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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후사라는 말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5 18:49:28

노가가 어원에 든 까닭은, 야연이 끝나기 전에 드러났다.

배중곤이, 술기운을 빌린 듯 슬며시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래 골라 둔 말이었다.

"섭정왕 저하께서 가례를 올리신 지도, 벌써 한 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저하께는 아직, 후사가 없으시지요."

자리의 소리가, 잠깐 낮아졌다.

*

후사라는 말은, 함부로 꺼낼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배중곤은 그것을, 나라의 일로 포장해 꺼냈다. 섭정왕은 나라의 기둥이니, 그 대를 이을 후사가 하루빨리 있어야 한다는 것. 정비 하나로 후사가 더디면, 측실을 들여 후사를 서두르는 것이 문벌의 오랜 법도라는 것.

그 말끝에, 노경이 받았다.

"청하 노가에, 재덕을 갖춘 여식이 있습니다. 저하의 후사를 돕는 자리라면, 가문의 영광이겠습니다."

노예원이,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듯 숙였으나, 숙인 고개 아래로 눈빛은 또렷했다.

*

월령은 그 말을, 흔들리지 않고 들었다.

측실. 후사. 문벌의 법도.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으나,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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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5. 불

    "…어디.""향방 쪽이요. 담 안 서쪽. 연기가 검어요."월령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걷고 있었다. 걷다가 뛰었다. 봄은 방어멈 품에 있었다. 청아가 뒤에서 따라왔다. 기윤은 이미 없었다. 지붕을 탔다.궁 앞 길이 길었다. 군이 지나간 먼지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길. 그 위로 검은 연기가 한 줄 올라갔다. 자녕궁 담 안에서. 바람이 없어서 연기는 곧게 섰다.*봉쇄 문 앞에 병사 여섯이 서 있었다.문을 등지고. 안을 보지 않고. 연기가 제 등 뒤에서 올라가는데, 여섯이 다 앞을 보고 있었다."문을 열어라."월령이 말했다. 병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숙인 채 말했다."황명이옵니다, 왕비마마. 드나드는 자 없이. 저희는 문을 못 엽니다.""안에서 불이 났다.""…압니다.""황자 생모가 그 안에 계시다. 타 죽으면, 그게 황명이냐."병사장이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문을 열면 황명을 어긴 것이고, 안 열면 후궁이 탄다. 그 둘을 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서 있으라는 사람이었다.담 안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궁인의 비명이 한 번."…곤원전 마마의 이름으로 연다."월령이 말했다."뒷일은 곤원전과 내가 진다. 열어라."병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월령을 보았다. 황후의 패도, 황후의 사람도 없었다. 섭정왕비 하나가 서 있었다. 그 뒤에 시비 하나.병사장이 봉인지에 손을 댔다. 종친부 인이 찍힌 종이가 찢어졌다. 문이 열렸다.*연기가 먼저 나왔다.낮고 검은 연기. 향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상궁이 짓던 향. 그 향이 타는 냄새였다. 회랑 끝 향방 문에서 불이 혀를 내밀고 있었다. 궁인 셋이 물통을 들고 오갔다. 셋 다 얼굴이 검었다. 셋 다 아무 말이 없었다.설련이 없었다."…설련 언니!"청아가 소리쳤다. 소리치고, 뛰었다. 월령이 그 소매를 잡기 전에. 연기 속으로. 겁먹은 얼굴로. 겁먹은 채 손이 먼저 가는 아이였다. 늘."청아—"기윤이 지붕에서 내려왔다. 소리 없이. 청아가 들어간 회랑으로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4. 살구나무 마을

    출정 전야에, 월령이 품에서 꽃잎 봉지를 꺼냈다.네 장. 한 장은 그의 소매에 있었다. 월령이 그 봉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받지 않고, 도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한 장은 부군이 가지고 가셔야지요. 소매 거 말고요.""소매 것으로 된다. 오늘 밤은 네가 다 가져라. 넷 다."월령이 봉지를 쥐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봉지째 쥐었다."…살구나무 마을이 탔다.""알아요.""내가 거기 간다. 가서, 남은 게 있으면 찾는다. 첫 장이든, 나무든.""나무는 탔겠지요.""뿌리는 안 탄다."그가 말했다. 짧게. 그 말이 격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월령은 알았다. 살구나무는 뿌리로 산다.*그가 그녀를 당겼다.등불을 끄지 않았다. 옷고름을 푸는 손이 오늘은 느리지 않았다. 느릴 시간이 없었다. 새벽에 떠났다. 그런데 서두르지도 않았다. 서두르는 것과 느리지 않은 것은 달랐다.입술이 닿았다. 숨이 섞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받쳤고,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쥐었다. 자국이 있는 자리. 두 번 낸 자국. 오늘 세 번째."…부군.""음.""돌아오세요. 두 번은—""안 늦는다."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끊고, 그 입술을 제 입술로 막았다. 무게가 실렸다. 월령의 무릎이 풀렸고, 그가 그것을 받았다. 이름을 불렀다. 한 번. 그 한 번에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부군이 아니라, 이름으로."…지헌."그의 숨이 목 깊은 데서 끊겼다.*한참 뒤, 그가 그녀의 등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불렀어요.""두 생 동안 처음이다.""알아요. 그래서 불렀어요."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에 얹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월령은 그가 무엇을 삼키는지 알았다.*새벽에 군이 섰다.북경군 본대. 왕부 앞에서 궁 앞으로, 궁 앞에서 북문로로. 위지헌이 말에 올랐다. 검은 대창포, 옥관. 강무진이 그 뒤. 정무가 그 옆. 북영에서 밤길을 내려온 위명서가 그 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3. 북에서

    급보는 낮에 왔다.북문군 파발. 흙먼지를 뒤집어쓴 군사가 왕부 대문 앞에서 말에서 굴러 내렸다. 강무진이 그를 받았다. 붕대 푼 팔로."…흑령이 국경을 밟았습니다. 사흘 전에. 염로 초소 둘이 무너졌고요.""둘.""예. 그리고 군량이… 군량이 샙니다, 나리. 염로 물표가 가짜가 섞여서, 어디로 새는지 아직."강무진이 파발을 안으로 들였다. 물 한 그릇을 제 손으로 떠다 주었다. 오른손으로."…나리. 나리도 북에 가십니까.""간다. 왕야가 가시면.""그럼 저도 같이. 길은 제가 압니다.""길은 나도 안다. 근데 너는 자라. 사흘 달렸으면."파발이 물그릇을 든 채 벽에 기댔다. 기대자마자 잤다.*심각의 서신이 그 뒤에 왔다.월령의 오라비. 북문군에서 부장으로. 글씨가 급했다. 급한 글씨로 전황을 적었다. 흑령 본대의 위치, 초소가 무너진 날, 그리고 물표.월령이 그 물표 번호를 보았다. 소매에서 낡은 물표를 꺼냈다. 명부지기의 것. 삭원 염로.번호가 같았다."…같아요.""뭐가.""군량이 새는 물표하고, 명부지기가 쥐고 죽은 물표요. 같은 번호예요. 발행처가 같은 손이에요."위지헌이 두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낡았고 하나는 새것이었다. 같은 번호가 두 번 찍혀 있었다.*편전에서 경화제가 그것을 들었다.병상이 아니었다. 아직은. 그러나 기침을 한 번 했다. 고 내관이 그 기침을 세었다."…출정이다."경화제가 말했다."지헌아. 네가 간다. 북경군 본대로.""예."경화제가 섭정왕비를 함께 들라 한 자리였다."도성은."위지헌이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못했다. 도성에 봄이 있었다. 봉쇄된 자녕궁에 설련이 있었다. 그 자녕궁에 숙비가 있었다. 그가 도성을 비우면, 담 밖에 세운 군도 함께 빈다."…도성은, 신첩이 있사옵니다."월령이 말했다. 편전에서. 낮게, 그러나 다 맺어서.경화제가 그녀를 보았다. 옥필을 굴리지 않았다."섭정왕비가.""예. 폐하께서 뒤에 계시옵고, 황후마마가 곁에 계시옵니다. 신첩은 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2. 담

    봉쇄된 담에는 소리가 없었다.초비가 지붕에서 그 담을 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아가 저녁부터 새벽까지. 궁인 셋이 드나들었다. 물을 긷고, 땔감을 들이고. 설련은 봉쇄 뒤로 이틀째 안 보였다. 창가에 서지 않았다. 휘장이 내려진 채였다."…아무것도요."초비가 왕부에 그것을 전했다. 장작을 패다 온 손이었다. 손등 흉터에 나무 부스러기가 앉아 있었다."궁인 셋은요, 얼굴이 다 같아요. 다 같이 아무것도 안 봐요. 물 긷고, 들어가고. 휘장은 그대로고. 그게 다예요."월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비는 본 것만 말하는 아이였다. 안 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저녁에, 월령이 그 담 앞에 갔다.가마 없이. 청아도 없이. 봄은 방어멈에게. 담 밖에 서 있던 자리. 설련이 서 있던 자리. 거기 섰다.담이 높았다. 안이 안 보였다. 안에서도 밖이 안 보일 터였다. 그런데 설련은 이 담 앞에 하루를 서 있었다. 안 보이는 담을 보면서.월령은 그 아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을.*독고진겸이 왔다.옆에 섰다. 한 걸음 떨어져서. 늙은 사내가 담을 보았다. 딸이 서 있던 자리에 딸이 아닌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그 아이가 여섯 살에 열쇠를 삼키려 했소. 셈방에 들어가기 싫다고. 그 얘기는 했지.""예.""안 한 얘기가 있소. 그때 그 열쇠를 뺏은 게 누이요. 누이가 궁에서 나와 상단에 들른 날이었소. 그 아이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 열쇠를 꺼냈어. 그러고는 아이를 안고 자녕궁으로 데려갔지. 그 뒤로 그 아이는 찻상 뒤에서 컸고. 나는 못 했소. 나는 셈방에 있었으니까."월령이 그를 보았다."…그러니 그 아이한테 그 방은, 무서운 방이면서 숨는 방이오. 둘 다요. 나는 그걸 아오. 알면서도 그 방에 두고 온 왕비를 못 봐주겠고. 그런데 그 아이가 제 발로 남은 것도… 알겠고."독고진겸이 담에 손을 짚었다. 셈을 매기던 손."부녀가 아니오, 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1. 황명

    "…이번엔 불윤이 아니오."배중곤이 말했다. 종친부 앞마당에서, 원로들 사이에 앉아. 목소리가 전 같지 않았다."곤원전에서 사람이 죽었소. 곤원전 궁녀 손에. 그 궁녀가 자녕궁 담을 두드리다 잡혔고. …이건, 이건 우리 종친부가 상소 쓰고 말고 할 일이 아니오."원로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중곤의 발이 옮겨 갔다. 반 발이 아니라 한 발. 이긴 쪽으로."…그런데 배 대감. 자녕궁이 상소를 낼 때는 대감이 의를 맡으셨는데."젊은 원로 하나가 말했다. 배중곤이 그를 보았다."그때는 병이 돈다기에. 늙은이가 소문에 속았다고 이미 말했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젊은 원로가 입을 다물었다. 배중곤은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이긴 쪽으로 옮긴 발이 늘 이렇게 남의 눈에 밟혔다.*편전에 경화제가 앉아 있었다.옥필을 굴리지 않았다. 앞에 놓인 것은 셋이었다. 봄의 저고리에서 나온 붉은 실 둘. 청릉 장부와 삼황자부 궤 목록. 그리고 곤원전 뒤채에서 죽은 여인의 이름.황후가 그 곁에 앉아 있었다. 밤옷이 아니라 정장으로. 오래 이 자리에 앉지 않던 사람이었다."…내 처소요, 폐하."황후가 말했다."내 처소에서, 내 궁녀 손으로. 대황자 때 폐하께서 보류하셨지요. 그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고. 이번엔 합니다."경화제가 아내를 보았다. 잠자코 보았다. 그러고는 고 내관을 불렀다.*황명은 셋이었다.자녕궁 봉쇄. 문을 닫고, 궁인 셋 외에 드나드는 자 없이. 숙비는 '병중 요양'. 병이 나을 때까지. 나을 날은 적지 않았다.삼황자 위명서, 북영 종군 정식 임명. 황명으로.곤원전 궁녀·오상궁 참, 사후 재가."…자녕태후."경화제가 낮게 말했다. 고 내관이 붓을 멈췄다."그 말이 종친부에서 나오거든, 짐이 아직 살아 있다고 전해라."*위명서가 편전에 들었다.북영에서 한 시진. 흙먼지 그대로. 매화 소맷단에 붉은 것이 마르지 않은 채 있었다. 북영에서 내보낸 척후가 북문로 북쪽 끝, 회암역 너머에서 흑령 척후와 부딪쳤다.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0. 베다

    궁녀는 새벽에 잡혔다.자녕궁 담 밖 회랑 뒤 협도였다. 초비가 지붕에서 보았고, 묵아가 실을 던졌고, 기윤이 내려섰다. 젊은 궁녀는 담 안으로 들지 못했다. 담 안에서 문이 안 열렸다. 숙비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마마. 마마, 제가—"궁녀가 담을 두드렸다. 담 안은 조용했다. 낮은 발소리조차 없었다.기윤이 그 허리띠를 잡았다. 뒷덜미가 아니라 허리띠. 궁녀가 담을 보며 끌려갔다. 담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곤원전에서 온 기별이 왕부에 닿은 것은 그보다 먼저였다.월령이 그것을 새벽에 들었다. 새벽 젖을 물리고 봄을 다시 재우던 때. 늙은 상궁의 글씨. 명부지기가 죽었다. 차를 마시고. 곤원전 궁녀 손으로.월령은 그 글을 두 번 읽었다. 두 번째에도 같은 글자였다.첫 장 이야기는 없었다. 하나씩, 천천히 듣기로 한 답이 없었다. 늙은 여인이 팔 것이 없어져서 그냥 주려던 답이, 잔 하나에 없어졌다.위지헌이 그 글을 받아 들었다. 읽었다. 그러고는 옥대를 맸다. 풀었던 것을."…형님께 간다.""저도요.""너는 봄 곁에.""아니요. 저도 가요. 그 여인이 저한테 주려던 걸 누가 가져갔는지, 제가 봐야 해요."*새벽에 자녕궁으로 보낸 기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문이 안에서 안 열렸다고. 설련이 제 손으로 안 연 문이었다.편전에 경화제가 없었다.병상이 아니라, 아직은 새벽이라. 위지헌은 기다리지 않았다. 월령이 소매의 종이를 고 내관에게 건넸다. 붉은 실 둘. 위지헌이 고 내관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곤원전 궁녀 하나와, 옥의 오상궁. 오늘 참한다. 형님께는 그리 아뢰어라.""…전하. 황명이 아직.""황후전에서 사람을 독살한 손이다. 황자 생모 손발이든 뭐든, 그건 대역이다. 황명은 뒤에 받는다."고 내관이 옥필을 들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였다. 깊이.*형장은 궁 밖 남쪽이었다.월령이 그 자리에 섰다. 위지헌의 반 걸음 뒤. 청아가 그 곁에. 봄은 방어멈에게.오상궁이 먼저 끌려 나왔다. 옥에서 달포. 향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5. 뼘

    그 말은 아직 공중에 있었다.그대가 내 곁에 있다면.이 황궁도 외롭지 않을 것 같군요.위명서의 목소리는 살구꽃잎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너무 가벼워서,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것이 칼집에 숨은 소리라는 것을 모를 터였다.한때의 월령도 몰랐다.그녀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황궁의 붉은 담 안에 한 사람의 온기를 들이면, 그 외로움이 조금은 녹을 줄 알았다.높은 처마와 긴 회랑과 밤마다 닫히는 문들 사이에 자신이 봄을 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이제는 안다.황궁의 외로움은 사람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사람 하나를 삼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3. 틈

    "월령 언니, 여기 계셨어요?"문밖의 목소리는 봄비처럼 부드러웠다.심서윤은 늘 저렇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정하게. 마치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그때의 월령은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촌이라 믿었고, 어머니의 방 앞에 흰 천이 걸린 뒤에는 서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운 적도 있었다. 등을 토닥이던 작은 손의 감촉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그리고 황후전의 어느 밤, 비녀함 안쪽에서 밀서를 꺼내던 그 손도.그 손등에 비치던 차가운 등불도.그래도 월령은 그 손을 기억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 향

    살구꽃 향이 났다.빗물에 젖은 진흙 냄새도, 목 안쪽을 태우던 비린 독향도 아니었다. 부드럽고 희미했다. 오래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먼 봄이 숨을 죽이고 들어오는 듯했다.심월령은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바로 기침을 토했다."아가씨!"누군가 비명을 질렀다.월령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칼날이 닿기도 전부터 속을 태우던 열기가 아직 목 안쪽에 남은 것 같았다. 피와 비가 뒤섞이던 형장의 냄새가 혀끝에 되살아났다.아니.칼이 아니었다.그녀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던 것은 칼날보다 조용한 것이었다. 탕약의 밑바닥에 가라앉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 흰

    비가 내렸다.그러나 비는 피 냄새를 씻어 내리지 못했다.젖은 흙은 피를 먹은 뒤 오래된 쇠처럼 비렸다. 낮은 돌계단 틈마다 붉은 물이 고였고, 빗방울은 그 위에 닿을 때마다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형장 둘레에 몰린 백성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누군가의 젖은 소매에서 눅눅한 마 냄새가 났고, 멀리 황궁 쪽 붉은 담은 비안개에 잠겨 마치 아직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서 있었다.심월령은 그 붉은 담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무릎이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한때 대연에서 가장 고운 비단만 몸에 두르던 황후의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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