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식사가 끝나자 태주는 설거지를 하고 서연은 아이 가방을 풀었다. 봄이는 토끼 인형부터 가져가 귀에 코를 묻었다.
“얘도 씻어?”
“오늘은 안 씻어도 돼.”
서연은 옷만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태주가 잠옷을 찾자 봄이가 인형을 안고 자기 방으로 갔다. 아빠가 내민 옷을 밀어 두고 서랍 맨 밑에서 딸기 무늬 잠옷을 꺼냈다.
서연은 식탁에 남은 바나나 껍질을 치우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버지에게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전화하니 엄마는 씻고 누웠다고 했다.
“너는?”
“좀 있다 들어가려고.”
“밥은 먹었고?”
“응. 아빠도 챙겨 먹어.”
통화를 끊고 보니 저녁 8시가 넘어 있었다. 서연은 세탁기에 옷을 넣었지만 작동시키지 못했다. 내일 아침까지 두면 냄새가 날 텐데, 지금 돌리면 널고 가야 했다.
태주가 봄이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왔다.
“돌려 놔. 내가 널게.”
“유치원 가방 안에 젖은 수건도 있어요.”
“그것도 넣을게.”
서연은 세제를 계량해서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봄이는 아빠 무릎에서 머리를 말렸다. 바람이 귀에 닿자 얼굴을 찌푸렸고, 태주가 드라이어 방향을 바꿨다.
잠자리에서는 동화책 한 권이 두 권이 되었다. 서연이 토끼 목소리를 내자 봄이가 틀렸다고 했다. 언니가 어떻게 읽어 줬는지 물었지만 아이는 알려 주지 않았다.
“엄마처럼 해 줘. 한 번만.”
서연은 같은 줄을 다시 읽었다. 봄이는 눈을 감았다가 금세 떴다. 이번에는 틀렸다는 말도 하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두 번째 책 마지막 장에서 태주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빠도 들어가도 돼?”
봄이가 베개를 조금 옮겼다. 태주는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앉아 아이가 내민 책을 받았다. 그림 속 고양이 이름을 잘못 읽자 봄이가 바로잡았다.
서연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듣다가 벽시계를 봤다. 10시 30분이었다. 봄이의 눈은 감겼다 뜨기를 반복했다.
“봄아. 이모 이제 집에 갈게.”
아이가 곧바로 눈을 떴다.
“왜?”
“이모도 씻고 옷 갈아입어야지. 내일 점심 먹고 올게.”
봄이가 태주를 봤다.
“아빠도?”
“아빠는 여기 있어.”
태주가 책을 덮지 않은 채 대답했다. 봄이는 책 모서리를 쥐었다가 놓았다. 서연에게 대신 토끼를 더 안쪽으로 넣어 달라고 했다. 베개와 벽 사이로 떨어지지 않게.
서연은 인형을 눕히고 일어났다. 봄이가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태주는 책을 읽었다. 마지막 문장은 아이가 잠든 뒤에야 끝났다.
현관에서 코트를 입는데 태주가 따라 나왔다. 그는 신발장에 놓인 흰 운동화를 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형부.”
“미안. 먼저 가.”
서연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문고리를 쥐려던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다.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빈소에서 수십 번 인사할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여기 오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네.”
“어디를 봐도 걔가 하던 것밖에 없어.”
그가 한 손을 들었다. 서연은 붙잡아 주려고 반 발 다가갔다가 멈췄다. 손은 그녀의 어깨에 닿지 않고 신발장 모서리를 짚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가까웠다.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젖은 숨이었다. 서연은 잡은 소매를 놓지 못한 채 눈물 한 방울이 턱 끝에서 떨어지는 것을 봤다.
그 숨이 피부에서 내려오자 이상한 일이 먼저 일어났다. 슬퍼야 하는 자리에서 아랫배가 당겨졌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속옷 안쪽이 천천히 젖었다. 서연은 그 반응을 배신이라고 느꼈다. 울고 있는 형부 앞에서 몸이 먼저 열린 것이 역겨웠다. 그런데도 다리는 뒤로 빠지지 않았다.
닦아 주려고 손을 들었다가 제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만 찾았다. 빈소에서 건넨 뒤 돌려받지 못한 손수건이었다.
빈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 태주가 자기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서연은 그제야 소매를 놓고 조금 비켜섰다. 같이 울어도 될 것 같았는데, 어디까지 가까이 가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거리가 있어서 더 무서웠다.
“내일 점심에 올게요.”
“응.”
“그때까지 밥은 드세요.”
태주는 얼굴을 닦고 문을 열어 주었다.
“도착하면 문자 하나 줘.”
문이 닫힌 뒤에도 서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코트 소매에서 손을 빼, 방금 움켜쥐었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속옷이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감촉을 계단까지 가져가고 싶지 않아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한참 후에야 눌렀다.
***
서연이 원룸 불을 켰을 때는 밤 11시가 조금 넘었다.
현관에 쌓인 전단을 집어 들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 태주에게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고생했다. 봄이는 잔다.
그녀는 그제야 외투를 벗었다. 빨랫대에는 사고 소식을 듣던 날 널어 둔 옷이 그대로 있었다. 잘 마른 티셔츠를 걷다가 팔을 끼우지 않고 얼굴에 눌렀다. 향이 거의 빠진 세제 냄새가 났다.
휴대전화 사진첩을 열자 언니가 보낸 반찬 사진이 나왔다. 사고 전 주말이었다. 주말에도 일을 하느냐고 투덜대던 언니는 밀폐 용기를 두 줄로 세워 찍어 보냈다.
시간 없으면 문 앞에 놓고 간다. 통은 돌려줘.
서연은 답장했던 문장을 읽었다. 통값까지 청구하겠네, 아주.
싱크대 위에 그 통이 있었다. 씻어서 돌려주려고 포개 둔 채였다. 서연은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뚜껑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주울 힘이 나지 않았다.
샤워기를 틀었다. 물이 얼굴을 치자 현관에서 닿았던 숨이 다시 목덜미에 붙는 것 같았다. 서연은 벽에 이마를 대고 손을 내려보냈다. 손가락이 들어가기 직전, 미끄러운 열을 확인하고 멈췄다.
여기서 자겠다고 하려는 사람이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손가락을 빼자 허전함이 남았다. 절정은 오지 않았다. 오고 싶던 자리가 스스로 닫히는 느낌만 있었다. 서연은 물을 더 뜨겁게 틀고 그 열로 아래를 씻었다. 씻는다고 닫힌 것이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
다음 날 늦게 눈을 뜨고서야 뚜껑을 주웠다.
토요일 오전이었다. 밀린 공과금 알림과 카드 결제 예정 금액이 화면에 나란히 떴다. 서연은 침대에 걸터앉아 회사 단체 대화방을 열었다. 사장 오미경이 대신 받은 고객문의가 쌓여 있었다.
상품 페이지에서 사진 하나가 빠져 있었다. 서연이 노트북으로 수정하자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주말에 일하지 말라니까. 밥은 먹었어?”
“먹으려고요. 사장님, 저 월요일에 출근은 하는데요.”
서연은 손톱으로 노트북 모서리를 긁었다. 말을 꺼내 놓고도 조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지 막막했다.
“당분간 시간을 좀 바꿀 수 있을까요. 아침이나 저녁에 애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둘 다?”
“아직 정하진 못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미경이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서연 씨.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같이 보자. 그런데 오전 전화 받을 사람이 없으면 나도 곤란해. 언제 비는지 알아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지.”
“네. 시간 정해서 말씀드릴게요.”
“월요일 와서 얘기해. 오늘은 수정창 닫고.”
서연은 창을 닫았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신 뒤 작은 메모장에 출근 시간과 버스 시간을 적었다. 태주의 집을 들렀다가 회사에 가려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나와야 했다. 저녁에 다시 가서 아이를 재우면 어젯밤처럼 돌아올 것이다.
줄 사이에 저녁 먹을 시간은 있었는데, 자기 빨래를 할 시간은 빠져 있었다. 자기 몸을 다스릴 시간도 없었다. 그 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후 1시, 약속대로 해솔아파트에 갔다. 현관 안에서는 계란찜 냄새가 났다. 명자가 싱크대 앞에서 냄비를 씻고 있었다.
“왔어? 밥은 먹었고?”
“네, 어머니.”
우유만 마셨지만 새로 상을 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봄이는 거실에서 태주와 퍼즐을 맞추다가 손을 들었다. 서연은 아이 손바닥을 가볍게 맞췄다.
“이모, 점심 다 먹었어.”
“잘했네. 계란찜?”
“할머니가 해 줬어.”
명자의 설거지 소리가 잠깐 잦아들었다. 서연은 주방으로 가 명자 옆에 섰다.
“잘 먹었나 봐요.”
“밥이야 해 주면 먹지. 집으로 오라니까 싫다는 거고.”
명자는 물을 잠갔다. 손에 묻은 거품을 보고 다시 틀었다.
“밤에는 어땠대?”
“형부가 같이 잤대요.”
“나는 월요일 오전에는 못 와. 병원 예약이 있어. 바꾸려고 했는데 한참 밀린다더라.”
서연은 메모장을 꺼내 월요일 오전에 작은 선을 그었다. 명자가 그걸 보고 덧붙였다.
“화요일부터는 와 줄 수 있어. 하루 종일은 몰라도.”
“네. 시간 같이 맞춰 볼게요.”
명자는 씻은 냄비를 뒤집어 놓았다. 서연은 행주로 옆에 고인 물을 닦았다. 명자가 봄이에게 인사하고 간 뒤, 태주는 퍼즐 판을 소파 앞으로 옮겼다. 봄이는 곰의 코 조각을 찾느라 둘을 보지 않았다.
식탁에서 서연이 메모장을 폈다.
“형부 언제 출근하세요?”
“월요일엔 오후에 잠깐. 수요일부터는 나가야 해.”
“봄이 유치원은요?”
“선생님하고 통화했어. 월요일에 같이 가 보려고. 힘들어하면 바로 데려오고.”
서연은 월요일 오전에 그었던 선을 지웠다. 태주가 그 옆 버스 시간을 봤다.
“매일 왔다 갔다 하려고?”
“그러면 밤이 너무 늦어져서요.”
“서연아. 네가 다 할 필요 없어.”
“다 한다는 거 아니에요. 저도 일해야 돼요.”
말이 생각보다 딱딱하게 나왔다. 서연은 펜을 내려놓았다. 태주는 변명하지 않고 그녀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시선이 메모장에서 올라와 서연의 입에 멈췄다. 입에서 목으로, 목에서 잠옷처럼 여민 니트 깃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메모장으로 도망갔다. 그 경로를 서연도 봤다. 봤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젯밤 현관에서 몸이 먼저 열렸던 일이 떠올라, 그녀는 무릎을 더 모았다.
“저, 한 달 정도만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떨까요.”
태주의 시선이 메모장에서 올라왔다.
“여기서 자겠다고?”
질문은 돌봄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눈이 머문 자리는 돌봄의 자리가 아니었다. 서연은 펜을 꼭 쥐었다. 쥐면 몸이 들키지 않을 줄 알았다.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