서명 맞아요?”

“평소 쓰시는 모양은 맞아요. 이것만으로 직접 쓰셨다고 할 수는 없고요.”

추가 대출 서류를 펼쳤다. 아버지 이름 끝이 위로 꺾여 있었다. 앞의 서명에도 같은 자리에 꺾인 획이 있었다.

나는 두 장을 포개지 않고 나란히 밀어 놓았다.

“사본에서 봤던 게 이거예요.”

“끝부분이요?”

“네. 아버지는 빨리 쓰시면 여기가 벌어져요. 그런데 이건 꺾이는 자리에서 한 번 멈췄어요.”

이헌은 몸을 숙였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다.

“멈춘 게 보여요?”

“잉크가 조금 더 고여 있어요. 그건 정상 서명에도 생길 수 있어요.”

나는 휴대폰의 손전등을 켜고 불빛을 낮췄다. 천장 불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종이 표면이 드러났다.

서명 아래에 가는 눌림이 있었다.

휴대폰을 반대쪽으로 옮기자 자국의 한쪽이 어두워졌다. 나는 숨을 내쉬고 각도를 다시 바꿨다.

“이헌 씨. 여기 좀 비춰 주세요.”

이헌이 휴대폰을 받았다. 손이 닿지 않도록 나는 먼저 손을 뗐다.

“이 높이로요?”

“조금만 낮게요. 네, 거기.”

내 손가락은 종이 위에서 멈췄다. 누르지 않고 획 옆을 따라 움직였다.

잉크 선 밑으로 다른 선이 비쳤다. 정확히 겹치지 않은 부분은 종이 바탕까지 이어졌다.

“서명 밖에도 자국이 있어요.”

이헌이 빛을 고정했다.

“윗장에 쓴 게 눌린 걸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부터 봐 주세요.”

나는 종이를 돌리지 않고 몸을 옮겼다. 불빛이 들어오는 쪽에서 보면 눌린 선 끝에 섬유가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

“여기는 이 방향으로 눌렸어요. 그런데 잉크는 반대로 올라가요.”

이헌이 내 손끝과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같이 생긴 게 아니란 뜻이에요?”

“한 번에 쓴 흔적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첫 대출 서류의 같은 글자를 보았다. 굽는 자리에서 섬유가 눌린 방향과 잉크 선이 이어졌다. 추가 대출 서류에서는 중간에 어긋났다.

“먼저 눌린 선을 따라 썼을 가능성이 있어요. 여기서 벗어났다가 다시 들어갔고요.”

“서명을 덧그렸다는 거네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가방에서 자를 꺼내 서명 옆에 놓았다.

“그 흔적으로 보여요. 누가 어떻게 했는지는 감정을 받아야 해요.”

이헌이 입술을 다물었다. 휴대폰을 든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 전체가 나온 사진과 글자 옆의 눌림이 보이는 사진을 따로 남겼다. 빛을 옮길 때마다 같은 자리가 보이는지 확대해서 확인했다.

손가락 끝에 땀이 났다. 종이에서 손을 떼고 바지 옆에 문질렀다. 아버지가 쓴 글씨를 읽을 때와는 달랐다. 어디서 멈췄고 어디로 눌렀는지, 그 자국부터 다시 찾았다.

◈

“다른 것도 볼게요.”

나는 나머지 추가 대출 서류를 펼쳤다. 이헌이 빛을 옮겼다.

이번에는 이름 첫 획 바깥으로 눌린 자국이 더 길게 나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낮춰 확인했다. 종이 아래에 받침이 있었는지 보려고 뒷면도 살폈다.

등 뒤 선반에 팔꿈치가 닿았다. 빈 상자가 조금 밀리며 마른 소리를 냈다.

우리는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환풍기 소리만 들렸다.

이헌이 먼저 상자를 제자리로 밀었다. 나는 종이를 운반대에 내려놓았다.

“조금 좁네요.”

“내가 건너갈게요.”

“아니요. 빛이 바뀌면 다시 찾아야 해요.”

나는 운반대를 옆으로 조금 옮겼다. 바퀴가 덜컥거려 손으로 붙들었다. 이헌이 반대편을 잡아 줬다.

운반대가 멈춘 뒤에도 이헌의 손은 내 손 옆에 있었다. 손등 사이가 3cm쯤 됐다. 나는 먼저 손을 떼고 자를 집었다.

“아까 것과 같은 자국이에요?”

이헌이 낮게 물었다.

“겹쳐 쓴 건 비슷해요. 모양은 달라요.”

나는 사진을 더 찍고 원본의 모서리를 확인했다. 접힌 자리에 찢김이 있어 그곳을 피해서 넘겼다.

두 장 모두 아버지 이름이 있었다. 두 장 모두, 잉크 아래의 자국이 글씨와 맞지 않았다.

나는 대출 번호와 서명 부분이 함께 나온 사진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됐어요.”

이헌이 불빛을 거뒀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예요?”

“서명 자리에 먼저 생긴 눌림이 있어요. 그걸 따라 잉크를 올린 흔적이 있고요. 아버지가 직접 쓰지 않았다는 판단은 감정 맡기고 받아야 해요.”

이헌은 휴대폰을 내게 돌려줬다.

“그대로 적어 둬요.”

나는 수첩을 꺼냈다. 손이 급해 첫 글자가 비뚤어졌다. 줄을 바꾸고 본 것만 적었다. 빛을 비춘 방향도 화살표 대신 말로 썼다.

이헌이 상자 뚜껑을 들어 먼지 묻은 바깥쪽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나는 수첩을 넣고 서류를 처음 순서대로 맞췄다.

종이 아래에 자가 남아 있었다. 자를 빼자 서명 끝이 다시 보였다.

아버지는 그동안 저 이름 옆에 적힌 돈을 갚으려고 공장에 나갔다. 나는 서류철을 닫기 전에 대출 번호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서류철 모서리를 맞추고 잠금쇠를 끼웠다. 처음 찍은 사진을 열어 순서를 확인했다. 이헌이 상자를 올릴 수 있도록 운반대 위의 종이도 걷었다.

그때 복도에서 구두 밑창 소리가 났다.

이헌이 상자에서 손을 뗐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발소리는 철문 쪽으로 가까워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걷다가 문 앞에서 멎었다. 무전기 잡음에 이어 경비가 짧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방 지퍼를 닫는 손이 멈췄다. 이헌이 운반대에 걸린 외투를 소리 없이 들어 올렸다.

나는 아직 선반에 넣지 못한 서류철을 내려다보았다.

문밖에서 열쇠가 부딪쳤다.

이헌이 안쪽 통로를 가리켰다. 나는 서류철을 상자에 넣고 가방을 들었다.

철문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5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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