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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가 사이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20:09:26

『황궁 공보: 황궁 도서관의 북부 자료 열람은 정상 운영된다.』

엘리네는 마지막 줄에서 손을 뗐다.

“빠진 이름이 있나요?”

“뒤에 도착한 보고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칼릭스는 책을 든 채 서가 너머에 서 있었다. 엘리네가 보고의 다음 장을 넘겼다. 빈 종이 뒤에는 다른 부대의 기록이 이어졌다.

“고친 기록은 따로 있나요?”

“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왜 그대로 두었을까요?”

“요약본을 다시 만들지 않았으니까요.”

엘리네는 수첩을 폈다. 적어 둔 제목 아래에 펜을 대려다가 멈췄다.

“제가 적어도 되는 숫자인가요?”

“예.”

펜촉이 종이를 긁었다. 엘리네는 숫자 옆에 출처를 적을 자리를 남겼다. 칼릭스가 들고 있는 책의 모서리가 서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대공 전하께 들었다고 적을게요.”

“알겠습니다.”

엘리네는 이름까지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칼릭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군복의 소매가 조금 움직였고, 책이 선반 위에 놓였다.

문 쪽에서 수레 바퀴가 삐걱거렸다. 사서가 눕혀 둔 사다리를 다른 직원과 들고 나가고 있었다.

엘리네는 통행세 장부를 다시 폈다.

“여기는 군대가 출발하기 전에 수레를 돌려보냈다고 되어 있어요.”

“읽었습니다.”

“말만 보낸 기록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고요.”

“수레가 못 가도 말은 갈 수 있습니다.”

“말도 못 가게 되면요?”

칼릭스가 서가의 빈칸으로 엘리네를 보았다.

“짐을 나눕니다. 사람에게도 싣습니다.”

엘리네는 장부를 누르고 있던 추를 옮겼다. 천 끝이 페이지 사이에 끼어 있었다. 종이를 당기지 않고 추부터 들어 냈다.

“그럼 하루에 가는 거리가 줄겠네요.”

“예. 보급을 받는 날도 늦어집니다.”

“돌아오는 길에 쓸 식량까지 가져가야겠어요.”

“돌아올 때 남아 있을 창고를 정해 둡니다.”

칼릭스의 대답은 짧았다. 엘리네는 보수 목록에 나온 창고 이름을 찾아 수첩 옆에 놓았다.

“이곳인가요?”

칼릭스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서가에 가려 글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엘리네는 책을 들어 보이려다 내려놓았다. 묶음의 끈이 아직 풀려 있었다.

“고개 아래 창고요. 지붕을 고쳤다고 적혀 있어요.”

“그곳이 맞습니다.”

“길에 대해서도 물어봐도 될까요?”

칼릭스가 책에서 시선을 들었다.

엘리네는 장부와 보고를 나란히 맞췄다.

“기록만 읽어서는 어느 곳에서 길이 막혔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저는 반대편만 알아요.”

“노르덴 쪽입니까?”

“네. 회색 고개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내려가는 산길이요.”

“그 길을 보셨습니까?”

“걸었어요.”

칼릭스의 손이 책등에서 멎었다.

“어디까지 가셨습니까?”

“눈 때문에 돌아선 곳까지요. 고개를 넘지는 못했어요.”

엘리네는 수첩의 빈 곳을 폈다. 펜을 들자 칼릭스가 있는 쪽으로 몸이 돌아갔다.

“노르덴 쪽은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왼편으로 꺾여요. 아래에서는 끝이 안 보여요. 굽이를 돌면 돌을 쌓아 둔 자리가 있고요.”

펜촉이 종이에 닿기 전에 멈췄다.

“그 자리가 제국 기록에도 나오나요?”

“돌무더기 옆에 표지목이 있습니까?”

“제가 갔을 때는 누워 있었어요. 밑이 썩어서요.”

“보고에는 서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네는 펜을 잉크병 위로 옮겼다.

“언제 적은 보고인데요?”

“제가 고개를 넘기 전에 받은 것입니다.”

“그때도 누워 있었을 텐데요. 새로 세웠다면 모르지만요.”

엘리네는 수첩에 선을 그었다. 물길에서 갈라지는 자리를 표시하고 그 위에 짧은 선을 더했다.

“돌은 여기에 있어요. 길이 꺾이는 곳보다 조금 위예요.”

칼릭스는 수첩을 보지 않았다.

엘리네가 펜을 멈췄다. 책등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연회에서는 춤추는 발을 살피느라 이렇게 오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제가 잘못 기억한 걸까요?”

“아닙니다.”

그 뒤에도 칼릭스의 시선이 머물렀다. 엘리네는 잉크가 묻지 않은 손가락으로 종이 끝을 눌렀다. 창가에서 찻잔 받침이 달그락거렸다. 엘리네가 먼저 그쪽을 보았다.

마리엔이 돌아오고 있었다.

“황후 폐하, 물을 새로 데워 달라고 했어요.”

마리엔은 말을 끝내고 서가 쪽에 고개를 숙였다. 칼릭스도 짧게 고개를 움직였다.

엘리네는 수첩을 덮지 않은 채 펜을 놓았다.

“차는 조금 뒤에 마실게. 이 줄만 확인하고.”

마리엔이 찻주전자를 놓았다. 쟁반 아래에 물이 묻어 있었다. 마리엔은 얼른 천으로 닦고 책을 살폈다.

“안 튀었지요?”

“괜찮아. 여기까지 안 왔어.”

엘리네는 책을 안쪽으로 옮겼다. 마리엔이 받침까지 닦는 동안 칼릭스는 서가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책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네는 수첩의 선을 내려다보았다. 표지목이 서 있었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굽이가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엘리네는 눕혀진 나무가 있던 쪽에 점을 찍었다.

“마리엔, 저쪽에 얇은 책이 있는지 봐 줄래? 이 목록에 적힌 거야.”

마리엔이 내민 목록을 받았다.

“사서에게 여쭤볼게요.”

“멀리 갈 필요는 없어. 없으면 다음에 보면 돼.”

마리엔이 문가의 사서에게 갔다. 엘리네는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펼쳐 놓은 수첩은 그대로 두었다.

서가 끝에 북부 지명을 적은 나무패가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패 아래의 책등을 읽었다. 찾는 지명은 없었다. 낮은 칸을 보려고 손을 짚었다가 손가락을 떼었다.

먼지가 묻어났다.

엘리네는 손수건을 꺼냈다. 손끝을 닦은 뒤 더러워진 부분을 안으로 접었다. 모서리를 맞추고 가운데를 눌러 접자 긴 천이 되었다.

맞은편에서 책을 넣던 칼릭스가 손을 멈췄다.

엘리네는 손수건을 다시 접었다. 좁힌 폭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마지막 끝을 틈에 끼웠다.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칼릭스가 말했다.

“종이도 그렇게 접으십니까?”

엘리네는 손에 든 천을 보았다.

“지도를 넣을 때요. 펼칠 쪽을 밖으로 두면 필요한 곳부터 볼 수 있어요.”

“펴 놓을 자리가 없어도 되겠군요.”

“바람이 불 때도요. 전부 펴면 잡기가 어려워요.”

엘리네가 끼워 둔 끝을 빼냈다. 접힌 면이 차례로 나왔다. 먼지가 묻은 자리는 안쪽에 남아 있었다.

“손수건까지 이럴 필요는 없는데요.”

천을 펴던 손이 멎었다. 칼릭스가 보고 있었다. 엘리네는 손수건을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습관이 됐어요.”

“접힌 선이 겹치지 않게 하시는군요.”

“같은 곳만 접으면 그쪽부터 찢어져요. 산에서는 풀을 구하기도 어렵고요.”

엘리네는 서가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에 남은 먼지를 보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책이 있었다. 표지가 앞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

손을 뻗자 반대편에서 칼릭스가 책을 당겼다.

두꺼운 책이 빠지며 빈칸이 생겼다. 그 너머로 군복의 단추와 흰 흉터가 보였다. 엘리네는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칼릭스가 책을 돌려 제목을 확인했다.

“찾으시던 것입니까?”

“아니에요. 떨어질까 봐 넣으려고 했어요.”

칼릭스는 선반 안을 살핀 뒤 책을 옆 칸에 넣었다. 뒤에 다른 책이 가로로 누워 있었다. 손을 넣어 바로 세우고 나니 책등이 한 줄로 맞춰졌다.

엘리네는 빈칸에서 한 걸음 옆으로 옮겼다.

“산길 지도를 그린다는 건 어디서 들으셨어요?”

칼릭스가 엘리네를 보았다.

“연회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노르덴 지도를 그렸다고요.”

“북부에서 보급로를 찾을 때 노르덴의 통행 자료도 살폈습니다. 지도에 그린 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제 이름이요?”

“엘리네 하르덴.”

궁정에서 듣는 호칭과는 달랐다. 엘리네는 서가에 붙은 나무패로 시선을 옮겼다. 패 아래에 비어 있는 못구멍이 보였다.

“그 이름은 작게 적었는데요.”

“여백 아래에 있었습니다.”

“어느 길인지 기억하세요?”

“노르덴 쪽 창고에서 물길까지 가는 구간입니다.”

“거기는 길이 바뀌었어요.”

말이 먼저 나왔다. 엘리네는 손을 들어 굽이를 그리려다 소매를 잡았다.

“비가 많이 온 뒤에 흙이 무너졌어요. 제가 그린 건 그 전 길이에요. 지금은 위로 돌아가야 해요.”

“얼마나 돌아갑니까?”

“걸음으로만 재서 정확하지 않아요. 지도로 옮길 때 다시 확인해야 했어요.”

“직접 재셨습니까?”

“걸으면서 수첩에 적었어요. 내려올 때도 세고요.”

칼릭스가 지도통 뚜껑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림에는 돌아가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 지도를 그리고 나서 길이 바뀌었으니까요.”

엘리네는 탁자 위의 수첩을 보았다. 펼쳐 놓은 장에는 조금 전 그린 물길과 굽이만 있었다.

“노르덴에 있을 때는 고치러 갈 수 있었는데.”

손에 잡고 있던 소매를 놓았다.

칼릭스는 묻지 않았다. 황후궁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무엇을 허락받아야 하는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서가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몸을 돌렸다. 사서가 목록을 들고 오다가 걸음을 늦췄다.

“찾으시는 책은 아직 분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서의 눈이 칼릭스가 선 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정리되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급한 건 아니에요.”

엘리네가 답했다. 사서는 목록을 탁자에 놓고 물러났다. 마리엔은 문가에서 다른 직원이 가져온 책을 확인하고 있었다.

엘리네가 다시 서가를 보았을 때 칼릭스는 책을 닫고 있었다.

“책을 더 보실 건가요?”

“오늘은 이만 가겠습니다.”

칼릭스가 서가 끝으로 나왔다. 엘리네와 같은 쪽으로 나오지 않고 반대편을 돌아갔다. 엘리네는 책장 사이에 남은 빈 곳을 보다가 말을 꺼냈다.

“조금 전 표지목 이야기는 적어 두어도 될까요?”

칼릭스가 멈췄다.

“전하께서 받은 보고에는 서 있었다는 것까지요.”

“예.”

“그럼 다음에 지도를 볼 때 확인할 수 있겠어요.”

엘리네가 탁자로 가려는데 칼릭스가 먼저 물러섰다. 지나갈 자리는 충분했다. 엘리네는 발을 멈췄다.

“제가 곤란한 걸 여쭤봤나요?”

“아닙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엘리네도 그쪽을 보았다. 사서가 직원에게 목록을 건네고 있었다. 마리엔은 반납할 책을 들고 기다렸다.

서가 끝에는 두 사람만 서 있었다.

칼릭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황후 폐하와 단둘이 있는 걸 보이면 안 됩니다.”

엘리네는 주머니 속 손수건의 모서리를 눌렀다. 조금 전까지는 같은 방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 생각했다. 문에서는 탁자도 마리엔도 보였지만, 서가 안쪽은 가려져 있었다.

“지금도 그런가요?”

“예.”

칼릭스는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엘리네가 먼저 탁자 쪽으로 발을 옮겼다. 치맛자락이 책장 아래를 스쳤다.

창가에 이르자 마리엔이 돌아왔다.

“이 책들은 돌려드릴까요?”

“잠깐만. 표시한 곳부터 옮겨 적을게.”

엘리네는 의자에 앉았다. 수첩의 선 옆에 표지목을 적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장을 덮지 않도록 접는 자를 사이에 놓았다.

칼릭스는 벽에 두었던 지도통을 들었다. 엘리네는 펜촉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길이 바뀐 곳은 표시해 둘게요.”

칼릭스의 손이 지도통 끈에 머물렀다.

“다음에 그 지도를 보시게 되면요. 옛길로 읽으시면 안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펜을 내려놓고 답례했다.

문이 열리자 복도의 구두 소리가 들어왔다. 칼릭스가 문턱 앞에서 옆으로 비켰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에스텔이었다.

엘리네는 펼친 수첩 위에 손을 놓았다. 에스텔의 부채는 가슴 앞에서 펴져 있었다.

“대공 전하.”

“로웬 영애.”

칼릭스가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섰다. 에스텔은 비켜 선 채 안쪽을 보았다. 서가에서 창가의 탁자까지 시선이 옮겨 왔다.

엘리네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에스텔이 부채를 접었다.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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