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연애 끝에, 강도겸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하며 소정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소정은은 싸우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짐가방을 차분히 정리하고, 도겸이 마련해준 천문학적인 이별 수당을 받아든 채 과감히 떠났다. 도겸의 친구들은 익숙한 내기를 걸었다. 과연 이번에는 소정은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J시에서 소정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강도겸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존심도, 분노도 없는 사랑, 그들이 알고 있는 소정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생각했다. 사흘 안에 돌아와 사과할 거라고. 하지만 사흘이 지나고, 또다시 사흘이 지나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결국 도겸이 먼저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가 처음으로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넌 이제 그만 장난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만하면 돌아와...”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뜻밖의 낮은 남자의 웃음소리였다. “대표님,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이별을 후회해도 어쩔 수 없죠.” “정은을 바꿔줘, 걔랑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죄송하지만, 제 여자친구는 지쳐서 방금 잠들었어요.”
View More전화기 너머, 전해산 교수가 기묘하게 조용해졌다.진욱은 순간 신호가 끊긴 줄 알고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확인했다.‘아니네...’통화는 멀쩡히 이어지고 있는데, 말이 없는 건 전해산이었다.“형? 아직 계세요?”잠시 후, 전해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너 방금, 정은이가... 조재석의 학생이었던 전 여자친구라고 했냐?]“네. 두 사람 몇 년 동안 사귀었어요. 그러다... 뭐, 여러 가지 오해 때문에 헤어졌죠.정은이가 이번에 호주 간 것도 그즈음이고요. 정은이가 형한테 얘기 안 했어요?”전해산은 대답 대신 긴 침묵으로 일관했다.진욱은 몇 초 더 기다렸고, 그제야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알았다. 이따 얘기하자.]뚝-통화가 끊겼다.진욱은 멍하니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소리쳤다.“세상에! 설마 형이 지금까지 정은이랑 재석 관계를 몰랐던 거야? 그래서 재석이 섬에 들어와 정은이 붙잡으려는 걸, 연구팀 전부가 그냥 ‘바람둥이’라고 생각한 거냐고?!”미연은 곰곰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그러자 옆에서 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아빠, 바람둥이가 뭐야?”진욱은 딸의 질문에 대답 대신 이마를 짚었다....맥스 군도, 작은 건물 안.주광빈 교수는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전해산 교수를 발견했다.전해산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전 교수님, 설마 갑자기 여기서 망부석?”“말 시키지 마세요. 지금은 충격 완화 중입니다.”주광빈은 물을 따라 마시며 옆으로 다가갔다.“뭔 일인데 그래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에게 영혼을 빼앗기기라도 했어요?”전해산이 고개를 저었다.“그것보다 더 센 것 같습니다.”큰숨을 몰아쉬며, 전해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혹시 조재석 교수님 전 여자친구가 누군지 알아요?”“학생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아는데. 온 학교가 아는 사실인데 왜요?”“맞아요. 전 여자친구가 학생이라는 건 우리도 알았죠.”전해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근데 왜
“엥? 우리 형이 먼저 카톡을 보내다니, 이거 진짜 드문 일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진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에는 늘 자기가 먼저 전해산에게 안부를 묻는 처지였고, 그나마 전해산이 마지못해 두세 마디 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전해산이 먼저 연락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예전, 재석이 호주로 떠나기 전에는 진욱이 거의 매일 카톡을 보냈다. 은근슬쩍 정은의 근황을 캐묻느라,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들이댔다.하지만 재석이 떠난 뒤로는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어서, 진욱도 연락을 그만뒀다.그런데 오늘, 카톡 창에 뜬 첫 미확인 메시지를 열어본 순간...[진욱아, 물어볼 게 있는데. 조재석, 혹시 바람둥이 아니냐?]진욱은 얼이 빠졌다. 상대방이 답이 없자, 전해산은 반 시간 뒤에 또 보냈다.[말하기 곤란하지? 알지, 조재석이 너희 실험실 책임자잖아. 걱정 마, 진짜 안 새 나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나랑 너만 아는 거야! 조재석은 절대 모른다!][믿어봐, 형을!]그로부터 또 30분 뒤...[진짜야, 겁내지 마!][차라리 이모티콘으로만 답해도 돼!][바람둥이면 ‘Y’, 아니면 ‘N’!]또다시 삼십 분 후...[아 맞다, 오늘 토요일이지. 아직 자나 보다...][일어나면 꼭 답해라!][...]진욱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곁에서 미연이 고개를 내밀었다.“뭐야, 당신 표정 왜 그래? 대체 뭐라고 온 거야? 나도 보자.”진욱은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건넸다.잠시 후, 미연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 교수님이 바람둥인지 아닌지? 이게 무슨 질문이야?”진욱은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했다.미연은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뭐가 어려워. 그냥 솔직히 물어보면 되잖아.”진욱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 창에 손가락을 올렸다.그리고 조심스레 한 줄을 입력했다.[방금 일어났어요.]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산의 답장이 날아왔다.[드디어 깼구나! 자, 이제 말해봐!]진욱의 입술이 씰룩거
전진욱은 한번 시원하게 하품을 내뱉고, 곤히 잠든 딸아이가 배 위에 올려놓은 다리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옆을 보니 딸은 천사 같은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고, 아내 서미연은 이불 밖으로 어깨가 반쯤 드러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진욱 마음속에 벅찬 충만감이 밀려왔다.‘처음에 대체 왜 그렇게 쉽게 이혼에 동의했던 걸까?’‘괜히 세월만 날려버렸잖아...’그 탓에 그는 딸이 젖 달라고 칭얼대는 모습도, 옹알이를 시작하던 순간도, 기어다니던 시절도, 첫걸음을 떼던 날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장면도 전부 놓쳤다.후회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진욱은 원래 큰 욕심을 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다시 아내와 딸을 곁에 두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사치였다.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한 순간... 벌써 정오였다.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치고 잔 탓에 세상이 깜깜한 줄만 알았다. 덕분에 그는 주말 낮잠 수준을 넘어서, 늘어지게 오전까지 푹 쉰 셈이었다.다행히도 오늘은 실험실 출근이 없는 휴일이었다.재석이 호주로 간 뒤로, 진욱의 고생길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연구 과제 전체의 진행을 책임져야 했고, 후배 연구원들의 성장을 챙기는 것도 그의 몫이 되었다.게다가 학회 발표, 업계 미팅, 국제 컨퍼런스 요청이 쉴 새 없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고, 그 일정이 마구 쏟아졌다.예전에는 재석이 앞에서 모든 걸 막아주었기에, 그는 다른 연구원들과 마찬가지로 연구에만 집중하면 됐다. “진짜, 강제로 업그레이드 당한 셈이지.”진욱은 항상 혼자 이 말을 반복했다.거기다 그는 서비대에서 전공 수업까지 맡고 있었다. 올가을 학기에는 대학원생 두 명이 새로 배정돼, 두 학생의 지도교수 역할까지 떠안았다.마흔을 넘긴 나이에, 더 여유로워질 줄 알았건만 진욱의 삶은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아내 서미연은 그런 남편을 보며 종종 농담을 건넸다.“전
정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조재석 씨, 잘 들어요. 난 내가 원하지 않으면, 당신이 내 앞에서 죽는다 해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요.”“정은아...”“난... 충분히 고민했어요.”정은은 재석의 눈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우리... 다시 시작해요.”재석의 눈가가 단번에 붉어졌다. 이 말은 분명 자신이 먼저 꺼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고, 거절당할 각오까지 했었다.“미안해요.”정은은 두 손으로 재석의 얼굴을 감싸며 속삭였다.“그동안 내 마음이... 좀 흔들렸어요.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몰라요.”“당신은 일도 있고, 가족도 있으니, 나 혼자 감당하면 돼요. 굳이 당신까지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요.”정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런데... 재석 씨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순간 후회했어요. 내 맘대로 끝내 버린 건, 내겐 단호한 정리였을지 몰라도, 당신에겐 깊은 상처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재석 씨, 잘 봐요. 난 이렇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고, 차갑기까지 한 사람이에요. 난 늘 내가 할 일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해요. 그래도... 그래도 나랑 다시 시작할 건가요?”재석은 조심스레 정은의 손을 잡아, 자기 손바닥 안에 꼭 감쌌다.그리고 마치 간절히 기도하는 신도처럼,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인을 우러러보았다.“사랑해. 정은이가 이기적이어도, 제멋대로여도 상관없어. 당신이 하고 싶은 건 다 해. 난 언제나 네 선택을 지지할 거야. 설령 그 선택이... 나랑 헤어지는 거라도.”“재석 씨...”정은은 재석의 말에 놀라서 숨이 막히듯, 목소리가 떨렸다.“그러지 마요... 난 그런 사랑 받을 자격 없어...”“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남이 판단할 일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택한 거야. 내 마음이 원해서.”‘사랑이 깊어지면, 이렇게 낮아질 수도 있구나.’예전엔 정은이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지금의 재석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그는
정은은 눈앞의 재석을 조용히 바라보았다.두 사람이 구조된 이후로, 재석은 단 한 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던 순간에 그 약속을 언급했다.살아만 있다면, 단 한 번의 기회를 달라고.하지만 정은이 처음 그 말을 회피했을 때 이후로, 재석은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정은아?”“네?”정은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돌렸다.“무슨 생각해?”정은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아무것도요.”재석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보였다.그리고 몇 초 후, 다시 고개를 들어 정은을 똑바로 바라봤다. 표정은 단호하고 진중했다.“정은아, 그때 지하도에 갇혔을 때 내가 했던 말... 굳이 마음에 두지 않아도 돼.”정은은 뜻밖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재석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실은 나도 생각했어. 끝까지 밀어붙여서 네 대답을 받아내야 하나 싶어서. 사람들이 그런 얘기 하잖아, 쓴 열매도 열매고, 달든 쓰든 먹어봐야 안다고...”자신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재석은 곧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하지만 그 열매를 내가 따먹는 것보다, 네 마음이 더 중요해. 난... 네가 부담을 느끼거나, 그 때문에 불행해지는 건 원치 않아.”재석은 누구보다 정은을 잘 알고 있었다.조금 더 시간을 두고 다가간다면, 언젠가는 정은이 고개를 끄덕일 거라는 것도.정은은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석은 그 약속을 빌미로 옛 연인에게 무리하게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다.정은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정말 괜찮아요? 내가 그 약속... 안 지켜도 된다고요?”재석의 눈가가 붉어졌다.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아쉬움, 안타까움, 고통... 그러나 무엇보다 강하게 비치는 건, 꾹 눌러 담은 인내였다.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지라도, 재석에게 가장 소중한 건, 정은 그 자체였다.“그래. 괜찮아. 내린 결정이야. 후회도 없어.”그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현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 궁금한 게 있는데. 조 교수가 그렇게 큰소리치던 정은이와의 ‘재결합’은... 이루어졌어?”“아, 아니구나.”현빈은 드물게 우위를 점한 듯,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있는 재석을 한 번 훑어보곤 말했다.“나, 내일 떠난다.”재석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그 눈빛은 뭐지?”“좀... 믿기지 않아서요.”재석의 솔직한 대꾸에 현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떠나고 싶겠어?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가는 거지. 솔직히 나도 정은이 옆에 붙어서 단 하루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어? 나도 못 하는 건, 조 교수는 더더욱 안 되지.”현빈의 말투엔 비아냥이 섞였지만, 사실관계를 바꾸지는 않았다.정은은 본디 곁에서 누가 붙어 있는 걸 불편해하는 성격이었다.“말은 좀 곱게 하시죠.”재석이 받아쳤지만, 그의 표정엔 반박할 힘이 없었다.“오늘 오신 건... 작별 인사차?”“주된 목적은 조 교수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온 거라고.”“걱정 마세요. 저 오래 살 겁니다. 심 대표님께 기회 같은 건 절대 안 줄 테니까.”현빈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정말로 병문안 겸,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온 듯했다....다음 날 아침.정은은 현빈과 도균성 일행을 바닷가까지 배웅 나갔다.도균성과 몇몇은 먼저 배에 올랐고, 현빈은 잠시 부두에 서서 정은을 바라봤다.“오빠, 혹시 하실 말씀 있어요?”“응.”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을 바라보는 눈빛엔 웃음이 담겨 있었지만, 그 아래엔 말로 할 수 없는 아쉬움과 미련이 감춰져 있었다.“정은아, 너 그 사람... 너무 쉽게 용서하지 마.”정은은 순간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하지만 현빈은 더는 그녀의 반응을 보지 않았다. 그저 단호하게 돌아서 배에 오를 뿐이었다.연구팀에 있는 건물로 돌아오자마자, 정은은 전해산 교수를 마주쳤다.“정은아, 심 대표 떠났지?”“네.”“그래. 아, 참. 내가 방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