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황궁 도서관이 북부 군사 자료를 정리한다.』
엘리네는 컴퍼스의 안쪽을 엄지로 쓸었다. 새긴 글씨 사이에 잉크가 조금 남아 있었다. 천으로 닦아도 빠지지 않던 자국이었다.
문밖에서 그릇이 부딪쳤다.
“공주님, 풀 가져왔어요.”
엘리네는 컴퍼스를 닫아 가죽집에 넣었다. 마리엔이 붓과 풀을 내려놓는 동안 지도 모서리에 얇은 종이를 댔다.
“내일은 도서관에 가야겠어.”
“찾으실 책이 있어요?”
“회색 고개 기록. 수첩에 적어 뒀어.”
마리엔이 책상 끝의 수첩을 펼쳤다.
“미리 가져오라고 할까요?”
“내가 볼게. 어떤 게 있는지도 모르니까.”
엘리네는 종이 끝에 풀을 발랐다. 뜯어진 자리를 맞춘 뒤 깨끗한 천으로 눌렀다. 붓을 씻으려던 마리엔이 지도 밖으로 나간 길을 가리켰다.
“여기서 더 올라가신 적은 없죠?”
“응. 눈 때문에 돌아왔어.”
엘리네는 붙인 종이 위에 자를 놓았다.
“그래서 다른 쪽 기록을 보려는 거야.”
◊
겨울 첫째 달 5일, 도서관 앞에는 책을 실은 수레가 서 있었다.
엘리네는 수레 옆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엔은 문가에서 외투를 받아 들었다. 긴 창 아래로 열람 탁자가 놓여 있었고, 안쪽 서가에는 사다리가 기대어 있었다.
책을 나누던 사서가 급히 손을 털었다.
“황후 폐하. 필요한 책을 말씀해 주셨으면 보내 드렸을 텐데요.”
“직접 찾으려고 왔어요. 북부의 겨울 통행 기록이 있나요?”
사서가 탁자 위의 목록을 살폈다.
“상단 쪽 기록을 찾으십니까?”
“군대가 지나간 기록도 괜찮아요. 회색 고개가 나온 것이면 좋겠어요.”
목록을 짚던 손이 멎었다. 사서는 엘리네를 보고 안쪽 서가를 돌아보았다.
“군사 자료는 따로 묶어 두었습니다. 열람 가능한 것부터 가져오겠습니다.”
“밖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돼요. 여기서 볼게요.”
엘리네는 창가의 탁자를 골랐다. 마리엔이 수첩을 내려놓고 의자를 뺐다.
“차를 가져올까요?”
“서두르지 마. 외투도 정리하고 와.”
마리엔이 나간 뒤 엘리네는 수첩을 폈다. 어제 적어 둔 회색 고개 아래에 빈칸을 남겼다. 종이를 펴기 전에는 장갑부터 벗었다.
사서는 책을 한 권씩 가져왔다. 통행세 장부, 길을 고친 기록, 군사 보고의 요약본이었다.
“원본을 다 옮긴 것은 아닙니다. 길을 살피시려면 통행세 장부가 나을 수도 있습니다.”
“눈이 언제 쌓였는지도 나오나요?”
“그 때문에 짐을 돌려보낸 날은 적혀 있을 겁니다.”
엘리네는 장부를 먼저 당겼다.
사서는 책 사이에 천으로 싼 추를 놓아 주었다. 누른 자리에 얼룩이 생기지 않도록 새 천으로 싼 추였다.
“장을 억지로 펴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꺾이지 않게 볼게요.”
사서가 물러나자 엘리네는 첫 장의 날짜를 수첩에 옮겼다.
◊
통행세를 받은 날 사이로 빈 날이 이어졌다.
엘리네는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눈이 쌓여 길을 막았다는 글 옆에 다른 색 잉크로 짧은 덧글이 붙어 있었다.
『짐수레 회송.』
다음 장에는 말만 보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 아래부터는 받은 돈이 없었다.
엘리네는 접는 자를 펴지 않고 책 옆에 놓았다. 행을 놓치지 않도록 자의 끝을 따라 읽었다. 길을 고친 기록에는 무너진 돌담과 물이 넘친 구간이 나왔지만, 고개 위쪽 이야기는 없었다.
군사 보고를 당기자 가죽 표지 안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북부 행군 기록 요약.』
첫 장에는 부대를 보낸 곳과 돌아온 곳이 나뉘어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날짜를 확인했다. 3년 전 겨울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멎었다.
『행군 구간. 회색 고개.』
그 아래에 황제의 이름이 있었다.
『아드리안 아르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북부군 이동.』
엘리네는 앞장을 다시 펼쳤다. 명령을 받은 날과 출발한 날이 따로 적혀 있었다. 귀부인들이 차를 마시며 말하던 겨울 행군이었다.
수첩을 가까이 당겨 날짜를 옮겼다.
황제가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엘리네는 다음 줄을 읽고도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지휘. 칼릭스 아르벤 대공.』
출발한 날에는 이미 통행세 장부가 비어 있었다.
엘리네는 두 책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때가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장부의 앞뒤 장까지 넘겼다. 짐수레를 돌려보낸 뒤에도 길이 열렸다는 기록은 없었다.
“찾으시는 곳이 나왔습니까?”
돌아온 사서가 물었다.
엘리네는 펼친 장부를 가리켰다.
“이때 길이 다시 열렸는지 적힌 책도 있나요?”
“고개 쪽 기록 말씀이십니까?”
“네. 군대가 출발하기 전후로요.”
사서가 몸을 숙여 글을 읽었다.
“이 장부만으로는 알기 어렵겠습니다. 길이 막힌 뒤에는 보고를 늦게 받은 경우도 있어서요.”
“그럼 다른 기록도 보고 싶어요.”
“북부에서 보내온 길 보수 목록이 있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사서는 책을 쌓아 둔 수레 쪽으로 갔다.
엘리네는 보고를 다시 읽었다. 행군을 마친 뒤 남긴 문장은 짧았다. 추위로 말을 잃었고, 짐을 나누어 실었으며, 일부 병력이 먼저 돌아갔다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줄에 숫자가 있었다.
『미귀환 병사 400명.』
엘리네는 수첩에 숫자를 적지 않았다. 펜촉에 맺힌 잉크를 병 안쪽에 털고, 빈칸 아래에 보고의 제목만 옮겼다.
문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사서가 수레 곁에서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
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
◊
칼릭스는 검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왼쪽 목의 흰 흉터가 옷깃 위로 조금 드러났다. 팔에는 가죽 지도통을 끼고 있었다.
엘리네와 눈이 마주치자 걸음을 멈췄다.
“황후 폐하.”
“대공 전하. 책을 찾으러 오셨나요?”
“반납하러 왔습니다.”
칼릭스가 다른 손에 든 책을 사서에게 건넸다. 책 아래에 끼운 종이도 함께였다.
“빠진 장은 없습니다. 접힌 곳만 펴 두었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사서는 책을 받으려다 엘리네의 탁자를 보았다.
“폐하께도 북부 자료를 찾아 드리던 중이었습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탁자로 옮겨 왔다. 엘리네는 보고를 덮지 않았다.
“회색 고개를 보고 있었어요.”
“어느 쪽 기록입니까?”
“제국 쪽이요. 제가 가진 건 노르덴 쪽뿐이라서요.”
칼릭스는 대답하기 전에 지도통 뚜껑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엘리네는 그 손을 보다가 펜을 잉크병 옆에 놓았다. 연회에서는 장갑에 가려 보지 못했던 손등에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길 보수 목록이 있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건 안쪽에 있습니다.”
칼릭스가 서가를 돌아보았다.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칸에 묶어 두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칼릭스는 탁자로 다가오지 않았다. 서가 끝에서 몸을 돌려 사서가 밀고 가는 수레를 비켜 주었다. 엘리네에게서는 책등 사이로 군복 소매만 보였다.
엘리네는 장부의 표시 끈을 끼웠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하고도 보고는 그대로 두었다.
문가에서 마리엔이 들어왔다. 쟁반을 든 시녀가 뒤따랐다.
“차는 여기에 둘까요?”
“책에서 조금 떨어뜨려 줘.”
마리엔은 탁자 끝에 찻잔을 놓고 안쪽을 보았다. 칼릭스를 알아본 뒤에는 엘리네에게 묻지 않고 벽 쪽으로 물러났다.
엘리네는 잔을 들지 않았다.
서가 너머에서 사다리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
사서는 사다리의 아래를 발로 확인한 뒤 올라갔다.
“가죽 끈으로 묶인 것이 보이십니까?”
칼릭스가 물었다.
“예. 반납하신 책 바로 위 칸에 있군요.”
엘리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록을 가져오면 어느 구간인지 바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서가 끝으로 가자 사서의 손끝이 보였다. 묶음을 빼내려고 팔을 뻗었지만 옆의 책이 함께 밀려 나왔다.
“옆에 있는 것부터 내려 주셔도 돼요.”
엘리네가 말했다.
사서는 손을 바꾸어 책등을 잡았다. 발을 옮기는 순간 사다리에서 짧게 나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칼릭스가 지도통을 내려놓았다.
사서의 구두가 발판 끝에서 미끄러졌다. 칼릭스는 사다리 옆을 잡고 다른 팔로 사서의 등을 받쳤다.
책이 기울었다.
엘리네는 양손을 내밀었다. 먼저 내려온 책의 밑을 받치고 가슴 쪽으로 당겼다. 그 위로 얇은 묶음이 떨어졌다. 끈 끝이 손목에 걸렸지만 놓치지는 않았다.
“발부터 올리십시오.”
칼릭스가 말했다.
사서가 발판을 더듬었다. 구두 밑창이 나무에 닿자 칼릭스는 받친 팔을 낮췄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사서는 사다리를 붙잡고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딛고 나서야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책을 받으시게 해서…….”
“다친 곳은 없으세요?”
엘리네가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칼릭스는 사다리를 놓지 않은 채 아래를 살폈다. 발판 끝에 붙은 나무 조각이 들떠 있었다.
“이건 쓰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겠습니다.”
“표시부터 해 두십시오. 모르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사서는 수레에서 끈을 꺼내 사다리 아래에 둘렀다. 매듭을 짓는 손이 조금 떨렸다.
엘리네는 받은 책을 수레 위에 내려놓았다.
“목록은 제가 가져갈게요. 나머지는 여기 두면 되나요?”
“제가 옮기겠습니다.”
사서가 손을 뻗다가 멈췄다. 칼릭스가 사다리를 벽에 눕혀 놓고 수레를 잡고 있었다.
엘리네는 묶음만 골라 들었다.
“손도 한번 살펴보세요. 나무에 긁혔을 수 있으니까요.”
사서는 그제야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마리엔이 다가와 책을 받겠다고 했다. 엘리네는 묶음을 건네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반납한 책에 끼워져 있던 종이였다.
글이 적힌 쪽은 보지 않고 칼릭스에게 내밀었다.
“여기 떨어졌어요.”
칼릭스가 종이 끝을 잡았다. 손이 닿기 전에 엘리네가 놓았다.
“감사합니다.”
엘리네는 빈손을 거두어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마리엔은 묶음을 들고 두 사람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에 놓아 줘.”
엘리네가 먼저 몸을 돌렸다.
◊
찾아온 목록에는 길을 고친 때와 필요한 목재의 양이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장갑을 다시 벗어 놓고 묶음의 끈을 풀었다. 손목에 끈 자국이 남았지만 금세 옅어졌다.
마리엔이 찻잔을 앞으로 옮겼다.
“손부터 녹이세요.”
“책장만 확인하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속 보시잖아요.”
엘리네는 잔을 들었다. 식기 전의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마리엔은 빈 잉크병 받침을 정리하며 문 쪽을 살폈다.
사서는 다른 직원에게 사다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칼릭스는 서가 안쪽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책등 사이로 검은 머리가 보였다가 가려졌다.
엘리네는 차를 내려놓고 보수 목록을 넘겼다. 다리와 돌담, 길가의 표지목이 차례로 나왔다. 찾는 때의 기록에는 고개 아래 창고를 고쳤다는 말만 있었다.
행군 전에 눈을 치웠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엘리네는 수첩을 당겼다. 기록이 없다는 것과 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말이었다. 빈칸 옆에 확인할 곳을 적었다.
펜이 종이 끝에서 멈췄다.
서가 너머의 칼릭스는 그 길을 직접 지나온 사람이었다.
엘리네는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린 뒤 수첩을 덮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마리엔도 사서도 같은 방에 있었다.
“대공 전하.”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
“말씀하십시오.”
“이 보고를 읽어도 괜찮을까요?”
엘리네는 펼쳐 둔 요약본 위에 손을 놓았다.
칼릭스가 서가의 빈칸 너머로 책을 보았다.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열람용으로 남긴 기록입니다.”
“직접 쓰신 건 아니군요.”
“제 보고를 줄인 것입니다.”
엘리네는 손을 거두었다. 짧은 문장 사이에 적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마리엔이 차를 더 가져오겠다며 쟁반을 들었다. 문 쪽에서 사서가 다른 책을 내려놓았다. 엘리네는 그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돌아오지 못한 병사가 적혀 있어요.”
칼릭스는 들고 있던 책을 닫았다.
엘리네는 마지막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서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칼릭스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기록, 숫자가 틀렸습니다. 400명이 아니라 412명입니다.”
(4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7일, 북방 보급안을 검토한다.』탁자 다리를 누르던 엘리네가 손을 뗐다. 마리엔이 지도 묶음을 올려놓으려 하자 엘리네는 창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그쪽에 두자. 창을 열어도 종이가 날리지 않게.”천을 벗기고 지도 모서리에 자를 얹었다. 바닥을 닦은 물이 마를 때까지 둘은 탁자를 움직이지 않았다.그 뒤로도 탁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실을 나설 때마다 다리가 놓인 곳을 확인했다.◊군무청 서기가 보급 계획서를 펼쳤다. 칼릭스는 가죽 지도통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장갑을 벗었다.창 아래에 놓인 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서기는 난로 쪽에 말려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계획서 끝에 붙였다.“창고별 수량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량은 따로 표시했습니다.”칼릭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첫 장을 읽었다.『봄 첫째 달 10일 출정. 병력 3만. 회색 고개 경유.』그 아래에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수량이 적혀 있었다. 칼릭스는 출정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행군 일수는 어디 있습니까?”“노정표에 있습니다.”서기가 묶음에서 종이를 찾아냈다. 칼릭스는 그것부터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벨모르에서 북부 요새까지 이어지는 선 옆에 숙영지가 적혀 있었다. 요새 위쪽부터는 표시가 드물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노르덴 쪽 마을에서 보급을 받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현지 보급을 약속한 문서도 있습니까?”서기는 종이 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첨부된 것은 없습니다.”“요청한 기록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