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4월 27일 저녁 여섯 시. 하르트 백작가.
성녀 순회는 한 달에 두 번이었다. 귀족 집에 가서 축복하고 저녁을 먹는다. 비서 사제 종이에는 「귀족 가문 축복 순회」라고 적혀 있었다. 오렌 사제는 「헌금 걷으러 가는 날」이라고 불렀다.
하르트 백작가는 왕도 북쪽 언덕에 있었다. 왕성 바로 아래. 정원에 분수가 셋. 현관에 대리석 계단 열두 칸. 하인이 스무 명쯤.
성녀가 마차에서 내렸다. 하얀 옷. 오늘은 금실 띠를 둘렀다. 비서 사제가 매어 준. 그리고 신발. 하얀 비단 신. 대주교 명이었다. 「귀족 집 대리석에 맨발 자국을 남기면 안 된다.」
성녀가 대리석 계단을 올랐다. 비단 신이 미끄러웠다. 성녀가 한 칸 오를 때마다 발끝에 힘을 줬다. 카일은 세 걸음 뒤에서 그걸 봤다. 맨발로는 하수 돌계단 이끼도 안 미끄러지던 사람이.
연회장은 넓었다. 샹들리에 셋. 긴 탁자 둘. 귀족이 마흔 명쯤. 다들 성녀가 들어오자 일어섰다. 몇은 무릎을 굽혔다. 몇은 고개만 숙였다. 몇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녀 신발을 봤다.
하르트 백작이 나왔다. 쉰쯤. 배가 나왔고 웃음이 컸다.
“성녀님! 영광입니다. 저희 집에 신의 빛을!”
성녀가 손을 들었다. 소매 안에서 인광 가루. 손바닥 위에 빛이 피었다 꺼졌다.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성녀는 손을 내리고 소매를 털지 않았다. 카일은 연회장 대리석 바닥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은 걸 확인했다. 오늘은 소매 안쪽에 천을 덧대 온 모양이었다.
†
축복은 짧았다. 백작 부부, 아들 둘, 딸 하나. 성녀가 차례로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백작 딸 차례였다. 이졸데. 열일곱. 하얀 얼굴. 정말로 하얬다. 분을 두껍게 발라서. 입술은 빨갰다. 연지.
성녀가 이졸데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멈췄다.
카일은 성녀 손을 봤다. 이졸데 머리 위에서 멈춘 손. 그리고 성녀 얼굴. 성녀가 이졸데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가까이. 코끝을 조금 움직였다. 냄새를 맡는.
“손 좀 볼게요.”
성녀가 말했다. 축복 대신.
이졸데가 어리둥절해서 손을 내밀었다. 성녀가 이졸데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위로, 손가락을 펴고. 이졸데 손가락이 떨렸다. 가늘게. 쉬지 않고.
“언제부터 손이 떨려요?”
“…네?”
“손. 떨려요. 언제부터예요?”
이졸데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떨리는 손. 처음 본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겨울부터요. 근데 다들 그래요. 추워서.”
“배 아파요? 밥 먹고 나서.”
이졸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머리도 아프고요. 잇몸에 파란 줄 있어요?”
이졸데가 입을 막았다. 손이 떨렸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백작 부인이 일어났다.
“성녀님, 축복을 해 주시면—”
성녀가 이졸데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볼에 손가락을 댔다. 분이 묻어 나왔다. 하얀 가루. 성녀가 그걸 엄지로 비볐다.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이졸데에게 말했다. 연회장 사람들이 다 들리게.
“얼굴에 바르는 하얀 분, 오늘부터 끊으세요. 납이 들어 있어요. 손 떨리고 배 아프고 잇몸 파래지는 거, 다 그거예요. 우유 많이 드시고, 분 대신 쌀가루 쓰세요.”
연회장이 술렁였다. 귀부인 몇이 자기 볼을 만졌다. 하얀 손가락.
백작 부인 얼굴이 하얘졌다. 분 때문이 아니라.
“…성녀님. 그 분은 남쪽 바다 건너에서 온 겁니다. 왕비 전하께서도 쓰시는.”
“그럼 왕비님한테도 말씀드리세요.”
성녀가 이졸데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이졸데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번엔.
“축복합니다.”
†
저녁 식사는 조용했다. 아주.
긴 탁자. 귀족들이 칼질하는 소리. 웃음이 없었다. 하르트 백작의 큰 웃음도. 백작 부인은 식사 내내 성녀를 보지 않았다. 이졸데는 자기 접시를 보고 있었다. 가끔 자기 손을 봤다.
성녀 자리는 탁자 상석. 백작 옆. 성녀 접시에 오리 가슴살, 송아지 고기, 버섯 파이, 흰 빵, 무화과. 기사단 한 달 식비였다.
성녀가 칼을 들었다. 오리를 한 조각 잘라 먹었다.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탁자 아래에서 무엇을 꺼냈다. 무릎 위 냅킨. 오늘은 큰 냅킨이었다. 연회 냅킨.
카일은 연회장 벽 쪽에 서 있었다. 호위는 식사 자리에 앉지 않는다. 성녀 뒤 세 걸음.
성녀가 송아지 고기 반을 냅킨에 쌌다. 버섯 파이 한 조각. 빵 둘. 무화과 셋. 그리고 접시 옆 소금 그릇에서 소금을 한 꼬집 집어 냅킨 귀퉁이에 따로 쌌다.
손이 빨랐다. 귀족들은 자기 접시를 보고 있었다. 이졸데 얘기 뒤라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성녀 손을 보는 사람은 카일밖에 없었다.
아니었다.
탁자 맞은편. 늙은 자작 부인 하나가 성녀 손을 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려고 했다.
카일이 움직였다.
세 걸음 앞으로. 성녀 의자 뒤. 망토를 펼쳤다. 회색 망토가 성녀 등과 의자를 덮었다. 그리고 탁자 아래로 늘어졌다. 성녀 무릎 위의 냅킨까지.
“성녀님, 바람이 찹니다.”
카일이 말했다. 연회장 창문은 다 닫혀 있었다.
성녀가 고개를 들어 카일을 봤다. 아주 잠깐. 그리고 망토 아래에서 냅킨 꾸러미를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늙은 자작 부인이 카일을 봤다. 망토를 봤다. 입을 다물었다. 자작 부인 접시에도 빵 한 덩이가 반쯤 사라져 있었다. 무릎 위 냅킨이 불룩했다. 카일은 그걸 봤다. 자작 부인도 카일이 본 걸 봤다. 그리고 아주 조금 웃었다. 와인 잔을 들었다.
카일은 망토를 성녀 어깨에 걸쳐 둔 채로 다시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망토 없는 기사. 셔츠에 가죽 조끼. 연회장 하인 하나가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밤 열 시. 마차.
하르트 백작가에서 백탑까지 마차로 한 시간. 성녀와 카일이 마주 앉았다. 비서 사제는 백작과 헌금 얘기를 하느라 다른 마차로.
성녀는 비단 신을 벗었다. 마차 바닥에 놓았다. 비단 신 뒤꿈치 안쪽에 피가 조금 배어 있었다. 세 시간 동안 쓸린 자리. 성녀가 그걸 보고 신을 뒤집어 놓았다. 피 묻은 쪽이 안 보이게. 맨발을 마차 바닥에 댔다. 발가락을 움직였다. 비단 신 안에서 세 시간 굳어 있던 발가락.
“발이 아팠어요.”
성녀가 말했다. 카일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신이 작았습니까.”
“아니요. 신이 신이라서요.”
성녀 소매가 불룩했다. 양쪽 다. 송아지 고기, 파이, 빵, 무화과. 소금.
“소금은 왜 쌉니까.”
“잿골엔 소금이 비싸요. 상처 씻을 때 소금물이 좋아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
“그 분 얘기. 안 할 수도 있었습니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축복만 하면 됐습니다. 백작 부인이 화를 냈습니다. 대주교께 말이 들어갈 겁니다. 헌금이 줄 겁니다.”
“네.”
“그럼 왜.”
성녀가 창밖을 봤다. 마차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물에 왕성 불빛.
“이졸데 아가씨 손이요. 들꽃골 대장장이 아저씨 손이랑 똑같이 떨렸어요. 그 아저씨는 납으로 그릇 땜질을 했어요. 이십 년. 손이 떨리다가 걷지를 못하다가,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졸데 아가씨는 열일곱이에요. 지금 끊으면 괜찮아요.”
성녀가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소매 안의 냅킨 꾸러미를 감싸 쥐었다.
“기적은 못 해도 그건 할 수 있어요.”
마차가 덜컹거렸다. 다리 끝 돌길. 성녀 몸이 흔들렸다. 성녀가 창틀을 잡았다.
†
마차가 왕도 남쪽 길로 접어들었다. 길이 고르고 조용했다. 바퀴 소리가 일정했다.
성녀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오늘 축복 세 시간, 연회 세 시간. 아침부터 서 있었다. 비단 신을 신고.
성녀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카일 쪽은 아니었다. 창 쪽이었다. 마차 벽. 성녀 머리가 마차 창틀에 닿았다. 탁. 성녀가 눈을 떴다. 고개를 바로 했다. 다시 감았다. 다시 기울었다. 탁.
카일은 그걸 봤다. 세 번.
네 번째에 성녀 머리가 기울다 멈췄다. 창틀 반 뼘 앞에서. 성녀가 졸면서도 피하는. 카일 쪽으로 기울지 않으려고 일부러 창 쪽으로 기우는. 그러다 창틀에 부딪히는.
카일은 망토를 찾았다. 없었다. 연회장에서 성녀 어깨에 걸쳐 준 채였다. 지금 성녀 어깨에 있었다. 회색 망토가 성녀 몸을 다 덮고 마차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성녀는 그걸 벗지 않았다.
카일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손을 뻗어 망토 끝자락을 잡았다. 성녀 발치에 늘어진 부분.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접었다. 두 번, 세 번. 두툼해졌다.
그걸 창틀과 성녀 머리 사이에 끼웠다.
탁. 성녀 머리가 다시 기울었다. 이번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접힌 망토 위에 닿았다. 성녀가 눈을 뜨지 않았다. 숨이 길어졌다.
카일은 몸을 다시 뒤로 기댔다. 마주 앉아서 봤다.
잠든 얼굴. 강림식 날 단 위의 무표정이 아니었다. 금식 때 문틈의 갈라진 입술도 아니었다. 그냥 스물셋 여자의 잠든 얼굴.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왼쪽 귀 밑 점. 땋은 머리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이 망토 위에 흩어졌다.
맨발이 마차 바닥에 있었다. 발가락이 가끔 움직였다. 꿈에서 풀을 밟는지.
카일은 눈을 돌렸다. 창밖을 봤다. 왕도 남쪽 지붕들. 저 너머 백탑. 6층 창은 꺼져 있었다. 주인이 여기 있으니까.
‘보고서.’
카일은 머릿속으로 보고서를 썼다. 날짜, 대상, 특이 사항. 하르트 백작가 축복 순회. 백작 딸에게 납중독 지적. 연회 음식 반출. 호위 기사가 망토로 가려 줌.
마지막 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마차가 백탑 앞에 섰다. 마부가 문을 두드렸다. 성녀가 깼다. 눈을 깜빡였다. 접힌 망토에 볼이 눌린 자국. 성녀가 망토를 봤다. 카일을 봤다.
“…제가 기대서 잤어요?”
“창에 기대셨습니다.”
성녀가 접힌 망토를 손으로 만졌다. 창틀과 자기 볼 사이에 있던. 그리고 카일을 다시 봤다. 오래.
“고마워요.”
“바람이 찼습니다.”
성녀가 웃었다. 망토를 벗어 접었다. 반듯하게. 귀퉁이를 맞춰서. 기사단 신참이 처음 배우는 망토 접는 법이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카일은 묻지 않았다. 카일에게 내밀었다. 망토가 성녀 체온으로 따뜻했다. 그리고 송아지 고기 냄새가 났다.
“오늘 밤에 잿골 가요.”
성녀가 말했다. 소매를 툭툭 치며.
“고기 식기 전에.”
카일은 망토를 받아 입었다. 따뜻했다.
“…세 걸음 뒤에 있겠습니다.”
“개구멍 넓혀 놨다니까요.”
“담으로 가겠습니다.”
“망토 또 찢어져요.”
“기우면 됩니다.”
성녀가 비단 신을 손에 들고 맨발로 마차에서 내렸다. 백탑 앞 돌바닥. 차가웠을 것이다. 성녀는 발을 움찔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가락을 쭉 폈다. 시원하다는 듯이.
『감시 보고서 — 4월 27일
대상: 하르트 백작가 축복 순회. 백작 딸에게 얼굴 분 사용을 끊으라고 조언함(납).
특이 사항: 연회 중 바람이 찼음.』
(9화 끝)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