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선재는 해외에 있었고, 그의 지문은 서울 문서에 남아 있었다.출입국 기록은 위조되지 않았다. 권선재는 내 대리 승인서가 출력되기 전에 출국했고, 승인 시각에는 해외에 있었다. 출입국 기록의 발급 경로와 원본 대조 결과도 일치했다.“그러니 피고인은 승인할 수 없었습니다.”선재 측 변호인이 단정하자 나는 감정서의 지문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지문은 작성된 문장 위가 아니라 빈 승인란의 아래쪽에 찍혀 있었다.“문서가 완성된 뒤 남긴 지문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내 질문에 감정인이 답했다.“현재 감정만으로는 선후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빈 서식에 먼저 지문이 찍힌 뒤 내용이 출력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선재의 알리바이는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방식이 바뀌었다. 직접 서명하지 않고 미리 찍어 둔 승인서, 혹은 본인 대신 움직이는 인증 수단이 있었다면 해외에서도 지시는 작동할 수 있었다.그때 백문우가 형량 협상을 조건으로 환자 목록을 제출했다. 이름과 시술명만 적힌 명단이 아니었다. 날짜별 승인 코드, 실제 시술자, 기록 수정자, 결재 기기가 서로 다른 칸에 나뉘어 있었다.내 이름이 적힌 줄에는 승인 코드 ‘KSJ-02’, 실제 시술자 백문우, 기록 수정자 외부 계정, 결재 방식 원격 토큰이라고 적혀 있었다.“KSJ가 권선재라는 뜻입니까?”검사의 질문에 백문우가 대답했다.“병원에서는 그렇게 불렀습니다.”“당신들끼리 부른 약어만으로 사람을 특정할 수는 없어요.”내가 끼어들자 백문우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럼 누가 그 코드를 썼겠습니까?”“그걸 증명하라고 당신을 부른 겁니다. 추측을 대신 말하라고 부른 게 아니라.”도겸은 방청석 뒤편에 앉아 있었다. 사건 대리에서는 빠졌지만, 과거 결재 경로를 설명할 증인 자격으로 출석했다. 그는 KSJ라는 세 글자 옆에 표시만 남겼다. 이름이 닮았다는 이유로 범인을 완성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검찰은 결재 기기의 등록 기록을 요구했지만 병원 서버에는 토큰 번호 일부만 남아 있었다. 그 번호가
나를 빈 그릇이라 부른 여자가, 내 몸에서 무엇을 훔쳤는지 증명하는 법을 가르쳐줬다.한미라의 기억만으로 원본을 정할 수는 없었다. 유란과 나는 봉인된 문서 3종을 감정대 위에 올렸다. 법원 보관용이라는 표시도, 태강 병원 직인도 믿지 않았다. 먼저 모서리 천공 위치를 재고, 용지 섬유의 배열과 형광 반응을 비교한 뒤 작성 시각과 인계 기록을 겹쳤다.왼쪽 위에 구멍 2개가 난 문서는 병원 보관용이었다. 오른쪽 아래에 바늘 자국이 남은 것은 법무팀 회람용이었다. 마지막 문서에는 한미라가 말한 반달 모양 눌림이 있었다. 아래 모서리에서 정확히 7밀리미터 떨어진 자리였다.“이게 진짜라는 뜻은 아니에요.”유란이 감정표에 선을 그었다.“법원 제출용 서식과 일치한다는 뜻까지만 말할 수 있어요. 종이도 같은 시기에 생산됐지만, 내용이 그때 작성됐는지는 잉크와 출력 이력을 더 봐야 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라의 증언은 문을 찾았을 뿐이었다. 열쇠는 보관 경로와 물리적 흔적이어야 했다.출력 장비 기록은 7년 전 태강재단병원 문서실을 가리켰고, 법원 인계대장에는 같은 봉인번호가 남아 있었다. 감정인은 봉인 접착면이 처음 붙은 뒤 다시 열리지 않았다는 의견을 냈다.그제야 문서의 본문을 확인했다.내 이름 아래 동의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대신 ‘의사 확인 불가 시 대리 승인’ 칸에 지문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 옆에는 백문우의 결재 코드가 있었다. 코드 사용 시각은 내가 수면 유도제를 투여받은 뒤 23분이 지난 때였다.유란은 당시 투약기록과 간호일지를 나란히 놓았다. 의식 확인란은 공란이었고, 보호자 연락란에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내가 거부할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었다. 거부할 사람 자체를 서류에서 지운 뒤 시술이 승인된 것이었다.이록은 내 옆에서 기록을 읽고도 대신 질문하지 않았다. 책상 아래에서 그의 손등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가 멈췄다. 잡을지 말지는 내 몫으로 남겨 둔 거리였다. 나는 먼저 손을 포갠 뒤 검사를 바라봤다.“환자가
“내가 바꿨다.”한미라는 며느리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죄의 마지막 줄을 쓰기 위해 법정에 섰다.도겸의 석방 검토는 즉시 중단됐고, 한미라의 자수서는 긴급 증인신문 자료로 넘어갔다. 나는 방청석이 아니라 증인석 정면에 앉았다. 그녀가 나를 위해 거짓말한다면 내가 먼저 끊어야 했다.“법원 원본 교체를 누구에게 지시했습니까?”“당시 기록관리 직원 박종수에게.”검사가 확인표를 펼쳤다.“박종수는 그날 연차였습니다. 법원 출입 기록도 없습니다.”한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전달 시각은요?”“오후 6시쯤.”“문제의 인계서는 17시 21분에 봉인됐습니다. 증인이 말한 시각에는 이미 보관실로 이동한 뒤였습니다.”첫 질문부터 두 군데가 어긋났다. 자백은 정확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죄를 대신 쓸 때 외운 문장이 무너지는 방식이었다.나는 신문 허가를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도겸 씨를 빼내려고 온 겁니까?”한미라가 나를 봤다.“내가 한 일을 말하러 왔다.”“방금 말한 직원은 현장에 없었고 시각도 틀렸어요. 모르는 일을 안다고 말하는 게 어머님 방식의 책임입니까?”“온사율.”“나를 위한 거짓말이라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감금하는 데 동의했고, 내 진단서를 이용했으며, 하겸의 기록을 외면했다는 사실도 함께 남을 테니까.”한미라의 손이 자수서 위에서 멈췄다. 그러나 울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그래. 그래서 전부 말하려는 거다.”“그럼 바꿔 말하지 말고 정확히 말하세요. 무엇을 바꿨습니까?”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자수서를 뒤집었다.“동의서가 아니다.”법정 안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권태겸 쪽에서 끼워 넣은 가짜 사망 기록 1장을 빼냈다. 온하겸이 이미 사망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문서였어. 그걸 없애면 나머지 기록이 살아날 줄 알았다.”“진짜 동의서는요?”“못 막았다.”“누가 바꿨습니까?”“그건 모른다.”한미라는 처음으로 모른다는 말을 했다. 자백의 범위가 줄어들자 오히려 진술은 선명해졌다.
남의 무죄를 만들던 남자는 자기 변호인 앞에서 한 문장도 변명하지 못했다.“서도겸 씨, 다시 묻겠습니다. 최근 법원 원본 교체에 관여했습니까?”“아닙니다.”“그런데 왜 과거 결재 얘기만 합니까?”독립 변호인은 도겸이 작성한 진술서를 책상 위로 밀어 돌려보냈다. 첫 장 절반이 태강 외부 법무팀 시절의 형식 결재에 대한 인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작 이번 혐의를 부인하는 문장은 마지막 두 줄뿐이었다.“확인하지 않고 서명했습니다. 그 일로 피해가 이어졌다면 제 책임입니다.”“그 책임은 별도로 조사받으면 됩니다. 지금 묻는 건 당신이 최근 증거를 조작했느냐는 겁니다. 죄책감을 사실처럼 진술하면 수사기관은 둘을 분리해 주지 않습니다.”도겸은 펜을 잡았지만 쓰지 못했다. 하겸의 기록을 놓쳤다는 후회가 그에게는 형량보다 오래된 감옥이었다.나는 접견실 유리 너머로 진술서를 보다가 인터폰을 들었다.“도겸 씨, 하지 않은 일까지 떠안는다고 하겸에게 사과가 되는 건 아니에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당신이 책임져야 할 만큼만 책임져요. 나머지는 진실을 훔친 사람 몫으로 남겨 두고.”도겸은 진술서 마지막 장을 찢었다. 그리고 새 종이에 두 문장을 따로 적었다. 과거 형식 결재의 과실을 인정한다. 최근 법원 원본 교체와 인계표 작성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그제야 변호인이 조사를 재개했다.나는 도겸의 개인 금고 접근 경로를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 금고 열쇠는 도겸이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의 종이 묶음이 반드시 금고에 직접 넣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무실 이전 당시 봉인된 보관물은 직원이 목록만 확인한 뒤 금고 안으로 옮겼고, 외부인이 맡긴 법률 자료도 밀봉 상태라면 별도 개봉 없이 보관됐다.보관 기록에서 한 줄이 걸렸다.[한미라 제출 자료. 별도 봉투 1개. 서도겸 지정 보관.]날짜는 한미라가 자백 장부를 넘긴 날보다 4일 전이었다. 나는 그날의 방문 기록을 찾아냈다. 한미라는 도겸을 만나지 못했고, 1층 안내 데스크에 봉투를 맡겼다. 수령자는 도겸이 아니라
“사율 씨, 이번엔 제 말을 믿지 마세요. 기록을 믿으세요.”서도겸은 수갑을 찬 채 호송차 문 앞에 서 있었다.새벽 5시 18분이었다. 체포영장 집행 시각, 압수 장소, 적용 혐의를 나는 차례로 받아 적었다.증거조작 공모. 법원 보관 원본 교체. 최근 제출된 증거 인계표의 서명 위조.“변호사부터 선임할게요.”“태강과 거래한 적 없는 사람으로 하세요. 그리고 제 과거 서명도 숨기지 마십시오.”“지금 그 말을 하면—”“과거에 결재한 건 사실입니다. 지금 만든 문서는 아니고요. 둘을 섞는 순간 제가 아니라 저쪽이 이깁니다.”도겸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죄책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지 않은 일까지 떠안을 때가 있었다.조사 전 허용된 짧은 접견에서 도겸은 변호인보다 먼저 나를 봤다.“제가 서명한 결재 문서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내용을 확인했어요?”“표지와 인계 수량만 봤습니다. 첨부 목록은 보지 않았고요.”“그게 당신 과실이네요.”“예.”도겸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사과로 사실을 덮지도 않았다.“당시에는 원본이 법원 보관 절차로 넘어간다고 믿었습니다. 확인하지 않은 책임은 제 겁니다. 하지만 최근 인계표에 서명하거나 원본 교체를 지시한 적은 없습니다.”“그 두 문장을 반드시 따로 진술해요. 첫 번째 책임 때문에 두 번째 혐의까지 받아들이지 말고.”“그래서 사율 씨가 온 겁니까?”“당신을 믿어 주러 온 게 아니에요. 섞인 기록을 분리하러 왔어요.”도겸은 그제야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그걸로 충분합니다.”호송차가 출발하자 이록이 내 손에서 메모지를 가져갔다. 종이에는 체포 시각 5시 18분, 영장 제시 5시 11분, 압수물 봉인번호 7개가 적혀 있었다.“오기준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어.”“보복일 가능성은 있어요. 가능성만.”“도겸이 법원 원본을 바꿨다고 믿어?”“믿는 문제가 아니에요.”나는 오기준의 보관함에서 나온 두 문서의 사본을 나란히 놓았다. 태강 외부 법무팀 시절 도겸이 실제로 서명한
배신자는 피해자도 대표도 아니었다.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않던 외주 회계 담당자였다.독립 감사팀이 찾아낸 첫 흔적은 재단 온 회계팀 공용 인증서의 복제 기록이었다. 인증서는 외주 회계 담당자 오기준의 개인 노트북에서 사용됐고, 차명 의심 회사로 넘어간 첫 입금도 그 인증서로 승인돼 있었다. 금액은 매번 작았다. 자문료, 장비 점검비, 행사 정산금처럼 보이도록 항목을 바꿔 같은 계좌로 흘려보냈다. 한 번에 큰돈을 빼면 걸리지만, 정상 거래 사이에 소액을 섞으면 누구도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계산이었다.김지원이 감사표를 넘기며 물었다.“우리 회계팀이 직접 보낸 돈은 아닙니까?”“명의는 회계팀이지만 승인 기기는 오기준 씨 개인 장비입니다. 다만 인증서가 복제됐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이체를 그가 실행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회계팀 직원들은 서로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누가 공용 인증서를 마지막으로 썼는지, 누가 지분 매각 검토를 먼저 알았는지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내부 직원을 한 방에 모아 추궁하자는 의견에 반대했다. 유출자를 찾겠다는 이유로 피해자와 직원 모두의 장비를 임의로 열면, 우리가 고치겠다고 한 구조를 감사가 다시 무너뜨릴 수 있었다.우리는 접속 시각과 근무표, 외주 계약서, 입금 계좌를 분리해 확인했다. 오기준이 재단 사무실에 들어온 날에는 기부 대리인도 방문했고, 방문용 태블릿에서 내 옛 대표 인증서가 복제됐다. 두 기기의 비정상 호출 시각은 13분 차이였다. 회계팀 계정은 정상 업무 시간에만 열렸지만 오기준의 노트북에서는 퇴근 뒤 같은 인증 정보가 2차례 호출됐다.오기준은 처음에는 회계 편의를 위해 인증서를 저장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감사팀이 태강 외주 법무망과 주고받은 비용 청구서를 내놓자 말을 바꿨다.“재단을 무너뜨리라는 지시는 아니었습니다.”“그럼 무슨 지시였죠?”“피해자들끼리 의견이 갈리게 만들고, 지분 매각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하라는 정도였습니다.”“총회 녹음도 넘겼습니까?”“파일을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