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오후 2시 30분.
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
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
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도아의 관장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
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관장님……."
문가에 서 있던 윤지수가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연락이 안 되나요?"
"네. 포트폴리오 봉투에 적혀 있던 번호로 계속 전화를 걸고 있는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나옵니다. 아무래도 오늘 안 올 것 같은데……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실까요?"
서아는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약속을 취소하고 그 보잘것없는 크라프트지 봉투를 파쇄기에 넣어버리는 것이 맞았다. 그것이 서아가 평생을 지켜온 규칙이었다.
하지만.
서아의 시선이 책상 한쪽에 놓인 이안의 포트폴리오로 향했다.
그 기괴하고 폭력적인 붉은 색채. 어제 처음 그 그림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등골을 타고 오르던 서늘한 전율이 아직도 생생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네? 하지만 30분이나 지났……."
"기다려요."
서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윤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쾅-!
노크도 없이 관장실의 육중한 유리문이 거칠게 열렸다.
"앗!"
문 앞에 서 있던 윤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서아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받으며 문가에 서 있는 남자.
"여기가 갤러리 도아 맞나? 하도 미로 같아서 길을 좀 헤맸는데."
낮고, 긁히는 듯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
남자는 삐딱하게 서서 사무실 내부를 훑어보고 있었다.
서아의 눈동자가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스캔했다.
정돈되지 않아 눈을 반쯤 가린 흑발. 피로감이 짙게 묻어나는 나른한 눈매.
계절감이 맞지 않는 낡은 가죽 재킷 아래로는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늘어난 티셔츠가 보였다. 바닥을 딛고 있는 워커는 언제 닦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흙먼지와 페인트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무균실 같은 서아의 사무실에, 절대 들어와서는 안 될 오물이 쏟아진 것 같은 강렬한 이질감.
서아는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 작가님입니까?"
남자는 서아의 부름에 그제야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단정한 포니테일, 티끌 하나 없는 흰색 실크 블라우스와 H라인 스커트. 서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에는 한 치의 주눅 듦도 없었다. 오히려 노골적이고 불손했다.
"그쪽이 나 불렀어?"
처음부터 존대할 생각조차 없는 노골적인 반말이었다.
옆에 있던 윤지수가 경악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기요, 작가님. 아무리 그래도 관장님한테 말씀이 너무……."
"지수 씨. 나가 있어요."
"네? 하지만……."
"나가보라니까."
서아의 차가운 명령에 윤지수는 남자를 흘겨보며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사무실 안에는 서아와 이안 단둘만 남게 되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디퓨저의 무화과 향 사이로, 낯선 냄새가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싸구려 연초 냄새, 독한 테레빈유(기름) 냄새, 그리고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 수컷의 체취.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얕게 들이마시며 남자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30분이나 늦으셨으니 긴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안은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어와 서아의 책상 앞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손님이 앉으라고 마련해 둔 고급 가죽 소파였다. 이안은 긴 다리를 꼬아 올리며, 흙 묻은 워커의 끝을 뻔뻔하게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차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서아는 끓어오르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됐어. 냄새만 맡아도 머리 아프니까."
"……뭐라고요?"
"이 방 말이야. 무슨 병원 무균실 같네. 냄새도 그렇고, 인테리어도 그렇고."
이안은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담뱃갑을 꺼내며 툭 내뱉었다.
"숨 안 막혀? 이런 데서 어떻게 매일 그림을 봐."
서아의 입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이곳은 대한민국 최고의 갤러리,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관장의 방이었다. 예술계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와 보고 싶어 하는 성소.
그런데 이 무례한 남자는 그 공간을 병원 무균실이라며 조롱하고 있었다.
"이안 작가님."
서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이곳은 작가님의 개인 작업실이 아닙니다. 담배는 집어넣으시죠. 갤러리 전체가 금연 구역이니까."
이안은 담배를 입에 물려다 말고 픽 웃었다.
"규칙 참 많네."
그는 담배를 도로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서아를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이 너무도 날카롭고 직설적이어서, 서아는 마치 옷이 벗겨지는 듯한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래, 나 왜 불렀는데."
이안이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서아는 책상 위에 있던 크라프트지 봉투를 집어 들어 이안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 포트폴리오. 본인이 직접 보낸 거 맞습니까?"
이안의 시선이 구겨진 봉투에 머물렀다. 그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서아는 놓치지 않았다.
"아…… 그거."
이안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친구가 미친 짓을 했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걸 기어코 주워서 보냈나 보군."
"친구가 보낸 거든, 본인이 보낸 거든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우리 갤러리 도아의 1차 서류 검토에서 직접 미팅 대상으로 올라왔으니까요."
"통과?"
[ - 본편 끝 - ]모니터 하단의 문구는 그대로였지만 저장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작업용 파일과 외장 저장장치, 편집장에게 보낼 원고 폴더까지 세 개의 저장본이 같은 수정 시각으로 남아 있었다. 도진은 더 이상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대신 메일 창을 열었다.받는 사람 칸에는 김 편집장의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은 짧게 적었다.[신작 본편 원고 송부]첨부 버튼을 누르자 방금 완성한 본편 파일이 올라갔다. 도진은 파일명이 맞는지, 마지막 페이지가 `[ - 본편 끝 - ]`에서 끝나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새로 만들어 둔 에필로그 파일은 첨부하지 않았다. 그 파일에는 아직 한 문장도 없었다.본문에는 더 긴 설명을 쓰지 않았다.[본편까지 보냅니다. 에필로그는 마지막 장면을 확인한 뒤 보내겠습니다.]커서가 전송 버튼 위에 멈췄다. 몇 주 전 1부 1차 원고분을 보낸 적은 있었지만, 완성된 본편 전체를 편집장에게 넘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도진이 망설인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었다. 편집장이 지금까지의 일부가 아니라 이 이야기의 본편 결말까지 읽게 되는 순간, 아내의 현실을 모르는 독자 한 사람이 작품 전체를 공유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했다.도진은 결국 버튼을 눌렀다.전송 완료 표시가 떴다.그는 보낸편지함에서 첨부 파일의 용량과 전송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본편은 자신의 서재 안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도진은 메일 창을 닫았다.모니터의 전원을 껐다.파앗-.서재를 채우고 있던 푸른빛이 꺼지고, 방 안은 다시 깊은 어둠과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역광만이 남았다."하아…."도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자신의 발밑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여자.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거실에 세워진 거대한 누드화 속에서 다리를 벌리고 헐떡이던 그 천박한 모습과, 지금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이 비참한 모습이 정확히 겹쳐진다는 사실을.도진은 아주 천천히,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도, 도진 씨… 쓰지 마… 제발…!"도진이 다시 타건을 시작하려 하자, 서아가 기겁하며 도진의 무릎을 마구 흔들었다. 그녀는 도진의 바지를 찢어버릴 듯 꽉 움켜쥐고 악을 썼다."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거 쓰면 나보고 죽으라는 거잖아!! 이 개새끼야, 쓰지 마!! 악!!"도진은 서아의 발악을 철저히 무시했다.오히려 그의 손가락은 더욱 경쾌하고 빠르게 키보드를 타격하기 시작했다.타닥, 타다다닥! 타다닥!『완벽하게 붕괴된 여자는 남편의 발치로 기어들어 왔다. 그녀의 눈물은 참회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얄팍한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 그 짐승 같은 생존 본능만이 남아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게 만들었다.』"흐아아악! 도진 씨!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서아가 도진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오열하며 세게 깨문 입술에서 배어난 피가 도진의 바지에 붉게 번졌다.도진의 시선은 오직 모니터 화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화면 속에서 커서가 깜빡이며,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그녀는 울부짖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그저 그녀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남편의 눈에 비친 아내는 더 이상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걸작을 완성시켜 준, 가장 아름답고 추악한
"하아……."도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그의 눈동자는 모니터 화면에 고정된 채 미친 듯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이성이 완전히 마비된 채, 오직 창작의 희열에만 취해 있는 광신도의 그것과 같았다.『거실을 짓누르는 침묵을 찢고, 아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앞에 전시된 것은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추악한 타락의 증거물이었다. 붉은 물감으로 짓이겨진 화폭 속의 나체. 그것은 그녀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우아한 위선의 성벽이, 가장 천박한 방식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도진의 길고 흰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다.망설임은 1초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문장들을 손가락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쾅! 쾅! 쾅![도진 씨! 문 열어! 제발 문 좀 열어봐!!]문밖에서 서아의 절규가 들려왔다. 손톱으로 문짝을 박박 긁는 소리, 짐승처럼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오열하는 소리까지.그 모든 소리가 도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배경음악(BGM)이었다."그래. 그렇게 울어야지.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져 내려야지."도진의 입가에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결말부를 가로막고 있던 지독한 체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완벽한 파국의 형태를 찾지 못해 헤매던 지난날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백서아.자신의 완벽한 아내이자, 완벽한 창녀.그녀가 거실에서 내지르는 저 처절한 비명 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살아 숨 쉬는 활자가 되어 도진의 모니터 위에 박제되고 있었다.『"내가 죽을게! 죽으라면 뛰어내릴 테니까, 제발 그 글만은 쓰지 마!"여자는 닫힌 문을 긁으며 짐승
서재 문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문 너머에서는 도진의 타건음이 끊이지 않았다.타닥, 타닥, 타다닥-.타건음은 조금 전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서아에게 두려운 것은 이제 소리의 크기가 아니었다. 저 리듬이 멈추지 않는 동안, 문 너머의 파일에 자신의 파멸이 실제 문장으로 계속 쌓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진은 문을 닫고 들어간 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문장으로 바꾸고 있었다.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불빛만이, 이미 무너진 지옥의 풍경을 환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비추고 있었다."아… 아아……."서아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목 안쪽이 막힌 것처럼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 아래로 식은땀이 번졌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 도진의 목소리가 되살아났고, 눈을 뜨면 거실 벽에 기대어 있는 그림이 시야를 점령했다.그녀는 가장 먼저 그림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 했다. 소파 끝에 걸쳐 있던 얇은 스로를 끌어당겨 화폭 위로 던졌지만 천은 프레임 모서리에 걸렸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다시 집어 들려던 손가락이 제대로 오므라들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캔버스 하단이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거대한 그림이 앞으로 기울자 서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프레임을 붙잡았다.쿵.프레임이 벽을 스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서아가 프레임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서자 캔버스 하단이 바닥을 긁으며 따라왔다. 결국 거대한 그림은 벽에서 떨어져 거실 한가운데에 비스듬히 세워졌다.서아는 그대로 굳었다. 저 안에서 도진이 소리를 들었을까. 문이 열릴까.하지만 서재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미 이어지고 있던 타건음도 단 한 번 끊기지 않았다.타닥. 타다닥.서아는 손에 쥔 천을
"당신은 내 소설을 완성시켜 줄 가장 이상적인 피사체인데. 피사체는 마음껏 움직여야 의미가 있지. 당신이 이안이와 뒹굴며 느끼는 그 더러운 쾌락, 그리고 들킬지도 모른다는 그 짜릿한 공포와 죄책감. 그 모든 감정의 파동이 내 소설의 훌륭한 자양분이 됐거든.""악마… 이 악마 새끼… 넌 사람도 아니야…!""사람? 예술가는 사람이 아니야. 신이지. 자신의 피조물을 창조하고, 파괴하고, 다시 조립하는 절대적인 통제자."도진이 서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향해 걸어갔다."하지만 내 철저한 통제에도 한 가지 변수가 있었지. 바로 결말."도진이 그림 속 서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백서아라는 위선적인 여자를 어떻게 무너뜨려야 가장 아름다울까. 가결말을 적어 놓고도 마지막 장면 하나는 끝내 비워둘 수밖에 없었어. 현실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직접 보고 싶었거든."도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그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실성한 듯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서아에게 꽂혔다.헝클어진 머리칼.눈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공포에 질려 파들파들 떠는 가녀린 어깨.그리고, 그 뒤로 거대하게 버티고 서 있는 천박한 나체화.현실의 껍데기와 화폭 속의 진실이 한 공간에 기괴하게 병치된 순간."아아……."도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환희의 불꽃이 일렁였다."이거였어."그가 양팔을 천천히 벌렸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모든 악기를 통제하는 듯한, 압도적이고 장엄한 제스처였다."이게 바로 내가 찾던 완벽한 파국이야!"도진의 목소리가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도진은 더 극적이고, 더 예술적이며, 더 끔찍한 파멸을 원했다.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문단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이 필요했다.며칠 밤낮을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그 마지막 퍼즐 조각.그런데 지금.그 퍼즐 조각이 제 발로 도진의 거실 한가운데로 굴러들어온 것이다."하… 하하……."도진의 입에서 낮고 뒤틀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도, 도진 씨……?"발치에 엎드려 있던 서아가 그 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오래 운 탓에 눈가가 붉고 퉁퉁 부어 있었고, 창백한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서아는 도진이 오열하는 줄 알았다.그렇게 끔찍이 사랑하던 아내의 추악한 진실을 마주했으니, 그 충격에 정신을 놓고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여보… 내가, 내가 다 설명할게. 저거, 저 그림…."서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하며 도진의 바짓단을 꽉 움켜쥐었다."저거 다 거짓말이야… 그 미친놈이, 이안이가 나한테 앙심을 품고… 상상해서 그린 거야…! 도진 씨, 제발 내 말 좀 믿어줘… 흑, 흐으윽……!"서아는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변명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면 자신은 정말 끝장이라는 공포가 그녀의 뇌를 마비시키고 있었다."내가 미쳤다고 저런 짓을 해? 당신도 알잖아, 나 그런 여자 아니라는 거…! 저 새끼가 나 스토킹하다가, 내가 안 만나주니까 당신한테 이런 거 보내서 나 협박하는 거야! 당장 저거 찢어버리자. 응? 칼 어딨어, 이거 당장 찢어버려!"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