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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녹음 세 개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5 19:00:00

『오늘 일정: 10월 21일 화요일, 호텔 약속』

“조건부터 들을게요.”

주원은 흰 휴대폰을 쥔 채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앉아서 이야기해요. 여기서는 누가 들을지 몰라요.”

이헌이 보안실 쪽을 돌아봤다. 안에서 의자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고 열린 승강기에 탔다.

주원은 22층을 눌렀다.

층 표시가 올라가는 동안 흰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주원은 알림을 확인하지 않고 옆 단추를 눌렀다. 검어진 화면에 천장 등이 비쳤다.

“그걸로 계속 녹음한 거예요?”

“전부는 아니고요.”

주원은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하고 따로 만날 때요.”

이헌은 층 표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주원이 먼저 나갔다. 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회의실은 비어 있었다. 주원은 출입증으로 문을 열고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나는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이헌은 내 옆 의자를 빼다가 한 칸 건너에 앉았다. 주원은 맞은편에 휴대폰을 놓고 창가로 갔다.

창 손잡이가 돌아갔다. 주원은 창을 2cm쯤 열고 손을 뗐다. 커튼 끝이 창틀에 끼자 다시 빼냈다.

전에 둘이 이야기할 때도 녹음이 나오기 전 저렇게 창을 조금 열었었다.

“많이 열면 문이 덜컹거려요.”

묻지 않았는데 주원이 말했다.

“안 열면 답답하고.”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건 주원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코트 단추만 풀었다. 가방은 무릎에 두었다.

주원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결혼식 날, 파혼은 내가 직접 할게요.”

나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날까지 약혼을 유지하자는 뜻이에요?”

“네.”

“녹음을 주는 대가로요?”

주원의 손이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

“먼저 들어요. 듣고 거절해도 돼요.”

“거절하면 못 받는 건가요?”

“아니요. 파일은 줄 거예요.”

나는 맞은편의 빈 의자를 보다가 주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들어 볼게요.”

◈

주원은 첫 파일을 열었다. 날짜를 확인한 이헌이 의자를 조금 당겼다.

“이건 어디서 녹음했어?”

“아버지 차 안. 캐피털 대표하고 통화하셨어.”

주원이 재생을 눌렀다.

처음에는 옷이 스치는 소리만 났다. 이어 석진의 목소리가 나왔다.

“해윤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통화 상대의 말은 작았다. 주원이 소리를 높였지만 몇 마디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류, 서명, 확인.

나는 들리는 말을 속으로 짚었다.

“윤 대표 서명은 기존 것하고 맞춰 놓으세요. 추가된 두 건 다.”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녹음 속에서 차 방향지시등 소리가 났다. 상대가 짧게 물었고, 석진이 대답했다.

“본인이 쓴 게 아니라는 소리 안 나오게 하시라고요. 획 끝까지.”

이헌이 화면에 손을 대지 않고 주원에게 말했다.

“잠깐 멈춰.”

주원이 멈췄다. 회의실 환풍기 소리가 들렸다.

나는 휴대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날짜 다시 보여 주세요.”

주원은 파일 정보를 열었다. 나는 내 휴대폰을 꺼내 메모에 날짜를 적었다. 가방 안쪽에 넣어 둔 서류를 꺼내고 싶었지만, 보안실에서 받은 종이만 손에 걸렸다.

“추가 대출 서류 작성일보다 앞이에요.”

내가 말하자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조해 봐야 해요.”

“네. 아버지가 서명했다는 날하고도요.”

추가 대출 서류 속 아버지 이름은 중간에 잉크가 뭉쳐 있었다. 아버지는 그 이름을 쓸 때 펜을 떼지 않는다. 그 차이를 말해도 캐피털에서는 본인 확인을 받았다는 말만 했다.

나는 메모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추가 대출 두 건, 서명 작성 지시』

“다시 틀어 주세요.”

주원은 멈춘 곳보다 조금 앞으로 돌렸다.

“본인이 쓴 게 아니라는 소리 안 나오게 하시라고요. 획 끝까지.”

같은 말을 한 번 더 들었다. 나는 이번에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금액은 그대로 갑니다. 합해서 35억. 윤 대표한테 새로 확인받을 필요 없어요.”

파일이 끝났다.

이헌이 접었던 소매 끝을 눌렀다. 나는 메모 화면을 끄지 못했다.

아버지는 갚을 돈이 늘었는데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고 했었다.

나는 잘못 적은 숫자를 지우고 다시 썼다.

“이게 언제부터 있었어요?”

주원이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약혼 전부터요.”

이헌이 주원을 불렀다.

“주원아.”

“알아. 지금 그 말 안 해도 돼.”

주원은 화면을 넘기지 않았다.

“듣고도 가만있었던 거 알아.”

나는 주원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시킨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안 하면 그만이라고.”

“저희 아버지는 안 한 일 때문에 빚을 졌어요.”

“네.”

주원은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나는 대답 대신 2번째 파일을 가리켰다.

◈

이번 녹음에는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있었다.

“장소는 아버지 집무실이에요. 내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주원이 설명하고 재생했다.

“주원아. 네가 신경 쓸 건 결혼식이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본가 식탁에서 내게 식사를 더 하라던 말투와 다르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면 해윤 쪽은요?”

녹음 속 주원이 물었다.

“윤 대표가 공장을 계속 하겠답니까?”

“부채가 그만큼인데 뭘 계속해. 부지 정리하면 돼.”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혼인하고 나면 가족끼리 처리할 일이야. 네 장인이 끝까지 버티겠어? 딸 앞길 막으면서.”

나는 무릎 위 가방을 의자 옆으로 내렸다. 가방 바닥이 의자 다리에 닿았다.

녹음 속 주원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약혼을 시킨 거예요?”

“너도 얻는 게 있잖아. 호텔 일만 하고 살 거냐.”

주원의 손가락이 화면 아래에 놓였다. 파일은 계속 흘렀다.

“건설 쪽 일정이 있으니까 결혼 날짜 바꾸는 소리 하지 마. 부지 넘겨받고 나면 해윤 빚은 정리하면 돼.”

나는 탁자 밑에서 두 발을 모았다.

약혼으로 상환 기한이 늘었다. 결혼하면 아버지가 숨을 돌릴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들은 말에서 빠져 있던 것이 녹음에는 있었다. 공장은 없어지고 땅이 넘어간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끝이에요.”

주원이 재생을 멈췄다.

나는 탁자 위로 손을 올렸다.

“빚을 정리한다는 게 공장을 살린다는 뜻은 아니었네요.”

“네.”

“직원들은요?”

주원이 입을 다물었다. 이헌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계획에 고용 승계는 없었어요.”

나는 휴대폰에 적은 줄 아래에 부지라는 말을 넣었다. 획 하나를 잘못 눌러 지웠다.

“처음부터 이거였네요. 약혼도, 결혼도.”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원은 뒤집어 놓았던 검정 휴대폰을 밀어 치웠다.

“그래서 지금 주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니라고 못 하게.”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편집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나는 흰 휴대폰을 봤다.

“파일만 말고 이 기계도 확인받을 수 있어야 해요.”

“필요하면 내놓을게요.”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있어요?”

“앞뒤로 잘라 낸 적 없어요. 보내는 것도 그대로 보낼 거고요.”

이헌이 말했다.

“원본은 손대지 마. 확인받을 방법부터 정하자.”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메모를 저장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헌의 손이 탁자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손등까지 10cm쯤이었다.

내가 손을 옮기자 이헌이 손가락을 폈다.

닫힌 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멈췄다. 누군가 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그대로 지나갔다. 이헌은 내 손을 잡지 않았다. 소매 끝을 한 번 누르고 주원을 봤다.

“마지막 건 뭐야?”

주원은 곧바로 누르지 않았다.

◈

“삼촌도 끝까지 들어.”

이헌의 손이 소매에서 떨어졌다.

주원이 3번째 파일을 틀었다. 앞부분에는 긴 침묵이 있었다.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내가 내려놓은 메모 종이 끝이 들렸다.

나는 종이 위에 휴대폰을 얹었다.

“캐피털 쪽에서 말이 나옵니다.”

녹음 속에서 주원이 말했다.

“누가?”

“서명 확인을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석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아버지가 처리하신 거잖아요.”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주원은 화면만 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들쑤시지 마. 일 커지기 전에 끝내면 돼.”

그 뒤에 석진의 말이 이어졌다.

“은숙이 일처럼 깔끔하게.”

이헌이 탁자에 놓인 휴대폰을 봤다.

주원은 정지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 녹음 속에서 문이 열리고 닫혔다. 한동안 소리가 없다가 파일이 끝났다.

이헌이 물었다.

“다시.”

주원이 재생 위치를 옮겼다. 같은 한마디가 다시 나왔다.

이헌은 끝까지 듣고 손바닥을 탁자에 붙였다. 손가락 끝이 희어졌다.

나는 의자 사이 빈칸을 지나 이헌의 소매를 잡았다. 천이 손끝에 걸렸다. 이헌이 나를 봤다.

“여기 있어요.”

낮게 말하자 이헌이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 뒤에는 없어. 아버지가 나가셨어.”

“무슨 일을 말하는지 물었어?”

“나중에 한 번. 못 들은 걸로 하라고 하셨어.”

이헌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는 소매를 놓지 않은 채 주원을 봤다.

“이 말만으로 사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알아요.”

“그래도 확인해야 해요. 그날 기록하고, 남아 있는 말들하고.”

이헌이 내 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손가락을 풀었다. 소매에 생긴 주름을 펴지는 않았다.

주원은 재생 목록으로 돌아갔다.

“셋 다 보내 줄게요.”

이헌이 받는 방법을 정하는 동안 나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파일 이름과 날짜를 적었다. 주원이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주었다.

나는 적은 글자와 화면을 차례로 맞췄다.

전송이 끝나자 내 휴대폰에도 파일 세 개가 생겼다. 나는 각 파일의 처음과 끝을 확인했다. 주원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마지막 녹음의 재생을 멈추자 이헌이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집에 가서 한 번 더 들을 거예요.”

“오늘 다 하지 않아도 돼요.”

“날짜만 맞춰 볼게요. 서류랑.”

이헌은 잠깐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주원이 창가로 가서 창문을 닫았다. 손잡이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돌아온 주원은 내 맞은편에 앉지 않고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이제 조건 이야기해도 돼요?”

나는 수첩을 덮었다.

“네.”

“결혼식 날까지 내가 아는 건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을게요. 그날 사람들 앞에서 내가 파혼하겠다고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저더러 모르는 척하라는 거예요?”

“아뇨. 조사하든 확인받든 해요. 내가 먼저 말하겠다는 것만 지켜 줬으면 해요.”

나는 주원의 얼굴을 봤다.

“그 사이에 공장에 무슨 일이 생기면요?”

“그때도 기다리라는 말은 안 해요.”

“아버지가 결혼을 더 서두르면요?”

“내가 막을게요.”

이헌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지킬 수 있는 말만 해.”

주원은 이헌을 피하지 않았다.

“날짜는 안 바뀌게 할 거야. 내 결혼식이잖아.”

나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저희가 위험해지면 약속을 지킬 수 없어요.”

“그건 약속 안 해도 돼요.”

“녹음도 저희가 필요한 곳에 낼 거예요.”

“그러라고 준 거예요.”

나는 주원이 돌려놓은 흰 휴대폰을 봤다. 화면에는 재생 목록이 그대로 떠 있었다. 주원은 잠금을 걸고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누가 파혼을 말하든 끝내야 하는 약혼이었다. 그런데 주원은 녹음을 내놓고도 그 자리를 자기에게 남겨 달라고 했다.

“주원 씨가 먼저 말하면 아버님한테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

“알아요.”

“호텔에서도요.”

주원은 의자에 걸린 코트를 들었다. 한쪽 소매에 팔을 넣다가 멈췄다.

“그것도 알아요.”

나는 가방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헌은 문 앞에 가지 않고 탁자 끝에서 기다렸다.

주원은 나머지 소매에 팔을 넣었다. 평소라면 그치, 하고 내 대답을 받았을 말끝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꺼지지 않은 회의실 등을 올려다봤다가 물었다.

“왜요?”

주원이 코트 깃에서 손을 내렸다.

“나도 한 번은 내 결정 하고 싶어서.”

(7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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