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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서재 문 앞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4 18:00:00

『오늘 일정: 10월 18일 토요일, 본가 제사』

회장이 식탁에 놓인 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석진은 의자 뒤에 선 채 기다렸다.

“여기서 하면 안 되는 얘기냐.”

“식사들 하시는데 길어질 것 같아서요.”

회장이 수건을 내려놓았다. 이헌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너도 와.”

회장의 말에 이헌이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안경을 고쳐 쓰고 식당을 나갔다. 회장이 뒤따랐고, 이헌은 회장이 문턱을 넘는 것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식탁 위에 남은 물병을 들었다. 이헌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쯤 찬 잔이 놓여 있었다. 잔 밑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았다.

주원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나경 씨는 더 먹어요.”

“다 먹었어요.”

“밥 그대로인데.”

나는 밥그릇을 내려다봤다. 남은 밥을 한술 떠서 먹었다. 주원은 재촉하지 않고 빈 접시를 모았다.

경란이 주원의 손을 막았다.

“넌 들어가 봐. 아버지 또 부르실 수 있으니까.”

“서재에요?”

“거기 말고 거실에 있어.”

주원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경란은 회장 자리의 잔을 들어 안을 확인했다.

“물도 안 드셨네.”

“새로 가져다드릴까요?”

“조금 있다가. 지금 들어가면 싫어하셔.”

경란은 잔을 쟁반에 올리고 식당을 나갔다. 나는 밥그릇을 비운 뒤 주방으로 옮겼다. 접시를 받던 사람이 뜨거운 물을 틀려다 내 손을 보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찬물 먼저 쓰세요.”

“괜찮아요. 이것만 놓을게요.”

그릇을 건네고 손을 씻었다. 손끝에 남아 있던 밤 가루가 물에 씻겼다.

식당에 돌아오자 주원이 내 의자를 당겨 놓고 있었다. 가방이 발치에서 옆으로 누워 있었다.

“이거 넘어졌어요. 안 열어 봤어요.”

“열어도 종이밖에 없어요.”

“칼도 있다면서요.”

주원이 가방을 세워 줬다. 나는 안쪽 칸의 휴대폰을 꺼냈다. 아버지에게서 공장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답장을 쓰고 가방을 들었다.

“잠깐 전화하고 올게요.”

“거실은 소리 울려요. 현관 쪽으로 가요.”

주원은 식탁에 남은 냅킨을 모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로 나왔다.

◈

현관 옆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간 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공장 안이세요?”

“응. 잠깐 보러 왔다. 너 아직 본가냐?”

“식사 끝났어요. 혼자 들어가셨어요?”

“염 반장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벽에 등을 대지 않고 섰다.

“추운데 창고까지 돌아보지 마세요. 바닥 젖은 데도 있고요.”

“안 간다. 너도 어른들 계신 데서 전화 오래 하지 말고.”

“네. 집에 가실 때 문자 주세요.”

통화가 끊겼다. 화면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돌아서는 순간 서재 쪽에서 석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제가 한 약속은 뭡니까.”

식당에서는 들리지 않던 말이었다. 복도 끝 서재 문이 덜 닫혀 있었다. 문 아래로 불빛이 길게 나와 있었다.

나는 걸음을 늦췄다.

“네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

회장의 물음에 석진이 곧바로 대답했다.

“해외 법인에 필요한 기간이 있습니다. 현지 임원들한테도 그렇게 설명했고요. 1년을 채우기도 전에 돌아오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제가 보고드리겠습니다.”

이헌의 목소리였다.

“너한테 묻는 게 아니야.”

나는 가방 손잡이를 팔 안쪽으로 옮겼다. 이헌이 돌아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이 집 안에도 여럿이었다. 서재 문 앞까지 가면 안 됐다.

식당 쪽으로 발을 돌리려는데 회장의 말이 들렸다.

“내가 오라고 했다는데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냐.”

복도 벽에 걸린 액자 유리에 서재 불빛이 비쳤다. 나는 그 아래에 멈췄다.

“일 때문에 보낸 겁니다.”

석진이 말했다.

“일이면 보고받으면 돼. 사람을 거기 묶어 둘 이유가 아니지.”

“제가 이헌이를 벌주려고 보냈다는 말씀이십니까?”

안에서 의자가 끌렸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꺼내 쥐었다. 화면은 켜지 않았다.

“형님.”

이헌의 말이 낮게 들렸다.

“제 귀국 문제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아버지께 언성 높이지 마세요.”

“네가 지금 내 말투를 가르쳐?”

“밖에서도 들립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휴대폰 옆면을 눌렀다. 켜진 화면에 일정이 떠올랐다. 아직 오늘 제사 알림을 지우지 않은 채였다.

서재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소리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

복도 중간에 낮은 장식장이 있었다. 그 위에 놓인 빈 쟁반을 집었다. 식당에 가져다 놓고 가방을 찾아 나가면 됐다.

쟁반 밑에 받쳐 둔 천이 함께 들렸다. 한쪽 귀퉁이가 장식장 모서리에 걸려 있어 손으로 풀었다. 그때 이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해윤 쪽에 보낸 사람들부터 거둬 주세요.”

나는 쟁반을 든 채 멈췄다.

“무슨 사람.”

“공장 담장에 측량 장비를 세웠습니다.”

“정당한 업무야. 채권이 있는데 땅이 어떤 상태인지 보지도 못하나.”

“공장에 동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동의가 필요한 단계가 오면 구하겠지.”

쟁반 손잡이가 손바닥을 눌렀다. 보리차를 받아 마시고 빈 컵을 돌려주던 측량 기사의 손이 떠올랐다. 기사들을 돌려보낸 뒤 걸려 온 전화도 기억났다.

결혼식 날 아버지 도장을 찍게 하겠다고 했다.

“그 땅을 왜 네가 챙겨.”

석진이 물었다.

“형님이 결혼과 공장 일을 묶어서 말씀하시니까요.”

“집안일이야.”

“해윤 직원들한테도 집안일입니까.”

나는 쟁반을 장식장에 다시 내려놓았다. 나무에 닿기 전에 밑으로 천을 밀어 넣었다.

회장이 기침했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뒤따랐다.

“결혼식 얘기가 왜 나와.”

“일정이 겹쳐서 그렇습니다. 양가가 정리할 게 있으니 날짜를 맞추자는 뜻이었어요.”

식탁에서 들었던 말 그대로였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아버지와 주고받은 문자 아래에 손가락을 댔다가 뗐다. 지금 전화하면 아버지가 공장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이헌이 말했다.

“결혼하는 사람의 뜻부터 확인하셔야 합니다.”

“주원이 뜻은 내가 알아.”

“윤나경 씨 뜻은요.”

내 이름이 나오자 가방을 고쳐 들던 손이 멎었다.

“네가 그걸 왜 묻지?”

“당사자니까요.”

“네가 말하는 당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올 사람이야.”

“들어오기 전에도 자기 뜻은 있습니다.”

나는 벽에서 떨어져 섰다. 서재 문까지 가는 길에 가릴 물건이 없었다. 누가 문을 열면 내가 먼저 보일 자리였다.

석진이 웃는 소리가 짧게 났다.

“나경이가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나 보네.”

“제가 확인한 일로 말씀드립니다.”

“그 애하고 얼마나 가깝길래.”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나서면 이헌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공장에 들어온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내가 말하면 됐다.

한 발을 떼기 전에 회장이 말했다.

“그 얘기는 그만해.”

“아버지.”

“밥 먹으러 온 애를 왜 여기서 따져.”

나는 발을 다시 붙였다. 서재 안에서는 아무도 말을 잇지 않았다.

◈

복도 반대편에서 그릇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장식장 옆으로 비켰다. 주방에서 나온 사람이 쟁반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내 손에 든 가방을 보고 고개를 숙였을 뿐,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식당 문이 닫혔다.

서재에서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해외 법인 보고는 월요일에 따로 하겠습니다.”

이헌이 말했다.

“당분간은 국내 일정도 같이 보겠습니다.”

“누가 그렇게 정했어.”

“내가.”

회장이 답했다.

“연말에 발표할 거다.”

“무슨 발표를 하신다는 겁니까.”

“내 뒤에 누가 앉을지.”

나는 장식장 위의 천을 놓았다. 접힌 귀퉁이가 손에서 빠졌다.

석진의 말이 빨라졌다.

“그건 이미 정리가 끝난 일 아닙니까.”

“내가 끝냈다고 했나.”

“제가 부회장으로 일한 게 몇 년인데요.”

“안다.”

“아시면서 이헌이를 지금 불러들여요? 밖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내가 누구한테 뭘 맡기는지 아직 말 안 했다.”

이헌은 말이 없었다.

나는 문틈을 보지 않으려고 바닥으로 눈을 내렸다. 복도 카펫 끝이 뒤집혀 있었다. 회장이 식당으로 올 때 짚었던 지팡이는 없었지만, 아까 문틀을 잡고 들어서던 손이 떠올랐다.

석진이 다시 말했다.

“확인되지도 않은 얘기로 저를 재단하시면 안 됩니다.”

“뭐가 확인이 안 됐는데.”

잠깐 말이 끊겼다.

“그런 뜻이 아니라, 밖에서 하는 말들이요.”

“내가 밖에서 뭘 들었다고 했나?”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손바닥에 손잡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회장이 물었다.

“결혼식 전에 처리할 일이 있다며.”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양가 서류 정리라고요.”

“그 서류 나한테도 가져와.”

“아버지가 보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져오라고.”

이번에는 석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보낼 문자 창을 열었다.

『본가에서 서류 얘기 나와도 바로 도장 찍지 마세요. 먼저 저한테 보여 주세요.』

보내기를 누르자 곧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답장은 짧았다.

『알았다. 네가 보고 하자.』

나는 화면을 끄고 가방 안에 휴대폰을 넣었다.

서재 안에서 이헌이 입을 열었다.

“해윤에 필요한 확인은 저도 돕겠습니다.”

“너는 네 일이나 해.”

“그 일도 제 보고에 넣겠습니다.”

석진이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누가 네 보고에 넣으래.”

“석진아.”

회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긴 내 서재다.”

이헌은 말을 잇지 않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바닥에 그림자가 움직였다가 멈췄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

식당 쪽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틀었다. 구두 앞코가 카펫 끝에 걸렸다. 발을 들자 접힌 부분이 조금 더 말려 올라왔다.

나는 장식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회장이 나오다 밟으면 넘어질 수 있었다. 무릎을 굽히고 카펫 귀퉁이를 잡았다. 아래 깔린 미끄럼 방지 천이 함께 접혀 있었다.

한 손으로 카펫을 들고 다른 손을 밑에 넣었다. 고무 줄 사이에 구두 자국이 눌려 있었다. 천부터 펴고 위를 덮으면 됐다.

서재에서 석진이 말했다.

“그럼 주원이 결혼식은 예정대로 하는 겁니까.”

나는 손을 멈췄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집안 일정에 변동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 모아 놓고 서류부터 들이밀지 마.”

회장의 대답 뒤로 이헌이 몇 마디 했지만 낮아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카펫을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안에서 내 이름이 또 나올까 봐 문을 봤다. 문틈은 그대로였다.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깨가 들렸다. 급히 가방을 잡으려다 손에 걸린 카펫을 당겼다. 카펫 위에 걸쳐 있던 장식장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위에 둔 쟁반이 흔들려 벽에 부딪쳤다.

짧은 소리였지만 서재 안의 말이 끊겼다.

나는 쟁반을 잡았다. 천이 반쯤 밀려 나와 있었다. 손바닥으로 눌러 멈추고 카펫을 내려다봤다. 아직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서재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손을 뻗어 밑에 깔린 천을 폈다. 카펫을 덮고 모서리를 눌렀다. 구두가 걸리지 않게 끝을 바닥에 붙였다.

문손잡이가 움직이는 소리는 없었다.

서재 안에서 이헌이 물었다.

“밖에 누구 계세요?”

나는 쟁반에서 손을 뗐다. 대답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등 뒤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경란이 복도에 서 있었다. 내가 내려놓은 가방을 보고, 편 카펫을 보고, 서재 문으로 눈을 옮겼다.

나는 장식장을 짚고 일어섰다.

경란은 식당 쪽을 돌아본 뒤 내게 가까이 왔다. 손에 든 냅킨이 구겨져 있었다.

서재 안에서 다시 의자가 끌렸다. 나는 가방을 들지 못한 채 섰다. 경란이 내 손목 아래를 잡았다. 진주 귀걸이가 고개를 기울인 쪽으로 흔들렸다.

“나경아, 너 거기서 뭐 들었니.”

(7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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