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4월 9일 오전 열 시. 백탑 앞뜰, 기적의 단.
일주일에 한 번 기적 공연이 있었다. 대주교 비서 사제가 종이에 그렇게 적지는 않았다. 「주간 치유 축복」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사제들끼리는 공연이라고 불렀다. 카일은 그걸 부엌 뒤에서 담배 피우던 젊은 사제 둘에게서 들었다. 「오늘 공연 몇 명이야?」 「다섯. 절름발이 둘, 눈먼 사람 하나, 귀머거리 하나, 등 굽은 노인 하나.」 「대본은?」 「어제 다 외웠어. 은화 셋씩.」
카일은 그 대화를 긴 기록에 적었다. 날짜, 시각, 사제 둘의 생김새.
앞뜰은 강림식 날만큼은 아니어도 꽉 찼다. 기적을 보러 온 사람들. 앞줄 의자에 귀족 몇. 대주교가 단 옆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금실 사제복, 반지 다섯 개. 오늘은 여섯 개였다.
단 앞에 줄이 섰다. 맨 앞 다섯 명. 사제 하나가 그 다섯을 단 계단 앞에 차례로 세웠다. 다섯 다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절름발이라는 남자 둘은 지팡이가 새로 깎은 거였다. 손잡이 나무가 반들거렸다.
그 다섯 뒤로 진짜 줄이 이어졌다. 앞뜰 문 밖까지. 거기 선 사람들 옷은 깨끗하지 않았다.
성녀가 단 위에 섰다. 오늘도 맨발. 의자가 없었다. 공연 날엔 서 있어야 한다고 비서 사제가 말했다. 「신의 딸이 앉아서 기적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카일은 단 아래 세 걸음 뒤에 섰다.
첫 번째 남자가 올라왔다. 절름발이. 새 지팡이를 짚고 한 칸씩. 단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성녀가 남자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남자가 몸을 떨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다리가! 다리가 뜨거워요!”
남자가 지팡이를 던졌다. 일어났다. 걸었다. 단 위를 한 바퀴. 뛰었다. 앞뜰이 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박수. 누가 울었다.
카일은 남자 무릎을 봤다. 뛸 때 굽혀지는 각도. 절름발이였던 적이 없는 무릎이었다.
성녀는 손을 거두었다. 남자를 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번째. 눈먼 사람. 사제가 손을 잡아 올려 줬다. 성녀가 눈 위에 손을 얹었다. 남자가 「빛이… 빛이 보여요」 했다. 앞뜰이 또 소리를 질렀다.
세 번째. 귀머거리. 성녀가 귀에 손을 댔다. 남자가 「종소리가 들려요」. 마침 백탑 종이 울렸다. 사제 하나가 탑 위에서 줄을 당기는 게 카일 눈에 보였다.
네 번째. 두 번째 절름발이. 같은 일.
성녀 손이 사람 머리 위에 얹힐 때마다, 카일은 성녀 어깨를 봤다. 강림식 날 대주교가 손을 얹었을 때 굳던 어깨. 오늘은 처음부터 굳어 있었다. 사람이 하나 올라올 때마다 더.
다섯 번째. 등 굽은 노인. 사제가 데려왔다. 노인이 단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성녀가 노인을 보지 않았다.
성녀는 줄 끝을 보고 있었다.
†
카일도 성녀 눈길을 따라갔다.
앞뜰 문 근처. 진짜 줄의 맨 끝. 담 그늘. 노인 하나가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일흔쯤. 한쪽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바지가 무릎 위까지 걷혀 있었다. 정강이에 감긴 천. 천이 누렇게 젖어 있었다. 파리가 꼬였다. 노인 옆에 지팡이. 나뭇가지를 다듬은. 새것이 아니었다.
카일은 그 노인 얼굴을 몰랐다. 그런데 노인이 앉은 자세는 알았다. 잿골 우물가 노인들이 그렇게 앉았다. 아픈 다리를 앞으로 뻗고, 성한 다리를 접고, 등을 담에 대고.
등 굽은 노인이 단 위에 올라와 무릎을 꿇었다. 사제가 성녀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성녀님.」
성녀가 움직였다.
손을 노인 머리 위가 아니라 자기 가슴 앞에 모았다. 그리고 단 계단을 내려갔다. 일곱 칸. 맨발로. 빠르게.
앞뜰이 술렁였다. 사제가 「성녀님!」 하고 불렀다. 대주교가 높은 의자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카일은 성녀를 따랐다. 세 걸음 뒤. 사람들 사이로 길이 열렸다. 성녀 앞에서 사람들이 저절로 비켜섰다. 무릎을 꿇는 사람도 있었다. 성녀는 보지 않고 지나갔다.
줄 끝. 담 그늘. 성녀가 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얀 옷자락이 흙바닥에 닿았다.
“할아버지, 다리 볼게요.”
노인이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담에 등이 부딪혔다.
“성, 성녀님, 더럽습니다. 냄새도 나고.”
“괜찮아요. 언제부터예요?”
“…한 달. 대장간에서 쇠 부스러기가 박혀서. 처음엔 작았는데.”
성녀가 천을 풀었다. 천이 상처에 붙어 있었다. 성녀가 천천히 떼어 냈다. 노인이 이를 악물었다. 천 아래 상처가 드러났다. 정강이 한가운데. 손바닥 반만 한 붉은 부기, 가운데 누런 고름. 냄새가 확 올라왔다. 앞뜰 사람들 몇이 코를 막고 물러섰다.
성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상처를 봤다. 가까이.
“칼 있어요?”
성녀가 카일을 돌아봤다. 처음으로 카일에게 무엇을 달라고 했다.
카일은 허리 단검을 뽑았다. 손잡이 쪽으로 내밀었다. 성녀가 받았다. 그리고 다시 카일을 봤다.
“불이요.”
카일은 주위를 봤다. 앞뜰 입구 쪽에 촛대 행상이 있었다. 카일이 걸어가서 은화 한 닢을 던지고 초 하나를 불째로 들고 왔다. 행상이 「기사님, 그건 축복 초인데」 하다가 카일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성녀가 칼끝을 촛불에 댔다. 칼끝이 까매졌다. 식혔다. 숨 셋.
“할아버지, 아파요. 제 손 잡지 말고 기사님 손 잡으세요. 저는 손 써야 해서.”
노인이 카일을 올려다봤다. 카일은 그 노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내밀었다. 노인이 잡았다. 마른 손이 카일 손을 꽉 쥐었다.
성녀가 칼끝을 고름 가운데에 댔다. 짧게 그었다.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카일 손을 부러뜨릴 듯이 쥐었다. 고름이 터져 나왔다. 성녀가 엄지로 상처 둘레를 눌렀다. 천천히, 바깥에서 안으로. 고름이 더 나왔다. 그리고 피. 빨간 피.
“됐어요. 이제 피가 나요. 좋은 거예요.”
성녀가 엄지와 검지로 상처 안에서 무엇을 집어냈다. 쇳조각. 손톱만 한. 녹슨.
앞뜰이 조용했다.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박수도 없었다.
성녀가 쇳조각을 노인 손바닥에 놓았다.
“이게 한 달 동안 할아버지 다리에 있었어요.”
노인이 쇳조각을 봤다. 울었다.
“물이요.”
이번엔 카일이 말하기 전에 움직였다. 앞뜰 분수. 물통을 들 것이 없었다. 카일은 투구를 벗었다. 기사단 투구. 분수 물을 퍼 왔다.
성녀가 투구 물로 상처를 씻었다. 여러 번. 그리고 자기 하얀 옷 소매를 찢었다. 길게. 소매가 팔꿈치까지 사라졌다. 그 천으로 상처를 감았다.
“사흘 동안 매일 깨끗한 물로 씻고 천 갈아요. 끓였다 식힌 물이요. 부기가 빠지면 괜찮아요. 열이 나면 우물가 대장장이 집 한나 언니한테 말해요.”
“…성녀님이 한나를 아세요?”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났다. 하얀 옷 무릎이 흙과 고름으로 더러웠다. 찢긴 소매 아래로 맨팔이 드러났다.
†
앞뜰 누군가 말했다.
“기적이다.”
작은 소리였다. 그다음 다른 사람이. “기적이야.” “성녀님이 페터 영감 다리를 고쳤어.” “칼로 쇠를 꺼냈어.” “그게 기적이지, 아까 그건—”
말이 거기서 끊겼다. 아까 그거. 단 위에서 지팡이를 던지고 뛰던 남자. 사람들이 단 쪽을 돌아봤다. 첫 번째 절름발이가 단 계단 아래에서 슬금슬금 뒤로 빠지고 있었다.
성녀가 앞뜰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이 또 길을 열었다. 이번엔 무릎을 꿇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성녀 옷의 고름 얼룩과 찢긴 소매를 봤다.
성녀가 카일 옆에 섰다. 카일은 투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젖은.
성녀가 찢기지 않은 왼쪽 소매를 털었다. 카일 쪽으로. 아주 조금. 사람들은 못 볼 만큼.
푸른 가루가 떨어졌다. 카일 장화 앞에. 햇빛에 반짝였다.
성녀가 카일을 올려다보지 않고 말했다. 카일만 들을 만큼 낮게.
“이건 가짜예요.”
성녀가 턱으로 줄 끝을 가리켰다. 담 그늘. 노인이 쇳조각을 쥐고 아직 울고 있었다. 다리에 감긴 하얀 천.
“저건 진짜 상처고요.”
카일은 성녀를 봤다. 성녀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단 쪽. 높은 의자. 대주교.
대주교는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하얀 수염 아래로. 그런데 반지 낀 손이 의자 팔걸이를 꽉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카일은 그 손을 봤다. 미소와 손이 따로 노는 사람.
대주교가 일어났다. 두 팔을 벌렸다.
“세렌의 자녀들이여! 보셨습니까. 성녀께서는 단 위에서만이 아니라 땅바닥에서도 기적을 행하십니다. 가장 낮은 곳의 상처까지!”
박수가 터졌다. 앞뜰 사람들이 다시 와 소리를 질렀다. 대주교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까 끊긴 말은 아무도 다시 하지 않았다.
성녀는 박수 속에서 서 있었다. 찢긴 소매, 더러운 무릎, 맨발. 박수를 받지도 손을 흔들지도 않고.
카일은 투구를 다시 썼다. 젖은 투구. 물이 목덜미로 흘렀다. 차가웠다. 정신이 났다.
†
오후 두 시. 대주교 집무실. 백탑 2층.
카일은 문 밖에 서 있었다. 호위는 문 밖. 문은 두꺼운 참나무였다. 그래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주교 목소리. 부드러웠다. 끝까지 부드러웠다.
“리아. 앉거라.”
성녀 이름을 알았다. 당연히. 데려온 사람이니까.
“오늘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페터 할아버지 다리에서 쇠를 뺐어요.”
“그건 의원이 할 일이다. 성녀가 할 일은 축복이다.”
“의원이 잿골에 안 가요.”
침묵. 길었다.
“리아. 네가 여기 온 이유를 잊었느냐. 들꽃골.”
“안 잊었어요.”
“들꽃골에 약을 보내고 의원을 보내는 건 신전이다. 신전은 기부금으로 움직인다. 기부금은 기적을 본 사람들이 낸다. 오늘 앞뜰 사람들이 무엇을 봤느냐. 고름을 봤다. 고름을 보고 은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페터 할아버지는—”
“한 사람이다. 들꽃골은 삼백 명이다.”
성녀가 대답하지 않았다.
“금식 사흘. 물만. 거처에서 기도하거라. 무엇이 성녀의 일인지.”
의자 끄는 소리. 맨발이 바닥을 걷는 소리. 문이 열렸다.
성녀가 나왔다. 찢긴 소매는 그대로였다. 갈아입을 시간을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녀가 카일을 봤다. 카일이 들었는지 묻지 않았다. 다 들렸을 걸 아는 얼굴이었다.
성녀가 계단으로 갔다. 6층까지. 212칸 중 남은 칸. 카일이 세 걸음 뒤에서 따랐다.
5층 계단참에서 성녀가 멈췄다. 숨을 골랐다. 아침도 수프 세 숟가락, 점심은 공연 때문에 거르고, 이제 사흘 금식. 성녀가 벽을 짚었다. 아주 잠깐.
카일이 한 걸음 다가갔다.
“괜찮아요.”
성녀가 말했다. 카일이 손을 내밀기 전에. 그리고 다시 올라갔다.
6층. 문. 성녀가 문고리를 잡고 돌아봤다.
“칼이랑 투구, 고마웠어요. 투구 냄새 날 거예요. 고름 씻은 물.”
“…씻으면 됩니다.”
“잘 씻으세요.”
문이 닫혔다.
카일은 투구를 벗었다. 들여다봤다. 냄새가 났다. 고름과 피와 분수 물 냄새. 그리고 쇠 냄새. 기사단 투구 냄새.
카일은 투구를 겨드랑이에 끼고 문 앞에 섰다.
‘금식 사흘. 물만.’
카일은 그날 밤 긴 기록에 다섯 줄을 썼다. 사제 둘의 대화. 은화 셋씩. 새 지팡이. 절름발이였던 적이 없는 무릎. 쇳조각. 그리고 대주교의 말. 「들꽃골은 삼백 명이다.」
공식 보고서는 세 줄이었다.
『감시 보고서 — 4월 9일
대상: 주간 치유 축복 참석. 축복 중 단에서 내려가 신도 상처를 직접 치료함.
특이 사항: 대주교 판단으로 금식 사흘.』
(5화 끝)
9월 16일 밤 열한 시 반. 백탑 뒷담 바깥.카일은 혼자였다. 루카스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레타 말대로. 루카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따라올 테니까.사복. 검은 외투. 회색 망토가 아니라. 검도 차지 않았다. 단검 하나. 장화 대신 가죽 신. 기사단 야간 정찰용. 소리가 안 나는.하수 돌계단은 피했다. 꼭대기에 경비 둘. 카일은 언덕 옆 덤불을 타고 올라왔다. 신전 뒷담을 따라 서쪽으로. 담 그늘 속으로. 백 걸음.창고가 있었다. 담 안쪽.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돌 창고. 창고 뒷벽이 담에 붙어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 위로 창고 지붕 끝이 손바닥만큼 튀어나와 있었다.석공들이 돌을 더 쌓은 건 담의 낮은 자리였다. 여기가 아니었다. 여기는 원래 높았다. 카일 키보다 머리 하나 높았다. 그런데 창고 지붕이 담보다 반 뼘 낮았다. 담 꼭대기에 손을 걸 수만 있으면, 담을 넘는 게 아니라 창고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카일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뛰었다. 담을 디뎠다. 한 발. 손을 뻗었다. 담 꼭대기에 손끝이 걸렸다. 끌어올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왼손바닥 흉이 당겼다. 회색 실 매듭이 손목에서 조였다.담 위. 엎드렸다. 숨을 죽였다.뒤뜰이 보였다. 달빛. 반쯤 갈아엎어진 이랑. 남은 박하. 그 너머 백탑. 하얀. 6층 창. 촛불.뒤뜰에 사람이 없었다. 쪽문은 닫혀 있었다. 쪽문 앞에 신전 경비 하나가 서 있다고 루카스가 전했었다. 지금은 없었다. 자정 교대 전 십오 분은 시 경비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신전 경비대도 사람이었다.카일이 창고 지붕으로 내려섰다. 기와가 달그락. 카일은 멈췄다. 숨 셋. 아무도 오지 않았다.지붕에서 땅으로. 이랑 사이. 박하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골랐다. 쪽문.잠겨 있지 않았다.†탑 안. 1
9월 15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 빵집 처마 밑.에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감자, 양파, 빵. 그리고 얼굴이 하얬다.카일이 처마 밑으로 들어서자 에마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말없이. 이 아이가 말없이 무엇을 내미는 건 처음이었다.카일이 바구니 바닥 천을 들췄다. 쪽지. 접힌. 두 장.한 장은 에마 글씨였다. 동글동글하고 큰. 그런데 글씨가 떨려 있었다.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회색 아저씨.어젯밤 대주교님 집무실 앞 복도를 닦고 있었어요. 걸레질. 벌 받아서요. 네모 턱 아저씨한테 말대꾸해서.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대주교님이랑 네모 턱 아저씨랑 비서 사제님이 얘기했어요.내년 봄 축성 축제 때요. 4월 3일. 강림식 1년 되는 날. 그날 성녀님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승천」한대요.승천이 뭔지 저 몰라서 계속 들었어요.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성녀님이 탑 꼭대기 난간 앞에서 기도하면, 빛이 나면서, 성녀님이 하늘로 올라간대요. 앞뜰 사람들이 다 본대요. 성녀가 하늘로 돌아갔다고. 신의 딸이 신한테 돌아갔다고.네모 턱 아저씨가 물었어요. 「진짜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대주교님이 그랬어요. 「연기와 인광 가루를 크게 피운다. 사람들 눈이 빛에 가려질 때, 난간 뒤에서.」그다음 말은 작아서 못 들었어요.근데 네모 턱 아저씨가 그랬어요. 「탑이 일곱 층입니다. 떨어지면.」대주교님이 그랬어요. 「그러니 승천이지.」비서 사제님이 그랬어요. 「성녀 자리가 비면 다음 성녀를 남쪽에서 또 찾으면 됩니다. 이번 아이는 말을 너무 안 듣습니다. 장부도 이상하게 한 번 없어졌고요.」저 걸레 떨어뜨릴 뻔했어요.회색 아저씨 이거 어떡해요. 성녀님한테 말했어요. 성녀님이 아무 말도
9월 4일 오후 세 시. 잿골 대장간.장부는 사흘 만에 돌아갔다. 8월 30일 오후. 카일이 같은 빵 바구니에 넣어 창살 너머 오렌에게 넘겼다. 오렌이 그날 밤 비서 사제가 다시 술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도. 오렌은 사흘째 밤 비서 사제 방 앞을 지나가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비서 사제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산 장부를 펴 놓은 채로. 원본 장부가 없어서 사본으로 정산하다 지쳐서.오렌이 원본 장부를 서고 금고 옆 책장 맨 아래 칸에 꽂아 두었다. 금고 안이 아니라. 열쇠가 없었으니까.다음 날 아침 비서 사제가 책장에서 장부를 찾아내고 혼잣말을 했다고, 에마가 쪽지로 전했다. 「내가 어젯밤 술 마시고 꺼내 놨나. 아이고.」베낀 장부는 그레타 금고에 들어갔다. 스물두 장 상자 옆에. 서른여섯 장. 카일 글씨. 루카스가 숫자를 맞춘.그레타가 그걸 보고 말했다. 「하나 더.」“사람 말.”그레타가 파이프를 물었다.“장부는 숫자다. 숫자는 대주교가 「도적이 털었다」고 하면 반쯤 흔들린다. 숫자 옆에 사람 말이 있어야 해. 그 숫자가 사람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들꽃골은 멀다. 남부까지 가서 받아 오면 한 달. 잿골은 가깝다. 잿골 사람들 말을 받아 와. 성녀가 뭘 했는지. 신전이 뭘 안 했는지.”†카일과 루카스가 잿골에 왔다. 사복. 루카스 손에 종이 한 묶음. 카일 손에 펜과 잉크. 그리고 인주. 붉은.한나가 대장간 앞에서 둘을 맞았다. 팔짱을 끼고.“증언?”“예.”“그게 뭔데.”“본 걸 말하면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이름 쓰고, 이름 못 쓰시면 손도장.”한나가
8월 27일 오후 다섯 시. 하수 돌계단, 뒷담 쇠창살 앞.오렌이 그날도 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의자, 지팡이, 무릎 위 화분. 보라색 꽃은 다 지고 씨앗 꼬투리가 맺혀 있었다.카일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왔다. 비번 날마다. 오렌은 세 번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늙은이가 바람 쐬는 거요.」오늘은 오렌 발치에 빵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신전 부엌 바구니. 둥근 빵이 여섯 덩이.“기사 양반, 배고프오?”오렌이 바구니를 들어 창살 사이로 밀었다. 창살 간격이 좁았다. 바구니가 걸렸다. 오렌이 빵을 하나씩 꺼내 창살 사이로 넘겼다. 카일이 받았다. 하나, 둘, 셋.넷째 빵을 넘길 때 오렌이 낮게 말했다.“바구니 바닥.”카일은 빵을 받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여섯. 그리고 빈 바구니를 창살 사이로 당겼다. 바구니가 걸렸다. 카일이 바구니를 기울였다. 바구니 바닥 천이 들렸다. 그 아래.가죽 표지.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두께는 손가락 두 마디.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표지에 금박으로 백탑 문장.카일 손이 굳었다. 빵 냄새 아래에서 오래된 가죽 냄새가 올라왔다. 습기와 잉크와 손때.“원본이오.”오렌이 말했다. 하늘을 보며. 바람 쐬는 늙은이처럼.“올해 것. 정월부터 지난달까지. 들꽃골 줄이 있는.”카일이 바구니를 마저 당겼다. 창살에 걸린 바구니를 비틀어서. 장부가 바구니째 넘어왔다. 카일은 그걸 빵 여섯 덩이 밑에 다시 묻었다. 천으로 덮었다.“…어떻게.”“그저께 밤. 비서 사제가 술 마시는 밤. 쉰 해 동안 이 신전에서 장부를 옮겨 적은 늙은이가, 장부 금고 열
8월 18일 밤 열 시. 왕실 기사단 본관 3층. 단장실.카일은 다시 단장실 문 앞에 섰다. 이번엔 상자가 없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두드렸다.“들어와.”그레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이 닫혀 있었다. 빗장까지. 7월 5일 밤 이후로 그레타는 단장실 창을 열지 않았다. 여름인데. 단장실 안이 파이프 연기로 뿌옜다.“앉아.”카일은 앉지 않았다. 9년 동안 단장실에서 앉은 적이 없었다.“앉으라니까. 오늘은 길 거 같으니까.”카일이 의자에 앉았다. 처음으로. 책상 앞 나무 의자. 삐걱거렸다.그레타가 책상 뒤에 앉았다. 의족을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바닥에 두었다. 파이프도 내려놓았다.“말해.”카일은 그레타를 봤다.“…무엇을.”“전부. 상자에 안 쓴 거.”카일은 말이 없었다.“스물두 장에 안 쓴 게 있어. 5월 2일 장, 「나는」 다음 빈칸. 그거 말고도 많지. 네가 확인한 것만 쓰는 놈이라 확인 못 한 건 다 빼놨어. 네 머릿속에만 있는 거. 그거 말해.”그레타가 손깍지를 꼈다. 책상 위에.“나도 이제 증거를 모으러 다닌다. 남부, 잿골, 시 의회. 근데 네 머릿속을 모르고는 어디를 파야 할지 몰라. 다 말해. 시간 많다. 오늘 밤 새워도 돼.”†카일은 오래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시작했다. 처음부터.“열네 살.”그레타 눈이 조금 움직였다.“잿골에 살았습니다. 강 쪽으로 세 골목. 어머니하고 둘이. 어머니는
8월 10일 오전 열한 시. 왕도 남쪽 시장.카일은 비번이었다. 열흘에 한 번 쉬는 날. 사복. 갈색 외투.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유 없이. 숙소에 있으면 상자 없는 책상만 봤다.“회색 아저씨!”카일이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로 흰 두건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마.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숨을 헐떡이며.“찾았다! 아저씨 비번이라고 루카스 아저씨가 그랬어요. 시장 오면 있을 거라고. 아저씨는 비번에 할 게 없어서 시장 돌아다닌다고.”카일은 루카스를 다음에 보면 무엇을 시킬지 생각했다.에마가 카일 팔을 잡아끌었다. 골목 안 빵집 처마 밑으로. 사람이 없는 데. 그리고 장바구니를 내밀었다. 감자, 양파, 빵 두 덩이. 신전 부엌 장보기.“바구니 밑이요.”카일이 바구니 바닥을 더듬었다. 감자 밑에 천이 깔려 있었다. 천 밑에 종이. 접힌.“성녀님이요. 어젯밤에 쓰셨어요. 네모 턱이 잠든 다음에. 저한테 장 보러 갈 때 바구니 밑에 넣어 가래요. 네모 턱이 제 바구니는 안 봐요. 감자만 있으니까.”카일이 종이를 펼쳤다.삐뚤빼뚤한 글씨. 석 달 전보다 조금 덜 삐뚤었다. 성녀가 밤마다 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잿골 한나 언니 집 약이 떨어져요. 버드나무 껍질, 쑥. 바울이 또 기침해요. 열은 없대요. 그리고 페터 할아버지 다리 옛날 상처 자리가 다시 부었대요. 고름은 아직 없대요. 소금물로 씻고 쑥 붙이면 돼요. 한나 언니가 할 줄 알아요. 근데 쑥이 없어요.뒤뜰 쑥은 네모 턱이 다 뽑았어요. 박하만 남았어요.강가 쑥 말고 남쪽 시장 약초 가게 쑥이요. 셋째 골목 노란 문. 할머니가 파세요. 들꽃골 쑥이랑 제일 비슷해요.돈은 없어요. 미안해요.」맨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