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한결은 빗속에 젖은 채로 멈춰 서 있었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는 비릿한 금속성 냄새와 섞여 있었다. 그것은 관리국이 뿌려놓은 살균된 공기가 아니었다. 진흙과 썩은 잎사귀, 그리고 생명력이 짓이겨진 거리의 냄새였다. 손목의 흉터 칩을 뜯어낸 자리에선 여전히 선혈이 뚝뚝 떨어져 빗물과 섞였다. 한결은 그것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70년의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지금, 현실은 그저 잿빛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지정된 안전 가옥으로 향하려 했다. 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골목 끝, 그곳에는 분명 자신의 마지막 동료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짙은 어둠 속에서 익숙한 구둣소리가 들려왔다. 한결은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민호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화처럼 묵직하고 절도 있는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드러낸 사람은 한결의 직장 상사이자, 지옥 같은 구조 현장에서 그를 이끌어온 김 팀장이었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결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의 무뚝뚝하고 듬직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빛은 기계적으로 차가웠고, 손에는 익숙한 신경 차단기 하나가 쥐여 있었다. 한결의 미간이 좁혀졌다.
"민호는 어디 있지?" 한결의 질문에 김 팀장은 대답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한결의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힐끗 쳐다보며 경멸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민호라니. 그 멍청한 녀석은 이미 지하 4층에서 데이터 분리 작업을 끝내고 폐기되었다. 한결아, 넌 정말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이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하더군. 시스템이 멈추면 모든 게 끝날 거라 믿었나? 겨우 흉터 칩 하나를 뜯어낸다고 해서, 너희의 그 가련한 영혼이 자유를 얻을 줄 알았던 거냐?"
김 팀장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어 지시를 내렸다. "실험체 001번 확보. 즉각적인 동기화 재개 준비해. 서버가 셧다운 되었다고 해서 데이터가 사라진 건 아니야. 우린 이미 백업 서버로 모든 기억을 이전해 놓았으니까." 한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가 보았던 그 붕괴의 잔해는 진짜가 아니었다. 관리국은 처음부터 시스템의 붕괴조차 데이터 수확의 일부로 계산하고 있었다. 한결이 흉터 칩을 뜯어내며 느끼던 해방감은 거대한 덫의 입구에 불과했다.
"팀장님, 설마 당신까지 그들의 개였던 건가?" 한결이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김 팀장은 한결의 멱살을 꽉 움켜잡으며 그를 콘크리트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충격으로 머리가 울렸지만, 한결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김 팀장의 눈동자 속에는 인간적인 감정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직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적인 충성심만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는 한결의 귓가에 입을 바짝 들이대고 속삭였다. "개? 아니, 난 관리자다. 너희 같은 실험체들이 얼마나 깊은 지옥으로 떨어지는지 관찰하는 관찰자지."
그의 말은 한결의 폐부를 찔렀다. 지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동료이자 상사였던 김 팀장. 그가 사실은 한결의 뇌파를 가장 가까이에서 측정하며, 어떤 고통에서 행복 데이터가 가장 순도 높게 추출되는지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결은 그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구조 현장에서 민호를 구하기 위해 땀 흘리던 순간, 김 팀장이 보여주었던 그 안도의 미소조차 전부 데이터 확보를 위한 연극이었다. 모든 신뢰가 찢겨 나가는 기분은 흉터 칩을 뜯어낼 때의 통증보다 훨씬 더 처절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었군. 당신이 말한 '지옥'은 내가 직접 겪은 70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배신이었어." 한결은 분노를 억누르며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감추지 않았다. 김 팀장은 비웃으며 한결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지원군들의 발소리를 확인하며, 다시 한번 한결을 제압하기 위해 신경 차단기를 작동시켰다. "똑똑하군. 하지만 넌 이제 선택권이 없다. 민호를 구하고 싶나? 아니면 네가 겪었던 그 70년의 환영 속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고 싶나? 선택해."
한결은 빗물과 섞인 피를 닦아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의 손목에서는 여전히 고통이 일렁였지만, 그 고통은 이제 그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그는 시스템을 완전히 부술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흉터 칩을 뜯어내는 것은 끝이 아니라, 관리국의 중앙 서버와 직접 연결되는 마지막 통로를 여는 행위였다. 한결은 김 팀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더 이상 겁에 질린 실험체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심장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심어 넣을 준비가 된, 시스템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인간이었다.
"민호는 어디 있지?" 한결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협박이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하기 전의 최후통첩이었다. 김 팀장은 당황한 기색 없이 한결의 멱살을 다시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한결은 이미 한 발 앞서 있었다. 그는 김 팀장의 손목을 낚아채며, 흉터 칩이 빠져나간 자리에 흐르던 자신의 피를 김 팀장의 목에 묻은 칩 단자에 문질렀다. 김 팀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단순한 혈액이 아니었다. 한결이 틈의 내부에서 강제로 주입받았던 그 지독한 데이터를 역으로 전송하는 매개체였다.
"뭐, 무슨 짓을..." 김 팀장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더니, 온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관리국의 시스템과 동기화되어 있던 부품이었던 것이다. 한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멱살을 쥐고 벽에 고정했다. "너희가 내게 주입했던 그 70년의 지옥을, 이제 너도 똑같이 경험해 볼 시간이야. 누가 더 빨리 미쳐버리는지 확인해보자고. 시스템의 부품이 고장이 나면, 결국 도살장 전체가 멈춰 서게 되어 있으니까."
주변의 어둠이 일렁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작은 입자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데이터의 파편이었다. 한결은 김 팀장의 고통 어린 비명을 들으며, 그가 숨겨두었던 관리국의 진짜 좌표를 읽어 내려갔다. 모든 기억이 동기화되고, 감각이 확장되었다. 한결의 머릿속으로 수만 명의 실험체가 느끼는 고통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압도적인 무게에 한결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그는 관리국의 심장을 멈추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도달해 있었다.
김 팀장은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한결이 겪었던 70년의 악몽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한결은 그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음성으로 읊조렸다.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아. 너희가 만든 그 데이터는 결국 인간의 존엄을 담을 수 없거든. 너희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이제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다." 한결은 뒤돌아서서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진짜 복수가 시작될 차례였다.
한결의 발걸음이 복도 바닥을 울릴 때마다, 벽면에 부착된 감시 카메라들이 미세하게 회전하며 그를 추적했다. 붉은색 인디케이터가 깜빡이는 모습은 마치 굶주린 맹수의 눈동자 같았다. 한결은 자신의 손목에 박힌 흉터 칩을 꽉 쥐었다. 그곳에서 흐르는 미세한 진동이 신경을 긁어댔지만, 그는 고통을 쾌락으로 치환하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제 뒤로 물러설 곳은 없었다. 관리국이 설계한 미로 속에서, 그는 가장 깊숙한 심장부인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유리 관 안에서는 정체 모를 액체에 잠긴 인간들이 희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관리국이 수확해 낸 행복 데이터의 숙주들이자, 언젠가 폐기될 쓰레기들에 불과했다. 한결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무의식 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공포와 절망이 한결의 흉터 칩을 타고 실시간으로 전송되어 왔다. 그는 그 비명들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자신의 뇌 속에 구축된 70년의 지옥을 역으로 시스템에 주입할 준비를 마쳤다.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자, 육중한 강철 문이 기계적인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그 안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국 요원 박철웅이었다. 그는 차가운 무표정으로 총구를 한결의 미간에 겨눈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박철웅의 뒤편으로는 희미한 푸른 빛을 내뿜는 데이터 서버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001번, 선을 넘었군. 네가 김 팀장을 처리했다고 해서 시스템이 무너질 거라 생각했나?” 박철웅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예리했다. 한결은 멈춰 서서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박철웅의 눈동자 한구석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가족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관리국의 개가 된 자. 한결은 그가 겪고 있을 내적 갈등을 꿰뚫어 보듯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박철웅, 너도 결국은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해. 네가 지키려는 가족들조차 이 빌어먹을 관리국에선 언제든 삭제 가능한 데이터일 뿐이라고. 그걸 알고도 총구를 겨눌 수 있겠어?”
박철웅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움켜쥐며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한결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손목 흉터 칩을 박철웅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칩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주파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기괴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이게 뭔지 알지? 관리국이 너희 같은 꼭두각시들에게 심어둔 동기화 장치야. 내가 지금 이 장치를 과부하 시키면, 이 구역 전체의 시스템이 붕괴해. 그럼 너와 네 가족의 기억 데이터도 영원히 지워지겠지. 그래도 나를 쏠 건가?” 한결의 말에 박철웅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관리국이 얼마나 잔혹하게 기억을 수확하고 폐기하는지를. 그럼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시스템은 질서야. 네가 파괴하려는 건 혼돈뿐이다.” 한결은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흘렸다. “질서? 타인의 고통을 쥐어짜서 만드는 영생이 무슨 질서란 말인가. 그건 도살장일 뿐이야.”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때,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던 김 팀장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참혹했다. 뇌 회로가 과부하 된 탓인지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기계적인 코드 값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한결의 다리를 붙잡으려 발버둥 쳤다. “한결아, 멈춰...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김 팀장의 손이 한결의 바짓단을 적셨다. 그 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시스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섞여 있었다. 한결은 차갑게 그 손을 뿌리쳤다. 더 이상 동정은 없었다. 그는 박철웅과 김 팀장을 번갈아 보며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너희 둘 다 똑같아.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시체들이지. 오늘 내가 그 시체들의 숨통을 끊어주러 왔다.” 한결의 흉터 칩이 격렬하게 붉은 빛을 내뿜으며 전력을 급상승시켰다.
박철웅이 고민하는 사이, 한결은 공간 내의 동기화 프로토콜을 강제로 재설정했다. 흉터 칩을 통해 전달되는 고압 전류가 벽면의 데이터 단자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지하 4층 전체가 기괴한 소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달린 조명들이 파열음을 내며 터져 나갔고, 유리 관 안의 액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결의 머릿속에는 70년의 지옥이 다시금 밀려들었지만, 그는 이제 그것을 무기로 삼았다. 박철웅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그의 손목에서도 한결의 것과 같은 흉터 칩이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그동안 억눌러왔던 고통 데이터가 역류하고 있었다. 박철웅은 총을 떨어뜨리고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기억들이 실은 관리국에 의해 조작된 가짜였다는 사실을 뇌의 깊은 곳에서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김 팀장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 경련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결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관리국 지하 4층의 심장부로 향하는 버튼이 있었다. 한결은 떨리는 손으로 마스터 키를 슬롯에 삽입했다. 이제 시스템 셧다운을 실행할 시간이었다. 흉터 칩이 피부를 뚫고 나올 듯 박동했다. 데이터가 한결의 신경계와 완전히 융합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관리국의 모든 서버에 접속했다. 그곳에는 수천 명의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빼앗긴 채 기억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한결은 자신의 기억을 폭탄처럼 터뜨릴 준비를 마쳤다. “이제 진정한 죽음을 선사해 주지. 너희가 그토록 갈망하던 안식이라는 걸 말이야.” 한결의 중얼거림에 시스템 전체가 붉은 경보등으로 뒤덮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하기 시작하자, 공간 전체가 중력을 잃은 듯 흔들렸다. 한결은 닫히는 문틈으로 박철웅의 텅 빈 눈동자를 보았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뇌를 파괴하고 있었다. 한결은 그 모습을 보며 차가운 쾌감을 느꼈다. 진정한 파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지하 4층의 중앙 서버실만 파괴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관리국장 최진혁이 설계한 그 끔찍한 영생의 요람을 불태워버릴 시간이었다. 한결은 자신의 손목 흉터 칩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고통은 이제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타오르는 분노와 차가운 이성만이 남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벽면에 기대어, 마침내 도달할 심연을 향해 눈을 감았다. 시스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버실의 보안 방벽들이 한결의 흉터 칩에 의해 차례로 해제되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가상의 장벽이 무너질 때마다, 관리국의 기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이들의 행복한 기억들이 데이터 조각이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눈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인간의 영혼을 도려낸 껍데기들이었다. 한결은 그 조각들을 가만히 손으로 훑었다. 지독하게도 차갑고 무미건조한 데이터의 향기였다. 한결은 이제 시스템의 심장부에 근접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중앙 연산 장치가 인간의 뇌를 매개로 작동하고 있었다. 수많은 전선이 인간의 두개골에 직접 꽂혀 있는 광경은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한결은 그들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오늘 이곳의 모든 전원을 차단하고, 이 악몽 같은 굴레를 영원히 끝내겠다고. 관리국의 비윤리적인 영생 사업은 오늘부로 폐기되어야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차가운 냉기가 한결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수십 개의 유리 관 안에 갇힌 사람들이 관리국의 시스템을 가동하는 배터리처럼 소모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3년 전 처형당한 줄 알았던 동료들의 뇌 데이터도 보였다. 그들은 관리국에 의해 꼭두각시로 재탄생해,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한결의 눈에 핏발이 섰다. 관리국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대가로 자신들의 영생을 구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시 중앙 서버의 메인 콘솔로 다가갔다. 마스터 키를 꽂고, 마지막 프로토콜을 활성화할 준비를 했다. 흉터 칩이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내뿜었지만, 한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관리국이라는 거대한 도살장을 무너뜨릴 유일한 사신이 되어 있었다.
“어디까지 온 거지?” 낯익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최진혁 국장이었다. 그는 평소의 냉철한 모습 대신, 알약을 씹어 삼키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복용하는 알약이 시스템 동기화 장치임을 한결은 이제야 깨달았다. 최진혁 또한 시스템의 주인인 척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시스템에 구속된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것이다. “네가 하는 짓이 결국 시스템을 더 강화하는 것뿐이라는 걸 왜 모르나, 한결아.” 최진혁의 말에 한결은 비웃음으로 답했다. “내가 파괴하는 건 시스템뿐만이 아니야. 너라는 존재 자체를 이 데이터의 지옥 속으로 영원히 매장할 거다.” 한결은 마스터 키를 슬롯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러자 시스템의 비상 경보가 지하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역방향 동기화 프로토콜이 가동되었다.
한결의 기억 속에 있던 70년의 지옥 데이터가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관리국의 중앙 서버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서버 곳곳에서 불꽃이 튀고 데이터 회로가 타버리는 냄새가 진동했다. 최진혁은 당황하며 콘솔을 조작하려 했지만, 한결은 이미 그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물리적으로 단자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관리국 내부의 모든 카메라와 통신 장비가 먹통이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거세하던 그 공장이 멈춰 서기 시작한 것이다. 한결은 최진혁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너희가 누리던 영생은 타인의 고통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러라.” 한결의 손목 칩이 마지막 빛을 발하며 시스템의 핵심 코어를 완전히 파괴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최진혁은 바닥에 주저앉아 헛된 손짓을 했다. 그의 뇌가 시스템의 붕괴와 함께 동기화되어, 자신이 수확했던 수만 명의 고통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었다. 한결은 그 참상을 뒤로하고 서서히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김 팀장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관리국의 부속품들이었을까. 한결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이 지옥의 문을 닫고 나갈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흉터 칩에서 들려오는 기계적인 음성은 멈추지 않았다. “시스템은 복구된다. 너 또한 이 지옥의 부품일 뿐이야.” 한결은 그 환청을 비웃으며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너도 결국 이 지옥의 부품일 뿐이야.
첫눈은 12월 22일 밤에 왔다.자정이 조금 지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철웅이었다. 문자 대신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병실 창가,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 사이를 비스듬히 내리는 눈. 그리고 사진 앞쪽에 누군가의 손. 앙상한 손가락, 누런 피부. 새끼손가락 손톱 끝에 주황색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 가는 초승달. 거의 다 자라 나가서, 손톱깎이로 한 번만 깎으면 없어질 만큼.사진 아래 한 줄이 따라왔다.남았다.나는 옥탑방 창문을 열었다. 눈이 빨랫줄 위에 얇게 쌓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소원 뭐래요. 답은 한참 뒤에 왔다. 안 알려 준대. 말하면 안 이루어진대.나는 그날 밤 무전을 켜지 않고 잤다. 1년 만에 처음이었다.그 뒤로 2주가 흘렀다. 그 2주 동안 세상은 빠르게 움직였다.연말 뉴스는 올해의 말을 뽑았다. 1위는 마지막 1분이었다. 보험사 네 곳이 실손 보험에 라스트 미닛 특약을 기본으로 끼워 넣었다. 새로 보험에 드는 사람은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패치가 집으로 배송되었다. 대형 병원 스무 곳이 호스피스 병동 전체에 도입했다. 요양 시설 단체 가입이 줄을 이었다. 1월 첫 주, 안식은 가입자 이백만 명 돌파를 발표했다. 11월에 삼십만이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였다.지하철 광고판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약국 계산대 옆 전단지에서 하얀 바탕의 노인의 손이 나를 따라왔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는데, 계산대 아르바이트생의 귀 뒤에 흰 동그라미가 붙어 있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나는 그걸 보고 한참 서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봉투 필요하세요, 하고 두 번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나오다가 돌아서서 물었다. 그거, 왜 붙였어요? 아르바이트생은 귀 뒤를 만지며 웃었다. 보험 들었더니 그냥 왔어요. 떼기 귀찮아서요. 그리고 이거 있으면 좀 덜 무섭잖아요, 오토바이 탈 때. 나는 고개를 끄덕
나흘 뒤 밤, 철웅에게서 전화가 왔다."나와."그 한마디였다. 어디냐고 묻자 성진대 후문 앞이라고 했다. 포장마차. 목소리가 이미 조금 풀려 있었다.밤 열 시 반, 후문 건너편 골목 입구에 주황색 비닐 천막이 하나 서 있었다. 천막 안에 백열등 두 개, 플라스틱 탁자 세 개. 어묵 냄비에서 김이 올라 비닐 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손님은 철웅 하나였다. 그는 구석 탁자에 앉아 지팡이를 탁자 모서리에 기대 놓고, 소주병 두 개를 앞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다."어머님은요?""자. 오늘 저녁에 한 번 숨이 이상해서 다들 뛰어왔는데, 돌아왔어. 의사가 오늘은 넘긴대." 그가 잔을 비웠다. "미경이가 옆에 있어. 나가서 바람 좀 쐬라고 쫓아냈어."나는 맞은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기우뚱했다. 포장마차 주인 할머니가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떠서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술은 안 마신다고 했고, 할머니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어묵 꼬치 두 개를 국물 옆에 얹었다."지팡이 양반이 매일 여기서 한 병씩 해." 할머니가 철웅을 턱으로 가리켰다. "오늘은 두 병째야. 아가씨가 좀 말려."철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냄비 앞으로 돌아가 어묵을 꼬치에 꿰기 시작했다."이만 명." 철웅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 말이 머리에서 안 나가."나는 국물을 불었다. 나흘 전 가족실에서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만 명이 서로 옆에 서서, 서로 모르고."아무도 모르잖아. 그 사람들이 거기 있는 거." 그가 소주를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가족들은 편히 가셨다고 생각하고, 안식은 이만 명 돌파라고 광고하고. 근데 그 사람들은 그 골목에 서 있어. 아무도 모르는 데에. 아무도 안 찾는 데에.""……네.""나 그런 사람들 옮긴 적 있어.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주치의가 상담실 문을 열어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어제 입은 스웨터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원탁 위에는 식은 커피 두 잔과 종이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벽의 뇌 단면 그림 옆에 누군가 모니터 기록을 출력한 긴 종이를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초록 선을 검은 잉크로 옮긴 띠가 벽을 가로질러 문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밤새 계셨어요?""집에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잠이 안 와서요."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두 가지를 말씀드려야 합니다."나는 앉았다. 그는 수첩을 펼쳤다. 어제 적은 시각들이 빽빽했다."첫째, 어제 그 새 파형이요. 밤 열한 시 이십 분쯤 마지막으로 나오고 멈췄습니다. 오늘 새벽엔 없었어요." 그는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시각을 늘어놓고 보니까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네 시 오십이 분부터 여덟 시까지, 그러니까 정하윤 씨가 병실에 계시던 동안에 제일 촘촘하게 나왔어요. 가시는 뒤로는 점점 드물어지고요.""제가 있어서요?""모릅니다. 우연일 수도 있어요. 하루치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였다. "그런데 두 번째가 더 큽니다."그는 벽에 붙은 긴 종이 앞으로 갔다."어젯밤에 그 새 파형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확실히 하려고, 1년 치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이 모니터에 분석 기능이 있어요. 파형을 쪼개서 겹쳐 있는 성분을 따로 보여 주는 기능입니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어서 한 번도 안 켰어요. 선 모양이 1년 동안 똑같았으니까."그가 종이의 왼쪽 끝을 가리켰다. 거기서는 선이 가늘었다."이게 작년 11월, 강한결 씨가 처음 오셨을 때입니다. 선 하나예요. 깨끗한 한 줄." 그는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선이 조금 굵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면 여전
다음 주 목요일 아침, 나는 은평 시장에서 귤을 샀다.트럭 것 말고 시장 것으로.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과일 가게 확성기는 여전히 귤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이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바구니를 샀다. 두 개가 아니라 스무 개쯤 되는 귤이 검은 봉지 안에서 묵직하게 흔들렸다.생선 가게 앞을 지나다 멈췄다. 파란 천막 아래에서 문순자 할머니가 얼음을 깨고 있었다. 두꺼운 고무장갑, 목까지 올린 털 조끼, 머리에 두른 수건. 쇠꼬챙이로 얼음 덩어리를 내리칠 때마다 작은 조각이 튀어 할머니의 앞치마에 붙었다. 며느리가 옆에서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병원에서 무리하지 말랬잖아요.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아가씨!" 할머니가 먼저 나를 보았다. 쇠꼬챙이를 든 채로 손을 흔들었다. "귤 거기서 샀어? 잘했네. 거기가 싸.""할머니, 얼음 깨셔도 돼요?""이거 안 깨면 내가 죽어." 할머니가 얼음을 한 번 더 내리쳤다. "병원에서 누워 있으니까 자꾸 그 하얀 게 생각나. 여기서 이거 깨고 있으면 안 나. 손이 시리고, 비린내 나고, 저 여편네가 잔소리하고. 그래야 여기가 내 데인 줄 알지."며느리가 한숨을 쉬었고, 할머니는 웃었다. 이 몇 개 빠진 입이었다."오늘은 어디 가?""아빠 보러요. 요양원."할머니가 쇠꼬챙이를 내려놓고 나를 오래 보았다."잘 생각했네. 가서 손 한번 잡아 드려. 늙으면 그게 제일 좋아."솔밭요양원 2층 거실에 들어섰을 때, 창가 끝 의자 옆에 엄마가 서 있었다.1년 사이에 엄마는 작아져 있었다. 머리가 반쯤 하얘졌고, 등이 조금 굽었다. 회색 누빔 점퍼를 입고, 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온병을 창턱에 내려놓고 걸어와,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아프지 않게."살 빠졌네.
이송 병원은 성진대학병원이었다.무전에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마을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사십 분, 서울까지 한 시간 반. 버스 안에서 나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이어폰 속 무전은 이미 다른 출동으로 넘어가 있었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고속도로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갔다. 하나, 둘, 셋, 넷.안식의 남자는 패치가 작동하면 자동으로 연락이 간다고 했다. 새벽 두 시에도 머리를 빗고 봉투를 챙겨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패치는 지퍼 백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비공개 동의서에는 서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섬망입니다. 흔한 일입니다.나는 휴대전화를 열어 철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가고 그가 받았다."왜.""아저씨 지금 병원이에요?""어. 엄마 옆에.""성진대 응급실에 방금 소생자가 들어왔어요. 라스트 미닛. 스물네 살이래요. 오토바이."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병실의 기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그래서.""제가 한 시간 반 뒤에 도착해요. 그 전에 안식 사람들이 먼저 올 거예요. 그 사람 어디로 옮겨지는지만이라도 알아봐 줄 수 있어요?"철웅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전화를 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 귀 뒤에는 그 패치가 붙어 있었다. 그는 그 하늘이 자기 어머니의 하늘보다 낫다고 말한 사람이었다."구급 7이면 서교 쪽 애들이네." 그가 말했다. "알았어."전화가 끊겼다.아홉 시 반, 나는 성진대학병원 본관 로비에 도착했다. 철웅이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회색 스웨터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지팡이가 무릎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구급 7 반장이 내 후배야." 그가 먼저 말했다. "애 이름은 오재민. 배달하다가 합정 사거리에서 혼
마을버스는 정류장 앞에 섰다가, 아무도 타지 않자 문을 닫았다.기사가 창밖으로 나를 한 번 보았다. 나는 벤치에 앉은 채 손만 들었다. 괜찮다는 뜻인지, 가라는 뜻인지 나도 몰랐다. 버스가 짧게 경적을 울리고 떠났다. 산모퉁이를 돌아 불빛이 사라졌다.이어폰 속에서 무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송 준비. 들것. 잡음. 산속이라 신호가 자꾸 끊겼다. 스물넷. 그 숫자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병원으로 가는지 들어야 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귀 가까이 들었다. 지지직. 목소리의 반쯤만 들어왔다가 흩어졌다.정류장 기둥의 시간표를 보았다. 다음 버스는 사십 분 뒤였다.해는 이미 산 뒤로 넘어가 있었다. 주황색이던 하늘이 잿빛으로 식어 갔다. 정류장 지붕 밑 형광등이 깜박이다 켜졌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발끝이 시렸다. 벤치 끝에 누가 두고 간 목장갑 한 짝이 얼어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손바닥 쪽 빨간 고무가 반쯤 닳아 있었다. 밭일을 하던 누군가가 버스를 타면서 떨어뜨렸을 것이다. 나는 그걸 한참 보았다. 다른 할 일이 없었다.십 분쯤 지났을 때 산길 위쪽에서 헤드라이트가 내려왔다. 흰 승합차였다. 옆구리에 초록 글씨로 솔밭요양원. 차가 정류장 앞에 서더니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분홍 조끼가 보였다."따님! 아직 계셨네. 버스 놓쳤어요?"면회 신청서를 받던 요양보호사였다. 그녀는 비상등을 켜 두고 차에서 내렸다. 한 손에 종이컵 두 개를 포개 들고, 겨드랑이에 무언가를 끼고 있었다."병원 가는 어르신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이라서요. 원장님 차 빌렸어요. 저녁 배식 전에 올라가야 돼서 오래는 못 있어요."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자판기 거예요. 율무차."나는 컵을 받았다. 손바닥이 녹았다. 달고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아까 어머님한테 전화드렸어요. 따님 오셨다고." 그녀가 자기 컵을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