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엄마가 서연의 팔을 밀었다. 세게 밀지도 못했다. 서연은 다시 엄마 손을 잡았다. 태주는 반대편에서 의자를 끌어왔다. 누구도 서두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연은 아버지 옆의 봄이를 확인했다. 봄이는 할아버지 손을 잡은 채 어른들 틈으로 사진을 보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 마지막 인사까지 마친 뒤에도 할 일이 남았다. 놓고 온 우산, 맞지 않는 신발, 이름이 적히지 않은 봉투. 누군가는 돌아가는 차에 사람을 나눠 태웠다. 서연은 봄이의 가방을 찾으러 빈소에 다시 들어갔다.
어젯밤 쓰던 숟가락은 식당에 돌려주었다. 색칠책은 아이 가방에 넣었다. 구겨진 토끼 귀가 지퍼에 걸리지 않도록 모서리를 접어 넣었다.
태주는 작은 탁자에서 서류봉투를 정리하고 있었다. 장례 비용을 적은 종이와 해외에서 전달된 서류가 섞여 있었다. 서연이 빈 봉투를 내밀자 그는 종이를 나눠 담았다.
“이쪽은 건드리지 말아 줘. 아직 확인할 게 있대.”
“네.”
서연은 손을 거뒀다. 맨 위의 번역된 목록에는 반환 물품이 적혀 있었다. 언니의 휴대전화가 있는지 잠깐 훑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언니 전화는요?”
“못 받았어. 찾은 물건은 다시 알려 준다고 했어.”
“케이스 안에 봄이 사진 있는데.”
태주가 종이 모서리를 맞추다 멈췄다.
“알아.”
그 한 마디가 생각보다 낮았다. 서연은 더 묻지 않고 봉투 입구를 접었다. 봄이가 5살 때 찍은 사진이었다. 앞머리를 서희가 집에서 잘라서 한쪽이 짧았다. 사진관에 가기 전에 태주가 보고 웃었고, 언니는 웃을 거면 네가 잘라 보라고 가위를 내밀었다.
그날 형부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서연과 언니는 식탁에서 귤을 까 먹었다. 귤이 시어서 서로 하나씩 떠넘겼다.
태주가 서류봉투를 가방 깊이 넣었다.
“서연아. 네 짐은 다 챙겼어?”
“네. 형부 건 저기 외투 남았어요.”
입구에서는 윤명자가 봄이에게 운동화를 신기고 있었다. 태주의 어머니는 아이 뒤축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오늘 할머니 집에 가자. 아빠도 좀 쉬어야지.”
봄이가 발을 뺐다.
“우리 집.”
“할머니가 계란찜 해 줄게. 좋아하잖아.”
“우리 집 갈 거야.”
명자는 아이의 양말이 바닥에 닿지 않게 발목을 잡았다. 봄이가 다리를 움츠리자 서연이 옆에 앉았다.
“봄아, 신발부터. 집에 가려면 신어야 돼.”
봄이는 이번에는 발을 내밀었다. 명자가 입술을 눌렀다가 일어났다.
“나도 애 데려가서 재워 봤어. 낯선 집도 아닌데.”
“오늘은 집이 좋은가 봐요.”
서연이 운동화 찍찍이를 붙였다. 명자는 손에 든 아이 외투를 털었다. 바닥에 닿지도 않았는데 두 번 털고 나서 서연에게 건넸다.
태주가 와서 아이 가방을 들었다.
“엄마. 오늘은 제가 데려갈게요.”
“너 운전할 정신은 있어?”
“택시 타려고요.”
명자는 태주의 얼굴을 보더니 택시 뒷좌석에 깔아 주라며 자기 무릎담요를 내밀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집에 가면 연락하고.”
서연의 부모도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고속버스 시간을 확인했고, 엄마는 봄이의 뺨을 만지다가 또 눈물을 닦았다. 서연은 엄마를 오래 안아 주지 못했다. 봄이가 그녀의 코트 주머니를 붙잡고 있었다.
“이모는?”
“봄이 집까지 같이 갈게.”
태주가 곧바로 서연을 봤다.
“너도 쉬어야지.”
“저녁 먹는 것까지만요. 애 가방도 풀어야 하고.”
정숙이 딸의 코트 깃을 여몄다. 손끝이 잘 맞지 않아 단추를 두 번이나 놓쳤다.
“늦기 전에 네 집으로 가. 알았지?”
“응.”
“언니 집이라고…….”
엄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연이 그 손을 잡자 정숙은 금세 빼서 눈가로 가져갔다.
태주는 모녀 쪽을 보고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아버지에게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달라고 했다. 엄마가 뒤돌아보는 동안 한 손은 흔들고, 다른 손으로는 조카 손을 잡았다.
택시에서 봄이는 잠들었다. 서연은 아이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지 않게 손바닥을 받쳤다. 앞좌석의 태주는 내릴 때가 되어서야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여는 손가락을 서연은 백미러로 봤다. 반지 자국이 아직 없었다. 그날의 그는 아직 끼고 있었다. 금빛이 택시 불빛에 한 번 스쳤다.
엘리베이터가 8층에 멈췄다. 태주가 안고 있던 봄이를 복도에 내려놓았다. 잠이 덜 깬 아이는 804호 앞에 서서 현관문을 올려다봤다.
태주가 번호를 누르자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는데도 봄이는 들어가지 않았다.
서연도 문턱 앞에서 멈췄다. 늘 이쯤이면 언니가 문을 더 열고 가방부터 빼앗아 갔다. 오늘은 어두운 복도 끝에서 냉장고 소리만 났다.
태주가 빈손을 문 안으로 내밀었다가 내려놓았다.
“들어와.”
서연은 그제야 알았다. 이 집에서 언니 없이 형부와 저녁을 먹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불부터 켤까?”
태주가 현관 안으로 팔을 뻗었다. 거실 불이 들어오자 봄이가 신발을 벗었다. 한 발은 아직 신발 속에 둔 채 안쪽을 살폈다.
“엄마 신발 있어.”
신발장 아래에 흰 운동화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언니는 출장을 가면서 다른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서연은 제 구두를 벗어 현관 한쪽으로 밀었다. 흰 운동화에는 손대지 않았다.
구두를 벗는 동안 종아리가 드러났다. 상복을 입은 채로 하루를 보낸 살이었다. 태주의 시선이 그 줄기를 따라 내려갔다가 바로 거둬졌다. 거두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본 사람만 그 빠름을 알 수 있었다. 태주는 자기 눈을 혐오하는 얼굴로 신발장 모서리를 짚었다.
봄이가 운동화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뒤축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다가 현관 밖을 돌아봤다.
“엄마 발 시렵겠다.”
태주는 아이를 일으키려다 무릎을 굽혔다. 서연이 가방을 내려놓는 동안에도 부녀는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봄이는 양말 바람으로 거실에 들어갔다. 소파, 베란다, 반쯤 열린 방문 앞을 차례로 돌더니 태주를 돌아봤다.
“아빠, 손 씻어.”
“그래. 같이 씻자.”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서연은 주방으로 가 손을 씻고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는 반찬통이 많았다. 뚜껑에 적힌 날짜가 모두 사고 전이었다. 무엇을 버려도 되는지 몰라 문을 닫았다.
태주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나왔다.
“뭐 시킬까.”
“죽 먹을까요? 봄이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요.”
그가 휴대전화를 찾는 동안 서연은 밥솥을 열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쌀통이 싱크대 아래에 있는 건 알았다. 가끔 조카를 봐 주러 왔을 때도 그랬다. 서연은 작은 냄비를 꺼내며 물었다.
“아니다. 계란 새로 산 거 있어요?”
“엄마가 며칠 전에 넣어 놓으셨을 거야.”
서연이 종이 포장에 찍힌 날짜를 확인했다. 태주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쌀을 씻었다. 물을 몇 번이나 갈다가 서연 쪽을 봤다.
“이 정도면 되나.”
“네. 물 좀 많이 넣어 주세요.”
그는 냄비 옆에서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겼다. 검은 천이 더 조여 들자 손을 뗐다.
서연은 풀어 드리겠다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작년 언니 생일에 본 장면이 떠올랐다. 서희는 태주의 목 앞에 손을 뻗고, 손이 크면서 왜 이런 건 못 푸느냐고 웃었다.
지금은 그 손을 대신할 사람이 이 부엌에 있었다. 서연은 소매를 걷어 쌀뜨물을 버렸다. 팔 안쪽이 형광등 아래 하얗게 드러났다. 태주의 시선이 그 연한 줄을 따라가다 넥타이로 돌아갔다. 풀지 못한 매듭이 목구멍을 누르는 것 같았다.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제가 저을게요.”
태주가 자기 목을 내려다봤다. 잠깐 뒤 부부방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서연은 끓어 넘치기 직전의 불을 줄였다.
봄이가 식탁 의자를 끌어 주방 입구에 앉았다.
“이모, 노란 거 조금만.”
“계란?”
“응. 너무 많으면 미끌거려.”
“알았어. 조금만.”
아이는 서랍에서 제 숟가락을 꺼냈다. 그러고는 한참 서랍 안을 보다가 어른 숟가락 두 개를 더 꺼냈다. 서연은 그릇을 세 개 놓았다. 누구도 개수를 세어 말하지 않았다.
죽은 생각보다 오래 끓여야 했다. 봄이가 배고프다고 말해서 서연은 바나나를 반 개 잘라 주었다. 태주는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나와 식탁을 닦았다. 손수건은 세면대 옆에 펴 두었다며, 빨아 주겠다고 했다.
“급한 거 아니에요.”
서연이 냄비 손잡이를 잡았다. 행주가 얇아 뜨거웠다. 그녀가 잠깐 손을 털자 태주가 서랍에서 두꺼운 냄비 받침을 꺼내 건넸다. 언니가 물건을 넣어 둔 자리를 서연보다 잘 알았다.
죽을 앞에 두고도 그는 바로 먹지 않았다. 봄이의 그릇 가장자리에 고인 죽을 숟가락으로 저어 식혀 주었다. 아이가 입을 벌리자 한 숟갈 먹인 다음 제 그릇에 손을 댔다.
“아빠 것도 불어.”
“아빠 건 괜찮아.”
“뜨거워.”
태주가 순순히 입김을 불었다. 봄이는 그걸 보고 제 숟가락을 들었다.
태주도 다시 숟가락을 들었지만 입으로 가져가지는 못했다. 봄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 위로 입김을 불어 주었다.
“이제 안 뜨거워.”
서연은 자기 그릇을 내려놓았다. 식탁 아래로 내린 태주의 다른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봄이가 바나나 껍질을 들고 쓰레기통 쪽으로 짧게 걸어갔다.
“내가 버릴게.”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였다. 그 짧은 빈자리에 태주의 주먹이 풀렸다. 풀린 손이 서연의 무릎 옆 치마천을 집었다가 놓았다. 잡은 것은 천이었다. 그러나 천 아래 무릎의 온도까지 손바닥에 남았다. 서연의 허벅지가 저절로 모였다. 모으는 동작이 그의 손등을 스쳤다.
둘은 그 90초를 아무 말도 없이 보냈다. 봄이가 돌아오자 태주의 손은 다시 식탁 위에 있었다. 숟가락을 든 손과, 방금 치마를 놓친 손이 같은 손이었다.
***
열 달이 지난 밤, 그 식탁은 비어 있었다.
804호가 아니었다. 서연의 원룸 작은 테이블이었다. 모양만 닮아 있었다. 모서리가 둥글고, 네 명이 앉기에는 좁은 높이가 비슷했다.
서연이 그 가장자리에 앉혀져 있었다. 바지 한쪽이 발목에 걸려 있고, 상의는 걷혀 유두가 공기에 드러나 있었다. 태주가 두 무릎 사이에 서서 허리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때 이 테이블 밑에서 손을 못 놨어.”
서연은 대답 대신 그의 손등을 물었다. 소리 때문에였다. 이 집 벽은 얇았다. 아래층에서 뉴스 소리가 올라왔다.
삽입은 짧고 깊었다. 식탁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서연이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붙이고 숨만 토했다. 태주의 엄지가 허벅지 안쪽 오래된 자국 위를 문질렀다. 어제 난 자리가 아니었다. 며칠 간격으로 덧난 자리였다.
“죽 먹을 때 이 손.”
“기억하지 마세요.”
“못 해.”
허리가 두어 번 더 깊어진 뒤 서연의 안이 먼저 조였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이를 박고 차오르는 것을 넘겼다. 태주는 그 조임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왔다. 빠져나온 콘돔을 휴지에 싸는 손의 반지 자국이, 형광등 아래 하얗게 보였다.
서연은 식탁에서 내려와 바지를 올렸다. 테이블 모서리에 남은 체온을 행주로 닦았다. 닦아도 나무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 2026년의 부엌이었다.
불 켜진 그 집에서, 세 개의 죽 그릇이 김을 올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저녁이었다. 손만 꽉 쥐고 있던 저녁이었다.
차에 타기 전부터 수진은 화가 나 있었다.촬영에 쓸 천 상자가 잘못 실렸다. 확인 사진에서는 분명한 회색이었는데 현장에서 펼치니 푸른 기가 도는 천이었다. 유리그릇 아래에 놓자 제품 색까지 달라 보였다.“제가 현물 보고 넣자고 했잖아요.”수진이 말했고, 서연은 맞다고 대답했다.급하게 잡힌 지역 매장 촬영이었다. 서연이 사진을 확인했으니 그대로 출발해도 된다고 했다. 이번 실수는 직원이 아니라 자기 쪽에 있었다.“일단 흰 배경부터 찍어요. 회색은 다시 가져올 방법 찾을게요.”“팀장님이 다녀오실 거예요?”“아니요. 그러면 오늘 현장이 비잖아요.”서연은 본사에 연락했다. 다른 물건을 가져올 차량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촬영 순서를 바꾸겠다고 했다. 다음 팀이 쓰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하윤이 틀린 상자 옆에 서서 눈치를 봤다. 수진이 상자를 닫아 벽 쪽으로 밀었다.“하윤 씨가 고른 거 아니잖아요. 먼저 그릇 물기부터 닦아요.”서연은 그 말을 들으며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몇 년 전 자신에게 듣던 말을 이제 수진이 다른 직원에게 하고 있었다.결국 회색 배경 컷만 다음 주로 넘겼다. 촬영기사의 추가 시간을 확보하는 대신 오늘 두 가지 구도를 줄였다. 서연이 비용과 변경 내용을 미경에게 설명했고, 남은 촬영은 예정대로 끝냈다.오후가 되자 하윤은
서희는 계약서보다 먼저 보내온 사진을 지워 달라고 했다.은경이 연결해 준 새 거래처였다. 수입 생활용품의 설명을 정리하는 일인데, 담당자는 서희의 경력 소개를 먼저 만들었다며 파일을 보냈다. 사진 아래에는 오래전 사고와 귀국 이야기가 세 줄이나 적혀 있었다.『힘든 시간을 이겨 낸 특별한 번역가.』서희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전화를 걸었다.“이 내용은 어디에 쓰실 건가요?”담당자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업체 소개 자료요. 경력이 공백처럼 보이지 않게 사정을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제가 사정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드렸나요?”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서희는 화를 누르느라 연필을 너무 세게 쥐었다. 손가락에 힘이 빠지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이전 작업 경력과 지금 맡을 업무만 넣어 주세요. 개인 사진도 빼고요.”“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희는 응원하는 뜻으로…….”“그 뜻은 알겠어요. 그래도 빼 주세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가슴이 빨리 뛰었다. 일을 놓칠까 봐 불안했다. 말 한마디를 곱게 못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 번이나 통화 내용을 되짚다가 은경에게 연락했다.“내가 너무 까칠했어?”&ldquo
월요일 회의실 화면에 첫 문구가 떴다.엄마의 마음으로 차리는 식탁.서연은 펜 뚜껑을 닫았다. 식기 기획전 초안이었다. 지난달 합류한 하윤이 손에 든 자료를 조금 더 높였다.“가족 단위 고객을 중심으로 잡았습니다. 따뜻한 이미지가 구매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요.”수진이 다음 장을 넘겨 달라고 했다. 고객 조사에는 1인 가구와 두 사람이 사는 집의 응답도 상당히 많았다.“이 자료하고 첫 문장이 좀 다른데요.”하윤의 귀가 붉어졌다.“혼자 살아도 엄마 밥은 그리울 수 있으니까요.”서연은 그 말을 자기 이야기로 듣지 않으려고 표를 다시 봤다. 맞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 문장 하나에 들어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그리운 마음 말고, 이 그릇을 사면 편한 점이 뭐죠?”“깊이가 다르고, 작은 접시는 덮개로도 쓸 수 있습니다.”“그걸 먼저 보여 줘요. 밥 차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손님이 정하게 두고.”하윤은 자료에 줄을 그었다. 수진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 다른 의견을 냈다.“그런데 기능만 말하면 너무 건조하지 않을까요? 지난번도 사양표 같다는 얘기 들었잖아요.”맞는 지적이었다. 서연은 곧바로 고쳐 쓸 문장을 불러 주려다가 멈췄다.
봄이는 횡단보도를 건넌 뒤 이모에게 메시지를 보내고서야 다시 걸었다.태주는 아이의 화면 대신 안경점 봉투를 보고 있었다. 손잡이를 너무 오래 쥐어 손가락 마디가 붉어졌다.“내일 이모 집에 가도 돼?”“엄마한테 먼저 말해. 몇 시인데?”“두 시. 내가 지하철 탈 거야.”“역 바꿔 타는 데 알고?”“작년에도 갔잖아.”맞는 말이었다. 태주는 새 안경 때문에 어지럽지는 않은지만 물었다. 봄이는 괜찮다며 안경다리를 귀 뒤로 밀었다.“아빠는 이모 보면 아직 슬퍼?”태주가 걸음을 늦췄다. 봄이는 못 들은 척해 줄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가끔은.”“이모도 그럴까?”“그건 아빠가 대신 말할 수 없지.”“물어봐?”“아니. 아빠 대신 물을 필요 없어.”봄이는 잠깐 입술을 내밀었다. 질문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들렸을까 봐 태주가 말을 보탰다.“네가 궁금한 건 물어도 돼. 그런데 아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거나, 이모 대답을 아빠한테 가져오려고 하지는 마.”&ld
서연은 아파트 입구를 지나쳐 한 동을 더 걸었다.현관 번호를 누르려다 문 옆에 붙은 이름을 보고서야 잘못 왔다는 걸 알았다. 같은 모양의 출입문이었다. 장바구니를 고쳐 들고 돌아오는 동안 커피가 손등으로 조금 흘렀다.뜨겁지는 않았다. 뚜껑을 너무 세게 눌러 한쪽이 들려 있었다.자기 집에 들어와 고기부터 냉장고에 넣었다. 무와 대파는 식탁에 두고, 세제는 욕실로 가져갔다. 거울에 제 얼굴이 비쳤다. 조금 전 태주가 본 얼굴도 이랬을까.서연은 세제 봉지를 거꾸로 들었다가 바로 세웠다. 아직 뜯지도 않은 봉지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이모, 아까 마트 앞에 있었지?』봄이였다. 뒤이어 새 안경을 쓴 사진이 왔다. 갈색 테가 아이 얼굴에 잘 어울렸다. 사진 뒤쪽에 아빠의 어깨가 걸려 있었지만 서연은 확대하지 않았다.『응. 봤어. 안경 예쁘다. 네가 골랐어?』『아빠는 잘 보이면 된대. 그게 대답이냐고.』서연은 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아빠가 잘 모르는 거지. 다음엔 네가 비교해서 보여 줘.』『했어. 그래도 몰라. 근데 왜 안 불렀어?』입력창에 손가락이 멈췄다.사람이 많았다고 하면 됐다. 신호가 바뀌었고, 장바구니가 무거웠고, 이제 서로 가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고. 그중 마지막 이유만은 봄이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너도 아빠랑 있었잖아.』
서연이 그 집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남색 가방의 손잡이는 그사이 두 번 더 꿰맸다. 이번에 단 실은 원래 것보다 조금 밝았다. 현관에서 실밥을 발견한 서연은 손톱으로 잡아당기지 않고 가위를 가져와 짧게 잘랐다.물건을 챙겨 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토요일이었다.마트 정육 코너 앞에는 점심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서연은 국거리 한 팩을 고르고 고기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다. 작은 무와 대파도 담았다. 세제는 늘 쓰던 것이 할인 중이었다.계산을 마치고 봉투에 물건을 넣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아가 다음 주 금요일에 밥을 먹자고 했다. 이번에는 회사 사람들과도, 가족들과도 상관없는 약속이었다.‘좋아. 내가 식당 찾을게.’‘지난번처럼 줄 서는 데 말고. 배고프면 나 성질나.’‘원래 나잖아.’곧 욕 한 글자가 답으로 왔다. 서연은 계산대 옆으로 비켜서 소리 내 웃었다. 뒷사람이 지나가자 가방을 다시 어깨에 올렸다.일은 바빴고 가끔 지겨웠다. 수진과 의견이 달라 회의가 길어지는 날도 있었고, 어머니 전화를 일부러 저녁까지 미루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을 보내고도 주말이 오면 누군가와 밥을 약속할 수 있었다.태주에게 걸지 않은 전화만으로 5년을 세지는 않았다.마트 옆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샀다. 사장에게 뚜껑을 한 번 더 눌러 달라고 부탁하고, 장바구니에서 삐져나온 대파를 안쪽으로 밀었다. 집에 도착하면 고기부터 냉장고에 넣을 생각이었다.&n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