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뉴럴링크 대표실.
김 비서가 급히 들어와 서류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대표님, 싱가포르 아시아벤처캐피털에서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습니다."재혁이 서류를 펼쳐 들었다.예정에 없던 긴급 일정이었다.뉴럴링크의 대규모 해외 투자와 직결된 중요한 회의.거절할 수 없는 자리였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출장 일정이 적힌 문서보다 책상 한쪽에 놓인 작은 초대장에 오래 머물렀다.행복나무 보육원 성탄 발표회.그리고 그 아래 적힌 날짜."..."머릿속에는 싱가포르의 마천루 대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주연의 미소가 떠올랐다.한동안 말없이 초대장을 바라보던 재혁은 천천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잠시 망설인 끝에 주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휴대전화가 울리자 주연은 무심코 화면을 바라봤다.최재혁.그 이름을 보는 순간 이유도 모른 채 심장이 크게 뛰었다."여보지민의 가벼운 농담 덕분에 생각보다 편안하게 시작된 저녁이었다. 처음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지민은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다. 이경환에게 민성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를 가볍게 만나고 술집을 자주 드나들며,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반대로 하는 아들. 마음대로 살아온 철없는 남자. 이경환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민성은 대략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민성은 달랐다. 적어도 오늘 자신에게 보여준 모습만 놓고 보면 그랬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자신이 도착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 대화하는 동안에도 무례한 농담이나 불편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억지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을 들켰다고 생각했을 때는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지민은 그런 민성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이경환 사장님이 아들을 너무 안 좋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 물론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의 민성은 이경환이 말했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 그 여자가 나타난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민은 물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며 맞은편의 민성을 바라보았다. 민성은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몸만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시선은 계속 레스토랑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민은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조금 전 들어온 두 여자 중 한 사람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여자. 화려하지도, 특별히 눈에 띄는 차림도 아니었다. 하지만 민성이 그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나 분명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깊은 애정. 지민은 여자인 자신이 그 눈빛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저 여자구나.’ 민성이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
주연은 몇 걸음 앞서가다 지혜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혜야?” 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에서 주연의 옷을 골라주며 웃고 떠들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저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연은 지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멈칫했다. “어……?” 창가 쪽 테이블. 민성이 앉아 있었다. 한쪽 팔에는 아직 깁스를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단정한 모습이었다. 짙은색 정장에 말끔하게 정돈한 머리.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주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자에게 향했다.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여자였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와 분위기가 평범한 친구 사이의 저녁 식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설마…….’ 주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마치 격식 있는 선을 보는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질적이었다. 선 자리인가? 주연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으로 빠르게 지혜의 얼굴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 쇼핑을 하며 모처럼 옅은 웃음을 띠던 지혜의 얼굴에서 핏기와 웃음기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 충격과 허탈함이 엉킨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연의 가슴이 다 아려왔다. 그 순간 민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혜와 시선이 마주쳤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주연에게도 보였다. 민성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그 역시 지혜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주연은 다시 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혜야.” “…….” “그냥 나갈까?” 지혜가 그제야 주연을 바라봤다. “왜?” “다른 데 가자.” “아니야.” “너 아직 몸도 안 좋은데 굳이 여기서 먹을 필요 없잖아.” 지
식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다. 지민은 민성이 예상했던 것보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업은 처음부터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지민의 질문에 민성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니요.” “그럼요?” “처음에는 그냥 아버지 일을 하기 싫어서 시작했습니다.” 지민이 조금 놀란 듯 바라봤다. “아버님 사업을 이어받기 싫으셨어요?” “네.” 민성의 대답은 짧았다. 그 표정을 본 지민은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회사가 잘 됐잖아요.” “운이 좋았죠.” “운만으로 그렇게 큰 회사를 만들 수 있나요?” 민성이 지민을 바라봤다. “저를 칭찬하시는 겁니까?” “칭찬받는 거 싫어하세요?” “아니요. 좋아합니다.” “솔직하시네요.” “제가 원래 솔직합니다.” 지민이 웃었다. “그건 조금 더 만나봐야 알겠는데요?” 민성이 피식 웃었다. “박지민 씨도 생각보다 말 잘하시네요.” “그것도 칭찬으로 받을게요.”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민성은 지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분명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한 기대를 갖게 해서는 안 된다. 오늘 자신은 이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이 관계를 정리하러 온 것이었다. ‘식사 끝나기 전에 말하자.’ 민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지민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민성 씨.” “네.” “혹시 오늘 억지로 나오셨어요?” 민성의 손이 잠깐 멈췄다. 지민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제가 너무 정확하게 맞혔나요?” “티가 났습니까?” “조금요.” 민성이 난처한 듯 웃었다. “미안합니다.” “왜 미안하세요?” 지민은 잠시 민성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괜
약속 시간보다 십 분쯤 일찍 레스토랑에 도착한 민성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민성 고객님 맞으시죠?” “네.” “예약하신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레스토랑 안은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재즈 선율로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민성은 자리에 앉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빌딩 사이로 수많은 불빛이 반짝였고, 도로 위 차량의 붉은 후미등이 긴 띠처럼 이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꽤 신경 써서 예약한 자리였다. “참…….” 민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이경환의 전화가 다시 떠올랐다.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제대로 입고 나가. 괜히 네 평소 버릇대로 건들거리지 말고.’ 처음에는 그 말에 반감이 들어 일부러 평소 즐겨 입던 화려한 정장을 입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옷장 앞에서 마음을 바꿨다. 오늘 만나는 박지민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자신은 이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온 자리였기에, 상대방에게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짙은 밤색 정장에 차분한 셔츠를 골랐다. 민성은 자신의 옷깃을 한번 정리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 자리에 나오면서도 자신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여자가 떠올랐다. 김지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더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민성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만하자, 이민성.”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싫다는데 뭘 더 어떻게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은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 그때 직원이 다가왔다. “고객님, 일행분 오셨습니다.” 민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직원 뒤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박지민이었다. 민성의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을 나섰을 때는 어느새 저녁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 봄으로 향하는 저녁 공기는 아직 서늘했지만, 한겨울처럼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었다. 거리에는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퇴근길 차량의 붉은 후미등이 길게 이어졌고, 백화점 앞에는 주말 저녁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였다. 주연은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옆에서 걷는 지혜를 힐끗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 집을 나설 때보다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힘들지 않아?” “괜찮아.” “진짜?” “응.” 지혜가 작게 웃었다. “오히려 나오니까 좀 살 것 같아.” 주연은 그제야 안심한 듯 웃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계속 누워만 있으면 안 된다니까.” “누가 아까 절대 못 나간다고 했더라?” “그건 네가 오늘 퇴원했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나오길 잘했지?” 주연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했어.” 오늘 몇 시간 동안만큼은 지혜가 민성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주연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고프지?” 지혜가 배를 가볍게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랜만에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오늘은 죽 말고 제대로 된 거 먹자.” “그 말 기다렸어.” “뭐 먹고 싶어?” 지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지난번에 갔던 레스토랑 어때?” “거기?” “응. 음식 괜찮았잖아. 조용하기도 하고.” 주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내가 살게.” 지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야지. 오늘 내가 옷을 몇 벌이나 골라줬는데.” “많이 먹어. 오늘은 먹는 것까지 내가 감시할 거니까.” “무서워서 살겠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차가운 저녁 공기 속으로 가볍게 흩어졌다. 주연은 지혜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재혁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던 민성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민성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아버지. 민성은 받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오늘 지민이랑 만나기로 했다는 얘기 들었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가는지 알 바 아니지만, 내 얼굴에 먹칠할 짓은 꿈도 꾸지 마라. 옷차림도 똑바로 정중하게 갖춰 입고 나가서 예의를 지켜.” 나름대로는 아들을 향한 걱정이 뒤섞인 잔소리였다. 하지만 민성의 귀에는 그 모든 말이 지독한 억압이자 숨통을 조이는 족쇄로만 들렸다. "……알아서 할 테니까 끊어요." “저 서른 넘었습니다.” “알아.” “그런데 옷까지 아버지한테 검사받아야 합니까?” “네가 평소에 하는 꼴을 아니까 하는 소리야.” 민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박 선생 딸이다. 괜히 네 평소 버릇대로 건들건들 굴지 말고 예의 갖춰.” “제가 언제 예의 없이 행동했다고요?” “내가 널 하루 이틀 봤어?” “아버지.” 민성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휴대전화를 노려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옷을 어떻게 입고 나가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냐.” 재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버님이 신경 많이 쓰시는 모양인데?” “신경?” 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양반한테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아들 하나 어떻게든 정착시키려는 거겠지.” “그래도 오늘은 제대로 갖춰 입고 가라.” 민성이 재혁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너까지 왜 이래?” “아버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된다며.” “최재혁, 너 재미있냐?” “조금.” 민성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사무실을 나서려다 잠시 멈췄다. 조금 전 재혁이 하려다 만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아까.” 재혁이 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