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김도현이라는 이름이 화면 위에 떠 있는 동안, 거실 안의 공기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숫자와 계좌를 따라가던 시선이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화면에만 머물지 못했다. 건우는 노트북 앞에 서 있었고, 하나는 의자에 앉은 채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틀릴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싶었지만, 계좌 흐름은 지나치게 선명했다.형이 죽기 전에 추적하던 돈의 끝에, 형이 가장 믿던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그 사실은 단순한 충격으로 끝나지 않았다.오랫동안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기억들까지 한꺼번에 흔들어 놓았다.“다시 봐.”건우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아무 말 없이 로그 화면을 다시 열었다. 자회사 계좌로 들어온 돈이 싱가포르 투자회사를 거쳐 개인 계좌로 빠져나가는 흐름은 숫자만 달라질 뿐 몇 달 동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었다. 우연이나 일회성 실수라고 보기에는 구조가 너무 정교했다.“계좌 명의는 확실해.”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동명이인 가능성도 확인해봤는데, 주민번호 뒤 두 자리랑 회사 신고 자료가 일치해.”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창가 쪽으로 걸어가려다 멈춘 그는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김도현.형이 해외 일정으로 자리를 비울 때마다 회사 안을 대신 맡던 사람. 중요한 결재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보고를 올리던 사람. 집에도 몇 번이나 드나들었고, 건우에게도 늘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형이 뒤쫓던 돈의 끝에 있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칼을 들고 형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형이 알았겠지.”건우의 입에서 낮게 말이 흘러나왔다.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아마.”그녀도 쉽게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그래서 변호사를 찾았을 거야.”건우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정지윤 변호사를 찾아간 이유, 기록에 남기지 않은 약속, 사고 직전에 주고받으려 했던 봉투, 그리고 그날 바로 회수된 자료. 모든 조각이 조금씩
자금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숫자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하나는 노트북 화면을 확대했다.여러 개의 송금 기록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회사 결제처럼 보이던 금액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었다.“건우.”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이거 봐.”건우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여기.”하나는 특정 계좌를 가리켰다.“처음에는 회사 자회사 계좌로 돈이 들어와.”마우스가 움직였다.“그 다음.”다음 화면이 열렸다.“싱가포르 투자회사.”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하나는 화면을 하나 더 넘겼다.“여기서 다시 빠져.”새로운 계좌가 나타났다.건우의 눈이 멈췄다.“개인 계좌.”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잠시 침묵이 흘렀다.건우는 계좌 번호를 바라보고 있었다.“이거.”그가 말했다.“회사 계좌 아니네.”하나는 천천히 말했다.“응.”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개인 이름이야.”건우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누구.”하나는 화면을 확대했다.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이거.”그녀가 말했다.“이름이 익숙해.”건우가 고개를 들었다.“누군데.”하나는 화면을 돌렸다.김도현건우의 눈이 아주 미묘하게 흔들렸다.그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형의 회사 재무담당 부사장.형이 가장 신뢰하던 사람이었다.잠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건우는 화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형이 죽기 전에 추적하던 돈의 끝이 형이 가장 믿던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었다.“설마.”건우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확정은 아니야.”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근데.”잠시 후 이어 말했다.“가능성은 높아.”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건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창밖을 바라봤다.형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김도현의 얼굴도.항상 웃고 있던 사람.형이 해외 출장 갈 때마다 회사 일을 대신 맡기던 사람.그 사람이 형이
지윤 변호사 사무실에서 돌아온 뒤, 집 안 공기는 오래 가라앉아 있었다.하나는 거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있었다. 화면에는 형의 회사 재무 자료가 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숫자들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여기 봐.”그녀가 조용히 말했다.건우는 소파에서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이 계좌.”하나는 숫자를 가리켰다.“자회사 결제 계좌인데.”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였다.“세 달 간격으로 큰 돈이 빠져나가.”건우의 눈이 좁아졌다.“얼마.”“평균 삼십억.”잠시 침묵이 흘렀다.건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근데.”그가 말했다.“회사 결제면 문제 없잖아.”하나는 고개를 저었다.“문제는.”그녀는 다음 화면을 열었다.“이 돈이 어디로 가는지야.”화면에는 해외 송금 기록이 나타났다.싱가포르.케이맨 제도.그리고 이름 없는 투자회사.건우의 시선이 멈췄다.“페이퍼컴퍼니.”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본 것도 이거일 거야.”잠시 정적이 흘렀다.이건 단순 횡령이 아니었다.회사 안에서 조직적으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었다.건우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형의 얼굴이 떠올랐다.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감정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항상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에 행동하는 사람이었다.그 사람이 굳이 변호사를 찾아갔다는 건 이미 확신에 가까운 증거를 잡았다는 뜻이었다.“그래서.”건우가 말했다.“형이 자료를 넘기려 했던 거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근데 그걸 누가 가져갔지.”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형의 죽음은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그 자료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막아야 했던 사건일 수도 있었다.밤이 조금 깊어졌을 때. 하나는 노트북을 덮었다.건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건우.”그녀가 조용히 불렀다.그는 고개를 들었다.“
정지윤 변호사의 사무실은 도심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쪽에 있었다.크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간판은 분명했다. 법률사무소 지윤이라는 이름이 깔끔하게 걸려 있었다.건우는 건물 앞에 서서 잠시 간판을 바라봤다.“여기 맞아.”하나가 말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이 문을 열면, 형이 마지막으로 준비하려 했던 것의 일부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하나는 먼저 문을 밀었다.사무실 안은 조용했다.책장이 벽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가운데에는 단정하게 정리된 책상이 놓여 있었다.책상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예약하셨나요?”목소리는 차분했다.하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윤신우 대표 관련해서 왔습니다.”그 순간. 여자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반응은 짧았지만 분명했다.“윤신우 대표.”그녀가 천천히 말했다.“그 이름… 오랜만에 듣네요.”건우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그럼.”그가 조용히 말했다.“기억하신다는 거네요.”정지윤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그리고 물었다.“두 분은.”건우가 먼저 대답했다.“동생입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정지윤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예상은 했어요.”그녀가 말했다.“언젠가는 누군가 찾아올 거라고.”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형이.”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사고 전에 여기 오셨죠.”정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의 대답은 단순했다.“맞습니다.”건우의 숨이 조금 무거워졌다.“무슨 얘기 했습니까.”지윤은 잠시 침묵했다.그리고 말했다.“그건.”그녀의 시선이 조금 낮아졌다.“원래 말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하나는 바로 말을 이었다.“그래도.”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지금 상황은 다르잖아요.”정지윤은 한동안 두 사람을 바라봤다.그리고 결국 말했다.“윤 대표님은.”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회사 내부 자금 흐름을 조사
이니셜 J.그 한 글자는 생각보다 많은 이름을 만들어냈다.하나는 변호사 협회 등록 명단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개인 사무소를 운영하는 변호사 중 J로 시작하는 이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지역이었다. 형이 활동하던 도시와 인근 지역까지 범위를 넓히자 후보는 열 명 가까이로 늘어났다.“이 중에 있어.”하나가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건우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었다.“확률이 높은 사람부터 보면 돼.”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굳이 개인 변호사를 찾았다는 건.”그녀는 말을 이어갔다.“회사 로펌을 피하려 했다는 뜻일 수도 있어.”건우는 그 말에 동의했다.형의 성격을 생각하면, 회사 문제라면 오히려 공식 채널을 썼을 것이다. 굳이 개인 변호사를 찾았다면 그건 회사 안에서 처리할 수 없는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았다.“찾았다.”하나가 화면을 멈췄다.건우가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뭐야.”하나는 모니터를 돌렸다.정지윤 변호사개인 법률사무소.주요 분야는 기업 내부 고발과 금융 범죄였다.건우의 눈이 미묘하게 좁아졌다.“내부 고발.”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형이 왜 이 사람을 찾았는지.”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이제 조금 보이네.”잠시 후. 건우는 창가로 걸어갔다.형이 사고 직전에 변호사를 만났고, 그 변호사는 내부 고발 사건을 다루는 사람이었다.그 사실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형은 죽기 전에 누군가를 고발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그 봉투.”건우가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들었다.“응.”“자료였겠지.”그의 말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하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고발 자료.”잠시 정적이 흘렀다.건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래서.”그가 말했다.“누군가 그걸 가져간 거야.”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형은 그걸 넘기기 전에 죽었고.”그 말은 조용했지만 무거웠다.밤이 깊어질수록 집 안은 조용해졌다.하나는 서류를 정리하
카페에서 돌아온 뒤, 하나는 곧바로 노트북을 켰다.변호사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작점은 필요했다.“변호사라면.”그녀가 조용히 말했다.“형이 만난 사람.”건우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로펌 소속일 수도 있고.”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면 개인 변호사.”그녀는 형의 회사와 관련된 법률 자문 기록을 먼저 확인하기 시작했다.회사 계약 로펌 목록.외부 법률 자문 계약.최근 2년 동안 새로 연결된 법률사무소.화면 위에 이름들이 하나씩 올라왔다.그러나 이상하게도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건우.”하나가 말했다.“이거 봐.”건우가 고개를 들었다.“형.”그녀는 화면을 돌렸다.“최근에 개인 법률 상담 기록이 있어.”건우의 눈이 멈췄다.“개인?”“응.”하나는 키보드를 조금 더 두드렸다.“회사 기록 말고.”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개인 계좌로 결제된 상담.”건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형이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찾았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언제.”그가 물었다.하나는 화면을 가리켰다.“사고 나기 일주일 전.”공기가 아주 미묘하게 가라앉았다.잠시 후.하나는 화면을 더 확대했다.“이름은 가려져 있어.”그녀가 말했다.“근데.”잠시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로펌 아니야.”건우는 고개를 들었다.“그럼.”하나는 화면 아래쪽을 가리켰다.“개인 사무소.”그리고 그 아래에 남아 있는 단서 하나.이니셜 : J건우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J.”그가 낮게 말했다.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름일 수도 있고.”“사무소 이름일 수도 있고.”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그 짧은 이니셜 하나가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저녁이 깊어질수록 집 안 공기는 조용해졌다.하나는 부엌에서 컵을 정리하고 있었다.건우는 거실에 서 있었다.“하나.”그가 불렀다.그녀가 돌아봤다.“왜.”건우는 잠시 말을 찾다가 말했다.“오늘.”그는
건우는 더 이상 우연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았다.복구 업체에 다녀온 날 바로 걸려온 전화, 자신의 동선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리고 형이 남긴 음성 파일 속에 남아 있던 ‘부사장’이라는 단어까지.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위협이나 견제 수준을 넘어서 있다는 걸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그를 변수로 인식했고, 변수는 제거하거나 통제하는 게 계산의 기본이었다.아침 햇빛이 거실 바닥을 길게 가르고 있었지만, 집 안의 공기는 맑지 않았다. 하나는 창가에 서서 커튼을 조금 걷어놓은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
형의 음성 파일을 몇 번이고 다시 들은 뒤에도, 건우의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녹음 속 형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긴장이 섞여 있었고, 무엇보다 ‘건우가 살아남았어’라는 문장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라 어떤 계산의 전환점처럼 들렸다. 마치 누군가의 계획에서 어긋난 변수 하나를 지적하는 듯한 어조였다.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 역시 다그치지 않았다. 오늘의 서하는 유혹하지도, 자극하지도 않았다. 대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그날 이후, 건우는 밤이 오기를 의식하게 됐다.낮에는 바빴다.경찰서에 들렀고, 회사 관련 자료를 다시 정리했고,형의 마지막 통화 기록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지금은 안 돼.”그 짧은 문장이 여전히 귓가에 남았다.하지만 해가 지고 나면, 사건보다 다른 생각이 더 자주 떠올랐다.같은 얼굴인데 다른 눈빛.가까이 다가왔다가, 일부러 물러서던 몸짓.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잠깐 스친 그 만족스러운 표정.“서하.”그 이름을 부른 순간 이후로, 건우의 밤은 이전과 달라졌다.그는 스스로에게 변명했다.사건 때문이라고
하루 종일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공기가 눅눅했다.건우는 집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왔다.갈 곳은 많았지만, 머물 곳은 이 집뿐이었다.현관문을 열자 안이 조용했다.불은 켜져 있었고, 주방에서는 국이 끓고 있었다.하나는 부엌에 서 있었다.앞치마를 두르고, 국자 손잡이를 잡은 채로.“왔어?”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건우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는 게 더 낯설었다.“응.”신발을 벗으며 대답했다.그녀가 불을 줄이고 돌아섰다.“오늘은 일찍 왔네.”“할 게 없어서.”말은 건조했지만, 거짓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