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3화. 야간 외출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09:30:27

4월 5일 밤 열한 시. 백탑 6층.

문이 열렸다. 소리 없이.

카일은 복도 끝 창 옆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문 앞이 아니라. 저녁 교대 때 일부러 자리를 옮겼다. 문 앞에 서 있으면 저 사람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성녀가 나왔다. 하얀 옷이 아니었다. 갈색 잠옷 위에 낡은 회갈색 겉옷. 머리는 땋아서 겉옷 안에 넣었다. 두건을 썼다. 한 팔에 질그릇 단지를 안고, 어깨에 천 보따리를 메고. 맨발.

성녀가 문 앞 빈 의자를 봤다.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복도 끝 창 쪽을 봤다. 카일은 숨을 멈췄다. 그림자가 깊었다. 성녀가 고개를 돌렸다. 계단으로 갔다.

내려가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맨발. 212칸. 카일은 장화를 벗었다. 끈이 아니라 버클이라 빨리 벗겨졌다. 장화를 손에 들고 양말 바람으로 따라 내려갔다. 돌계단이 찼다. 발바닥이 얼얼했다. 이 계단을 저 사람은 매일 맨발로 오르내렸다.

1층. 성녀는 본당 쪽으로 가지 않았다. 부엌 뒤 쪽문. 쪽문을 열고 뒤뜰로. 달이 반쯤 떠 있었다. 뒤뜰은 버려진 밭이었다. 마른 풀, 쓰러진 울타리. 성녀는 밭을 가로질러 뒷담으로 갔다. 담 아래 덤불을 헤쳤다. 개구멍이 있었다. 어른 하나가 엎드려야 지나가는 크기.

성녀가 단지를 먼저 밀어 넣었다. 보따리를 넣었다. 그리고 엎드려 기어 나갔다.

카일은 담 앞에 섰다. 개구멍을 봤다. 자기 어깨를 봤다.

‘안 들어간다.’

카일은 장화를 다시 신었다. 담을 짚었다. 키보다 조금 높았다. 뛰어올라 담 위에 손을 걸고 넘었다. 망토가 담 위 가시덤불에 걸렸다. 찢어지는 소리. 카일은 이를 악물고 내려섰다.

담 너머는 돌계단이었다. 언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좁고 미끄러운 돌계단. 옆으로 물길이 흘렀다. 하수. 냄새가 올라왔다. 성녀가 저 아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단지를 안고,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카일은 거리를 두고 따랐다. 서른 걸음.

†

잿골이었다.

강가 낮은 지붕들. 골목이 좁았다. 대장간 화로가 꺼진 지 얼마 안 됐는지 쇠 냄새와 숯 냄새가 남아 있었다. 무두질 공방의 시큼한 냄새. 강물 냄새. 카일은 그 냄새를 알았다. 열네 살까지 맡던 냄새였다.

성녀는 골목을 망설임 없이 걸었다. 여러 번 와 본 걸음. 두 번 꺾고, 우물을 지나, 대장간 옆집 문 앞. 문을 두 번 두드렸다. 한 번 쉬고 한 번 더.

문이 열렸다. 팔뚝이 굵은 여자가 촛불을 들고 나왔다. 마흔쯤. 머리를 질끈 묶고, 눈이 빨갰다.

“아가씨!”

여자가 성녀를 끌어안았다. 단지째로. 성녀가 단지를 높이 들어 엎어지지 않게 했다.

“바울은요?”

“아직 열이 안 내려요. 저녁부터 더 올랐어. 헛소리를 해. 아가씨, 나 무서워.”

“괜찮아요.”

성녀가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창 덧문 틈으로 촛불 빛이 새어 나왔다.

카일은 골목 어귀에서 잠깐 망설였다. 여기서 돌아가면 보고서는 쉬웠다. 「행선지: 잿골 민가.」 그 한 줄이면 그레타는 다음 명을 내릴 것이다. 카일은 돌아가지 않았다. 대장간 담을 따라 걸었다. 화로 옆 벽이 아직 미지근했다. 손바닥을 대 봤다. 강바람이 그 벽에 막혀 조금 덜 불었다.

카일은 대장간 처마 밑 어둠 속에 섰다. 창 덧문 틈이 손가락 하나 폭으로 벌어져 있었다. 안이 보였다.

좁은 방. 바닥에 짚 요. 아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아홉 살쯤. 얼굴이 빨갛고 입술이 말라 있었다. 숨이 빨랐다. 옆에 대장장이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아이 손을 쥐고 있었다.

성녀가 아이 옆에 앉았다. 두건을 벗었다. 땋은 머리가 등으로 흘러내렸다. 성녀가 아이 이마에 손을 댔다. 손등으로. 그다음 목, 겨드랑이. 아이 손목을 잡고 한참 있었다. 맥을 세고 있었다. 입술이 숫자를 셌다.

본당에서 기도문 박자와 맞지 않던 입술. 카일은 그때 그 입술이 뭘 셌는지 알았다.

성녀가 보따리를 풀었다. 찢은 천 띠. 작은 주머니 몇 개. 마른 나무껍질 한 줌.

“한나 언니, 물 끓여 주세요. 큰 솥에. 다 끓으면 반은 식혀 두고 반에 이거 넣어요.”

성녀가 나무껍질을 건넸다.

“버드나무 껍질이에요. 뒤뜰 담 옆에 버드나무가 있어요. 열 내려요. 쓰니까 꿀 조금.”

“꿀은 없는데.”

성녀가 단지 뚜껑을 열었다. 고기 수프. 이틀 치 남긴 수프가 한 단지. 그리고 소매에서 냅킨 꾸러미. 빵, 달걀, 사과. 맨 밑에 작은 꿀 단지. 아침 식탁의 꿀.

한나라는 여자가 꿀 단지를 받아 들고 입을 막았다.

대장장이가 단지 안을 들여다봤다. 기름이 굳어 하얗게 뜬 고기 수프. 대장장이가 큰 손으로 단지를 받아 화로 옆에 놓았다. 남은 불씨에 데우려고. 그 손이 떨렸다. 카일은 그 손을 알았다. 아픈 자식 옆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아버지 손. 쇠는 두드려 고치는데 자식 열은 두드릴 수가 없는 손.

“아가씨, 이거 신전 밥이잖아. 아가씨 먹으라고 주는 거.”

“저 많이 먹어요. 남아서 그래요.”

카일은 처마 밑에서 그 말을 들었다. 남아서. 아침 수프 세 숟가락. 저녁 수프 세 숟가락. 빵 반 덩이.

†

밤이 길었다.

성녀는 아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찬물에 적신 천으로 아이 겨드랑이와 목과 사타구니를 닦았다. 천이 미지근해지면 다시 적셨다. 버드나무 껍질 달인 물을 숟가락으로 조금씩. 아이가 쓰다고 뱉으면 꿀을 손가락에 찍어 입술에 발라 주고 다시.

그리고 발. 성녀가 아이 발을 무릎 위에 올렸다. 두 손으로 감쌌다. 엄지로 발바닥을 천천히 눌렀다. 뒤꿈치에서 발가락 쪽으로. 한 발, 그리고 다른 발. 오래.

대장장이가 물었다.

“발은 왜 주물러요?”

“열이 머리로만 몰리면 안 돼요. 발이 차면 열이 위로 가요. 발을 데워서 아래로 내려요.”

“그게 기적이에요?”

“아니요. 우리 엄마가 하던 거예요. 들꽃골에서.”

카일은 처마 기둥에 등을 댔다. 강바람이 찼다. 강 건너 왕성 쪽에서 야경꾼 종이 두 번 울렸다. 망토 찢어진 자리로 바람이 들어왔다. 발이 시렸다. 장화를 신었는데도.

‘저 사람은 맨발로 왔다.’

창 너머로 성녀 발이 보였다. 바닥에 앉아 있어서 발바닥이 보였다. 하수 돌계단을 내려온 발. 까맣게 때가 묻어 있었다. 엄지발가락 옆에 긁힌 자국. 피가 조금 말라붙어 있었다.

카일은 그 발에서 눈을 뗐다. 아이를 봤다. 아이 숨이 조금 느려지고 있었다.

†

새벽 두 시. 한나가 잠깐 졸았다. 대장장이도 벽에 기대 졸았다. 성녀만 깨어 있었다. 아이 발을 무릎에 올린 채로. 흥얼거렸다. 낮에 6층 문 안에서 들리던 남부 가락. 이번엔 가사가 들렸다.

“들꽃은 밤에도 피고, 엄마 손은 밤에도 따뜻해…”

카일은 그 노래를 알지 못했다. 남부 산골 노래는 왕도에서 들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잿골 단칸방에서 흥얼거리던 다른 노래가 떠올랐다. 가사는 기억이 안 났다. 박자만. 어머니 손이 카일 등을 토닥이던 박자.

카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떴다. 졸면 안 됐다. 감시 중이었다.

새벽 세 시. 아이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마, 목, 가슴. 흠뻑. 성녀가 손등을 아이 이마에 댔다. 오래. 그리고 숨을 내쉬었다. 길게.

“한나 언니.”

한나가 깼다. 벌떡.

“열 내려요. 땀나요. 옷 갈아입혀 주세요. 마른 걸로.”

한나가 아이 이마를 만졌다. 그리고 울었다. 소리를 죽이려고 앞치마를 입에 물고. 대장장이가 깨서 아이를 보고, 한나를 보고, 성녀를 봤다. 큰 손으로 성녀 손을 감싸 쥐었다.

“성녀님…”

“리아예요.”

성녀가 말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여기서는 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성녀는 저 위에 있어요.”

한나가 앞치마를 입에서 떼고 웃었다. 울면서.

“알아요. 우리 들꽃골 아가씨.”

†

새벽 네 시. 동쪽 하늘이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성녀—리아가 대장장이 집 문을 나왔다. 두건을 다시 쓰고. 빈 단지를 안고. 보따리는 두고 왔다. 천 띠와 버드나무 껍질은 한나 집에.

리아가 골목에 섰다. 기지개를 켰다. 두 팔을 하늘로.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갔다. 강림식 날 단 위에서 손을 들던 그 자세. 이번엔 빛이 나지 않았다. 손끝이 초록빛이었다. 풀물. 버드나무 껍질을 벗기고 쑥을 찧은 손.

리아가 팔을 내리고 돌아섰다. 골목 끝을 봤다.

대장간 처마 밑. 카일이 서 있는 곳.

카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수 있었다. 처마 기둥 뒤로 반 걸음이면. 그러지 않았다. 왜 그러지 않았는지 카일은 몰랐다. 밤새 서 있느라 다리가 굳어서일 수도 있었다.

리아가 카일을 봤다. 동트는 빛 속에서. 회색 망토, 찢어진 망토 끝. 장화.

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단지를 안은 채로 서 있었다. 강림식 날 단 위에서 카일을 볼 때처럼 아무 표정 없이.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카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르고.

리아가 돌아서서 하수 돌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맨발로. 카일은 서른 걸음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이번엔 숨지 않고.

돌계단 중간쯤에서 리아가 미끄러질 뻔했다. 이끼. 카일이 한 걸음 내디뎠다가 멈췄다. 리아가 벽을 짚고 다시 섰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뒷담 개구멍 앞. 리아가 엎드려 들어갔다. 카일은 담을 넘었다. 망토가 또 가시덤불에 걸렸다. 같은 자리가 더 찢어졌다.

뒤뜰에서 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드나무 아래. 카일이 담에서 내려서는 걸 보고, 찢어진 망토 끝을 봤다.

리아가 아무 말 없이 탑으로 걸어갔다. 쪽문. 계단. 212칸. 카일이 세 걸음 뒤에서 따랐다. 이번엔 장화를 벗지 않았다. 쿵, 쿵. 리아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6층. 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문틈으로 손이 하나 나왔다. 초록빛 손끝. 의자 위에 무엇을 놓았다.

사과 하나. 아침에 소매로 들어간 그 사과는 아니었다. 그건 한나 집에 두고 왔다. 다른 사과. 어디서 났는지.

문이 닫혔다.

카일은 의자 위 사과를 봤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다리가 굳어 있었다. 사과를 집어 망토 안에 넣었다.

교대가 오기까지 한 시간. 카일은 보고서를 머릿속으로 썼다. 날짜, 대상, 특이 사항. 야간 외출. 신전 밖 무단 이탈. 잿골 민가 방문. 신전 음식 반출.

다 사실이었다. 세 줄에 다 들어갔다. 이걸 그레타에게 내면 오늘 정오 전에 왕에게 올라간다.

카일은 그 세 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고쳐 썼다. 해가 떴다. 교대 기사가 계단을 올라왔다. 카일은 일어나서 내려갔다. 212칸. 기사단 숙소. 책상.

펜을 들었다. 한참 있었다.

『감시 보고서 — 4월 5일

대상: 밤 열한 시 거처를 나섬. 새벽 네 시 돌아옴.

특이 사항: 행선지 확인 중.』

(3화 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7화. 담을 넘음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6화. 승천 계획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5화. 잿골의 증언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4화. 오렌의 장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3화. 단장에게 전부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 가짜 성녀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22화. 쪽지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