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엄마가 서연의 팔을 밀었다. 세게 밀지도 못했다. 서연은 다시 엄마 손을 잡았다. 태주는 반대편에서 의자를 끌어왔다. 누구도 서두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연은 아버지 옆의 봄이를 확인했다. 봄이는 할아버지 손을 잡은 채 어른들 틈으로 사진을 보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 마지막 인사까지 마친 뒤에도 할 일이 남았다. 놓고 온 우산, 맞지 않는 신발, 이름이 적히지 않은 봉투. 누군가는 돌아가는 차에 사람을 나눠 태웠다. 서연은 봄이의 가방을 찾으러 빈소에 다시 들어갔다.
어젯밤 쓰던 숟가락은 식당에 돌려주었다. 색칠책은 아이 가방에 넣었다. 구겨진 토끼 귀가 지퍼에 걸리지 않도록 모서리를 접어 넣었다.
태주는 작은 탁자에서 서류봉투를 정리하고 있었다. 장례 비용을 적은 종이와 해외에서 전달된 서류가 섞여 있었다. 서연이 빈 봉투를 내밀자 그는 종이를 나눠 담았다.
“이쪽은 건드리지 말아 줘. 아직 확인할 게 있대.”
“네.”
서연은 손을 거뒀다. 맨 위의 번역된 목록에는 반환 물품이 적혀 있었다. 언니의 휴대전화가 있는지 잠깐 훑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언니 전화는요?”
“못 받았어. 찾은 물건은 다시 알려 준다고 했어.”
“케이스 안에 봄이 사진 있는데.”
태주가 종이 모서리를 맞추다 멈췄다.
“알아.”
그 한 마디가 생각보다 낮았다. 서연은 더 묻지 않고 봉투 입구를 접었다. 봄이가 5살 때 찍은 사진이었다. 앞머리를 서희가 집에서 잘라서 한쪽이 짧았다. 사진관에 가기 전에 태주가 보고 웃었고, 언니는 웃을 거면 네가 잘라 보라고 가위를 내밀었다.
그날 형부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서연과 언니는 식탁에서 귤을 까 먹었다. 귤이 시어서 서로 하나씩 떠넘겼다.
태주가 서류봉투를 가방 깊이 넣었다.
“서연아. 네 짐은 다 챙겼어?”
“네. 형부 건 저기 외투 남았어요.”
입구에서는 윤명자가 봄이에게 운동화를 신기고 있었다. 태주의 어머니는 아이 뒤축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오늘 할머니 집에 가자. 아빠도 좀 쉬어야지.”
봄이가 발을 뺐다.
“우리 집.”
“할머니가 계란찜 해 줄게. 좋아하잖아.”
“우리 집 갈 거야.”
명자는 아이의 양말이 바닥에 닿지 않게 발목을 잡았다. 봄이가 다리를 움츠리자 서연이 옆에 앉았다.
“봄아, 신발부터. 집에 가려면 신어야 돼.”
봄이는 이번에는 발을 내밀었다. 명자가 입술을 눌렀다가 일어났다.
“나도 애 데려가서 재워 봤어. 낯선 집도 아닌데.”
“오늘은 집이 좋은가 봐요.”
서연이 운동화 찍찍이를 붙였다. 명자는 손에 든 아이 외투를 털었다. 바닥에 닿지도 않았는데 두 번 털고 나서 서연에게 건넸다.
태주가 와서 아이 가방을 들었다.
“엄마. 오늘은 제가 데려갈게요.”
“너 운전할 정신은 있어?”
“택시 타려고요.”
명자는 태주의 얼굴을 보더니 택시 뒷좌석에 깔아 주라며 자기 무릎담요를 내밀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집에 가면 연락하고.”
서연의 부모도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고속버스 시간을 확인했고, 엄마는 봄이의 뺨을 만지다가 또 눈물을 닦았다. 서연은 엄마를 오래 안아 주지 못했다. 봄이가 그녀의 코트 주머니를 붙잡고 있었다.
“이모는?”
“봄이 집까지 같이 갈게.”
태주가 곧바로 서연을 봤다.
“너도 쉬어야지.”
“저녁 먹는 것까지만요. 애 가방도 풀어야 하고.”
정숙이 딸의 코트 깃을 여몄다. 손끝이 잘 맞지 않아 단추를 두 번이나 놓쳤다.
“늦기 전에 네 집으로 가. 알았지?”
“응.”
“언니 집이라고…….”
엄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연이 그 손을 잡자 정숙은 금세 빼서 눈가로 가져갔다.
태주는 모녀 쪽을 보고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아버지에게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달라고 했다. 엄마가 뒤돌아보는 동안 한 손은 흔들고, 다른 손으로는 조카 손을 잡았다.
택시에서 봄이는 잠들었다. 서연은 아이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지 않게 손바닥을 받쳤다. 앞좌석의 태주는 내릴 때가 되어서야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여는 손가락을 서연은 백미러로 봤다. 반지 자국이 아직 없었다. 그날의 그는 아직 끼고 있었다. 금빛이 택시 불빛에 한 번 스쳤다.
엘리베이터가 8층에 멈췄다. 태주가 안고 있던 봄이를 복도에 내려놓았다. 잠이 덜 깬 아이는 804호 앞에 서서 현관문을 올려다봤다.
태주가 번호를 누르자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는데도 봄이는 들어가지 않았다.
서연도 문턱 앞에서 멈췄다. 늘 이쯤이면 언니가 문을 더 열고 가방부터 빼앗아 갔다. 오늘은 어두운 복도 끝에서 냉장고 소리만 났다.
태주가 빈손을 문 안으로 내밀었다가 내려놓았다.
“들어와.”
서연은 그제야 알았다. 이 집에서 언니 없이 형부와 저녁을 먹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불부터 켤까?”
태주가 현관 안으로 팔을 뻗었다. 거실 불이 들어오자 봄이가 신발을 벗었다. 한 발은 아직 신발 속에 둔 채 안쪽을 살폈다.
“엄마 신발 있어.”
신발장 아래에 흰 운동화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언니는 출장을 가면서 다른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서연은 제 구두를 벗어 현관 한쪽으로 밀었다. 흰 운동화에는 손대지 않았다.
구두를 벗는 동안 종아리가 드러났다. 상복을 입은 채로 하루를 보낸 살이었다. 태주의 시선이 그 줄기를 따라 내려갔다가 바로 거둬졌다. 거두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본 사람만 그 빠름을 알 수 있었다. 태주는 자기 눈을 혐오하는 얼굴로 신발장 모서리를 짚었다.
봄이가 운동화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뒤축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다가 현관 밖을 돌아봤다.
“엄마 발 시렵겠다.”
태주는 아이를 일으키려다 무릎을 굽혔다. 서연이 가방을 내려놓는 동안에도 부녀는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봄이는 양말 바람으로 거실에 들어갔다. 소파, 베란다, 반쯤 열린 방문 앞을 차례로 돌더니 태주를 돌아봤다.
“아빠, 손 씻어.”
“그래. 같이 씻자.”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서연은 주방으로 가 손을 씻고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반찬통이 많았다. 뚜껑에 적힌 날짜가 모두 사고 전이었다. 무엇을 버려도 되는지 몰라 문을 닫았다.
태주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나왔다.
“뭐 시킬까.”
“죽 먹을까요? 봄이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요.”
그가 휴대전화를 찾는 동안 서연은 밥솥을 열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쌀통이 싱크대 아래에 있는 건 알았다. 가끔 조카를 봐 주러 왔을 때도 그랬다. 서연은 작은 냄비를 꺼내며 물었다.
“아니다. 계란 새로 산 거 있어요?”
“엄마가 며칠 전에 넣어 놓으셨을 거야.”
서연이 종이 포장에 찍힌 날짜를 확인했다. 태주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쌀을 씻었다. 물을 몇 번이나 갈다가 서연 쪽을 봤다.
“이 정도면 되나.”
“네. 물 좀 많이 넣어 주세요.”
그는 냄비 옆에서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겼다. 검은 천이 더 조여 들자 손을 뗐다.
서연은 풀어 드리겠다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작년 언니 생일에 본 장면이 떠올랐다. 서희는 태주의 목 앞에 손을 뻗고, 손이 크면서 왜 이런 건 못 푸느냐고 웃었다.
지금은 그 손을 대신할 사람이 이 부엌에 있었다. 서연은 소매를 걷어 쌀뜨물을 버렸다. 팔 안쪽이 형광등 아래 하얗게 드러났다. 태주의 시선이 그 연한 줄을 따라가다 넥타이로 돌아갔다. 풀지 못한 매듭이 목구멍을 누르는 것 같았다.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제가 저을게요.”
태주가 자기 목을 내려다봤다. 잠깐 뒤 부부방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서연은 끓어 넘치기 직전의 불을 줄였다.
봄이가 식탁 의자를 끌어 주방 입구에 앉았다.
“이모, 노란 거 조금만.”
“계란?”
“응. 너무 많으면 미끌거려.”
“알았어. 조금만.”
아이는 서랍에서 제 숟가락을 꺼냈다. 그러고는 한참 서랍 안을 보다가 어른 숟가락 두 개를 더 꺼냈다. 서연은 그릇을 세 개 놓았다. 누구도 개수를 세어 말하지 않았다.
죽은 생각보다 오래 끓여야 했다. 봄이가 배고프다고 말해서 서연은 바나나를 반 개 잘라 주었다. 태주는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나와 식탁을 닦았다. 손수건은 세면대 옆에 펴 두었다며, 빨아 주겠다고 했다.
“급한 거 아니에요.”
서연이 냄비 손잡이를 잡았다. 행주가 얇아 뜨거웠다. 그녀가 잠깐 손을 털자 태주가 서랍에서 두꺼운 냄비 받침을 꺼내 건넸다. 언니가 물건을 넣어 둔 자리를 서연보다 잘 알았다.
죽을 앞에 두고도 그는 바로 먹지 않았다. 봄이의 그릇 가장자리에 고인 죽을 숟가락으로 저어 식혀 주었다. 아이가 입을 벌리자 한 숟갈 먹인 다음 제 그릇에 손을 댔다.
“아빠 것도 불어.”
“아빠 건 괜찮아.”
“뜨거워.”
태주가 순순히 입김을 불었다. 봄이는 그걸 보고 제 숟가락을 들었다.
태주도 다시 숟가락을 들었지만 입으로 가져가지는 못했다. 봄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 위로 입김을 불어 주었다.
“이제 안 뜨거워.”
서연은 자기 그릇을 내려놓았다. 식탁 아래로 내린 태주의 다른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봄이가 바나나 껍질을 들고 쓰레기통 쪽으로 짧게 걸어갔다.
“내가 버릴게.”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였다. 그 짧은 빈자리에 태주의 주먹이 풀렸다. 풀린 손이 서연의 무릎 옆 치마천을 집었다가 놓았다. 잡은 것은 천이었다. 그러나 천 아래 무릎의 온도까지 손바닥에 남았다. 서연의 허벅지가 저절로 모였다. 모으는 동작이 그의 손등을 스쳤다.
둘은 그 90초를 아무 말도 없이 보냈다. 봄이가 돌아오자 태주의 손은 다시 식탁 위에 있었다. 숟가락을 든 손과, 방금 치마를 놓친 손이 같은 손이었다.
***
열 달이 지난 밤, 그 식탁은 비어 있었다.
804호가 아니었다. 서연의 원룸 작은 테이블이었다. 모양만 닮아 있었다. 모서리가 둥글고, 네 명이 앉기에는 좁은 높이가 비슷했다.
서연이 그 가장자리에 앉혀져 있었다. 바지 한쪽이 발목에 걸려 있고, 상의는 걷혀 유두가 공기에 드러나 있었다. 태주가 두 무릎 사이에 서서 허리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때 이 테이블 밑에서 손을 못 놨어.”
서연은 대답 대신 그의 손등을 물었다. 소리 때문에였다. 이 집 벽은 얇았다. 아래층에서 뉴스 소리가 올라왔다.
삽입은 짧고 깊었다. 식탁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서연이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붙이고 숨만 토했다. 태주의 엄지가 허벅지 안쪽 오래된 자국 위를 문질렀다. 어제 난 자리가 아니었다. 며칠 간격으로 덧난 자리였다.
“죽 먹을 때 이 손.”
“기억하지 마세요.”
“못 해.”
허리가 두어 번 더 깊어진 뒤 서연의 안이 먼저 조였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이를 박고 차오르는 것을 넘겼다. 태주는 그 조임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왔다. 빠져나온 콘돔을 휴지에 싸는 손의 반지 자국이, 형광등 아래 하얗게 보였다.
서연은 식탁에서 내려와 바지를 올렸다. 테이블 모서리에 남은 체온을 행주로 닦았다. 닦아도 나무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 2026년의 부엌이었다.
불 켜진 그 집에서, 세 개의 죽 그릇이 김을 올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저녁이었다. 손만 꽉 쥐고 있던 저녁이었다.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