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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린 자들의 몰락

나를 버린 자들의 몰락

By:  이야기꾼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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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를 백 년간 주름잡아 온 부씨 집안은 약육강식을 가문의 신조로 삼았다. 그런 집에서 자라온 양자인 나 또한 26년 동안 뺏고 빼앗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후계자 발표회에서 아버지는 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장남이 승계해야죠.” 자리를 가득 채운 인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내가 후계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전부 쏟아부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기억이 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비정상적으로 빡센 엘리트 교육을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수행해 왔다. 형이 싸움질을 하다가 정학을 당하는 동안, 나는 월반해서 최상위권 대학의 학·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았다. 똑같이 1천만 원의 자금으로 창업했으나, 형은 도박에 빠져 2억 원의 도박 빚을 졌고 나는 사업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끝내 형은 파산해서 청산 절차를 밟았고, 나는 회사를 이끌고 해외 시장을 개척해 시가총액 20억 원을 훌쩍 넘기는 성과를 이뤘다. 나는 내가 강자이며, 왕관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BS그룹 후계자 자리도 내 것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일으켜 세울 수 없는 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일말의 흔들림 없이 형을 택했다. 형의 도발적인 웃음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너무 꽉 깨물었는지 입안에 번지는 피 냄새가 오히려 나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이에 나는 문득 지난 26년의 노력과 모든 성과들이 그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내가 이룬 성과가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아버지는 반드시 형에게만 회사를 물려줄 인물이었다. 기가 차는 상황에 나는 차갑게 웃었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그렇다면 앞으로 원망이나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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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저 꼴 좀 봐요. 진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나 봐요.”

양옆에 여자를 낀 유씨 집안 도련님 유도현이 얼굴이 벌게진 채 내 앞을 막아섰다.

“참으로 안됐네요, 부 사장님. 아니,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나는 술잔을 든 채 움직이지 않고 유도현을 한 번 훑어보았다.

“누구시죠?”

“아니, 부예찬 씨! 곧 쫓겨날 판에 무슨 도련님 행세를 하는 거죠?”

나는 점점 일그러지는 유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이제 기억났네.’

유도현은 어젯밤에도 내 사무실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세 번이나 찧으면서 유씨 집안과 협력해 달라고 빌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했다.

‘유씨 집안의 규모조차 내 눈에 차지 않는데, 저런 인간이 지금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는 건가?’

‘유도현, 뒤끝 하나는 제대로 있는 인간이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런 거지 나부랭이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어. 분명 또 대단한 형이 꾸민 짓이겠지.’

부자간의 사랑이 넘치는 눈물겨운 이 연극도 다 봤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런 결과는 철저하게 사람을 실망시킬 뿐이었다.

계속 짖어대는 유도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부예찬 씨, 거기 서요! 진짜 이대로 가겠다는 거예요?”

“이야, 한때 그렇게 잘나갔던 사장님께서 이제는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도망치는 신세라니, 정말 놀라워요!”

내 앞길을 막은 유도현은 악의와 조롱이 가득 찬 얼굴로 웃었다.

“부예찬 씨, 당신 그 별 볼 일 없는 회사 시가 총액이 20억이 됐다면서요? 그냥 나한테 넘겨요. 어차피 곧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텐데 힘 빼서 뭐 해요?”

“지금 좋은 거 좀 갖다 바치면 한 번쯤 기회를 줄 생각도 있어요. 뭐 심플하게 내 밑에서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건 어때요?”

자존심을 한없이 깎는 유도현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는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잽싸게 말을 받았다.

“20억을 가지고 뭘 그래? 부씨 집안에서 20억은 껌값이지. 큰 도련님 용돈만 해도 그것보다 많을 텐데?”

“그리고 유도현, 너도 참 취향이 별나긴 하다. 진짜 취향도 특이하네. 저런 건 공짜로 줘도 나는 안 가져. 하하하하하.”

오른쪽에서 여자들이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그때 부예찬 사장님 밑에서 그렇게 목숨 걸고 일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더니 눈을 흘겼다.

“나는 진짜로 부예찬 사장님이 후계자가 될 줄 알았거든.”

그 말에 옆에 있던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멍청해서 그래. 네가 잘못 건 거야.”

“그러게. 지금 바로 상후 도련님한테 가서 일손이 필요하지 않은지 물어볼래.”

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다는 듯 여자는 나를 노려보았다.

샴페인 잔을 들고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장명석 사장은 비틀거리는 데다가 온몸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장명석은 잔을 들어 내 쪽으로 흔들어 보이더니, 손을 뻗어 술을 내 발치에 끼얹었다.

나는 더러워진 바짓단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쯧, 더럽기 짝이 없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요. 그런데 부씨 집안이 여는 행사가 개나 소나 들어올 수 있는 자리는 아니잖아요.”

곧 장명석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크게 웃었다.

“예찬 씨, 낙심하지 마요. 능력이 좋으니까 아무 회사에나 들어가도 재기할 수도...”

장명석은 눈을 굴리며 일부러 말을 끊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명석은 몸을 돌려 그 사람들과 잔을 부딪쳤다.

“솔직히 말해서 양자 주제에 시가총액 20억짜리 회사를 만들었다는 게 말이 돼요?”

“내가 보기엔 본인 돈을 부어서 겉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은 거 아닌가 싶어요.”

“그 정도 수익으로 그럴싸하다고는 못 하죠. 아마 속옷까지 탈탈 털어서 만들었을 텐데요?”

“내가 보기엔 저 문으로 살아서 나갈 방법이나 먼저 궁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몇 사람은 내 앞에서 또 크게 웃어 댔지만 나는 무념무상으로 옆에 서 있었다.

“비키세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차기 회장님께서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하던데요?”

몇 명은 나에게 위협을 가하듯 에워쌌다.

부상후는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보더니 마침내 단상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비키면서 모두가 몸을 돌려 부상후를 바라봤다.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부상후의 구두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뚜벅뚜벅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사람들의 가슴팍을 짓밟는 것처럼 위압감이 엄청났다.

곧 부상후는 내 앞에 와서 멈춰 섰다.

눈을 내리깔고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 속에는 살얼음 같은 찬 기운이 가득 어려 있었다.

“예찬아.”

부상후가 입을 열었다.

별로 높지 않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떠들썩하던 홀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원래대로라면 너는 나한테 졌기 때문에 우리 집안 사람이라는 신분을 박탈당해야 해.”

“또한 집안의 룰에 의해 제일 큰 벌을 받고 암시장에 던져지겠지. 그때부터 죽든 살든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거고.”

부상후는 자신의 손을 내 어깨에 툭 하고 얹었다.

엄지로 내 어깨를 누르기 시작하더니 힘이 조금씩 실리기 시작했다.

마치 내 뼈를 부러뜨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도 우리가 한때 형제였던 걸 생각해서, 네가 길바닥에 나앉는 꼴은 차마 못 보겠거든.”

부상후는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서더니 피식 웃으며 불쌍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게다가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 곁에 붙어서...’

부상후는 조롱하는 눈빛으로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더니 내 눈을 응시했다.

“개 노릇이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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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저 꼴 좀 봐요. 진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나 봐요.”양옆에 여자를 낀 유씨 집안 도련님 유도현이 얼굴이 벌게진 채 내 앞을 막아섰다.“참으로 안됐네요, 부 사장님. 아니,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죠?”나는 술잔을 든 채 움직이지 않고 유도현을 한 번 훑어보았다.“누구시죠?”“아니, 부예찬 씨! 곧 쫓겨날 판에 무슨 도련님 행세를 하는 거죠?”나는 점점 일그러지는 유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 이제 기억났네.’유도현은 어젯밤에도 내 사무실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세 번이나 찧으면서 유씨 집안과 협력해 달라고 빌었던 사람이었다.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단칼에 거절했다.‘유씨 집안의 규모조차 내 눈에 차지 않는데, 저런 인간이 지금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는 건가?’‘유도현, 뒤끝 하나는 제대로 있는 인간이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이런 거지 나부랭이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어. 분명 또 대단한 형이 꾸민 짓이겠지.’부자간의 사랑이 넘치는 눈물겨운 이 연극도 다 봤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정말이지 이런 결과는 철저하게 사람을 실망시킬 뿐이었다. 계속 짖어대는 유도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부예찬 씨, 거기 서요! 진짜 이대로 가겠다는 거예요?”“이야, 한때 그렇게 잘나갔던 사장님께서 이제는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도망치는 신세라니, 정말 놀라워요!”내 앞길을 막은 유도현은 악의와 조롱이 가득 찬 얼굴로 웃었다.“부예찬 씨, 당신 그 별 볼 일 없는 회사 시가 총액이 20억이 됐다면서요? 그냥 나한테 넘겨요. 어차피 곧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텐데 힘 빼서 뭐 해요?”“지금 좋은 거 좀 갖다 바치면 한 번쯤 기회를 줄 생각도 있어요. 뭐 심플하게 내 밑에서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건 어때요?”자존심을 한없이 깎는 유도현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는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잽싸게 말을 받았다.“20억을 가지고 뭘 그래? 부씨 집안에서 20억은 껌값이지. 큰 도련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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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가 곧 웃음이 터져 나왔다.“개 노릇이라니, 하하하.”“축하드려요! 이제는 부상후 부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오늘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있네요!”“어떻게 보면 부예찬 사장님도 운이 좋은 거죠. 부회장님 곁에서 개 노릇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복 받은 거 아닌가요?”샴페인 잔이 부딪치며 쨍그랑거렸고, 웃음소리는 파도처럼 사방에서 밀려오는 듯했다.나는 사람들 틈에 섞인 채 기고만장한 부상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날카롭던 눈빛이 이내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면서 웃었다.‘부상후.’ ‘나를 부씨 집안에 남겨 두다니,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보네.’“예찬아, 이미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았어. 말 안 들으면 죽는 줄 알아, 알겠어?”부상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향해 웃더니 블랙카드 몇 장을 꺼내 들었다.“자, 이 카드를 잡는 사람은 한 사람당 2억씩 가져갈 수 있어요! 차기 회장이 된 걸 축하하는 의미로 제가 쏠게요!”“부상후 부회장님 만세!”다음 날 이른 아침, 부씨 저택.평소 내 옆자리에만 앉던 여동생 부세아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내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앞으로는 내 옆에 앉지 마.”부세아는 우유잔을 들면서도 말투만큼은 평소 내게 어리광을 부리던 때와 똑같았다.“똥물이 나한테까지 튀면 곤란하니까.”아버지는 신문을 한 장 넘기더니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양자는 역시 급이 안 돼. 우리 집안에 남고 싶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해.”신문을 내려놓은 아버지는 그릇을 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나는 평소 얌전하기만 하던 부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세아야,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그러자 부세아가 나를 향해 눈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뭘 봐! 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전에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던 거고. 지금 보니 오빠는 내가 따를 가치조차 없더라.”“나는 이제 큰오빠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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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부상후가 BS그룹을 넘겨받은 지 사흘째 되던 날, 큰 사건이 하나 터졌다.해외의 잘 알려지지 않은 Q재단에서 협력 제안이 들어왔는데, 그 규모가 무려 600억 원에 달했다.부상후는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얼마나 신이 났는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네, 아버지. 바로 그 재단이에요!”“600억짜리 프로젝트를 제가 따냈어요!”“제가 반드시 잘해서 BS그룹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게요.”그 말을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홍정원은 눈시울을 붉혔다.[아들, 엄마는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예찬이 걔가 26년 동안 발버둥을 쳐도 무슨 소용이야? 너는 사흘이면 충분한데.]부상후는 서류를 탁자에 내던졌다.서류가 촤르륵 흩어졌다. 소파에 털썩 몸을 묻은 채 다리를 꼬던 부상후는 나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부예찬, 이리로 빨리 튀어와.”“형, 말은 똑바로 해.”나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서 일어나 부상후에게 걸어갔다.기분이 좋아서인지 오늘따라 나에게도 꽤나 부드럽게 굴었다.곧 부상후가 발끝으로 탁자 모서리를 툭툭 건드렸다.“봤어? 해외 Q재단이 나한테 600억짜리 프로젝트를 같이하자고 매달렸어.”나는 고개를 숙여 펼쳐진 서류를 한 번 훑어보다 시선이 오른쪽 아래로 미끄러졌다.원형의 직인이 페이지 끝에 찍혀 있었다. 회사 사인란의 Y라는 이니셜이 천장 조명을 받으면서 희미하게 반짝였다.그때 부세아가 갑자기 휴대폰을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화면 속 SNS 게시물 아래에는 벌써 ‘좋아요’가 백 개 가까이 달려 있었다.“봤어? 작은오빠가 그렇게 오래 애써 봐야 뭐 해? 이런 큰 프로젝트는 큰 오빠가 따냈는데...”“역시 엄마 말이 맞았어. 솔직히 나랑 큰오빠는 원래 가족이지만 작은 오빠는 애초에 양자였잖아.”“그러면서 우리 집안의 것까지 탐내다니, 정말 욕심이 끝이 없나 봐.”부세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곧 부상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서류를 내 앞으로 밀었다.“이거, 잘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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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사무실에서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그때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온 부세아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아직도 밤새고 있어?”“작은오빠는 개 노릇도 이렇게 열심히 하네. 어쩐지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다 싶었어.”그 뒤를 따라 고지호가 들어오면서 코웃음을 쳤다.“세아야, 지금 네 작은오빠는 상후 형한테 길들여져서 찍소리도 못 하는 사람이야. 어떻게 너네 집안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나는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담요를 끌어다 얼굴을 덮었다.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두 사람도 재미가 없었는지 돌아갔다.당직을 서던 청소 아주머니가 문 앞을 지나다가 따뜻한 물 한 컵을 들고 들어왔다.책상 모서리에 컵을 내려놓더니 내 눈을 가리켰다.“아무리 젊어도 밤은 그만 새요. 눈이 다 빨개졌어요.”나는 고개를 들고 청소 아주머니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거의 다 끝나 가요.”청소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더니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그래, 다 끝나 가.’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내가 내부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이 증거들을 찾아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더 걸렸을 테니까.내가 기획안을 건넸을 때, 부상후는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리고 그 기획안을 받지도 않고는 발끝으로 탁자를 툭툭 차며 말했다.“거기 놔둬.”그러나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물었다.“형, 600억짜리 프로젝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굳이 내가 말해 주지 않아도 되겠지?”“쯧, 네가 알려 줄 필요 없어.”부상후는 짜증 났는지 몸을 일으켜 서류를 두어 장을 넘기고는 곧바로 펜을 집어들고 사인했다.펜촉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면서 잉크가 배어들었다.곧이어 부상후는 고개를 들더니 꺽하고 트림을 했다.“됐어. 꺼져.”나는 사인부터 확인했다.그때 등 뒤에서 부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큰오빠, 작은오빠가 수작을 부릴 수도 있는데 그건 안 무서워?”“쟤가 감히? 쟤는 우리 집안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야. 본인이 아무리 싫어도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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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아버지의 손에 들린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까딱했다가는 내 뺨을 스쳤을 것이다.휙 하고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려 퍼지자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러나 그때,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흰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그 뒤로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경호원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왔다.일렬로 늘어서서 문을 막는 경호원들에 의해 복도의 불빛마저 완전히 차단됐다.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부상후는 코웃음을 쳤다.“예찬아, 너 진짜 대단하다. 그렇게 몰락하고도 너 대신 나서 줄 여자가 있었던 거야?”부상후는 끈나시를 입은 심채원를 위아래로 훑다가 여자의 목선을 잠시 응시했다.그러더니 여자를 보는 안목을 인정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얼굴은 그럭저럭 괜찮네요. 마침 잘됐어요. 내가 거둬줄 테니까 같이 남아요.”그러나 심채원은 부상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나를 봤다.시선은 부경태가 들고 있는 채찍으로 향했다가 다시 부경태의 얼굴에 꽂혔다.“부경태 회장님.”심채원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그럼에도 오한이 들 정도로 싸늘했고, 마치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는 듯한 위협감이 가득했다.“지금 손에 들고 계신 건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오늘 부예찬 씨를 다치게 하면 뒷일을 감당하지 못하실 거예요.”미간을 잔뜩 찌푸린 아버지가 눈앞의 새파랗게 어린 심채원을 위아래로 살폈다.“당신은 누군가요? 여기는 BS그룹 사무실인데, 어떻게 들어왔어요?”“경비는 뭐 하고 있지? 저 사람들을 당장 내보내지 않고!”그때 심채원이 코트 자락을 한쪽으로 젖히더니 서류뭉치를 꺼내서 부상후의 가슴팍에 던졌다.‘촥’ 소리와 함께 서류가 허공에 날렸다.“다들 저한테 예의를 갖추시죠.”부상후가 고개를 숙여 서류 표지에 찍힌 금박 로고를 한 번 확인했다.그 순간,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그러나 이내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뻗어 서류를 받아서 들었다.태도가 순식간에 180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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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사무실에 잠시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문가에서 기어 일어난 부세아는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 새도 없이 단숨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그러고는 내 소매를 붙잡고 흔들며 어리광을 부렸다.“작은오빠, 그날 한 말은 전부 홧김에 한 거야. 오빠가 나를 제일 아끼는 거 알아. 그러니까 나한테 화내지 마.”이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연히 부세아를 계속 아꼈을 것이다.‘그런데 세아야, 너는 이미 나를 실망시켰어.’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 소매를 움켜쥔 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손톱에는 막 네일을 받았는지 말린 장미색으로 곱게 칠해져 있었다.“어제 올린 SNS 게시물, 지웠어?”그 질문 하나에 부세아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부세아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입만 벙긋거렸다.그 모습은 마치 물 밖으로 건져 올려진 물고기와도 같았다.“작은오빠, 난, 난 그때 철이 없었어. 지금 바로 지울게, 바로 지울게!”부세아는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냈다.잠금을 풀면서 손가락이 떨렸는지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다.그러자 화면에는 정확한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았다는 경고문구가 떴다.“잠깐만, 내가...”그러나 나는 부세아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그저 부세아의 손가락 사이에서 옷소매를 빼냈다.내 손끝이 손바닥을 스치자 부세아는 뭔가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움츠렸다.그리고 휘몰아치는 이런 상황에서도 부경태는 책상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선만 바닥에 떨어진 채찍에서 내 얼굴로, 내 얼굴에서 다시 심채원의 얼굴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내 얼굴로 이동했다.입술을 달싹이는 걸 보니 뭔가 삼키기 힘든 걸 애써 삼키려는 것 같았다.“예찬아.”부경태는 한참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았고 심지어 보기 드문 온화함까지 배어 있었다.“사실 그때 너를 여기로 보낸 건 전적으로 너를 하드 트레이닝 시키려던 거였어. 너는...”부경태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는지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그리고 너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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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그날 밤 부씨 저택 서재는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물론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하지만 심채원이 보낸 사람이 부상후의 서재에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기에, 화면은 내 암호화 단말기로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화면 속에서 부상후는 책장에 꽂혀 있던 골동품을 하나씩 바닥으로 내던지고 있었다.청화백자 화병 세 개가 산산이 깨졌고, 크리스털 재떨이는 유리창을 뚫고 아래로 떨어졌다.그때 문밖에서 부세아가 문을 두드렸다.“꺼져!”그 고함 한마디에 부세아는 문전박대를 당한 채 돌아가야 했다.날이 밝아 올 무렵, 부상후는 마침내 손을 멈췄다.그리고 폐허나 다름없는 서재 한가운데에 앉아서 전화를 걸었다.[조사해요. 심채원의 배경, 부예찬이 해외에서 벌인 모든 일들, 더럽고 썩은 건 전부 파헤쳐요.][돈은 상관없어요, 제일 실력 좋은 사람으로 찾아줘요.][씨발,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건지. 걔가 어떻게 해외에서 재벌로 유명한 진씨 집안 사람이에요?][걔가 우리 집안에서 그렇게 움츠리고 산 세월이 얼만데! 아무튼 나는 못 믿어요!]나는 찻잔을 들고 등받이에 기댄 채 부상후가 전화를 끊고 다시 두 번째 번호를 누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지호야, 너 아는 사람 많잖아. 가서 예찬이 그 별 볼 일 없는 회사 장부 좀 뒤져 봐. 나는 걔가 그렇게 깨끗할 리 없다고 봐.][약점만 잡으면 진씨 집안이든 나발이든 상관없어. 나한테 약점을 잡히면 어떻게 되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화면 속 부상후의 얼굴은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이마에 핏줄까지 툭 튀어나온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곧 부상후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소파에 내던졌다.휴대폰은 몇 번 튕기면서 파편 더미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키보드로 네 글자를 쳤다.[정보 흘려.]옆에 서 있던 심채원이 손에 든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얼마나?][30%.]나는 엔터 키를 눌렀다.[맘대로 뒤지도록 놔둬. 깊이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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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부상후가 얼마나 다급하게 부경태의 사무실로 뛰어왔는지, 문은 남자의 발길질에 힘없이 열렸다.“아버지! 이거 좀 보세요!”부상후가 맨 위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손가락은 바들바들 떨려 금방이라도 종이를 뚫어버릴 듯했다.“예찬이 밖에 얼마나 숨겨 놨는지 보세요!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만 해도 6천억이 넘어요! 이런 걸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하는 거예요!”부경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종이 뭉치를 들고 한 장씩 넘겼다.그러다 네 번째 장 중 가운데에 있는 리스트에서 시선이 멈췄다.그 리스트에는 회사 이름 5개가 적혀 있었다.부경태는 한 줄 한 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5개는 BS그룹의 가장 중요한 핵심 거래처이자, 해마다 BS그룹 매출의 30% 이상을 책임지던 바로 그 회사들이었다.이름 뒤에는 거래 기간까지 적혀 있었다.가장 짧은 곳이 7년, 가장 긴 곳은 무려 12년이었다.모두 부예찬이 정식으로 사업에 발을 들인 시기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거래해 온 회사들이었다.그 순간, 부경태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손끝에서 서류 뭉치가 미끄러지면서 촤르륵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흩어졌다.부경태는 떨리는 손으로 그중 한 줄을 가리켰다.“이, 이게 다...”그러나 부상후는 아직 뭐가 문제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한 걸음 다가가 흩어진 종이를 다시 한데 모은 뒤 부경태의 앞으로 들이밀었다.“맞아요! 전부 쟤 거예요! 밖에서 이렇게 큰 판을 벌여 놓고 모두를 속인 거예요!”“제가 알아보니까 걔가 인정받고 돌아간 건 2년 전인데, 이 회사들의 대규모 인사 변동은 전부 5년 전이에요.”“예찬이 그때 이런 회사들의 지분을 이렇게 많이 소유할 만한 자금력을 가졌을 리가 절대 없어요.”“그러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에요. 저는 걔가 공금을 횡령했거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자금을 조달했다고 봐요.”“아버지, 우리가 지금 예찬이 약점을 잡은 거라고요!”그러나 부경태는 손을 들어 부상후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그 손은 한참 동안 허공에 떠 있었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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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석 달 뒤.개인 소유의 섬에 부는 바닷바람에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배어 있었다.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심채원이 쓰고 있는 면사포가 살짝 들썩였다.곧 손을 뻗어 면사포를 누른 채, 고개를 돌린 심채원은 나를 보면서 눈꼬리가 휘도록 웃었다.“뭐가 그렇게 긴장돼?”“아니, 긴장 안 했어.”“손이 떨리는데?”나는 고개를 숙여 샴페인 잔을 든 내 손을 한 번 보았다.잔 속의 술이 정말로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나는 웃음을 흘리며 잔을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결혼은 처음이라서... 이해해줘.”그 말을 달리 들었는지 심채원은 팔꿈치로 강하지 않게 나를 툭 쳤다.“재혼할 배짱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든가.”나와 심채원의 옆에는 진씨 집안의 집사가 메인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주경호는 빳빳하게 다린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가슴에 은색 브로치를 달았고, 손에는 레드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5년 전 처음 만났던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그날 주경호는 이렇게 말했다.“도련님, 진씨 집안 어르신이 임종하시며 도련님을 찾으라고 하셨어요. 도련님이야말로 진씨 집안의 유일한 핏줄이에요.”주경호가 나에게 한바탕 설명을 해 주자 그때의 나는 이렇게 말했다.“당장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전 BS그룹에서 조금 더 해 보고 싶어요.”그 말에 주경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명함 한 장을 내 손에 쥐여 준 뒤 말없이 돌아서서 떠났다.그랬던 주경호가 지금 내 앞에 서서 잔을 들어 보이며 축하해줬다.“도련님.”“집사님.”주경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힘은 세지 않았지만 꽤나 묵직했다.손바닥의 온기는 정장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전해져 왔다.주경호가 입을 열었다.“도련님, 어르신께서 이런 도련님을 보셨다면 아주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도련님 나이였을 때의 어르신도 지금의 도련님과는 견줄 수 없어요.”“다만 이 길을 택하지 않으셨더라도 진씨 집안은 도련님을 먹여 살릴 수 있었고요.”그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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