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 눈부신 햇살이 스며드는 전각 안.미옥은 나른한 손길로 정무를 앞둔 연호의 허리띠를 매어주고 있었다. 연호는 말없이 턱을 괸 채, 제 앞의 미옥을 내려다보았다.어젯밤 초희가 쏟아낸 그 끔찍한 병증.포궁악창이라 했던가.연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네가 부린 수작이겠지. 그러니 셋이 함께하자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냈겠지.’연호는 제 옷깃을 여미는 미옥의 턱을 느릿하게 쥐어 올렸다.‘궁에 나가 있던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너를 이리 변하게 만든 거지? 아무래
안락당(安樂堂).평안을 누리라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은 황궁에서 가장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웅크린 무덤이었다.굳게 닫힌 창살 너머로 훅 끼쳐오는 공기는 멀쩡한 사람의 폐부마저 단숨에 병들게 할 만큼 무겁고 탁했다.독하게 달여낸 탕약 냄새, 시체를 닦아낼 때 피우는 값싼 향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도 덮지 못한 채 허공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썩은 피고름의 비린내.낡은 병풍 너머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은 생명이 꺼져가는 자들의 가래 끓는 숨소리와 건조한 신음뿐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생기(生氣)라고는 단 한 줌
"아읏……!"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래를 파헤쳐지는 수치심에 초희가 신음을 뱉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초희의 안쪽 깊은 곳을 짚어보던 의녀의 두 눈이 공포로 크게 확장되었다. 부드러워야 할 살점 너머로, 기괴할 정도로 크고 단단한 덩어리가 만져진 탓이었다.의녀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으며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폐하! 이, 이건 단순한 염증이 아니옵니다!""무슨 소리야! 네년이 내게 분명 며칠 쉬면 낫는 병이라 하지 않았느냐!"초희가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물며 소리쳤으나, 의녀는 사시나무 떨듯 고개를
끔찍한 악취의 근원이 다름 아닌 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초희의 입술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초희는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며 허겁지겁 침상 위에 깔린 붉은 비단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제 흉한 아래를 가렸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끝에 피가 섞인 끈적하고 탁한 갈색 고름이 미끈하게 묻어나오자,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로 뒤덮혔다."당장 치워라."머리 위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저 더러운 것을 당장 연화당 밖으로 내던져."연호는 초희를 여인은커녕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는 듯, 혐오가 담긴 얼굴로 굳게 닫힌 문 너
그 순간, 초희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처박혔다.위는 입은 채 아랫도리만 벗으라니. 그것은 여인으로서의 최소한의 교감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노골적이고 수치스러운 명령이었다.하지만 굴욕감에 굳었던 것도 아주 찰나였다. 초희는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번들거리는 눈빛을 빛냈다.'수치심? 그깟 게 대수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사내의 혼을 쏙 빼놓고 옭아매는 건 아랫도리뿐이야. 세상천지에 그보다 확실하고 중요한 게 어디 있어.'애초에 고고한 귀족 영애들처럼 고상한 교감을 나눌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단 한 번, 저 오만하고
끼기긱-.무거운 연화당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독한 향유를 머리끝까지 들이붓고, 치맛자락 아래로는 아직도 매캐한 쑥 훈증 냄새를 품은 초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턱을 넘어서던 찰나였다."……!"초희의 걸음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의 시선은 반쯤 걷힌 붉은 휘장 너머, 너른 침상 위로 벼락처럼 내리꽂혔다.그곳에는 숨 막히도록 농밀하고도 노골적인 정사(情事)의 한복판이 펼쳐져 있었다.붉은 곤룡포를 반쯤 벗어 던진 연호가, 제 무릎 위에 미옥을 온전히 올려앉힌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
그것은 강진이 제 목숨을 걸고 미옥에게 건넨, 차마 연서(戀書)라 부르지 못한 피의 약조였다.미옥은 피 묻은 손을 가슴에 움켜쥐고 산등성이를 향해 달렸다.뒤돌아보는 순간, 저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내를 차마 두고 가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에.강진은 멀어지는 미옥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 옆구리에 박힌 단도를 뽑지 않았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그는 미옥이 자신에게 갚아야 할 그 ‘밥 한 그릇’의 무게를 되새겼다...행렬이 멈춰 선 지 반 시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산들바람에 실려 오던 풀 내음은
미옥이 하륜의 품으로 파고들며 애타게 매달렸다.“그냥 지금 같이 도망치면 되지 않습니까! 나으리와 저, 단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숨어 살면 되지 않습니까. 제발요, 서방님…….”서방님.그 애달픈 부름에 하륜은 기어이 쓰디쓴 숨을 삼켰다.그는 미옥의 뺨을 감싸 쥐고, 가장 다정하지만 가장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미옥아. 이 하늘 아래 그자의 눈을 피할 곳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황제는 널 찾기 위해 온 조선의 땅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하륜의 엄지가 미옥의 눈물을 훔쳐냈다.“내가 그 붉은 눈을 완전히 가
천기곡의 아침은 불안할 만큼 평온했다.화로 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약탕기의 김이 방안을 은은한 풀 향으로 채웠다.하륜은 익숙한 손길로 미옥의 무릎 위에 따뜻한 수건을 올리고는, 뼈마디가 도드라진 가느다란 다리를 조심스레 주물렀다.미옥은 하륜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으며 옅게 미소 지었지만, 정작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는 하륜의 눈동자 밑바닥에는 짙은 그늘이 일렁이고 있었다.간밤, 사혁이 다녀갔다.도성에서 날아온 전갈은 핏빛이었다.황제가 편전에서 직접 피를 뿌리며 대신들의 입을 막고, 미옥을 무귀인(武貴人)으로 복위시킴과 동
그것이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마지막 방패였다.하지만 연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바닥에 끌며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분노가 아니라, 덫에 걸린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사신의 섬뜩한 미소였다.“결백을 증명하라. 그래, 그 명분이 필요하겠지. 짐이 오늘 이 자리에서 똑똑히 증명해 주마.”연호가 턱짓을 하자 편전의 문이 열렸다.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쪽으로 향했다.머리가 하얗게 샌 강 유모가 밧줄로 묶인 무언가를 짐승 끌듯 질질 끌며 들어오고 있었다.한때 화려한 비단옷을 둘렀을 그것은,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