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3월 1일 토요일, 서진 본가 방문』
“날짜를 정하기 전에 서류부터 확인할게요.”
나는 공고문에 댄 손을 떼지 않았다.
“결혼 얘기 하는데 무슨 서류를 또 봐.”
“약혼하면 상환을 미뤄 준다고 하셨어요. 이번에도 말로만 듣지는 않을 거예요.”
석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주원이하고 먼저 얘기해 봐라.”
“서면으로 보내 주시면 읽어 볼게요.”
통화가 끊겼다. 나는 수첩에 마지막 말을 적고 펜을 닫았다. 이헌이 내 옆에 서 있었다. 공장 문에 붙인 종이가 테이프 사이로 조금 들떠 있었다.
“결혼을 앞당기면 취소하겠대요.”
“들었어요.”
“승낙한 거 아니에요.”
이헌은 내가 든 수첩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적어 둔 거, 나중에 보여 줘요.”
나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이헌이 들뜬 종이를 눌렀다. 내가 손을 댔던 자리에서 손가락 두 개쯤 떨어진 곳이었다.
◈
토요일 오후, 본가 현관에서 갈색 가방을 내려놓았다.
재단에서 맡긴 장부를 회장에게 먼저 보여 드리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보관함에서 장부를 꺼내며 관리인에게 물었다.
“회장님은 서재에 계세요?”
“안쪽에서 화분 보고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현관 옆 선반에 다른 구두가 없었다. 나는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쳤다. 복도를 따라가자 유리문 너머로 화분이 보였다.
회장은 창가에 서 있었다. 한 손에 물주전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선반을 짚고 있었다.
“회장님.”
“왔나.”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주전자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흙이 젖었는데도 손잡이를 기울인 채였다.
나는 장부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물이 넘쳐요.”
화분 밑의 받침에 물이 찼다. 가장자리에서 넘친 물이 선반 아래로 떨어졌다. 회장이 주전자를 세우려 했지만 손잡이가 흔들렸다.
나는 옆에 세워 둔 빈 받침을 집었다. 선반 밑으로 밀어 넣자 물이 그 안에 고였다.
“여기 두시면 돼요.”
주전자 놓을 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회장은 바로 놓지 못하고 손목을 한번 돌렸다. 나는 손잡이를 빼앗지 않고 기다렸다.
주전자 바닥이 선반에 닿았다.
“내가 물을 너무 줬군.”
“아래 고인 것만 비우면 돼요.”
나는 화분을 조금 들어 받침을 빼냈다. 생각보다 무거워 양손으로 받쳤다. 회장이 빈 받침을 안쪽으로 밀어 주었다.
“거기에 놓게.”
“네. 손만 조금 빼 주세요.”
화분을 내려놓고 고인 물을 비웠다. 관리인이 수건을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나는 선반에 남은 물을 닦은 뒤 흙 표면을 살폈다.
“오늘은 더 안 주셔도 되겠어요.”
“흙이 말라 보여서 줬는데.”
“겉만 보고 주면 아래에 물이 남기도 해요.”
회장이 젖은 손가락을 폈다. 소매 끝에도 물이 묻어 있었다.
나는 마른 수건을 건넸다. 회장은 수건을 받았지만 손을 감싸 쥐는 데 시간이 걸렸다. 팔순 잔치 때보다 손끝의 떨림이 컸다.
“이것도 고칠 줄 아나?”
“화분은 잘 몰라요. 종이 젖은 건 다뤄 봤고요.”
“그래. 각자 아는 게 있지.”
회장이 수건으로 손을 눌렀다. 나는 옆 의자를 조금 빼 두었다. 회장은 화분을 한 번 더 보고 나서 앉았다.
◈
장부를 펼칠 자리를 만들려고 작은 탁자 위의 찻잔을 옮겼다.
회장은 컵받침에 손을 올린 채 내가 보관함을 여는 걸 지켜봤다. 나는 장부 아래에 보존지를 깔고 표지를 넘겼다.
“실을 다시 묶은 곳은 이쪽이에요. 원래 구멍을 그대로 썼어요.”
“새로 뚫지 않고?”
“네. 더 뚫으면 종이가 약해져요.”
회장이 장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책장을 받치는 판을 먼저 댔다.
“여기에 손 올리시면 돼요.”
손가락이 종이에 닿기 전에 판 위에 멈췄다. 회장은 내가 고친 등 쪽을 들여다봤다.
“옛것은 남겨 놓는군.”
“없애면 다시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못 쓰게 된 것도?”
“떨어진 조각도 같이 둬요. 나중에 필요한 부분일 수 있어서요.”
나는 보관함 안의 봉투를 열어 보였다. 떨어져 나온 실과 종이 조각을 따로 넣어 두었다. 회장이 봉투의 적힌 날짜를 읽었다.
“공장에서도 자네가 이런 걸 하나?”
“아버지가 서류를 보여 주시면 봐요.”
“요즘 자주 가는 모양이던데.”
나는 봉투 입구를 닫았다. 회장의 손이 판 위에서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판을 짧게 두드렸다.
“네. 확인할 일이 있어서요.”
“장사가 잘 안되나?”
“납품은 계속하고 있어요.”
“그걸 물은 게 아니네.”
회장이 내 얼굴을 봤다.
“자네 무슨 일 있나.”
나는 보관함 모서리에 손을 얹었다. 수첩은 가방 안쪽에 있었다. 공장 문에 붙은 통지와 석진의 말을 적어 둔 수첩이었다.
“회장님, 해윤 대출 때문에…….”
회장이 찻잔을 들었다. 잔 안의 물이 흔들렸다.
나는 말을 멈추고 컵받침을 가까이 옮겼다. 회장이 잔을 내려놓았다. 받침 밖으로 물이 조금 흘렀다.
“말하게.”
“손은 괜찮으세요?”
“하던 얘기부터 해.”
나는 수건으로 탁자에 흐른 물을 닦았다. 회장은 손을 탁자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떨리는 손등을 그대로 둔 채 기다렸다.
“상환을 미뤄 주기로 했는데 회수 통지가 왔어요. 공장 부지 경매 절차를 시작하겠다고요.”
“언제까지라던가.”
“3월 31일이에요.”
회장은 잠시 창밖을 봤다. 나는 가방 쪽으로 손을 옮겼다. 수첩을 꺼내려다 장부 옆에 놓인 봉투를 봤다.
여기 있는 건 내가 적어 둔 말이 전부였다. 합의서도 통지도 작업실에 두고 왔다.
“석진이가 뭐라고 하던가.”
나는 가방 끈을 쥐었다.
“결혼 날짜를…….”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관리인이 빈 쟁반을 들고 유리문 앞에 섰다. 나는 몸을 옆으로 비켜 통로를 내주었다.
회장이 손을 들어 쟁반을 가리켰다.
“그 잔은 두고 가게.”
관리인이 물러난 뒤에도 회장은 나를 보고 있었다.
“날짜를 바꾸자던가?”
“앞당기자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자네는?”
“서류부터 확인하겠다고 했어요.”
나는 가방 끈을 놓았다.
“제가 말씀드리려면 합의서와 통지를 같이 가져오는 게 맞겠어요. 지금 말로만 옮기고 싶지는 않아요.”
회장은 탁자에 놓인 봉투를 손끝으로 밀었다. 내가 보관함에 넣기 좋게 방향을 돌려 주었다.
“그럼 그렇게 하게.”
“네.”
“결혼 날짜는 종이 고치듯 바꾸는 게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회장은 잔 대신 수건을 집었다.
“당사자가 와서 얘기해야지.”
누구를 가리키는지 묻지 못했다. 회장은 수건을 접으려다 한쪽을 놓쳤다. 나는 떨어진 귀퉁이만 탁자 위로 올려 주었다.
◈
장부를 덮을 때 이헌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회장이 먼저 이헌을 불렀다.
“왔으면 저것 좀 옮겨라.”
선반 끝에 있는 화분이었다. 바닥을 닦느라 다른 화분과 떨어뜨려 놓은 뒤였다.
이헌이 내 앞을 지나 선반으로 갔다. 셔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다.
“어디로 옮길까요.”
“원래 있던 데로. 받침은 갈아 놓았고.”
“옆에 두시면 돼요. 물이 많이 들어갔어요.”
내가 말하자 이헌은 화분 밑을 확인했다. 화분을 들어 선반 안쪽으로 옮기고, 받침 가장자리를 맞췄다.
회장은 이헌의 손을 보고 있었다.
“다들 바쁜데 화분 때문에 불렀군.”
“장부 가져온 날이잖아요.”
이헌이 돌아섰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가 곧 회장 쪽으로 옮겨 갔다.
“다 보셨습니까?”
“잘 고쳤어. 도서관에 돌려보내도 되겠네.”
나는 보관함 뚜껑을 닫았다. 이헌이 탁자 옆에 섰다.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외투 소매가 보였다.
회장이 이헌에게 물었다.
“점심은 먹었나.”
“먹었습니다.”
“저 사람은 안 먹은 모양이야. 차도 그대로고.”
나는 식어 버린 차를 봤다. 장부를 펼칠 자리를 만들면서 내 잔만 창가로 밀어 두었다.
“나가서 먹겠습니다.”
“일하는 사람들 밥은 제때 먹여야지.”
이헌은 대답하지 않고 내 잔을 탁자 쪽으로 가져다 놓았다. 손잡이는 내 쪽으로 돌아와 있었다.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보관함을 놓고 의자를 잡았다. 이헌은 회장 곁으로 갔지만 팔을 잡지는 않았다.
“서재로 가실까요?”
“내가 가네. 장부나 들어 줘라.”
회장이 복도로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있었다.
이헌이 보관함 손잡이를 들었다.
“무거워요?”
“들 수 있어요.”
“알아요. 외투 입어요.”
나는 외투를 걸쳤다. 단추를 끼우려는데 손가락에 남은 물기가 묻었다. 수건을 썼어야 했다. 나는 주머니의 손수건으로 손부터 닦았다.
이헌은 그동안 보관함을 내려놓지 않았다.
◈
현관으로 가는 복도 끝에서 경란과 마주쳤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외투 깃이 올라와 있었다. 경란은 내가 아니라 이헌이 든 보관함부터 봤다.
“일 때문에 왔니?”
“네. 재단 장부 가져왔어요.”
“회장님은?”
“서재로 가셨어요.”
경란은 유리문 안을 살폈다. 선반 아래에 놓인 수건과 젖은 받침이 남아 있었다.
“물을 또 직접 주셨어?”
“조금 넘쳐서 닦았어요.”
경란은 관리인을 부르려다 말고 손에 든 가방을 고쳐 들었다.
“나경아. 갈 때 문 잘 닫아. 여기 바람 들어오면 춥다.”
“네.”
경란이 돌아섰다. 찻집에서 들은 말을 꺼낼 틈은 없었다. 이헌도 붙잡지 않았다.
구두 소리가 복도 안쪽으로 멀어졌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이헌이 보관함을 밖에 내려놓는 동안 문을 잡고 있었다.
“식사 안 했어요?”
“아침은 먹었어요.”
“아버지가 물은 건 점심인데.”
“이헌 씨도 그렇게 대답했잖아요.”
이헌이 문 아래를 봤다. 내 가방 끈이 문틈에 끼어 있었다. 나는 끈을 당겼지만 장식이 걸렸다.
“잠깐.”
이헌이 문을 조금 더 밀었다. 소매와 내 팔 사이가 좁아졌다. 나는 가방을 먼저 빼고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문 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는 한 계단 내려섰다. 관리인이 문을 닫으러 왔다. 이헌은 손을 떼고 보관함을 다시 들었다.
“조심히 가세요.”
관리인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문이 닫힌 뒤에야 이헌도 따라 내려왔다.
주차된 차까지 가는 동안 발밑을 봤다. 이헌은 내 옆이 아니라 뒤에서 걸었다.
◈
차 앞에서 나는 가방을 열어 수첩을 꺼냈다.
“회장님이 무슨 일 있냐고 물으셨어요.”
이헌이 뒷좌석 문을 열다 말았다.
“뭐라고 했어요?”
“경매 통지가 왔다고요. 결혼 날짜 앞당기자는 말씀도 들었다고 했어요.”
“다른 말은요?”
“서류를 가져와서 말씀드리겠다고 했어요. 제가 적은 것만 보여 드릴 수는 없어서요.”
나는 수첩을 펼쳤다. 석진과 통화한 날의 기록 아래로 빈칸이 남아 있었다.
“손이 많이 떨리세요. 전에 뵀을 때보다요.”
“알아요. 진료받고 계세요.”
이헌이 보관함을 좌석에 놓았다. 고정 끈을 채우는 동안 나는 열린 문 앞에 서 있었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요?”
이헌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 뜻 아니에요.”
“제가 직접 확인한 건 말씀드릴 거예요.”
“그러면 돼요.”
나는 수첩을 덮었다. 이헌이 차 문에 손을 얹었다.
“나경아.”
본가 현관이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문 쪽을 돌아봤다. 닫힌 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안에서는 안 불렀어요.”
이헌이 손을 내렸다. 나는 가방 안에 수첩을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그때 이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은 화면을 보고 엄지로 옆면을 눌렀다. 차 문을 닫는 동작이 늦어졌다.
“회사 일이에요?”
“형님이에요.”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헌이 다시 화면을 켰다. 문자를 읽고 나서 본가 쪽을 한 번 봤다.
“저한테 하신 얘기예요?”
“나한테요.”
이헌이 휴대폰을 돌려 주었다. 나는 화면이 꺼지기 전에 글을 읽었다.
『네가 해외 가면 해윤 경매는 없던 일로 하지.』
(57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