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제10화 완벽을 허무는 감각(2)
서아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차갑게 대꾸했다.
자신이 뿜어내던 완벽한 큐레이터로서의 위엄이, 이 비좁고 냄새나는 지하실에서는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옆에 놓인 수건으로 얼굴과 목의 땀을 벅벅 닦아내더니, 발로 툭 차서 철제 의자 하나를 서아 쪽으로 밀어주었다.
"앉아. 차는 없어. 냉장고에 먹다 남은 맥주 정도는 있는데."
"됐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 없으니까."
서아는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그 더러운 의자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벽증이야?"
"위생 관념이 철저한 편이죠. 특히 이런…… 통제되지 않은 공간에서는 더더욱."
"통제?"
이안이 픽 웃으며 냉장고에서 미지근한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치이익-.
탁한 탄산 소리와 함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고 침을 삼켰다.
"당신은 참 피곤하게 사네. 그 잘난 통제 때문에 목구멍까지 단추를 꽉꽉 채우고 있으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내 표정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마시죠. 나는 오늘 큐레이터로서 당신의 원화들을 확인하러 온 겁니다."
서아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시선을 돌렸다. 벽에 기대어 있는 거대한 캔버스들로 향했다.
포트폴리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실물은 훨씬 더 기괴하고 폭력적이었다.
핏빛 붉은색과 심연의 검은색. 캔버스 위에서 색채들이 마치 서로를 뜯어먹고 있는 듯한 형상.
"그림들이…… 전부 공격적이네요."
"공격적이라."
이안이 남은 맥주를 바닥에 대충 내려놓으며 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서아를 둘러싸고 있던 무화과 향의 고급스러운 디퓨저 냄새가 깡그리 잡아먹히고, 지독한 땀 냄새와 기름 냄새가 그녀의 폐부를 짓눌렀다.
서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뒤에는 벽돌 기둥이 버티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안과 서아의 거리가 좁혀졌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 서아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거리를 좀 두시죠."
"좁은 지하실에서 거리를 둬봤자 얼마나 두겠어."
이안이 서아의 머리 바로 옆 벽면을 손으로 짚으며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거대한 그의 체구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서아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게 공격적으로 보인다고?"
이안의 시선이 서아가 보고 있던 붉은 캔버스로 향했다.
"네.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죠. 정돈된 미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의 감정. 갤러리 아르테의 메인 홀에 걸기엔, 관람객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불쾌감."
이안이 그 단어를 입술 위로 굴리며 낮게 웃었다.
그의 숨결이 서아의 뺨에 닿을 만큼 뜨거웠다.
"당신은 이 그림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어? 아니면……."
이안이 서아의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억눌려 있던 뭔가가 들켜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나?"
"……무슨 헛소리를."
"거짓말하지 마. 당신 눈동자, 지금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잖아."
이안의 말이 맞았다. 서아의 심장은 지금 비정상적인 속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 남자의 냄새, 짐승처럼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리고 퇴폐적인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이 지독한 공간의 에너지가 서아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삶을 살아오던 그녀에게, 이 통제 불능의 지하실은 지독한 독약이자…… 기묘한 최음제 같았다.
어지러웠다.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눈앞이 핑 돌았다.
서아는 애써 이성을 부여잡으며 이안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비키세요. 숨 막히니까."
하지만 서아의 손이 닿기도 전에, 이안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
물감과 굳은살이 박인 거칠고 커다란 손이 서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뜨거웠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델 듯한 체온.
남편 도진의 체온은 늘 서늘하고 일정한 36.5도였다면, 이 남자의 체온은 끓는점 직전의 활화산 같았다.
"이거, 놔."
서아가 반말을 섞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안은 오히려 손목을 쥔 힘을 더 강하게 주며 그녀를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당신, 여기 내 그림 보러 온 거 아니지."
이안의 목소리가 끈적하게 서아의 귓바퀴를 감싸고돌았다.
"……뭐?"
"나 확인하러 온 거잖아. 당신의 그 고상하고 숨 막히는 세계를 박살 내줄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
정곡을 찔린 서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반박해야 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당장 이 남자의 뺨을 올려붙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야 했다.
하지만 서아의 몸은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손목을 잡힌 채 이안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녀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름 모를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치심.
천박하고 불결한 이 남자에게 단숨에 속을 들켰다는 수치심.
그리고 그 수치심 뒤에 따라붙는, 소름 끼치는 흥분감.
"착각하지 마."
서아가 이를 악물며 이안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당신 그림은 흥미롭지만, 당신이라는 인간은 내 기준 미달이야. 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들개를 갤러리에 들일 취미가 없거든."
서아는 도망치듯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10센티미터 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걸음이 위태로웠다.
등 뒤에서 이안의 나른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지하실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도망가도 소용없어, 큐레이터님."
서아의 걸음이 멈칫했다.
"당신은 결국 내 그림에, 나한테 발목 잡히게 될 테니까. 당신 몸에 밴 그 가짜 향수 냄새가 다 지워질 때까지."
서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도망치듯 가파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녹슨 철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자, 쨍한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시야를 하얗게 태웠다.
"하아, 하아……."
차에 올라탄 서아는 문을 잠그고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에어컨을 최대로 틀었지만, 얼굴에 오른 열기는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는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창백할 정도로 하얗던 뺨은 수치심과 알 수 없는 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미치게 만든 것은 냄새였다.
그녀의 완벽한 벤츠 실내에 맴돌던 은은한 디퓨저 향은 온데간데없고, 옷자락과 머리카락에 깊게 배어버린 독한 물감 냄새와 수컷의 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미쳤어. 윤서아, 미쳤어……."
서아는 방금 전 이안이 강하게 쥐었던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피부 위로, 이안의 손가락 모양을 따라 흐릿하게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절대 넘어서는 안 될 금지된 구역에 들어갔다 온 자에게 찍힌 낙인 같았다.
완벽하게 박제되어 있던 윤서아의 삶에,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붉은 물감이 튀어버린 순간이었다.
제22화 낯선 향기,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2)그리고 거울을 노려보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렸다."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모델 서준 것뿐이야. 그림을 위해서. 큐레이터로서의 비즈니스라고. 도진 씨도 이해할 거야…… 아니, 알 필요조차 없는 일이야."필사적인 자기합리화.서아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샤워기 아래로 들어갔다.같은 시각.주방에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있던 도진의 표정은, 방금 전 서아를 향해 짓던 다정한 미소와는 전혀 달랐다.그의 얼굴에는 묘한 활기와 기분 나쁜 흥분감이 서려 있었다.도진은 찬장에서 최고급 다즐링 티백을 꺼내며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거짓말이 제법 늘었네. 우리 완벽한 아내께서.'도진은 서아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새로 산 원피스의 구김 없는 질감.평소보다 짙게 바른 립스틱.그리고 무엇보다, 그 코를 찌르는 역겨운 향수 냄새.그 향수는 서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과하지 않은 은은함을 추구하는 여자였다.그런 여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자극적인 향을 뒤집어쓰고 왔다는 건,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감추고 싶은 악취가 있다는 뜻이었다.테레빈유. 싸구려 유화 물감. 지포 라이터의 기름 냄새.그리고 젊고 거친 수컷의 체취.어젯밤 서아의 코트에서 났던 그 냄새가, 오늘은 훨씬 더 짙고 농밀하게 그녀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 나오고 있었다.'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걸까.'주전자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도진은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부으며 생각에 잠겼다.상식적인 남편이라면 당연히 분노해야 마땅했다.자신의 완
제21화 낯선 향기, 그리고 관찰자의 시선(1)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내내, 서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살폈다.흐트러진 곳은 없는가.표정에 불안감이 묻어나지는 않는가.그녀는 핸드백에서 새로 산 샤넬 향수병을 꺼냈다. 오늘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충동적으로 결제한, 아주 무겁고 관능적인 일랑일랑과 머스크 베이스의 향수였다.칙, 칙.귀 뒤쪽과 손목 안쪽에 향수를 한 번 더 뿌렸다.평소라면 머리가 아프다며 절대 쓰지 않았을 독한 향이었지만, 지금 서아에게는 이 숨 막히는 향기가 절실했다.'이 정도면…… 가려지겠지.'오후 내내 해방촌의 그 낡은 옥탑방에서 이안의 시선 아래 발가벗겨졌던 시간.그의 작업실에 배어 있던 테레빈유의 매캐한 냄새와, 그의 몸에서 나던 짙은 담배 냄새가 아직도 자신의 피부 밑에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옷은 갈아입었다.아침에 입고 나갔던 네이비색 수트와 블라우스는 갤러리 근처 세탁소에 쑤셔 넣듯 맡겨버렸다. 지금 입고 있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와 원피스는 백화점에서 향수를 사며 급하게 맞춰 입은 새 옷이었다.완벽하다.이성적으로 따져봤을 때, 남편 도진이 자신의 일탈을 의심할 만한 물리적 단서는 단 하나도 없었다.띠- 띠- 띠- 띠.철컥.익숙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도진 씨. 나 왔어요."서아는 현관에 들어서며 평소처럼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냈다."……어, 왔어?"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도진이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늘 그렇듯 단정하게 다려진 면바지에 얇은 니트 차림.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남편의 모습이었다."오늘 좀 늦었네. 갤러리에
제20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2)서아는 엉덩이를 떼고 당장이라도 문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이 불결하고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서늘한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야 맞았다.하지만.스툴에 닿은 그녀의 몸은 마치 납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이안의 시선.도망칠 테면 쳐보라는 저 오만하고 확신에 찬 눈빛.그 눈빛이 서아의 오기를, 아니,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기묘한 피학성을 자극하고 있었다."……빨리 끝내."침묵 끝에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나 시간 많지 않아."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항복 선언.서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핸드백을 무릎 위에 꽉 끌어안았다.이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그는 만족스러운 포식자의 미소를 지으며 이젤 앞에 자리를 잡았다."자세가 너무 굳었어. 어깨에 힘 빼."이안의 지시가 떨어졌다."됐어. 그냥 그려.""내가 그리는 건 정물화가 아니라 인물화야. 그따위로 경직되어 있으면 죽은 사람을 그리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이안이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성큼 다가왔다.그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어깨 위로 툭, 얹혀졌다.서아는 숨을 들이켰다."힘 빼."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그의 거친 굳은살이 얇은 실크 블라우스 너머로 서아의 쇄골을 지그시 눌렀다.단순히 자세를 교정하기 위한 터치였지만, 서아에게는 그 손길이 벌겋게 달아오른 쇠인두가 살갗에 닿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그녀의 어깨가 저항하듯 뻣뻣해졌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승모근부터 목덜미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렸다."하아…&hell
제19화 시선이라는 이름의 해체(1)해방촌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오르막길을 오르며, 서아는 거칠어지는 숨을 몰아쉬었다."하아, 하아……."또각, 또각.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는 지미추 힐의 마찰음이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자신의 매끈한 검은색 벤츠는 골목 초입에 간신히 구겨 넣듯 주차해 둔 상태였다. 평소라면 흠집이라도 날까 봐 절대 세워두지 않았을 비좁은 자리였지만, 지금 서아의 머릿속에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미쳤어. 내가 여길 왜…….'서아는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발걸음을 저주했다.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의 발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이안이 알려준 낡은 적벽돌 빌라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다음번엔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작업실로 와.''그때는 진짜로 벗겨줄 테니까.'오전 내내, 아니 갤러리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향하는 내내 이안의 그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서아는 그 말도 안 되는 도발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수석 큐레이터로서, 전시를 코앞에 둔 작가의 작업 진행 상황을 불시 점검하러 온 것뿐이다. 그 건방진 입에서 다시는 그런 천박한 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 그를 완벽하게 짓눌러버리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빌라의 옥탑방으로 이어지는 철제 계단 앞에 섰을 때, 서아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녹슨 철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매 순간, 그녀가 겹겹이 껴입은 사회적 체면과 방어기제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끼익
제18화 얄팍한 방어기제(2)"말조심해!"서아의 평정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여기는 내 직장이고, 내 구역이야. 어젯밤 일은…… 당신이 술에 취해 벌인 저급한 실수로 치부하고 덮어주기로 했어. 내 커리어에 오점 남기기 싫어서. 그러니까 당신도 주제 파악하고 내가 깔아준 판 위에서 얌전히 그림이나 쳐 그려. 쓸데없는 환상 품지 말고."독사처럼 쏟아내는 서아의 경고.그것은 이안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했다.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그 앙칼진 저항이 그저 우습고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덮어준다고?"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의 큰 체구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서아를 압박했다. 이안은 테이블을 돌아 서아가 앉아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오지 마. 거기 앉아."서아가 본능적으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 세워두었던 날 선 권위가, 그가 다가오는 발걸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이안은 서아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었다.완벽하게 퇴로가 차단되었다.가까워진 거리.오늘 아침 서아가 들이부었던 짙은 향수 냄새가 이안의 코끝을 찔렀다."독하네."이안이 서아의 목덜미 근처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며 중얼거렸다."뭐가…….""향수 냄새. 평소에 뿌리던 무화과 향이 아니잖아.""……!""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었어? 아니면, 뭘 감추고 싶었던 건가."서아는 숨을 들이켜는 것
제17화 얄팍한 방어기제(1)완벽한 화이트 큐브.먼지 한 톨 없는 갤러리 아르테의 VIP 접견실은 서아에게 있어 일종의 성역이자 요새였다.항온 항습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벽에 걸린 수천만 원짜리 단색화.블랙 글래스로 마감된 차가운 테이블.이 공간 안에서 서아는 철저한 지배자였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오만한 작가들의 기를 꺾어 자신의 기획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석 큐레이터."……하아."하지만 오늘 아침,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권위 있는 지시가 아니라 억눌린 한숨이었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운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를 강타했지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른쪽 손목.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재킷 소매를 끌어내려 손목을 덮었다. 어젯밤 샤워 타월로 피부가 벌겋게 일어날 때까지 문질러 씻었지만, 이안이 남긴 그 끔찍한 악력의 감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당신한테서 낯선 냄새 나.'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어젯밤, 차갑게 돌아누운 채 자신을 밀어내던 남편 도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결국 서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도진의 옆에 웅크려 누운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죄인처럼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서아는 자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자신이 왜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왜 이토록 끔찍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야. 난 잘못한 거 없어.'서아는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눈을 떴다.'그 미친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