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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4화. 여기서 자겠다고?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0:03:09

식사가 끝나자 태주는 설거지를 하고 서연은 아이 가방을 풀었다. 봄이는 토끼 인형부터 가져가 귀에 코를 묻었다.

“얘도 씻어?”

“오늘은 안 씻어도 돼.”

서연은 옷만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태주가 잠옷을 찾자 봄이가 인형을 안고 자기 방으로 갔다. 아빠가 내민 옷을 밀어 두고 서랍 맨 밑에서 딸기 무늬 잠옷을 꺼냈다.

서연은 식탁에 남은 바나나 껍질을 치우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버지에게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전화하니 엄마는 씻고 누웠다고 했다.

“너는?”

“좀 있다 들어가려고.”

“밥은 먹었고?”

“응. 아빠도 챙겨 먹어.”

통화를 끊고 보니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서연은 세탁기에 옷을 넣었지만 작동시키지 못했다. 내일 아침까지 두면 냄새가 날 텐데, 지금 돌리면 널고 가야 했다.

태주가 봄이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왔다.

“돌려 놔. 내가 널게.”

“유치원 가방 안에 젖은 수건도 있어요.”

“그것도 넣을게.”

서연은 세제를 계량해서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봄이는 아빠 무릎에서 머리를 말렸다. 바람이 귀에 닿자 얼굴을 찌푸렸고, 태주가 드라이어 방향을 바꿨다.

잠자리에서는 동화책 한 권이 두 권이 되었다. 서연이 토끼 목소리를 내자 봄이가 틀렸다고 했다. 언니가 어떻게 읽어 줬는지 물었지만 아이는 알려 주지 않았다.

“엄마처럼 해 줘. 한 번만.”

서연은 같은 줄을 다시 읽었다. 봄이는 눈을 감았다가 금세 떴다. 이번에는 틀렸다는 말도 하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두 번째 책 마지막 장에서 태주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빠도 들어가도 돼?”

봄이가 베개를 조금 옮겼다. 태주는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앉아 아이가 내민 책을 받았다. 그림 속 고양이 이름을 잘못 읽자 봄이가 바로잡았다.

서연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듣다가 벽시계를 봤다. 10시 30분이었다. 봄이의 눈은 감겼다 뜨기를 반복했다.

“봄아. 이모 이제 집에 갈게.”

아이가 곧바로 눈을 떴다.

“왜?”

“이모도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내일 점심 먹고 올게.”

봄이가 태주를 봤다.

“아빠도?”

“아빠는 여기 있어.”

태주가 책을 덮지 않은 채 대답했다. 봄이는 책 모서리를 쥐었다가 놓았다. 서연에게 대신 토끼를 더 안쪽으로 넣어 달라고 했다. 베개와 벽 사이로 떨어지지 않게.

서연은 인형을 눕히고 일어났다. 봄이가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태주는 책을 읽었다. 마지막 문장은 아이가 잠든 뒤에야 끝났다.

현관에서 코트를 입는데 태주가 따라 나왔다. 그는 신발장에 놓인 흰 운동화를 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형부.”

“미안. 먼저 가.”

서연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문고리를 쥐려던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다.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빈소에서 수십 번 인사할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여기 오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네.”

“어디를 봐도 걔가 하던 것밖에 없어.”

그가 한 손을 들었다. 서연은 붙잡아 주려고 반 발 다가갔다가 멈췄다. 손은 그녀의 어깨에 닿지 않고 신발장 모서리를 짚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가까웠다.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젖은 숨이었다. 서연은 잡은 소매를 놓지 못한 채 눈물 한 방울이 턱 끝에서 떨어지는 것을 봤다.

그 숨이 피부에서 내려오자 이상한 일이 먼저 일어났다. 슬퍼야 하는 자리에서 아랫배가 당겨졌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속옷 안쪽이 천천히 젖었다. 서연은 그 반응을 배신이라고 느꼈다. 울고 있는 형부 앞에서 몸이 먼저 열린 것이 역겨웠다. 그런데도 다리는 뒤로 빠지지 않았다.

닦아 주려고 손을 들었다가 제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만 찾았다. 빈소에서 건넨 뒤 돌려받지 못한 손수건이었다.

빈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 태주가 자기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서연은 그제야 소매를 놓고 조금 비켜섰다. 같이 울어도 될 것 같았는데, 어디까지 가까이 가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거리가 있어서 더 무서웠다.

“내일 점심에 올게요.”

“응.”

“그때까지 밥은 드세요.”

태주는 얼굴을 닦고 문을 열어 주었다.

“도착하면 문자 하나 줘.”

문이 닫힌 뒤에도 서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코트 소매에서 손을 빼, 방금 움켜쥐었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속옷이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감촉을 계단까지 가져가고 싶지 않아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한참 후에야 눌렀다.

***

서연이 원룸 불을 켰을 때는 밤 11시가 조금 넘었다.

현관에 쌓인 전단을 집어 들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태주에게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고생했다. 봄이는 잔다.

그녀는 그제야 외투를 벗었다. 빨랫대에는 사고 소식을 듣던 날 널어 둔 옷이 그대로 있었다. 잘 마른 티셔츠를 걷다가 팔을 끼우지 않고 얼굴에 눌렀다. 향이 거의 빠진 세제 냄새가 났다.

휴대전화 사진첩을 열자 언니가 보낸 반찬 사진이 나왔다. 사고 전 주말이었다. 주말에도 일을 하느냐고 투덜대던 언니는 밀폐 용기를 두 줄로 세워 찍어 보냈다.

시간 없으면 문 앞에 놓고 간다. 통은 돌려줘.

서연은 답장했던 문장을 읽었다. 통값까지 청구하겠네, 아주.

싱크대 위에 그 통이 있었다. 씻어서 돌려주려고 포개 둔 채였다. 서연은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뚜껑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주울 힘이 나지 않았다.

샤워기를 틀었다. 물이 얼굴을 치자 현관에서 닿았던 숨이 다시 목덜미에 붙는 것 같았다. 서연은 벽에 이마를 대고 손을 내려보냈다. 손가락이 들어가기 직전, 미끄러운 열을 확인하고 멈췄다.

여기서 자겠다고 하려는 사람이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손가락을 빼자 허전함이 남았다. 절정은 오지 않았다. 오고 싶던 자리가 스스로 닫히는 느낌만 있었다. 서연은 물을 더 뜨겁게 틀고 그 열로 아래를 씻었다. 씻는다고 닫힌 것이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

다음 날 늦게 눈을 뜨고서야 뚜껑을 주웠다.

토요일 오전이었다. 밀린 공과금 알림과 카드 결제 예정 금액이 화면에 나란히 떴다. 서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회사 단체 대화방을 열었다. 사장 오미경이 대신 받은 고객문의가 쌓여 있었다.

상품 페이지에서 사진 하나가 빠져 있었다. 서연이 노트북으로 수정하자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주말에 일하지 말라니까. 밥은 먹었어?”

“먹으려고요. 사장님, 저 월요일에 출근은 하는데요.”

서연은 손톱으로 노트북 모서리를 긁었다. 말을 꺼내 놓고도 조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지 막막했다.

“당분간 시간을 좀 바꿀 수 있을까요. 아침이나 저녁에 애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둘 다?”

“아직 정하진 못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미경이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서연 씨.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같이 보자. 그런데 오전 전화 받을 사람이 없으면 나도 곤란해. 언제 비는지 알아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지.”

“네. 시간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월요일 와서 얘기해. 오늘은 수정창 닫고.”

서연은 창을 닫았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신 뒤 작은 메모장에 출근 시간과 버스 시간을 적었다. 태주의 집을 들렀다가 회사에 가려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나와야 했다. 저녁에 다시 가서 아이를 재우면 어젯밤처럼 돌아올 것이다.

줄 사이에 저녁 먹을 시간은 있었는데, 자기 빨래를 할 시간은 빠져 있었다. 자기 몸을 다스릴 시간도 없었다. 그 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후 1시, 약속대로 해솔아파트에 갔다. 현관 안에서는 계란찜 냄새가 났다. 명자가 싱크대 앞에서 냄비를 씻고 있었다.

“왔어? 밥은 먹었고?”

“네, 어머니.”

우유만 마셨지만 새로 상을 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봄이는 거실에서 태주와 퍼즐을 맞추다가 손을 들었다. 서연은 아이 손바닥을 가볍게 맞췄다.

“이모, 점심 다 먹었어.”

“잘했네. 계란찜?”

“할머니가 해 줬어.”

명자의 설거지 소리가 잠깐 잦아들었다. 서연은 주방으로 가 명자 옆에 섰다.

“잘 먹었나 봐요.”

“밥이야 해 주면 먹지. 집으로 오라니까 싫다는 거고.”

명자는 물을 잠갔다. 손에 묻은 거품을 보고 다시 틀었다.

“밤에는 어땠대?”

“형부가 같이 잤대요.”

“나는 월요일 오전에는 못 와. 병원 예약이 있어. 바꾸려고 했는데 한참 밀린다더라.”

서연은 메모장을 꺼내 월요일 오전에 작은 선을 그었다. 명자가 그걸 보고 덧붙였다.

“화요일부터는 와 줄 수 있어. 하루 종일은 몰라도.”

“네. 시간 같이 맞춰 볼게요.”

명자는 씻은 냄비를 뒤집어 놓았다. 서연은 행주로 옆에 고인 물을 닦았다. 명자가 봄이에게 인사하고 간 뒤, 태주는 퍼즐 판을 소파 앞으로 옮겼다. 봄이는 곰의 코 조각을 찾느라 둘을 보지 않았다.

식탁에서 서연이 메모장을 폈다.

“형부 언제 출근하세요?”

“월요일엔 오후에 잠깐. 수요일부터는 나가야 해.”

“봄이 유치원은요?”

“선생님하고 통화했어. 월요일에 같이 가 보려고. 힘들어하면 바로 데려오고.”

서연은 월요일 오전에 그었던 선을 지웠다. 태주가 그 옆 버스 시간을 봤다.

“매일 왔다 갔다 하려고?”

“그러면 밤이 너무 늦어져서요.”

“서연아. 네가 다 할 필요 없어.”

“다 한다는 거 아니에요. 저도 일해야 돼요.”

말이 생각보다 딱딱하게 나왔다. 서연은 펜을 내려놓았다. 태주는 변명하지 않고 그녀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시선이 메모장에서 올라와 서연의 입에 멈췄다. 입에서 목으로, 목에서 잠옷처럼 여민 니트 깃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메모장으로 도망갔다. 그 경로를 서연도 봤다. 봤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젯밤 현관에서 몸이 먼저 열렸던 일이 떠올라, 그녀는 무릎을 더 모았다.

“저, 한 달 정도만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떨까요.”

태주의 시선이 메모장에서 올라왔다.

“여기서 자겠다고?”

질문은 돌봄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눈이 머문 자리는 돌봄의 자리가 아니었다. 서연은 펜을 꼭 쥐었다. 쥐면 몸이 들키지 않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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