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어, 현민아….”
“네가 너무 안 오길래 걱정돼서 나왔어.”
혜서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현민의 시선이 천천히 정한에게로 옮겨갔다.
곧이어 그 역시 금방 정한을 알아보고선 놀란 눈치였다.
“다정한?”“…….”
현민의 입에서 정한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혜서가 본능처럼 현민의 옆으로 붙어 섰다.
“수술했다더니 이젠 보이는….”
“나 알아?”
심드렁하게 현민을 응시하던 정한이 말을 잘랐다. 눈빛이 미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였는데 모를 리가.”
“왜 내 기억엔 네가 없지?”
“…….”
“하긴.”
정한의 시선이 혜서에게로 향했다.
“내가 진혜서 말고는 관심 있는 사람이 없긴 했지.”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전부 알고 있었다. 현민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 동창회 온 거면 어쩌지? 끝나서 모두 돌아갔는데.”
“동창회 온 거 아니었대. 우연히 만났어.”
“그래?”
“가자, 현민아.”
급하게 현민에게 팔짱을 껴 돌아서려는 혜서를 정한이 빤히 응시했다.
“박현민? 네가 박현민?”
순간 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정한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처음 화색을 띠었다.
“결혼한다더니 그 사람이 설마 얘야?”
“맞아.”
“아.”
혜서의 수긍에 정한의 시선이 둘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이내 그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기괴한 그의 모습에 불쾌해진 혜서가 더욱 걸음을 재촉하려 애썼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정한의 웃음이 거슬렸는지 걸음을 멈춘 현민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지금은 말해 줄 수가 없고.”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정한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얼른 돌아가자.”
혜서가 다급히 말을 끊었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다.”
둘 사이에서 피곤해진 혜서가 서둘러 인사하는 현민의 손을 잡아끌었다.
당장에라도 이 숨 막힐듯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진혜서.”
“……!”
“또 보자.”
그런 혜서의 바램을 짓밟는 그의 음성이 등에 꽂혔다.
혜서 역시 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더 빠르게 걸었다.
*
“뭐? 다정한? 다정한을 만났다고?”
서울에 위치한 향수 공방『여운』.
작업대 위에 늘어선 유리 보틀 사이에서 향을 블렌딩하던 새롬이, 혜서의 말을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응.”
“대박! 어쩐지 나가서 한참을 안 들어오더라.”
들고 있던 보틀을 거칠게 내려놓은 새롬이 의자를 끌어 혜서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이젠 진짜 앞을 보더라.”
“그래? 널 한 번에 알아봤어?”
“응.”
“와, 미쳤다.”
새롬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정한은 10살 무렵 서울에서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고 들었다. 그 해, 전주로 내려와 어머니와 10년을 단둘이 지냈다.
혜서 역시 19살 무렵, 서울에서 아역배우 생활과 모델 일을 하다가 스토커로 인해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무작정 전주로 도망치듯 내려와 정한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둘은 처음 만났다.
집이 가깝고, 어머니들끼리 친해져 둘의 접점이 많아졌지만 처음에는 혜서 역시 쉽게 그의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정한은 늘 주변에게 예민하게 굴었고, 남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늘 학교에서 혼자였다.
혜서가 교실에서 처음 정한을 마주했을 때 그는 자신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가오는 사람에게 까칠하게 굴며 귀찮게 구는 아이들을 피해 매일 도서관에서 잠만 자며 지냈다. 그랬던 그의 모습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선명했다.
서울에서의 트라우마로 혜서도 똑같이 남들의 시선을 싫어했으니까.
그렇게 각자가 남들을 피해 도서관을 찾았고, 우연히 계속해서 만났다.
날 알아보지 못한다. 보지 못한다.
혜서가 정한이 남달리 편했던 이유였다.
‘넌 왜 맨날 도서관 와서 잠만 자?’
늘 도서관 구석에서 엎드려 잠만 자던 정한을 일주일째 관찰만 하다 처음 용기 내 말을 걸었다.
‘그나마 여기가 사람이 덜 오니까. 안 쳐다봐서 좋아.’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서울에서 전학 온 애잖아.’
태연히 답을 하고 다시 엎드려 자던 정한이었다.
“……으음. 미안해.”연신 혜서를 매만지던 정한의 손길이 혜서의 잠꼬대 같은 혼잣말에 허공에 멈추었다.얼굴을 살피니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미안해, 정한아… 내가 정말 미안해.”꿈속에서조차 자신을 떠올린다는 것에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정한 역시 슬픔에 잠겼다.넌 뭐가 그리도 내게 미안한 걸까.본인의 의지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적 없는 혜서가 연신 사죄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이만 잠든 혜서를 안아든 정한이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미안해.”차에 타서도 혜서는 연신 사죄를 했다.운전석에 타 잠든 혜서를 바라보며 속을 애태웠다.“넌 잘못 한 거 없어, 진혜서.”“…….”“널 아프고 힘들게 하면 내가 다 죽여 놓을 거야. 그렇게 할 거야.”차창으로 스며든 달빛을 머금은 혜서의 얼굴이 유독 더 새하얗게 보였다. 웃고만 있어도 애가 타는 여자가 눈물을 보이며 잘못을 빌고 있으니 마음이 찣어지다 못해 괴로웠다.이만 서늘하게 눈빛이 바뀐 정한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제것을 건드린 대가를 반드시 치러주겠다 생각하면서.“자, 잠시만요… 안에 상무님은 안 계십…!”한성 그룹 본사 상무실.태현은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에 책상에 앉아 업무를 하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누가 대뜸 자신을 찾아온 모양인지 밖에선 비서들의 말리는 소리가 다급하게 전해지고 있었다.“……뭐야. 네가 왜 여기를.”벌컥 문이 활짝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정한이었다. 뒤따라 온 비서들이 미처 그를 말리지 못한 모양이었다.“왜? 내가 오면 안 될 곳이라도 왔나?”“뭐? 이 새끼가.”“어떻게. 여기서 말 할까? 무르는 게 좋을 텐데.”정한의 서늘한 눈빛이 뒤따라 붙은 비서들을 흘깃 쳐다봤다.그 모습에 무언가 직감한 태현이 고개짓으로 비서들을 물렀다.“씨발. 할 말이 뭔…… 윽! 아악!”비서들이 빠지고 둘만 남게 되자 정한이 다짜고짜 태현의 멱살을 한 손으로 집어들었다.괴로움에 몸부림 치던 태현이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내 소중한 걸 건
“이모 여기 소주 한병 더 추가요.”혜서는 백화점 퇴근 후 홀로 근처 포장마차를 찾았다. 짧고도 기나긴 하루였지만 정한의 약혼 발표 기사와 예슬과의 대면으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ㅣ“……써.”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병으로 잔을 채워 삼킨 혜서가 인상을 찡그렸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혜서였는데 오늘은 2병째였다.‘…난 정한이한테 힘이 되어 줄 수 있어. 근데 넌 아무런 힘이 없어 진혜서.’빈 잔을 도로 채우며 예슬이 제게 했던 말이 잔상처럼 떠올랐다.힘.그간 재회한 정한의 곁에서 그와 한성을 위해 힘이 되어주진 못해도 위로와 결핍을 채워주고 있다 믿었다. 정작 그가 필요로 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지난 10년 간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자신이었는데 정작 그것도 모르고 그의 곁에서 웃었다.‘지난 10년 간 너랑 한 약속 때문에 정한이가 약속 장소에 나갔다 돌아온 건 알고 있어?’안주도 없이 빈속을 술로만 채우던 혜서의 손짓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정한은 저와의 약속을 지켰다.‘꼭 다시 만나자. 내가 널 찾으러 갈게.’힘든 상황에 처해있었으면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타났었다는 그의 모습이 아른거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난 지난 10년 동안…단 하루도 널 잊어 본 적 없어.’처음 그가 여운을 찾아와 했던 말이 가슴을 울렸다. 그저 여운의 퍼스트메모리를 얻기 위해 그가 어쩌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단 의심을 하며 진심을 짓밟았다.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들은 죄책감이 되었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혜서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모든 상황이 그랬다. 혜서의 상황이,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 저를 무너트렸다.Rrrrr. Rrrrr.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간헐적으로 벨소리를 울렸지만 혜서는 받지 않았다.정한이었지만 선뜻 받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를 만나 또 미안하단 말만 연거푸 얘기하는 것 또한 미안했다.그저 그에게 미안한 것 투성이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뚝.혜서에게
백화점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할 말이 뭐야?”먼저 입을 연건 혜서였다.“사실을 알아챈 것 치고 멀쩡해졌네?”팔짱을 껴고 커피 한 모금 마시지 않던 예슬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너한테 들은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부여잡은 혜서가 말을 이었다.아직 정한에게서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 선뜻 지금의 예슬에게 그 무엇을 듣는다 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게 뻔했다.그를 만나 이야기를 듣기전에 흔들리고 싶지 않아 이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치는 예슬 때문에 결국 따라왔다.“정한이한테서 듣고 나서….”“그러면 아까 대표실에선 왜 도망쳤어?”“…….”예슬의 말에 혜서는 말이 없었다.정한과 예슬의 약혼 기사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예원의 사망 원인까지 듣고 나니 그때의 혜서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정한이가 말을 할 것 같아? 10년을 감춰 살았어. 너 하나 때문에.”“……!”예슬의 미간이 심하게 좁혀졌다. 따지듯 언성을 높이는 그녀는 마주한 혜서가 원망스러웠다.혜서 때문에 그간 정한이 힘들었고,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런데 그런 진혜서를 그는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싸고 도니 미칠 노릇이었다.“넌 정한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원망만 늘어놨지? 지금도 그래! 막상 들이닥친 문제는 보지도 않고 피했어. 피한다고 뭐가 달라져? 내가 거짓말을 왜해? 어차피 다 들통날텐데.”울분을 토해내며 예슬이 눈을 부릅떠 따져물었다. 그간 혜서에게 쌓인 게 많았다.“지난 10년 간 너랑 한 약속 때문에 정한이가 약속 장소에 나갔다 돌아온 건 알고 있어?”“뭐?”“그것도 모르고 넌 거기서 또 정한이만 원망해댔겠지.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안했으면서.”입술을 짓씹은 예슬이 계속해서 혜서를 다그쳤다.“아줌마랑 정한이는 한성그룹에서 목숨이 위험했어. 그래서 아줌마가 정한이를 살리기 위해 전주에 숨어 살았고.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너한테 따라붙은
“…진혜서.”충격받은 얼굴로 굳어 서있는 혜서를 확인한 정한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두 사람의 사이에서 예슬만 덤덤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진혜서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짜릿한 순간이었다.“내가 잘못 들은 거야? 아줌마가… 아줌마가 내 기사 때문에 돌아가셨다니?”“잘못 들은 거 아니야. 너 때문에 정한이 집에 불이 난 거야.”“기예슬!”예슬이 팔짱을 껴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화가난 정한이 소리쳤다. 늘 덤덤하고 매사 침착하던 정한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처음 본 혜서가 흠칫 뒷걸음을 쳤다.그가 이토록 화를 낸다는 사실은 제가 들은 모든 것이 사실이란 소리였다.“혜서야, 나랑 얘기 좀 하자. 안 그래도 너한테 가려고….”“자, 잠깐 혼자 있게 해줘.”“뭐?”고개를 외면해 뒤돌아서는 혜서를 향해 정한이 말을 잇지 못했다.“내가 지금 이래저래 경황이 없어. 잠깐이면 돼. 이따 얘기하자, 정한아.”“혜서야.”결국 혜서가 달아나듯 모습을 감췄다. 허탈함에 정한이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뭐든 세상엔 끝까지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진혜서한테 만큼은, 그래 혜서한테만큼은 감추고 싶은 게 많았다. 그만큼 그녀가 상처 입는 게 죽도록 싫었으니까.“이제 만족해?”“내가 아니어도 알게 됐을 일이야. 박현민도 알고 있거든.”“뭐?”결코 정한과 혜서가 이어질 수 없다는 명확한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예슬이 바보같이 현민의 이야기를 꺼냈다.“어떻게 하면 혜서랑 네가 헤어지게 될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더라고. 그런데 미련하게 진혜서한테 말 한마디 벙긋 못하고 돌아와서는… 쯧.”답답하다는 듯 예슬이 혀를 찼다. 끝까지 제 앞에서 벗어나 진혜서만을 쫓는 정한에게 괘씸했기에 보란 듯이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현민이 본인이 쥐어준 열쇠를 사용하지 않았다. 바보 같이.진작 두 사람의 사이에 예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흘렸다면 지금 이만큼 돌아오지 않아도 됐을 일이었다.“그래도
다음 날 출근한 혜서는 연신 바빴다. 입소문을 탄 건지 여운의 향수는 늘 인기가 많았고, 여럿 인플루언서는 물론 연예인까지 다녀간 만큼 화제를 끌어 모았다.“혜서야, 밥 먹으러 가자.”화장실도 가지 못할 만큼 바쁘게 뛰어다녔더니 새롬이 어느덧 점심시간임을 알렸다.“응. 밖에서 먹을까?”“그러자. 사내에선 눈칫밥이나 먹고 체 할 것 같아.”어깨를 한번 풀어내며 혜서가 활짝 웃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새롬과 백화점 로비로 향했다.“오늘은 데이트 하겠네?”새롬이 혜서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글쎄. 오늘 새벽에 출장에서 돌아와서 피곤할 것 같아.”새벽에 서울로 돌아왔다며 메시지를 남긴 정한의 연락을 확인했다. 간밤에는 불안감에 새롬의 집에서 잠을 잤기에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왜들 그러지?”“응?”함께 출입문으로 향할 때였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직원들을 눈치 챈 새롬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마다 휴대폰을 확인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무슨 일이라도 났나?”의구심에 새롬도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바라봤다. 혜서는 팔짱을 낀채 걸으며 곧 재빠른 그녀가 알려줄 이야기를 궁금해했다.“…혜, 혜서야.”“응? 왜그래.”가던 걸음을 멈춘 새롬이 사색에 잠긴 얼굴로 혜서를 바라봤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확인한 혜서가 제 앞에 들이미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천천히 기사를 읽어내려가는 혜서의 표정이 짙게 굳어갔다.정한의 약혼 발표 기사였다.*“어머니께서 재밌는 일을 벌이셨네.”한성 백화점의 대표실. 정한 역시 예상치 못한 기사가 순식간에 오르내리자 얼굴에 불쾌감이 적나라했다.“뒷감당 어쩌시려고.”“죄송합니다, 대표님. 기사는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윤 비서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정한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하자마자 맞은 뒤통수에 화를 삼켜내기 바빴다. 윤미가 발칙한 짓을 벌였다. 그렇게 경고를 했건만.기어이 선을 넘어버린 그녀에게 더 이상의 선처는 없었다.진혜서가 봤을 텐데.기사를 보고 상처를 입었을 혜서를 떠
하루가 꼬박 지났다. 밤새도록 혜서는 잠을 어떻게 잔건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오전에 출장을 미루겠다는 정한을 타이른 혜서는 공방에 출근해 새롬과 함께 경찰이 물러난 여운을 청소중이었다.“아마도 주변에서 우리 공방이 잘 되니까 샘나서 그런 걸 거야.”쓰레기 봉투를 꽉 묶어 든 새롬이 성난 듯 말했다.“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어.”“뭐? 무슨 이유든 누가 그랬든 이건 범죄야!”작게 고개를 끄덕인 혜서도 연신 주변을 정돈했다.조일관이 출소 후 일상생활을 지내며 신경쓰이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그가 자신을 잊고 그저 본인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지만 혹여라도 복수심을 품고 있다면 10년 전과 같은 비극이 또 일어날 수도 있었다.“하….”본인도 모르게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나온 혜서가 휘청거리자 새롬이 다가와 부축했다.“너 때문 아니야, 진혜서. 생각 그만해.”밤새 잠 한숨 못잔 혜서의 얼굴을 확인한 새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찰 조사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어젯밤 확인 결과 CCTV도 누군가 고의로 훼손한 흔적이 발견됐다.즉 우발적인 범행은 결코 아니란 뜻이었다.“좋은 일이 생기려고 액땜 했다 생각하자.”“응. 나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어떻게 걱정을 안 해. 그러지말고 당분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자. 어때?”새롬의 제안에 혜서가 잠시 고민했다. 그만큼 조일관의 출소와 공방의 침입 시기가 겹친 게 은연 중 불안했던 이유였다.“이럴 때 다정한은 어디 간 거야? 너만 두고.”“출장 갔어. 안 간다는 거 내가 다녀오라고 했어.”떠난 정한을 떠올린 혜서가 씁쓸한 미소를 띄었다.맘 같아선 그의 뜻대로 함께 있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그에게 작은 걸림돌이라도 되고 싶지 않았다.*“조일관의 소행이 아니란 말씀인가요.”출장길에 나선 정한은 운전을 하며 블루투스로 연결된 전화로 조일관에게 심어둔 남자와 통화중이었다.-네. 어젯밤 자택에서 나온적이 없습니다. 한 번 외출은 했으나 집앞 편의점에서 술을 산 것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