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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Chapters

제281화

허공에 머문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결국 늦은 것인가.’그녀는 그렇게 세상 신난 발걸음으로 그의 시야에서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그는 멀리서 마차에 오르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어쩐지 목이 메어 입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가림막이 다시 내려지고 주변이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심서준은 눈을 감고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 채, 손에 낀 옥반지를 만지작거렸다.앞에 있던 마차가 천천히 떠나고 재잘거리던 소리도 사라졌다.포산루에서 나온 문하는 마차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으리, 계 소저가 점포를 양도하는데 장 선생에게 마무리를 맡겼다고 합니다.”심서준은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고독을 담은 눈동자가 세차게 일렁이고 있었다.‘정말 가는구나.’문하도 그의 기분을 느끼고 한참 침묵하다가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만약 나으리께서 가셔서 만류하신다면 계 소저는 여기 남을 것입니다.”심서준은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의 고백이 그녀를 두렵게 해서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걸지도 모른다.긴 한숨을 내쉰 그는 그날 그녀가 흘리고 간 귀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는 그녀가 그에게 남기고 간 유일한 물건이었다. 매일 밤 잠을 설칠 때면 베개 밑에서 꺼내 보며 그리움을 달래고는 했다.그는 이렇게 애가 타고 말라죽을 것 같은데 정작 그리움의 대상인 그녀는 그의 마음을 무시한 채, 멀리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그녀의 의지는 단호했고 그는 질척거리며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그는 귀걸이를 소중히 품에 간직한 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돌아가자.”상전의 싸늘한 목소리에 문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계 소저가 오늘 그림을 포산루에 가져왔는데 가서 보시렵니까?”마차 안에서 심서준의 싸늘하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서 가져오거라.”문하는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아쉬운 듯,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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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이미 네가 원하는 대로 화리도 해주었지 않느냐. 꼭 이런 식으로 내 관심을 끌고 싶었어? 네가 계속 이런 식이면 나도 고씨 가문을 곱게 봐줄 수가 없구나.”사옥현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서 마지막 경고라는 듯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렸다.계연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사옥현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참 준수하고 자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보고만 있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그냥 조용히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터무니없이 시비를 걸어올 줄이야.만약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해 작정하고 고씨 가문과 고준안을 적대한다면 아마 많이 곤란해질 터였다. 하지만 계연수는 그저 이 상황이 우스울 뿐이었다.이명유가 자신에게 독을 타먹이고 노부인의 생신 연회에서 그에게 최음제를 먹여 망신까지 당했는데 아직도 그녀를 두둔할 줄이야. 계연수는 싸늘한 어투로 물었다.“나으리, 말은 똑바로 하십시오. 제가 이명유에게 뭘 했다는 겁니까?”사옥현은 계연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을 등지고 서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모습, 분노를 참으며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 화리하고 며칠만에 보는 그녀이지만 여전히 기억하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옥현은 거북함이 느껴졌다. 지금의 계연수는 그에게 너무 낯설었다.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순종적이지 않았다.그는 이를 갈며 물었다.“네가 서역 상인을 매수하여 집으로 보내지 않았느냐? 그자가 집에 와서 명유가 자신에게서 불임약을 샀다고 하더군. 결국 너는 명유가 내 첩실이 된 것에 앙심을 품고 명유에게 보복하려는 게 아니더냐!”계연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싸늘히 말했다.“저는 시정 나으리와 이미 화리하였는데 나으리가 첩을 들이든 말든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첩을 몇을 들이든 저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제게 이런 것을 따질 시간에 의원에게 진료나 받아보십시오.”사옥현이 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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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사옥현은 멈칫하더니 음산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심씨 가문을 등에 업었다고 무서운 게 없구나.”계연수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제가 이명유를 왜 모함합니까? 당신도 지긋지긋한데 고작 이명유 따위를 제가 왜 신경 쓴다고요? 제가 할 일이 그렇게 없어서 은자까지 써가며 사람을 매수하여 이명유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겠습니까?”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에 사옥현의 가슴이 철렁했다.사실 막 계연수를 보았던 순간에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그녀를 매번 추궁하고 의심한 배후에는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겁한 이기심이 있었다.계연수가 이명유를 적대한다면 이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의 곁에 있는 이명유에게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리라.그는 그녀가 이 사실을 인정하기를 바랐다. 그런다면 지난날은 모두 잊고 다시 그녀를 받아줄 수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 이명유에게 잘해준다면 그 역시 그녀에게 애정을 줄 수 있었다.예전에 그녀를 홀대하고 무시했던 것을 한껏 보상해줄 것이다.하지만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계연수를 보며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지긋지긋하다는 한마디에 가슴이 저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아니. 정말 나에게 마음이 없다면 명유를 모함할 리가 없지. 그저 태연한 척하는 거야.’사옥현은 싸늘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증거만 찾으면 내가 친히 너를 관아에 압송할 것이다. 연수야,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이번엔 나도 양보 못한다.”계연수는 황당무계한 소리에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그와 혼인한 삼 년 동안 언제 양보한 적이 있던가.하지만 계연수는 더 이상 사옥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제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사람을 보내 제 점포에 오물을 뿌리게 했습니까?”사옥현은 흠칫하더니 이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계연수는 사옥현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당황하긴 했어도 어리둥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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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냉담한 말을 내뱉는 계연수를 보고 사옥현은 당황한 듯, 눈빛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가 바라던 쓸쓸하고 상처입은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떠난 계연수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 장담했다.그녀처럼 온순한 성격에 중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까지 둘이 고씨 저택에 신세를 지는데 생활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소박한 차림새를 하고서도 그녀의 눈빛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그녀는 마치 정말로 그가 어떻게 되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그렇지만 명유를 모함한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겁도 많고 여린 명유가 나를 해쳤을 리가 없지.’그의 곁에 남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온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이명유가 어떻게 그에게 불임약을 먹였겠는가.그는 서역 상인의 말을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그러나 계연수가 다른 의원에게 진맥을 받아보라고 한 말은 외할머니인 사씨 노부인도 그에게 같은 말을 한 바가 있었다.그를 진찰한 의원은 평소 이명유를 돌보던 의원이긴 하지만 그와도 잘 아는 사이였고 온 집안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믿음직한 의원이니 틀렸을 리가 없었다.그는 냉랭한 눈으로 계연수를 노려보며 말했다.“어의를 찾아가서 진찰을 받을 것이지만 만약 내 몸에 문제가 없다면, 명유를 모함한 네 죄를 반드시 추궁할 것이다.”계연수도 지지 않고 사옥현을 노려보며 말했다.“서역 상인이 제가 시켰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이것도 나으리 스스로 추측한 것입니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 저를 괴롭힌다면 다시 도찰원을 찾아가서 무고죄로 고발할 것입니다.”“제가 간절히 원했고 수많은 노고를 들여 마침내 당신과의 연을 끊어내고 사씨 가문에서 해방되었는데 제가 고작 이명유를 모함하겠다고 당신들과 또 엮이겠습니까?”“나으리,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군요. 이제 우린 남남이고 저는 되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벼락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 그 집에 발을 들일 일은 없어요!”사옥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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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약방에서 나와 처소로 돌아온 계연수는 짐정리를 다시 확인했다. 내일 아침 바로 떠나야 하니 어떤 차질도 없어야 할 것이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계연수는 약봉지를 용춘에게 맡긴 후, 고씨 노부인의 처소로 가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노부인의 처소에서 나온 그녀는 또 큰 외숙모와 둘째 외숙모의 처소를 찾아가 그동안의 감사의 표시로 장미차와 향유를 선물했다.둘째 부인 유씨는 내일 당장 떠난다는 계연수의 말에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왜 이리 급하게 가려고 하느냐? 네 어머니는 몸도 안 좋은데 며칠 더 있다가 가지.”계연수는 웃으며 말했다.“그쪽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도 빨리 떠나기를 원하셨어요. 어머니는 일찍 출발하여 그쪽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유씨는 한숨을 내쉬며 안쓰러운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그녀는 전보다 살도 많이 빠지고 피곤해 보여서 더욱 안타까웠다. 유씨는 계연수가 급히 떠나고자 하는 이유가 고씨 집안에 더 이상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라는 것을 알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계연수의 손을 꼭 붙잡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거기 가면 꼭 서신을 보내거라. 나중에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오고. 나는 네가 여기 더 있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집안에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계연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외숙모 마음은 제가 잘 알죠. 걱정 마세요. 그곳에 가면 꼭 서신을 써서 보낼게요.”유씨는 그제야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유씨의 처소를 나온 계연수는 큰 외숙모인 장씨의 처소에도 방문했다. 장씨는 계연수가 내민 선물을 받고는 그녀가 내일 떠난다는 말에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러더니 평소와는 다르게 살가운 말투로 말했다.“준비는 다 되었느냐? 필요한 게 있으면 외숙모에게 말하거라.”계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모든 준비는 끝났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장씨는 어차피 해본 말이었기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네가 준비성 있는 건 내가 알지. 혹시라도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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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고준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장씨가 급히 말했다.“네가 무슨 시간이 있다고?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네가 나설 필요가 뭐가 있다고. 국자감엔 안 나가니? 너 아니라도 고준도 몸이 다 나았으니 관직도 없는 그 애가 가는 게 낫지.”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고준안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오라버니, 공무가 중요하지요. 마차도 미리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고준안은 주먹을 꽉 쥐고 계연수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처소로 바래다주마.”계연수는 다급히 거절했다.“그럴 필요 없으세요. 어차피 멀지도 않은데요.”하지만 고준안은 고집스럽게 계연수의 곁으로 다가갔다.“나도 밖에 나가봐야 하니 같이 가자꾸나.”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계연수는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씨에게 예를 행했다.장씨는 계연수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충격에 빠진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20년을 공들여 키운 사려 깊고 자랑스러운 아들인데 지금 이 순간은 아들의 속을 알 수 없었다.비록 고준안이 장씨의 앞에서 계연수의 얘기를 꺼낸 적은 없지만 조금 전 계연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동생을 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내가 은애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장씨는 매번 계연수가 처소로 올 때마다 언제나 핑계를 대고 나타나던 고준안을 떠올렸다. 그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소름이 돋았다.장씨는 나가려는 계연수와 고준안을 바라보다가 언성을 높여 아들을 불러세웠다.“준안이 넌 남거라. 내 네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준안은 싸늘한 얼굴로 어머니를 돌아보고는 말했다.“어머니, 이따가 얘기하세요.”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또 불러세울까,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대문을 빠져나갔다.장씨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실망감과 불안함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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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계연수는 지난번에 외할머니로부터 고준안의 생각을 들은 이후로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고 있었다.그 벼루는 어머니를 돌봐준 것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아서 준 선물이고 더 이상 그의 호의를 그냥 받을 수는 없었다.그녀는 다급히 손을 내밀어 상자를 다시 그의 손에 쥐여주고는 말했다.“오라버니는 앞으로 크게 되실 분입니다. 그러니 장차 은자가 들어갈 일도 많겠지요. 지금 고씨 집안 사정을 뻔히 알면서 오라버니께 뭘 더 받을 수는 없어요.”“그동안 어머니를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벼루는 제가 오라버니께 드리는 감사의 선물이니 받아주시고 이건 도로 가져가 주세요. 안 그러면 제가 죄송스럽습니다.”고준안의 손끝이 순간 굳었다.돌려서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명확했다.그저 감사의 의미만 있을 뿐, 다른 감정은 없다는 뜻이었다.선을 긋고 거리를 두려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하지만 고모를 돌봐드린 것은 그녀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어릴 때부터 계연수를 좋아했고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그녀의 순수하고 맑은 눈이 좋았고 온순하고 가녀린 모습이 좋아서 보호욕구를 자극했다. 어렸을 때 어려움에 부딪치면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에게 계연수는 잘못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병처럼 나약해서 소중히 보호하고 싶은 존재였다.이 세간에 그보다 더 그녀를 걱정하고 아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를 자신의 품에 거두고 비바람을 막아주고 싶었다.하지만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항상 그의 마음을 몰라주었다.고준안은 열어보지도 않은 상자를 꽉 쥐었다.그러고는 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말했다.“그래, 알겠다.”혜란원과 서원으로 향하는 교차로에 도착하자, 계연수는 고준안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고준안은 서글픈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연수야, 거기에 도착하면 서신은 보낼 거지?”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아쉬움과 서글픔이 가득 담긴 고준안의 눈을 바라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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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원본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자 계연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그림을 조심스레 상 위에 펼쳐놓고 그림 속 산과 들, 그리고 폭포수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아버지가 그렇게 찾던 그림이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의 손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그것도 심서준이 선물한 거라니.창밖에서는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데 실내는 조용했다. 계연수는 조용히 눈앞의 그림을 바라보며 예쁜 눈에 은은한 아쉬움이 스쳤다.결국 그녀는 심서준과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가장 감사한 사람이었다.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도 사씨 가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심연에서 허우적댔을 것이다.그녀는 조용히 그림을 감상하다가 용춘이 짐정리를 마치고 돌아오자 천천히 그림을 말아 상자에 넣었다.그러다 문득 그 귀걸이가 떠올랐다.심서준은 그녀에게 버리라고 했는데 그렇게 귀한 것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귀걸이가 어떻게 그림 속에 감추어져 있었는지, 심서준은 그걸 알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하지만 말투를 들어보니 아마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버리라고 한 게 의아했다.침상으로 다가간 계연수는 베개 밑에서 귀걸이를 꺼내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맑은 초록빛을 띄는 비취옥이 무척이나 어여뻤다. 버리기엔 아까웠다. 점포에 가져다 팔면 꽤 값어치가 나갈 것이다.그녀는 지금 대량의 은자가 필요했다. 휘안현에 가서 어떻게 될지 아직 미지수이고 둘째 삼촌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쪽에서 서화관을 차리려면 적지 않은 은자가 들어갈 터였다. 그래도 그녀는 아버지가 늘 그리워하던 곳으로 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그러나 정작 귀걸이를 전당포에 가져가려니 자기 물건도 아닌데 심서준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그녀는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며 한참을 고민했다. 심서준이 딱히 신경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에 중요한 물건이었다면 돌려주겠다고 했을 때 버리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니 죄책감이 좀 줄어들었다.어차피 계연수 본인은 이렇게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다닐 형편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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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계연수를 이곳으로 데려와 심서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계연수라면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른다.하물며 심서준이 누구인가. 하늘에 걸린 달처럼 고상하신 분이고 경성의 모든 사람들이 앞다투어 잘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또한 철두철미하고 차가운 사람이라 그의 주변에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던 여인은 계연수뿐이었다. 이는 그의 심복으로 삼 년을 지내면서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문하는 홀로 술을 마시는 그가 안타까워 아래층으로 가서 해장약이라도 사오려고 나왔다가 용춘과 마주친 것이다.그는 자신을 본 순간 눈에 띄게 당황하는 용춘을 보고 의구심이 들었다.날도 어두워졌고 내일 떠난다는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용춘은 잔뜩 굳은 얼굴로 문하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급히 뒤돌아섰다. 문하는 서둘러 용춘의 뒷덜미를 잡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어딜 그리 급히 갑니까?”용춘의 손에는 심서준의 귀걸이가 들려 있었다. 막 귀걸이를 전당포에 팔러 가는 길인데 심서준의 심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죄 지은 느낌이었다.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문하를 보고 심서준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하며 긴장을 풀었다.“떡 좀 사려고 나왔습니다.”문하는 아까 떡을 사러 나왔던 것 같은데 이 어두운 밤에 또 나온 것이 이상해서 물었다.“계 소저는 어디 계십니까?”만약 계연수도 같이 있다면 그녀를 데리고 올라가서 심서준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용춘이 다급히 답했다.“아가씨는 집에 계십니다.”문하는 아쉽다는 듯이 웃고는 용춘을 놓아주었다.용춘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하가 조용히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문하는 혹시 계연수가 진짜 함께 나오지 않은 것인지, 용춘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따라온 거였다.그는 용춘의 뒤를 따라가다가 전당포로 들어갔다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목격했다.용춘이 멀리 간 후, 그는 전당포로 들어가서 용춘이 뭘 팔았는지 물었다.전당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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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문하는 조심스럽게 심서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술냄새가 진하게 진동했다. ‘정갈함을 가장 중시하던 분이었는데….’문하는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그 시녀만 나오고 계 소저는 저택에 계신 듯합니다.”얘기를 들은 심서준의 눈빛에 냉기가 돌았다.문하는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시녀가 전당포로 들어가길래 뒤따라가서 물어보았는데 귀걸이 한쌍을 저당 잡혔다고 하더군요.”문하가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심서준이 저당 잡힌 귀걸이를 다시 회수해서 자연스럽게 계연수를 만나러 가기 위한 핑계를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어쩌면 계연수가 보고 감동하여 이곳에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문하는 속으로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웃고 있었지만 한참이 지나도 심서준은 말이 없었다.조심스레 고개를 드니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안 그래도 인간미 없고 냉혹한 인상의 사람인데 인상을 쓰고 있으니 그 위압감은 배가 되었다. 예전에 도찰원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보던 표정이었다.문하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계속 되짚었다.잠시 후, 심서준이 차갑게 말했다.“가서 회수하거라.”문하는 다급히 전당포로 달려가 은자를 주고 귀걸이를 받아왔다.그는 두 손으로 귀걸이가 든 상자를 받치고 바짝 긴장해서 심서준의 앞으로 다가왔다.이럴 줄 알았다면 괜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심서준은 상자에 든 귀걸이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계연수를 위해 신경 써서 고른 옥석에 그가 직접 도안을 그린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 정성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일까.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가슴은 칼에 베인 것처럼 아팠다. “저당을 잡힌 것이냐, 아니면 팔았다고 하더냐?”심서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쥔 채로 물었다.그는 오늘처럼 자신이 우습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리도 매정하게 그의 정성을 짓밟았는데도 그는 여전히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었다.문하는 심서준의 눈치를 살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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