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22.
다음 날 아침, 랑의 넓고 포근한 품 안에서 눈을 뜬 해솔은 기지개를 켜려다 낮게 신음을 뱉었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듯 뻐근했고, 특히 허리 아래쪽으로는 알이 배인 듯 눅눅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랑이 신령으로 몸을 깨끗이 정돈해 줬지만, 어젯밤 쉼 없이 밀려들었던 격렬한 자극의 흔적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랑은 밤새 잠든 해솔의 곁을 지키다 아침 일찍 굴 바깥에서 따온 신선하고 달큼한 산 과일을 챙겨왔다. 두 사람은 굴 입구로 걸어 나가 탁 트인 아침 산세의 풍경을 함께 감상하며 과일을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과즙이 풍부한 열매를 베어 물던 해솔은 문득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히던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서로의 뜨거운 마음을 확인하고 뜨거운 밤을 보냈
54.입안이 쓴 듯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그저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요물의 뛰어난 시력 덕분에 방 안의 풍경이 너무나 선명하게 지호의 눈에 들어왔다. 해솔의 붉어진 귓불, 그를 담은 랑의 깊은 안광까지.그때, 랑이 지호가 있는 쪽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랑과 지호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랑은 도발하듯 입꼬리를 피식 말아 올리더니, 해솔의 말랑한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내리찍었다.이어서 랑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해솔의 붉은 입술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놀란 듯 움찔하던 해솔은 이내 자연스럽게 랑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깊어지는 입맞춤을 수용했다. 해솔의 부드러운 숨소리가 어둠 속에 은밀하게 퍼져나갔다.그 다정한 얽힘을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보아야 하는 지호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손에 억세게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한 질투와 오기가 속에서 울컥 차올랐다.하지만 랑은 지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해솔의 얇은 상의 밑단 아래로 슬그머니 단단하고 따뜻한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이 매끄럽고 여린 해솔의 허리 곡선을 천천히 쓰다듬어 올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체온이 맨살에 직접 닿자, 해솔의 몸이 흠칫 떨렸다.“하아… 랑아, 안 돼… 더 하면… 나 못 참을 것 같아…….”해솔이 발그레해진 얼굴로 랑의 손목을 다급히 잡아채며 숨 가쁘게 그를 말렸다. 랑은 나지막하게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해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를 더 깊이 품에 품어 안았다.
53.랑의 단호한 한마디에 석지와 도웅은 귀 내려간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폭 꺾이고 말았다. 풀이 죽어 시무룩해진 둘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해솔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도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 잠깐 나가자.”“와, 진짜?!”“역시 해솔이가 최고야!”순식간에 표정이 밝아진 석지와 도웅이 환호성을 질렀고 해솔은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대신 짐부터 깔끔하게 정리하고 옷 갈아입고 나가는 거야.”“알았어, 알았어!”“근데 방이 두 개밖에 없는데, 방은 어떻게 나눠 써?”석지의 해맑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랑과 지호의 시선이 동시에 해솔에게로 꽂혔다.“마음 같아서는 석지 너 혼자 쓰게 해주고 싶은데, 방이 작아서 거기에 성인 남자 넷이 들어가는 건 좀 무리잖아.”“아, 어차피 나는 잘 때 본체로 돌아가니까 상관없어!”본체가 자그마한 다람쥐인 석지는 언제 어디서든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집에서도 잠을 청할 때는 늘 다람쥐의 모습으로 보송한 이불속에 쏙 들어가곤 했다. 석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랑이 해솔의 한쪽 팔을 제 쪽으로 쓱 잡아당겼다.“그렇다면 셋이 큰방을 쓰거라. 나랑 해솔이가 작은방을 쓸 터이니.”“싫은데요? 저도 형이랑 같이 잘래요!”&nb
52.해솔뿐만 아니라 세 산신과 지호 역시 촌놈처럼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저마다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랑아, 너는 서울 와본 적 있어?”해솔이 곁에 서서 제 손을 꼭 잡아 오는 랑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랑은 잠시 옛 기억을 더듬듯 묵직하게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도 자주 오진 않았다. 옛날에 왜놈들이 이 땅을 짓밟고 쳐들어왔을 때, 부탁을 받고 서너 번 정도 와서 정세를 살폈을 뿐이다.”“지호는?”“난 서울은 완전히 처음이야. 보통 따뜻한 아랫지방에서 터를 잡고 살아서 와볼 일이 없었거든.”지호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응수하자, 옆에 있던 도웅이 신나서 거들었다.“난 저번에 설범님이랑 한 번 와봤는데… 그땐 밤중에 몰래 온 거라 어두워서 제대로 못 봤어. 낮에 보니까 진짜 넓다!”서울에 여러 번 발을 들여본 랑을 제외하면, 모두가 이 거대 도시의 역동적인 규모와 빽빽한 사람들의 활기에 압도되어 두리번거리기 바빴다.사실 랑 역시 복잡하고 시끄러운 인간 사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과거에는 할 일만 빠르게 끝내고 산으로 돌아가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제 손을 꼭 쥐고 눈을 반짝이는 해솔의 곁에서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함께 차분히 눈에 담고 있었다.“내가 왔을 때는 식민지 시절이라 사람들의 표정에 그늘이 깊었는데, 지금은 다들 한결 행복해 보이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인간들의 세상은 참으로 빠르구나. 그때만 해도 이렇
51.여행 날짜는 해솔의 휴가에 맞춰 차곡차곡 정해졌다. 둔갑이 자유로운 세 산신에게는 딱히 챙길 짐이 없었기에, 해솔의 옷가지 몇 점을 나누어 가방에 채워 넣었다. 저마다 작은 가방을 하나씩 멘 다섯 명은 기차역에 일렬로 서서, 쿠르르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거대한 철마를 바라보았다.“와, 기차라니! 나 기차 처음 타 봐!”“난 그래도 설범님과 서울에 갈 때 두 번 타 봤지.”석지와 도웅이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거대한 기차를 올려다보는 동안, 해솔은 입술을 다물고 몰래 웃음을 참아야 했다. 다름 아닌, 제 옆에 딱 붙어 서서 껌딱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지호 때문이었다.옆에 바짝 붙어 선 지호가 귀를 쫑긋거리며 해솔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기에, 해솔은 내심 튀어나오려던 ‘KTX’ 자랑을 꾹 눌러 담아야 했다.부산까지 세 시간도 걸리지 않는 매끈한 고속 열차가 지금도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해솔은 속으로만 아쉬움을 삼키며, 강릉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이면 시원하게 쏘아버리던 현실 세계의 현대식 기차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근데, 서울에 정말 볼 게 있어?”석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해솔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강원도 시골보다는 먹을 것도 훨씬 많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것도 많지. 멋진 극장도 있고 말이야. 아마 너희가 보면 신기해서 입이 떡 벌어질걸?”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시대였지만, 수도 서울은 분명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
평화는 깨지기 마련이다.답답한 고구마 전개 없이 사이다만 가득한 소설 속 사랑 이야기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자각하는 속도조차 시원시원했다. 첫 만남의 설렘부터 가슴 몽글해지는 데이트 이야기까지 듣고 있노라면, 해솔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설악산에 머물고 싶어 할 정도였다.“해솔아, 이제 가야 한다. 너무 늦었어.”랑이 해솔의 옷자락을 살짝 끌어당기며 재촉하자, 해솔은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에이, 조금만 더 듣고 싶은데!”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해솔의 모습에 설범은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어서 돌아가 보세요. 저도 잠시 숨 좀 돌렸다가 새벽에는 서울로 올라가야 하거든요.”“헉, 오늘도 만나요? 와, 좋겠다! 그럼, 다음에 만나면 오늘 만난 이야기도 꼭 해주셔야 해요, 아셨죠?”“알았어요. 조심히 가세요. 랑이님도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음.”사실 랑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해솔을 데리고 설악산까지 찾아오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해솔을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안전하게 돌려보내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려 함이었다.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해솔은 이 세계에 오래 머물게 된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설범의 달콤한 연애 이야기에 온 정신을 빼앗겨 있었다. 랑의 눈에는 그런 해솔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숲길, 랑은 해솔을 자신의 등에 온순히 태운 채 조용히
49.랑과 석지는 영물답게 찬사가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낯빛을 유지했고, 도웅은 머쓱한 듯 껄껄 웃었다. 반면 지호는 이 상황이 그저 신나는지 꼬리를 치듯 맞장구를 쳤다.“그죠, 아주머니? 우리 얼굴들이 좀 잘생기긴 했죠?”“네놈은 어디 감히 조동아리를 밀어 넣느냐?”랑이 서늘한 눈빛으로 가차 없이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지호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사뿐히 걸음을 물렸다.그렇게 소란스럽게 웃고 떠드는 사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빨간 떡볶이가 큰 대접에 가득 차려져 나왔다.“오, 은근히 맵다!”평소 집에서 해솔의 취향을 가득 반영해 만들던 떡볶이는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편이었다. 생각보다 붉고 알싸한 장터 떡볶이의 맛에 석지가 붉은 혀를 슬그머니 내밀며 입김을 내뿜었다. 지호는 오물오물 떡을 씹더니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형! 우리 더 시켜 먹자!”해솔은 떡볶이를 우물거리다 말고 기겁을 하며 지호를 돌아보았다.“이모님이 이렇게 푸짐하게 주셨는데… 이걸 다 먹고 또 먹겠다고?”“에이, 아직 배고프단 말이야!”해솔이 기가 차서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도웅이 은근슬쩍 거들고 나섰다.“해솔아, 나도 조금만 더 먹고 싶긴 하구나.”“아니,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