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노르덴 국왕께 보내는 황실 서한을 준비한다.』
에스텔은 접은 부채로 손바닥을 눌렀다.
“북부 기록을 보셨나 봅니다.”
엘리네는 수첩 옆에 놓인 책을 덮었다.
“찾는 자료가 있었어요.”
“대공 전하께 여쭤보시면 빠르겠네요. 도서관 기록보다 잘 아실 테니까요.”
문밖에서는 아직 구두 소리가 들렸다. 엘리네는 그쪽을 보지 않고 잉크병 마개를 닫았다.
“기록과 다른 숫자를 알려 주셨어요.”
“그러셨군요.”
에스텔의 시선이 펼쳐진 수첩에 머물렀다. 엘리네는 잉크가 마른 것을 확인하고 접는 자를 거두었다.
“이 자리를 쓰실 건가요?”
“아니요. 폐하께서 책을 찾아 오라 하셔서요.”
에스텔이 사서를 불렀다. 엘리네는 마리엔에게 반납할 책을 건넸다. 수첩을 닫기 전에 물길 옆에 찍은 점이 보였다.
길이 바뀐 곳은 표시하겠다고 했다. 칼릭스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 말 뒤에는 다음에 언제 볼 수 있는지 묻지 못했다.
◊
겨울 첫째 달 7일, 황제의 시종이 황후궁에 왔다.
엘리네는 수틀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바늘에 꿴 실이 천 아래로 늘어졌다.
“서재로 오시라는 말씀인가요?”
“예, 황후 폐하. 노르덴 국왕께 보내는 서한에 서명이 필요하십니다.”
“지금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은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엘리네는 실을 짧게 자르고 바늘을 천에 꽂았다.
황제의 서재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엘리네가 확인할 서류는 시종장이 가져왔다. 인장이 필요한 날에도 황제는 사람을 보냈다.
마리엔이 겉옷을 가져왔다.
“황후 폐하, 소매를 조금만 걷어 주세요.”
엘리네가 손을 들자 마리엔이 손목의 레이스를 안으로 정리했다.
“서명하실 때 잉크가 묻을까 봐요.”
“그렇게 두면 되겠어.”
“장갑도 드릴까요?”
“벗어야 하니까 괜찮아.”
엘리네는 서랍에서 은 컴퍼스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수틀 아래에 두었던 손수건도 챙겼다. 마리엔은 엘리네의 소매가 걸리지 않도록 문을 더 열었다.
본궁으로 이어진 복도에서 근위병이 길을 비켰다. 시종은 문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답이 났다.
마리엔은 벽 쪽으로 물러섰다. 엘리네가 돌아보자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문이 열렸다.
서재에는 종이와 장작 냄새가 났다. 벽난로 앞에 의자가 있었고, 창 아래에는 넓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한쪽은 회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아드리안은 책상에서 봉투를 고르고 있었다.
“왔군. 이리 오시오.”
엘리네는 책상 앞에 섰다. 황제는 앉으라는 말 대신 종이를 돌려 놓았다.
“그대 아버지께 보내는 새해 인사요. 국왕께서 동맹을 귀히 여기신다고 했으니 답은 해야지.”
“제가 읽어 봐도 될까요?”
“서명할 편지인데 읽어야 하지 않겠소.”
황제가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엘리네는 앉아서 서한을 당겼다.
노르덴 국왕의 건강을 빌고, 두 나라의 우의가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문장이 있었다. 마지막에는 황후도 평안히 지내고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 줄에서 시선을 멈췄다.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소?”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꿀을 잘 받았다고 적고 싶어요.”
“그런 것도 직접 챙기시나?”
“노르덴에서 쓰던 것이어서요.”
“그럼 적으시오. 아래에 자리가 있군.”
황제는 봉투를 내려놓고 반지를 돌렸다. 엘리네는 빈자리를 살폈다. 황제의 서명 옆에 이름을 쓰면 짧은 문장 정도는 들어갈 수 있었다.
“편지는 언제 보내시나요?”
“다른 외교 문서와 함께 갈 거요. 날짜는 시종장이 알겠지.”
황제가 펜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펜촉을 갈아 놓으라고 했는데.”
엘리네는 펜을 살폈다. 촉 끝이 벌어져 있었다. 종이를 긁으면 잉크가 튈 수 있었다.
“다른 펜을 쓰면 돼요.”
“밖에 말하시오.”
엘리네가 일어나려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시종이 문틈으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 재상께서 옆방에서 기다리십니다. 결재 전에 확인받을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아드리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또 무슨 확인을.”
시종은 답하지 않고 문을 열어 두었다. 황제는 책상 위의 서한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대는 서명하고 기다리시오. 금방 오겠소.”
“예, 폐하.”
황제는 펜을 바꾸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복도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엘리네는 서한을 읽던 자리로 다시 당겼다.
『두 나라의 변함없는 우의를 믿으며.』
손가락으로 종이 끝을 펴는데 시종이 들어왔다. 새 펜을 받침에 놓고 잉크병의 뚜껑을 열었다.
“종이가 더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이것으로 충분해요.”
시종이 물러났다. 문은 끝까지 닫혔다.
엘리네는 펜을 들기 전에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빛이 들어오는 쪽에서 쓰면 손 아래 그늘이 덜했다. 서한을 옮길 자리를 찾다가 회색 천 아래의 종이를 보았다.
천 밖으로 나온 귀퉁이에 가는 선이 있었다.
산의 높낮이를 그린 선이었다.
엘리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한은 책상에 두었다. 창 아래 탁자에는 문진과 자가 놓여 있었고, 천 끝이 문진 아래에 끼어 있었다.
탁자 옆으로 가자 종이의 여백이 보였다.
『축척 1:100,000』
엘리네는 자에 새겨진 눈금과 지도 아래의 거리를 나란히 보았다. 지도에서 1센티미터면 실제로는 1킬로미터였다.
황궁에서 쓰는 군사 지도였다.
종이 아래쪽에는 제국 북부의 강이 그려져 있었다. 강 옆의 지명은 도서관에서 읽은 통행세 장부에도 있었다. 그 위로 올라가는 길은 천에 가려져 있었다.
천이 접힌 틈으로 붉은 선이 조금 드러났다.
엘리네는 탁자에서 손을 뗐다.
황제의 서재였다. 여기서 본 것을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어디서 보았는지부터 답해야 했다.
돌아서려던 엘리네의 눈에 지명 하나가 들어왔다.
『탈로』
엘리네는 그 이름을 다시 읽었다.
노르덴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마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산길을 걸었을 때 그곳에서 신발 끈을 바꿨다. 젖은 끈을 말리는 동안 마을 사람이 길에 쓸 빵을 싸 주었다.
그 마을이 제국의 군사 지도에 있었다.
복도에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문을 돌아보았다. 발소리는 문 앞을 지나갔다.
엘리네는 천의 접힌 부분을 잡았다. 문진은 옮기지 않고, 늘어진 끝만 조금 걷었다.
붉은 화살표가 나타났다.
제국 쪽에서 산맥을 넘는 화살표였다. 끝은 탈로를 향해 있었다.
엘리네는 몸을 숙였다. 산줄기를 따라 찍힌 경계점, 고개로 올라가는 길, 양쪽의 하천이 보였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는 작은 깃발이 그려져 있었다.
가운데 적힌 글씨를 읽었다.
『회색 고개』
그 아래에는 출발일이 적혀 있었다.
『봄 첫째 달 10일』
엘리네는 날짜에서 눈을 멈췄다. 회색 고개에는 그때도 눈이 남았다. 노르덴 쪽에서는 봄이 왔다고 산으로 가축을 올려보내지 않았다. 낮에 녹은 물이 밤이면 다시 얼었다.
화살표 옆에 적힌 수를 읽었다.
『투입 병력 3만』
엘리네는 천을 잡은 손가락을 폈다. 손톱이 닿은 자리에는 자국이 나지 않았다.
훈련을 표시한 지도라면 멈추는 곳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붉은 선은 국경에서 끝나지 않았다. 탈로를 지나 노르덴 안쪽으로 이어졌다.
선 옆에는 진입과 점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글자를 하나씩 확인했다. 먼저 읽은 글을 잘못 보았기를 바라며 다시 읽지는 않았다. 경계선을 넘은 화살표의 끝을 찾았다. 천 아래로 더 이어져 있었다.
전부 볼 필요는 없었다.
노르덴을 치러 가는 길이었다.
책상 위에는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엘리네는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지도를 보았다.
같은 방에서 준비한 종이였다.
엘리네는 지도 위의 지명을 낮게 읽었다.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제국 북부의 길, 회색 고개, 탈로. 그 순서를 기억한 뒤 날짜와 병력을 다시 보았다.
봄 첫째 달 10일. 3만.
지도에 적힌 고개의 높이도 확인했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회색 고개는 2,400미터였다. 엘리네가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아버지의 지도와 대조하며 적었던 높이였다. 이 종이에는 그보다 낮게 쓰여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 옆의 자를 보았다.
길의 거리를 재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 지도에 적힌 높이로는 위쪽에 남을 눈을 헤아릴 수 없었다. 고개 아래 길이 드러나도 굽이 위에는 얼음이 남았다.
도서관에서 칼릭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레가 못 가도 말은 갈 수 있다고 했다. 말도 못 가면 사람에게 짐을 나눈다고 했다.
엘리네는 회색 고개로 모이는 선을 보았다. 3만 명이 쓸 식량도 이 길로 올라가야 했다.
붉은 화살표는 산을 지나도록 곧게 그어져 있었다. 길이 좁아지는 곳도, 바람을 피할 곳도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엘리네는 검지로 여백을 짚으려다가 손을 접었다.
틀린 곳을 표시할 펜이 없어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고쳐 주면 안 되는 지도였다.
옆방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천을 내려놓았다. 접힌 선이 맞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서리가 문진 바깥으로 조금 나와 있었다. 손끝으로 천을 밀어 그 자리를 맞췄다.
문진도 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네는 탁자 아래를 살폈다. 치맛자락이 의자에 닿아 있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떨어뜨렸다.
문밖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나중에 가져오시오.”
엘리네는 책상으로 돌아갔다.
의자가 밀리지 않게 앉고, 서한을 앞에 놓았다. 펜받침은 오른쪽에 있었다. 새 펜촉에는 아직 잉크가 묻지 않았다.
꿀을 잘 받았다고 쓰기로 했다.
엘리네는 빈 곳을 보았다. 아버지께 전할 말이 들어갈 만큼의 자리였다. 고개를 넘지 마시라고, 제국의 군사 지도에 탈로가 있다고 적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편지는 황제가 다시 읽을 터였다.
문손잡이가 내려갔다.
엘리네는 주머니에 왼손을 넣었다. 은 컴퍼스의 접힌 다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꺼내 펼치지 않고 안에서 움켜쥐었다.
아드리안이 들어왔다.
“아직 쓰고 있소?”
“이제 서명하려던 참이에요.”
“짧은 인사에 오래 걸리는군.”
황제는 책상으로 돌아와 봉투를 집었다. 엘리네의 뒤로 지나가지 않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꿀 이야기는 적었소?”
“먼저 이름을 쓰고 적을게요.”
엘리네는 펜촉을 잉크에 담갔다. 병 입구에 닿지 않도록 들어 올린 뒤 여분을 안쪽 벽에 덜었다.
늘 하던 대로 하면 됐다. 종이를 누르고, 첫 글자를 쓰고, 잉크가 마를 때까지 손을 떼면 됐다.
왼손을 꺼내려다가 멈췄다. 컴퍼스를 놓으면 손가락이 벌어질 것 같았다.
엘리네는 손목을 책상 가장자리에 붙였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굳은살에 펜대가 닿았다.
“아버지께 다른 전갈은 없소?”
“건강히 지내시기를 바란다고 적겠어요.”
“편지에도 있지 않소.”
“제가 쓰면 좋아하실 거예요.”
황제가 봉투를 내려놓았다.
“좋을 대로 하시오.”
엘리네는 서한 아래에 펜을 댔다. 아드리안의 이름 옆으로 검은 잉크가 묻었다. 마지막 글자를 쓸 때까지 펜끝을 떼지 않았다.
왼손 안에서 컴퍼스의 경첩이 손금을 눌렀다.
엘리네는 아버지께 보낼 편지에 서명을 마쳤다.
황제가 종이를 가져가려다 주머니에 넣은 엘리네의 손을 보았다.
(6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7일, 북방 보급안을 검토한다.』탁자 다리를 누르던 엘리네가 손을 뗐다. 마리엔이 지도 묶음을 올려놓으려 하자 엘리네는 창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그쪽에 두자. 창을 열어도 종이가 날리지 않게.”천을 벗기고 지도 모서리에 자를 얹었다. 바닥을 닦은 물이 마를 때까지 둘은 탁자를 움직이지 않았다.그 뒤로도 탁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실을 나설 때마다 다리가 놓인 곳을 확인했다.◊군무청 서기가 보급 계획서를 펼쳤다. 칼릭스는 가죽 지도통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장갑을 벗었다.창 아래에 놓인 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서기는 난로 쪽에 말려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계획서 끝에 붙였다.“창고별 수량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량은 따로 표시했습니다.”칼릭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첫 장을 읽었다.『봄 첫째 달 10일 출정. 병력 3만. 회색 고개 경유.』그 아래에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수량이 적혀 있었다. 칼릭스는 출정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행군 일수는 어디 있습니까?”“노정표에 있습니다.”서기가 묶음에서 종이를 찾아냈다. 칼릭스는 그것부터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벨모르에서 북부 요새까지 이어지는 선 옆에 숙영지가 적혀 있었다. 요새 위쪽부터는 표시가 드물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노르덴 쪽 마을에서 보급을 받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현지 보급을 약속한 문서도 있습니까?”서기는 종이 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첨부된 것은 없습니다.”“요청한 기록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