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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처음부터 함께 만드는 집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5 20:49:32

일요일 오후. 이현은 오래된 공책을 꺼냈다.

대학 시절, 낙서를 하던 노트 뒷장에는

그가 언젠가 혼자 살게 되면 갖고 싶었던 ‘집’의 구조가 손글씨로 그려져 있었다.

햇빛이 잘 드는 거실, 주방 옆 작고 따뜻한 식탁,

그리고 창가에 놓인 두 사람만의 커피머신.

그는 노트를 유리에게 내밀며 작게 말했다.

“…이건 예전의 상상이지만, 지금 당신이랑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그릴 수 있어요.”

유리는 그 노트를 조용히 받아들었다.

오래된 노트에서 느껴지는 그의 과거 온기와, 그 안에 적힌 조심스러운 꿈의 문장들.

“‘밤늦게 돌아왔을 때 혼자 켜진 불 말고 누군가가 켜둔 불이 있었으면 좋겠다.’”

유리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지금은 내가 그 불을 먼저 켜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따뜻하고 작았지만, 명확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새롭게 이사할 집을 보러 갔다.

예전처럼 넓고 고급스러운 주거지가 아닌, 조금 더 오래된 동네의 작은 복층 집.

창문은 오래됐고, 벽지도 낡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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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1. 우리가 손을 놓기 전의 풍경

    이른 아침, 유리는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창가에 서 있었다.서늘한 유리창에 손을 얹고 차가운 온기를 느끼며 그 안쪽에 잠들어 있는 이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는 평온하게 자고 있었지만 그 평온함 속엔 지쳐 있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요즘 들어 그가 부쩍 말이 줄었고그 줄어든 말 속엔 많은 감정들이 이미 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유리는 느끼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걸 그에게 말하지 않고 있는지 알았다.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젠 말해봤자 바뀌는 게 없을 거란 생각.그 침묵 속에서 유리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이 사랑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조심스럽게 자각하고 있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카페로 향했다.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기보다,단지 집 안에 머무는 것이 그에게 더 불편을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그는 그녀의 산책을 막지 않았다.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었다.“기분 전환 잘 하고 와요. 춥게 입고 나가지 말고요.”그 다정한 말은 어딘가 너무도 자동화된 문장처럼 들렸고그 다정함이 전해주는 체온보다 이제는 거리감이 더 먼저 느껴졌다.카페에 앉아 유리는 커피 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아무 것도 쓰지 않은 노트북, 페이지를 넘기지 않은 책,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오늘도 혼자세요?”그는 어제의 남자였다.자신을 묻지 않고 자신에게 스며들려 하지 않으면서도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하는 사람.“네.”유리는 짧게 대답했다.“그게… 어울리는 날도 있죠.”그는 쓸쓸하게 웃었다.“혼자 있는 게 어울리는 날이라니… 좀 슬픈 말이네요.”“하지만 편하잖아요. 어울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웃고 싶지 않을 땐 그냥 조용하면 되니까.”그 말이 요즘 그녀의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누군가에게 어울리려 애쓰는 것보다,차라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80. 다정해야 내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서

    파리의 아침은 눈처럼 흩날리는 안개로 시작됐다.유리는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뿌연 창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바닥에 번지는 회색의 실루엣.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았다.마치 지금의 자신의 마음처럼.이현은 부엌에서 익숙한 손길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단정하게 포개진 식빵 두 장,살짝 버터를 녹여 볶아낸 스크램블 에그,그리고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놓여 있었다.그는 변함없이 유리를 위해 준비했고, 그 다정함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그러나 유리의 발걸음은 그 식탁으로 쉽게 향하지 못했다.“식사해요. 곧 식을 것 같아요.”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그녀의 손은 그릇을 들지도,음식을 입에 넣지도 못한 채 그저 무릎 위에서 얌전히 모아져 있었다.“어제는 산책 잘 다녀왔어요?”이현이 입을 열었다.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식은 손을 바라보았다.움직이지 않는 손,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손끝.“혹시… 무슨 일 있어요?”그 물음은 다정했지만 유리에게는 벽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아니에요. 그냥… 그냥 생각이 많아서요.”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눈빛 속엔 수많은 물음표들이 일렁였지만그는 그 어느 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그날 오후, 유리는 조용히 외출을 준비했다.“어디 가요?”이현이 물었다.“그냥… 혼자 걷고 올게요.”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오래 붙들었다.“같이 갈까 했는데… 요즘 당신,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유리는 작게 웃었다.“가끔은, 그래야 하는 시간도 있는 것 같아요.”그녀의 그 말은 멀어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으려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다.이현은 그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슬픔을 보았다.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 슬픔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유리는 조용히 거리를 걸었다.어딜 가겠다는 목적도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79. 말이 아닌 표정으로 남는 감정들

    겨울의 아침은 여전히 느릿했다.햇살이 이마를 스칠 때에도 그 빛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쉽게 읽히지 않았다.유리는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긴 숨을 쉬었다.그 숨결은 새벽 내내 가라앉았던 감정의 무게를 조용히 토해내는 듯했다.이현이 바로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온기를 느끼지 않았다.아니, 일부러 느끼지 않으려 했다.그가 자신을 지켜보는 눈빛을 잠든 척한 채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말이라는 것이, 그 순간엔 너무나 큰 파장이었기 때문이다.주방에선 물이 끓고 있었다.이현은 커피를 내리는 손길로 아침을 열었고, 유리는 그 소리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둘 사이엔 인사도, 조금 전의 기척도 오가지 않았다.그럼에도 두 사람은 묘하게 익숙한 동선으로 서로의 공간을 비켜갔다.이현은 커피잔을 두 개 꺼냈고 유리는 그 중 하나를 들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감사해요.”입술에 걸린 그 말 한마디. 그것조차, 이젠 다소 어색한 예의처럼 들렸다.아침 식사는 조용했다.바게트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식탁 위의 공기를 깨트릴 뿐이었다.유리는 국물을 천천히 떠올리며 이현의 눈을 피했다. 그녀는 알았다.그가 자꾸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는 걸.그 다정한 시선이 이제는 따뜻하지 않았다.그것은 조심스러운 감시처럼 느껴졌고, 그것이 그녀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이현 역시 말이 없었다.그의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흘렀지만그 중 어느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무슨 일이야?’‘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거야?’‘우리가… 멀어지고 있는 걸까?’그 물음표들 사이에서 그는 그저 그녀의 숟가락이 몇 번이나 멈추는지를 세고 있었다.오후가 되자, 유리는 산책을 나갔다.혼자서. 이현은 따라 나서지 않았다.그는 문틈 너머로 그녀가 코트를 입고, 천천히 목도리를 고쳐 매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녀는 그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처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 숨결 속에는 말이 되지 못한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고 이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78. 이현 없는 삶을 상상할 때

    그날 밤. 이현은 일찍 돌아왔다.손에는 작은 초콜릿 상자가 들려 있었다.“오늘 미팅이 잘 돼서요. 축하할 겸, 우리 둘이 좋아하던 거 사 왔어요.”유리는 초콜릿을 받아들고 작게 미소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오래 머물지 못했다.식사 후, 두 사람은 거실에서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이현은 유리의 손등을 감싸며 말했다.“요즘 우리, 자주 서로를 놓치는 기분이에요. 가까이 있는데도 멀게 느껴져요.”그 말에 유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는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그 마음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도리어 숨이 막혔다.“그럴지도 몰라요.”유리는 조용히 말했다.“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이현의 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그 다정함이, 이제는 유리에게 상처였다.그날 밤. 유리는 처음으로 ‘이현 없는 삶’을 상상했다.그를 놓아주는 상상. 그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 선택.그 상상은 차갑고, 아프고, 하지만 아주 조금, 해방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오래도록 울었다.그 울음은 어떤 말보다 정직한 자신의 고백이었다.파리의 겨울 햇살은 어제보다도 더 맑았다.하지만 그 빛이 부엌에 들이칠 때, 유리는 그것이 차갑다고 느꼈다.빛은 따뜻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은 점점 무채색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그날 아침, 식탁엔 따뜻한 수프와 갓 구운 바게트가 놓여 있었다.이현이 준비한 식사였다.그는 정성스럽게 접시를 정리하고 작은 꽃병에 라넌큘러스를 꽂아두었다.겨울에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는 꽃,그는 그것이 유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유리는 그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식사하세요. 금방 식겠어요.”이현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유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손끝만 테이블을 쓸고 있었다.“…입맛이 없어요. 잠깐만, 이따 먹을게요.”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엔 어딘가 무거운 것이 고여 있었다.이현은 조용히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77. 다정함이 상처가 되어버린 밤

    에펠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고,그 아래를 걷는 연인들은 각자의 언어로 속삭이며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고 있었다.이현은 유리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우리 예전엔 이런 산책 자주 했었죠.”그가 말했다. 유리는 작게 웃었다.“…그땐 그게 좋았어요.”그녀는 말했다.그 말 속에는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 조용히 녹아 있었다.이현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고,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숨을 삼켰다.집에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그 고요함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서로에겐 익숙해진 침묵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유리는 화분 옆에 걸터앉았다.이현은 가만히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유리 씨… 혹시, 내가 너무 다정한 게… 부담돼요?”그 물음은 생각보다 너무 정직해서 유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런 건 아니에요.”그녀는 겨우 말을 뱉었다.“그냥… 제가 지금, 누구에게든 받는 게 조금… 힘든 것 같아요.”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그녀가 덧붙였지만 그 말은 오히려 그의 마음을 더 아프게 찔렀다.눚은 밤. 서로 등을 돌린 채 누운 두 사람 사이엔 한 뼘 남짓한 거리가 있었다.그러나 그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은 말하지 못한 감정이었다.이현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쉬었다.그는 다정함으로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그러나 지금, 그 다정함이 그녀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다정함이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무언의 상처가 되어버린 밤이었다.파리의 이른 새벽. 창밖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눈이 올 듯한 날씨였다.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거리에서, 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잠든 이현의 얼굴이 보였다.고르고 깊은 숨결.오래도록 자신이 의지해왔던 그 사람의 온기가 아직 곁에 남아 있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문득 이현이 없는 세상을 떠올렸다.그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그가 나로 인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그녀를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76. 다정함이 상처가 될 때

    “…네. 기억나요. 예전에 저 잼 바르고 빵 먹는 거 정말 좋아했어요.”“지금은요?”그가 묻자, 그녀는 망설였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좀 다른 사람 같아서요.”그 말에 이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병을 내려놓았다.그 말은 단순한 잼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그녀는 지금의 자신과 그가 사랑했던 유리가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했지만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이현은 자꾸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고, 유리는 그런 그를 애써 모른 척했다.식사 중,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유리 씨… 무슨 고민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요.”“그 생각… 혹시, 나 때문이에요?”그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숙였다.“아니요. 아니에요… 정말.”그러나 그 ‘아니에요’ 속에 이미 수많은 ‘그렇다’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이현은 느끼고 있었다.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작은 숨을 쉬었다.밤이 깊고, 불이 꺼진 집 안에서유리는 침대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옆에 누운 이현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지만,그녀는 그 손을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가만히 두었다.예전 같으면 그 손을 더 꼭 쥐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 다정함조차 자신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사랑이 식은 건 아니었다.그저,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을 뿐.한밤중, 유리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 창가에 섰다.빛 하나 없는 창 너머 어둠 속에 자신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그녀는 그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속삭였다.“…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걸까.”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지금 이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그저, 말하지 못한 감정이 가슴속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 설명 없는 떨림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 미친놈인가?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8. 요동치는 북소리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7. 무너지는 틈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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