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의약 분야의 새내기임에도 모두에게 손가락질받는 신세가 되었다.온채아는 덤덤하게 심서정을 쳐다보았다. “내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배 속의 아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요?”“뭐요?”심서정은 당황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소리예요?”온채아가 비웃었다. “임신했잖아요. 주율천 애라고 속인 거죠?”“내 일에 참견할 시간 있으면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주씨 가문에 어떻게 설명할지나 잘 생각해 봐요!”발표회가 끝나고 이틀 뒤, 온채아는 민은하가 심서정을 구해줬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었다. 민은하가 왜 이런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심서정을 보니 비로소 이해가 갔다.누가 봐도 임신한 기색이 역력했다.임신 주수도 온채아와 비슷해 보였다.만약 다른 사람의 아이였다면 민은하는 진작에 심서정을 쫓아냈을 것이다.하지만 만약 정말 주율천의 아이였다면 심서정은 벌써 아이를 빌미로 안주인 자리를 꿰찼을 터였다.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으나 주율천은 인정하지 않았고 민은하는 주씨 가문의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설령 잘못된 선택일지언정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다.온채아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고 주변에는 손님들이 오가고 있었다.다급해진 심서정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당당하다면 뭐가 두려운 건데요?”온채아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차갑게 경고했다. “주씨 가문 귀에 들어가는 게 싫으면 당장 꺼져요.”말을 마친 온채아는 심서정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밖에서 성유준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간을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무엇보다 하씨 가문의 생일잔치에서 심서정과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심서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온채아에게 매번 밀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어제 하예원이 했던 말을 떠올린 심서정은 갑자기 온채아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하씨 가문과 성유준이 보호해 준다고 해서 평생 기세등등할
온채아는 어제 하지훈에게 물었던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본래 경성으로 돌아간 뒤에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오려 했다.성유준은 진지한 눈빛으로 온채아를 바라보았다.“말해봐.”“만약에...”역시 이 질문은 너무 무거웠던 것일까. 온채아는 자신감이 부족해진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머뭇거렸다. 두려웠다. 혹시라도 네가 뭔데 내가 가족의 평화까지 포기해 가며 널 택할 거라 생각하냐고 되물을까 봐.하지만 그토록 화목한 하씨 가문에서 자란 하지훈조차 망설임 없이 정다슬을 선택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게다가 강미진이 해준 말들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상태였다. 확실히 물어보지 않는다면 정말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온채아는 고개를 들어 성유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눈빛 사이로 마침내 용기를 쥐어짰다. “나 요새 계속...”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이가 다급히 올라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인터넷 상황이 더 심각해졌습니다.”온채아는 미간을 찌푸렸다.“더 심각해졌다고요?”성유준은 오히려 평온했다. “어느 정도야?”“다른 환자 가족들이 줄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약을 먹고 비슷한 증상을 겪었거나 각기 다른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상이가 보고했다.온채아가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이미 실시간 검색어 순위 두세 개가 이 사건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게다가 여론의 흐름이 이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온채아와 한빛 그룹을 싸잡아 욕했다면 이제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듯 화살이 오롯이 온채아 한 사람만을 겨냥하고 있었다.성유준은 온채아의 휴대폰 화면을 직접 꺼버리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겠어. 같이 갈 거야?”한빛 그룹 내부도 혼란스러울 게 뻔했다. 성유준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룹 내에서 물을 흐리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온채아 혼자 경성으로 보내는 것도 영 마음이
온채아를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괴롭힐 만한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첫 번째는 심서정이었지만 그녀에겐 이 정도로 여론을 주무를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박시훈이었다. DK 그룹은 일찍이 해외에서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름을 알린 곳이었으니 여론을 이용하는 수법은 아주 능숙할 터였다. 게다가 박시훈이 정말 박명하와 연관이 있다면 이건 명백히 온채아를 노린 것이었고 한빛 그룹은 온채아 때문에 연루된 셈이었다.방금 잠에서 깬 듯한 온채아는 검은 머리카락이 가슴 위로 흐트러져 있었고 눈가에는 여전히 졸음이 가득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두 뺨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투명해 보였다.참으로 순수한 모습이었다.성유준은 그녀의 맨발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안 추워?”“어?”온채아는 성유준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으리라 생각하고 해명할 말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질문이 날아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성유준은 여전히 본론을 꺼낼 생각이 없는지 온채아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있던 슬리퍼를 그녀의 발치에 가져다 놓았다. “찬 기운은 발바닥부터 올라와. 신발 신어.”그제야 온채아는 정신이 들었다. 어릴 때 찬 음식을 좋아했던 탓에 첫 생리를 시작한 뒤로 매번 침대 위를 구를 만큼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려야 했다. 여승운이 그녀를 치료해줬지만 찬 음식을 멀리하고 발을 따뜻하게 하라는 당부만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정작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성유준은 그 수칙을 철저히 지켰다. 겨울엔 찬 음료 금지, 여름에는 횟수 제한, 그리고 타일 바닥을 맨발로 걷는 것조차 금지했었다.온채아는 고분고분 신발을 신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임신하면 생리는 안 하거든.”게다가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 딱히 음식을 통제하지도 않았다. 생리통이 심하면 침을 한 대 놓거나 한약을 달여 마시면 그만이었으니까.성유준은 그녀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무언가 짐작한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온채아는 차경희의 안마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모퉁이 너머에서 전해지는 하예원의 원망 섞인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강미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차경희는 온채아의 손길에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강미진을 보며 마음이 찡한 듯 말했다. “우리 막내가 여기 있었다면 분명 나한테 안마를 해준다고 야단이었을 게야.”하아린은 두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강미진 부부와 함께 명절을 쇠러 해성에 왔었는데 그때 이미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이 단어를 하나씩 겨우 내뱉을 나이에 하아린은 이미 완벽한 문장으로 말을 하곤 했다. 집안의 막내인 데다 애교까지 넘치니 엄격한 하용건마저 꼼짝 못 할 정도였다. 하용건은 하아린이 그의 훈장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도 허허 웃으며 화 한 번 내지 않았다.하아린 이야기가 나오자 강미진은 코끝이 찡해졌다. “정말 그랬을 거예요.”하아린은 참 착하고 속 깊은 아이였다. 강미진은 말을 이어가며 온채아를 바라보았다. 온채아가 불쾌해하지만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친자 확인 검사를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럴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강미진도 잘 알고 있었다.늘 혼자인 것에 익숙했던 온채아였지만 하아린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마음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위로의 말조차 쉽게 꺼내지 못했다. 잃어버린 지 20년이 넘었으니 아이를 찾을 확률은 희박하기만 했다.안마가 끝나자 강미진은 온채아의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위층으로 올라가 쉬라고 권했다. 입덧 시기가 지난 뒤 온채아에게 나타난 가장 뚜렷한 증상은 잠이 많아진 것이었다. 침대에 반쯤 기대어 책을 읽던 그녀는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하용건의 생신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의 북적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정작 온채아를 깨운 건 요란하
식탁 위에는 정적이 흘렀고 하예원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사교성이 없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하도연마저 온채아를 이토록 감쌀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때 하지훈이 불쑥 웃음을 터뜨리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아버지, 들으셨어요? 큰누나가 아버지의 금지옥엽한테 입 닥치라고 하는데 안 혼내세요?”“...”하선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지훈을 노려봤다. “너도 입 다물어.”이 집안에서 하도연에게 훈계를 듣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하용건으로 하여금 수십 년간 이어진 지독한 담배 유혹을 강제로 끊게 만든 것도 하도연이었다. 가끔 몰래 피우다 걸리기라도 하면 하용건 역시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사람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네.” 하희민이 웃으며 거들었다. “네가 그렇게 반항아처럼 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집안의 실세는 너였을지도 몰라.”과거 하지훈이 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때 하용건은 그를 부대 군의관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하지훈은 하용건의 감시 아래 부대에 갇혀 있느니 죽는 게 낫다며 야반도주하듯 경성으로 도망쳤고 성유준과 딱 붙어 지내기 시작했다.하지훈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랬으면 큰누나 손에 제명에 못 죽었을걸.”하도연이 그를 슬쩍 훑어보며 말했다. “한 마디만 더 해봐. 지금 당장 부대로 보내버릴 테니까.”“...”하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온채아는 절로 웃음이 났다. 하예원을 제외하면 하씨 가문의 분위기는 정말 화목하고 좋았다. 온채아는 문득 자신에게도 형제자매가 있다면 가끔 이렇게 티격태격하며 지내는 게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차경희는 자식들의 소란에 못 말리겠다는 듯 뒷머리를 짚었다. “그만들 해라. 그만. 머리가 다 지끈거리네.”차경희 곁에 앉아 있던 강미진이 물었다. “어머님, 또 지병이 도지신 거예요?”차경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더니 머리가 아프네.”풍파
하용건의 생일 파티 당일, 온채아는 일찍 일어나 강미진에게 먼저 치료를 해주었다. 생일 파티는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아침 식사 자리에는 하씨 가문 식구들을 제외하면 손님은 온채아뿐이었다. 강미진은 온채아가 서먹해할까 봐 일부러 곁에 앉히고는 정성껏 음식을 집어주었다.하예원은 마치 친 모녀처럼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식탁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아린을 낳았을 때부터 강미진의 관심이 멀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이런 상황이라니.만약 온채아가 정말 하씨 가문의 다섯째가 된다면 식구들이 얼마나 그녀를 아끼고 사랑할지 하예원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렇게 되면 이 집에 과연 하예원의 자리가 남아있기나 할까! 하예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게 둬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온채아는 강미진의 걱정만큼 서먹해하지 않았다. 건강 관리에 관심이 많은 차경희가 어제 아침부터 온채아를 붙들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온채아는 다른 건 몰라도 이 분야만큼은 차경희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다.차경희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약간 배고픈 듯 지내는 게 더 좋다는 거니?”“그럼요.”온채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늘 배부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아요. 특히 할머니께서는 자극적이지 않게 드시되 적당히 배를 채우시는 걸로 충분해요.”조금 배고픈 것은 건강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물론 이는 차경희의 몸 상태에 맞춘 조언이었다. 건강 관리는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기 마련이니까.“들었죠?”차경희가 하용건을 얄밉다는 듯 째려보며 말했다. “이제 나보고 말랐다고 타박하지 마세요.”평소 하용건은 부대에서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밥 좀 많이 먹으라고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하루 세 끼도 모자라 가사 도우미에게 간식을 두 번이나 더 챙겨주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하용건은 군인 생활을 오래 해 미간의 주름이 깊고 엄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