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박소희! 멍청하게 서 있을 거야? 내가 공간 보라고 했지!”
터치라인에 선 강도욱의 고함이 경기장을 울렸다. 박소희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강도욱이 준 새 축구화 덕분인지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팀의 전체적인 균형이 무너지니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전반전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0-3이었다. 선수들은 벤치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강도욱은 물병 하나 건네지 않고 그들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를 넘어 차가운 멸시로 가득했다.
“이게 너희의 수준이다. 투 터치? 공간? 개뿔. 너희는 공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눈빛조차 무서워하고 있어. 특히 한서윤.”
서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넌 주장이랍시고 뭘 했지? 동료들이 무너질 때 소리 한 번 제대로 질렀나? 네가 제일 많이 뛰면 뭐 해, 팀을 하나로 묶지 못하는데. 넌 여전히 자격 미달이다.”
서윤의 가슴에 칼날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민아름이 참다못해 일어났다.
“감독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서윤 언니 진짜 죽을 힘을 다해 뛰었어요! 저희가 부족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요!”
“무시당하기 싫으면 실력으로 보여줘. 질질 짜면서 감정에 호소하지 말고. 여긴 유치원이 아니라 프로 구단이다.”
강도욱은 전술판을 거칠게 두드렸다.
“후반전엔 포메이션 바꾼다. 서윤, 넌 미드필더로 올라가. 수비만 하지 말고 네가 직접 경기를 조율해. 만약 한 골이라도 못 넣으면 오늘 저녁 훈련은 두 배다.”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서윤은 입술을 깨물고 미드필더 라인으로 전진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강도욱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독설이 힘이 되었다. ‘자격 미달’이라는 말이 그녀를 더 독하게 만들었다.
공이 서윤에게 왔다. 상대 수비수 두 명이 압박해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뒤로 패스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강도욱의 조언을 떠올렸다. ‘중심을 낮추고 흐름을 읽어.’
서윤은 어깨로 상대를 밀쳐내며 턴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비어 있는 민아름을 향해 자로 잰 듯한 전진 패스를 찔러 넣었다.
“아름아, 뛰어!”
서윤의 외침에 민아름이 반응했다. 수비 라인을 깨고 들어간 민아름은 골키퍼와 1대 1 상황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슛은 골대를 살짝 빗나갔다. 골은 터지지 않았지만, 레이븐스 선수들의 눈빛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 것이다.
경기는 결국 0-4 대패로 끝났다. 그리핀스 선수들은 이기고도 찝찝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후반전의 레이븐스는 분명 전반전과는 다른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핀스 선수들이 가고 난 뒤, 훈련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강도욱은 선수들을 다시 중앙으로 모았다.
“오늘 한 골도 못 넣었으니 약속대로 저녁 훈련은 두 배다. 하지만….”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후반전의 움직임은 봐줄 만했다. 특히 마지막 패스 전개는 내가 원하던 그림에 10% 정도는 근접했어.”
강도욱의 입에서 나온 아주 작은 인정. 그것만으로도 선수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옥 같은 일주일 동안 처음 들어본 긍정적인 신호였다.
“한서윤, 남아서 뒷정리해라. 나머지는 해산.”
선수들이 떠나고 어두워진 운동장에 서윤과 강도욱만 남았다. 서윤은 묵묵히 흩어진 축구공을 주워 담았다. 발목이 욱신거려 걸음걸이가 조금 절뚝거렸다. 그때, 강도욱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 있던 공 가방을 뺏어 들었다.
“앉아.”
“네?”
“앉으라고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서윤은 벤치에 걸터앉았다. 강도욱은 그녀의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거친 손길로 그녀의 축구화 끈을 풀었다.
“가, 감독님! 제가 할게요.”
“가만히 있어. 부기 안 빠지면 내일 훈련 지장 생기니까.”
그는 미리 준비해온 얼음 주머니를 서윤의 부어오른 발목에 갖다 댔다. 차가운 감각에 서윤이 움찔했다. 강도욱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낮게 깔린 조명 아래로 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낮의 악마 같은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아까 하신 말씀… 진짜 제가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도욱은 얼음 찜질을 멈추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 눈은 거짓말 안 해. 넌 아직 리더로서 무르다. 착한 것과 좋은 리더인 건 다른 거야.”
그는 고개를 들어 서윤을 쳐다보았다.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서윤의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흡수하고 있어. 아까 그 턴 동작, 가르쳐준 적 없는데 스스로 해냈더군.”
“그건… 감독님이 무게 중심 낮추라고 하셔서….”
“그래. 넌 몸이 기억하고 있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천부적인 감각이다. 그걸 썩히지 마라.”
그의 칭찬 아닌 칭찬에 서윤의 가슴이 요동쳤다. 심장 박동 소리가 고요한 운동장에 울려 퍼질 것만 같아 그녀는 숨을 참았다. 강도욱은 서윤의 발목을 잠시 더 주무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힘들 거다. 그리핀스한테 무시당한 거, 리그 개막전에서 갚아줘야지.”
“네! 반드시 갚아줄 거예요.”
서윤의 대답에 강도욱은 아주 짧게, 하지만 분명하게 미소를 지었다. 비릿한 독종의 미소가 아니라, 동료를 바라보는 듯한 따스함이 섞인 미소였다.
“가봐. 늦었다.”
서윤은 절뚝거리며 라커룸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자 강도욱은 다시 전술판 앞에 서서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유난히 든든해 보였다.
그날 밤, 서윤은 일기장에 짧게 적었다.
‘독종 감독님은 생각보다 더 뜨거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드는 지옥이라면, 끝까지 견뎌보고 싶다.’
레이븐스의 상처는 여전히 덧나고 아팠지만, 그 밑에서는 조금씩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꼴찌 팀의 반란은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영글어 가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훈련장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선수들이 일찍 도착해 있었다. 서윤의 진심이, 그리고 강도욱의 집요함이 드디어 팀의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이었다. 강도욱은 만족스러운 듯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좋아, 오늘 훈련은 공포의 1대 1 돌파다. 다들 각오해.”
그의 목소리와 함께 레이븐스의 함성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
"내 축구 인생을 통틀어, 너처럼 내 전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더 발전시키는 미드필더는 없었다. 한서윤, 넌 이미 완벽한 레지스타야. 중국 놈들이 아무리 거칠게 밀어붙여도, 내 지식과 네 발끝이 결합한 이상 우린 지지 않아. 그러니까 잔디 위에서 다치지만 마라. 네 몸은 전적으로 내 것이기도 하니까.""네. 오빠가 뒤에서 이렇게 단단한 성벽으로 버티고 서 있는데 제가 왜 다쳐요. 레이븐스의 완장, 그리고 국대의 10번 유니폼 절대 안 부끄럽게 하고 올게요."서윤은 그의 가슴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기댔다. 사방을 채운 고요한 분석실의 공기 속에서, 서로의 심장이 완벽하게 같은 궤적과 속도로 박동하고 있음을 느끼며, 두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갈 다음 전장은 두려움이 아닌 완벽한 승리의 무대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진흙탕 속의 지휘관동아시아컵 2라운드가 열리는 당일 새벽부터 하늘에는 먹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상공을 가득 메운 먹구름은 이내 붉은 노을마저 집어삼키며 거대한 폭우의 전조를 알렸다.경기 한 시간 전부터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초록색 잔디를 순식간에 축축하게 적셨다.잔디 배수 시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내리는 비는 군데군데 물덩이를 만들어냈다. 수중전은 선수들의 체력 소모를 배로 늘릴 뿐만 아니라, 공의 궤적을 불규칙하게 바꾸고 부상의 위험을 극단적으로 높이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특히 선 굵고 거친 피지컬 축구를 구사하는 중국 대표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셈이었다.라커룸 안의 공기는 가라앉은 습도만큼이나 무거웠다. 서윤은 벤치에
도욱의 거침없고 서늘한 경고에 권 위원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흙빛으로 변했다. 대한민국 축구의 레전드이자 무서운 기세로 명장 반열에 오른 강도욱의 사회적 영향력을 알기에, 권 위원장은 감히 더 대꾸하지 못하고 혀를 차며 자리를 피했다.주변의 소음이 잠시 가라앉은 틈을 타, 도욱은 웨이터의 트레이에서 와인 대신 시원한 생수 한 잔을 집어 서윤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가락 끝이 서윤의 손등을 가볍게 스쳐 지나갈 때,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과음은 축구선수에게 독이다, 한서윤 선수. 경기 끝났다고 긴장 풀지 마."그의 무뚝뚝한 어조 속에 담긴 지독한 다정함과 염려를 알기에 서윤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 감독님. 오빠가 제 타이밍에 딱 맞춰서 나타나 주신 덕분에 살았어요."서윤이 주변에 들리지 않게 아주 나직하게 '오빠'라는 호칭을 섞어 속삭이자, 도욱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서윤의 곁을 굳건히 지키며, 다른 스폰서나 위원들이 감히 그녀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방패 역할을 자처했다.매번 경기 후에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 거칠게 입을 맞추던 강박적인 패턴 대신,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막강한 권위와 능력으로 한 여자를 완벽하게 에워싸고 보호하는 그의 모습은 서윤의 가슴에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설렘을 선사했다."주말에 있을 2라운드 중국전은 오늘보다 훨씬 더 진흙탕 싸움이 될 거다. 저들은 피지컬로 우리 중원을 부수려 들 테지. 그러니까 오늘 밤에는 푹 자 둬.""네, 오빠만 믿고
도욱은 아무런 말 없이 서윤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채듯 끌어당겨 자신의 단단한 가슴팍에 완벽하게 밀착시켰다.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과 규칙적이지만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서윤의 온몸을 전율케 했다."오늘 경기, 내 전술의 완벽한 증명이었어."도욱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낮고 갈라져 있었다. 운동장에서 냉혹하게 호령하던 폭군 감독의 위엄은 지워진, 오직 한 여자의 성장에 감탄하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의 음성이었다."오빠가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잖아요. 전국의 카메라가 날 비추고 협회 노인네들이 내 이름 옆에 낙서를 해도, 전 오빠가 설계해 준 최고의 레지스타니까요. 도욱 오빠."도욱은 낮게 탄식하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한참 뒤 입술이 떨어졌을 때, 도욱은 서윤의 달아오른 뺨을 자신의 거친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무한한 애정과 자부심이 타오르고 있었다."축구협회 기술위원장 놈이 경기 끝나자마자 나한테 와서 네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하더군. 당장 다음 경기부터 널 주전 고정으로 가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널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게 내 감독으로서의 전술이지만…… 내 솔직한 마음은 그 오만한 시선들 속에 널 내어주는 게 지독하게 질투 나. 아무 데도 가지 마라, 서윤아. 넌 내 심장이니까."그의 거칠고도 애절한 독점욕에 서윤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깊은 사랑을 느꼈다. 서윤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으며 든든하게 미소 지었다.
'오빠, 내가 왜 오빠의 레지스타인지 똑똑히 보여줄게.'서윤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위치로 걸어갔다.삐익-!주심의 날카로운 휘슬 소리와 함께 전반전의 막이 올랐다. 경기는 시작과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템포로 전개되었다. 일본 대표팀은 소문대로 기술적 완성도가 엄청났다. 미드필더진의 정교한 삼각 패스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한국의 압박 라인을 유려하게 벗어났다.전반 10분, 위기가 찾아왔다. 일본의 에이스 미드필더가 한국의 수비진 사이로 칼날 같은 전진 패스를 찔러 넣었다. 패스의 궤적이 너무 정교해 포백 라인이 순간적으로 역동작에 걸렸다. 일본 공격수의 강력한 왼발 슈팅이 한국의 골문을 위협했으나, 골키퍼의 육탄 방어에 막혀 간신히 코너킥으로 이어졌다."라인 올려! 중원에서 공간 주지 마!"서윤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동료들의 위치를 재조정했다.국가대표팀의 붉은 유니폼이 땀으로 빠르게 젖어 들어갔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일본 선수들이 공을 돌리는 패스의 리듬과 동선이, 그녀의 시야 속에서 선형적인 데이터처럼 읽히기 시작했다. 강도욱 감독과 함께 매일 밤 지옥 같은 포지셔닝 훈련을 하며 체득한 공간 압축의 감각이었다.전반 25분, 중원에서 공을 잡은 일본의 사령탑이 다시 한번 전방으로 패스를 찌르려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서윤은 이미 상대가 공을 놓을 낙하지점을 예측하고 길목을 선점했다.탁!
한참 뒤 입술이 떨어졌을 때, 도욱은 서윤의 달아오른 뺨을 자신의 거친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눈빛에는 서윤을 향한 무한한 자부심과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주말에 있을 동아시아컵 첫 경기 개막전 일본전, 네가 선발로 낙점됐다. 오길상 감독이 방금 전 협회 기술위에 최종 명단 통보했어. 채리안은 벤치다."도욱의 든든한 소식에 서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마침내 기득권의 성벽을 실력으로 깨부수고 국가대표팀의 진짜 주전 사령관 자리를 쟁취해 낸 순간이었다."오빠가 위에서 버텨준 덕분이에요.""아니, 네 실력이 저 눈 먼 노인네들의 눈을 강제로 뜨게 만든 거야. 서윤아, 주말 경기장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가 뭔지 온 세상에 똑똑히 보여줘. 네 뒤에는 언제나 내가 가장 단단한 성벽으로 버티고 서 있을 테니까.""네. 나 절대 안 무너져요. 오빠의 명예도, 우리 레이븐스의 이름도 내가 그라운드 위에서 다 지켜낼게요."서윤은 그의 품에 다시 얼굴을 묻으며 세상 그 어떤 성벽보다 단단한 안정감을 느꼈다. 머나먼 거리에서도, 혹은 외부의 거대한 압박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완벽하게 같은 속도로 요동치고 있는 한, 다가올 동아시아컵의 전장은 두려움이 아닌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기적의 무대가 될 것이었다.밤이 깊어 외출 시간이 끝나갈 무렵, 서윤은 다시 파주 NFC로 돌아왔다. 본관 대강당 게시판에는 주말 일본전의 공식 선발 라인업 시트가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MF : 10. 한서윤 (레이븐스)]그녀
태오가 손을 흔들자 혜진은 괜히 쑥스러워 주변을 살피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와 시원한 음료가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코치님, 진짜 매번 이렇게 사람 부끄럽게 만드실 겁니까? 사복은 또 왜 이렇게 과하게 입고 오셨어요?"혜진이 투덜거리며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찔렀다. 태오는 턱을 괸 채, 혜진의 먹는 모습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나직하게 웃었다."과하게 입은 게 아니라, 혜진 선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신경 좀 쓴 겁니다. 파주에서 선배들 틈에 치이느라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 마음이 안 좋아서 밤새 잠도 잘 못 잤습니다.""참 나…… 코치님은 왜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세요? 저 정말 괜찮다니까요? 어제 훈련 때도 감독님한테 전술 수행 능력 좋다고 인정받았어요."혜진이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태오는 슬며시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작은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의 따뜻하고 묵직한 온기가 전해지자 혜진의 신체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잘 버텨줘서 고맙습니다, 혜진 씨. 레이븐스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매일 밤 데이터 확인해 줄 테니까 조금만 더 힘내요. 그리고 이건 코치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 하는 말인데……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태오의 청량하면서도 진심 어린 직진에 혜진은 결국 참았던 미소를 터뜨리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혹독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직 자신만을 온전히 바라봐 주는 남자의 존재는, 그녀의 거친 축구 인생에 가장
“가장 소중한 부품이니까, 아껴야지.”“부품이라니… 표현이 참 감독님다워요.”서윤이 투덜거리자 도욱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좁은 감독실 안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한서윤, 약속해라. 경기장 안에서는 감독인 내 말에 절대복종해. 하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내 심장에만 복종해.”
“은주야, 일찍 왔네?”서윤의 부름에 은주가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어, 언니. 아…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어제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자꾸 생각나서… ‘골키퍼가 흔들리면 팀 전체가 공포에 질린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동안 너무 무책임했던 것 같아서요.”서윤은 은주의 어깨를 꽉 쥐었다.
강도욱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의 조롱 섞인 비웃음이 아니라,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자조적인 미소였다.“난 이미 한 번 멈춘 몸이다. 내 다리가 멈췄을 때,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지. 하지만 축구는 멈추지 않더군. 내가 없어도 경기는 계속되고, 사람들은 새로운 스타를 찾아 떠나. 그게 얼마나 잔인한지 넌 모를 거다.”그는 자신의 오른쪽 무릎을
서윤은 코 끝이 찡해졌다. 독종이라 불리며 선수들을 몰아붙이던 남자는, 사실 누구보다 이 팀에 진심이었다. 그는 선수들이 잠든 시간에도 그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저… 감독님.""말해.""왜 저한테 그렇게 엄격하신가요? 주장 완장도 뺏으시고, 다른 선수들보다 더 심하게 몰아붙이시는 것 같아요."그제야 강도욱이 마커를 내려놓고 서윤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네가 이 팀의 심장이니까."서윤의 숨이 멎는 듯했다."심장이 멈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