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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2화

Author: 정대천
“사건의 진위가 어떻든, 이미 모두 들으셨을 것이고 봉소야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헌데 이 일을 최가에 가서 확인한다 한들 최가는 분명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서원을 세운 목적은 단지 세상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가난한 학자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 그들이 훗날 나라에 기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최가가 청운서원의 명성을 깎아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제 명예가 떨어진 것은 상관없지만, 수치를 입는다면 학자들에게 손해겠지요.”

모두 오늘의 사태를 이해했다.

경중의 학자들은 청운서원과 왕야가 어떤 관계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오직 봉소야뿐이었다.

그녀는 부와 권력에 눈이 멀어 더 높은 곳만 바라보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

“걱정 마시오. 우리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소. 봉소야가 청운서원에서 이런 교활한 수를 부린 것은 우리 학자들에 대한 모욕이오!”

봉소야의 전 약혼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사람일 줄은 예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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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9화

    아무리 순한 술이라 해도 술은 역시 술이었기에, 주량이 약한 사람은 결국 취할 수밖에 없었다.신수빈은 어느새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로 팔을 탁자에 괸 채, 눈웃음 어린 시선으로 아직도 술을 따르고 있는 이도현을 바라보았다.몸은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얇고 부드러운 상의는 그렇게 몸을 숙이는 순간 자연스레 느슨해졌고, 벌어진 옷깃 아래로 목선 밑 희고 고운 피부가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왕야께서는 저를 취하게 만들 생각이십니까?”그 남자의 시선이 어찌 그곳에 머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잔 안의 술이 넘쳐흐르는 것조차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신수빈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왕야는 겨우 두 잔 드셨는데 벌써 먼저 취하셨나 봐요? 술병도 제대로 못 드시네...”비록 취기가 오른 상태였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의 눈에 얼마나 유혹적으로 비칠지.오라버니는 이렇게 말했다.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세상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서하랑 역시 그랬다.한 걸음 내딛어 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스스로를 가둬 두면 안 된다고.하지만 계산하고 손익을 따지는 일은 이미 그녀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신수빈은 이도현 앞에서 진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었고, 그에게 마음을 온전히 열 수도 없었다.심지어 무심코 흘리는 말조차, 그 안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그가 좋아할 만한 표정을 계산했고, 그가 빠져드는 눈빛을 계산했고, 그가 욕망에 흔들릴 순간까지 계산했다.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 같은 자신이, 어떻게 한 남자와 서로 의심 없이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그 순간 이도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그녀의 뒤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커다란 손바닥이 뒤에서 그녀의 목덜미를 천천히 쓸었다.길고 가는 목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손길을, 얇게 풀어진 옷깃 따위가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빈아, 본왕을 취하게 하는 건 술이 아니다...”등 뒤로 단단한 무언가가 닿아 왔다.그게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8화

    이제 막 등불이 하나둘 밝혀지고, 달빛이 버들가지 끝에 걸릴 시간이었다.아직 밤은 길었다.이렇게 일찍 그와 함께 침상으로 들어갔다간, 정말 밤새 시달리다 죽을지도 몰랐다.신수빈은 이도현의 무릎 위에 앉은 채 두 팔을 느슨하게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힘없이 그의 품에 기대어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나직이 속삭였다.“왕야, 아이가 보고 싶어요. 아이를 데려오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이도현은 고개를 숙여 품 안의 그녀를 바라보았다.별빛 어린 눈동자는 물기 어린 듯 흔들렸고, 고운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는 나른하고도 부드러웠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엄지손가락이 붉은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목소리는 어느새 살짝 잠겨 있었다.“본왕은 보고 싶지 않으냐?”이런 질문쯤은 이제 너무 익숙했다.신수빈은 눈빛을 천천히 흘리며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몸을 더 가까이 기대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귓가에 속삭였다.“왕야는 왕야고, 아이는 아이잖아요.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밤 내내 왕야의 사람인데, 왕야께서 굳이 아이에게 질투하실 필요가 있나요?”그 말에 이도현 마음속을 슬쩍 스치던 시큰한 질투가 눈 녹듯 사라졌다.사실 그는 오늘 밤만큼은 그녀와 조용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아이를 일부러 왕부에 두고 온 참이었다.“우선 밥부터 먹어라. 본왕이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하지.”“고맙습니다, 왕야!”신수빈은 금세 얼굴 가득 웃음을 피웠다.목소리에도 감추지 못한 기쁨이 묻어났다.그 미소에 이도현마저 따라 웃고 말았다.그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얌전히 앉아서 먹어라. 호국사 음식이 너무 담백했던 거 아니냐? 보아하니 또 살이 빠진 것 같구나.”신수빈은 옆자리로 내려앉으며 웃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왕야는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전에 산후조리하면서 좀 살이 붙었던 거예요. 몸조리 끝나면 원래 천천히 빠지는 법이고요. 곧 봄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지금 딱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7화

    신수빈은 내시가 성지를 모두 읽어 내리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눌러 담았다.이도현은 윤서원이 호국사에 온 걸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조서를 내린 게 틀림없었다.“윤 대인, 성지를 받드십시오.”윤서원은 고개를 숙인 채 음침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결국 이도현은 어마원의 목마 일을 그에게 “하사”해 버렸다. 윤서원은 속이 뒤집힐 만큼 분했다.“내관께 아룁니다. 소인은 아직 상중이라 조정의 벼슬을 받기 어렵습니다.”그러자 내시가 곧바로 답했다.“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지난해 장안성 전란으로 죽은 자가 많아 지금 조정은 사람이 부족한 때라 하셨습니다. 많은 관리들 역시 상복을 입은 채 직무를 보고 있으니, 윤 대인께서도 사양하지 마십시오.”“받들겠습니다.”내시는 곧 시선을 신수빈 쪽으로 돌렸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호국부인께서도 짐 정리를 하시고 노신과 함께 입궁하시지요. 폐하를 알현하신 뒤 다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예, 수고를 끼쳐 드리겠습니다.”신수빈은 사람을 시켜 내시를 먼저 쉬게 한 뒤, 은보와 금자를 데리고 짐을 챙기러 갔다.어차피 내일 다시 돌아올 예정이라 많이 챙길 필요는 없었다.그때 은보가 낮게 물었다.“마님, 객방의 그 사람은 어찌할까요?”신수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지금은 중상이 심해서 치료가 가장 중요한 때다. 함부로 옮기긴 어려우니 금자는 남고, 넌 나와 함께 돌아간다. 암위들도 절반은 여기 남겨 두고.”“예.”윤서원은 남고 싶다면 남으라지. 어디서 자든 그녀 알 바 아니었다.내일 윤서원이 어마원으로 가면,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됐다.신수빈은 내시를 따라 호국사를 떠났다. 윤서원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음침한 눈빛을 드리웠다.그는 어젯밤 그 사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저 그녀를 이곳에서 떠나게만 만들면 된다고.호국사 주변에는 이도현의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자신이 굳이 남겠다고 버티고, 신 씨에게 집착하며 가까이하려 드는 모습을 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6화

    “게다가 거기서 묵고 갈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이도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장풍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왕야, 지금 가셔도 소용없습니다! 저쪽은 엄연히 정실 부군인데 왕야께서는 지금 명분도 없고 순서도 없으니... 끼어든 외실 같은 처지 아닙니까...”장풍은 이도현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끝내 마지막엔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이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정말 장풍의 말을 들은 듯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네 말이 맞다. 본왕은 명분도 없고 순서도 없지.”장풍은 속으로 슬며시 기뻐졌다.역시 왕야는 자기처럼 직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시는군.왕야 같은 명군은 원래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법이었다. 그런데 장풍이 다 기뻐하기도 전에, 그 명군께서 담담히 입을 열었다.“보아하니 네가 요즘 꽤 한가한 모양이구나. 뒷마당 마구간에 말 먹일 사람이 부족하다더라. 가서 한 달쯤 말이나 먹이고 있어라.”장풍은 눈을 크게 떴다.“…예?”‘형은 말을 받고, 나는 말 먹이를 주라고? 같은 어미 배에서 나왔는데 어째서 차이가 이렇게 심한 것일까?’장풍은 급히 해명했다.“왕야, 속하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속하는 왕야께서 외실이라 한 적 없습니다! 왕야와 마님께서는 서로 마음이 통하시고, 마님 마음속엔 왕야뿐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야말로 끼어든 사람 아닙니까…”“두 달.”장풍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이도현은 그 멍청한 놈이 물러난 뒤에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원래도 짜증났는데, 윤서원이 지금 호국사에 있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혔다. 게다가 뻔뻔하게 거기서 묵고 갈 생각까지 한다니, 생각할수록 열이 치밀어 올랐다.이제 춘위도 끝났겠다, 슬슬 봄 사냥도 준비해야 했다. 저 눈엣가시 같은 놈부터 빨리 처리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그리고 우선은 당장 눈앞의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신수빈은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을 보러 갔다.상처가 워낙 심해 요 며칠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5화

    민유하 모녀가 경성에 들어오기 전, 장녕은 이미 그녀들의 지난 세월을 모두 조사해 이도현에게 보고해 두었다.이도현은 여 귀비의 여동생이라는 그 여인의 삶을 적어 놓은 내용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그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 있던 장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왕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없다.”이도현은 손가락 마디로 탁자를 천천히 두드리다가 잠시 뒤 물었다.“장 가와 저 모녀 사이에 접촉은 있었느냐?”“없었습니다. 황성시가 양주에 마침 거점을 두고 있었는데, 민 마님은 양주에서 이름난 인물이라 드나드는 권세가와 귀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헌데 장 가는 관중 귀족이고 양주와는 천 리나 떨어져 있어 본래 접점이 없었습니다. 이번 일 역시 장한월이 말한 것처럼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닙니다. 장한월의 장남, 본래 세자였던 자가 색욕을 못 버리고 거금을 들여 미인을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민 마님의 딸 초담 아가씨가 장부로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막 들어온 그녀를 장한월이 우연히 보게 되었고, 생김새가 여 귀비 마마의 젊은 시절과 꽤 닮아 그제야 의심하게 된 겁니다.”장녕은 왕야가 침묵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왕야, 그럼 민 마님과 초담 아가씨는 어떻게 안배하실 생각이십니까?”이도현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내일이면 도착한다고 했지. 경성 안에 저택 하나 사 두고, 눈치 빠른 시녀 몇을 붙여라. 사람들이 도착하면 그리로 들여보내면 된다.”장녕은 순간 멈칫했다.이도현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속하가 우둔하여 여쭙습니다만, 민씨 모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여 귀비 마마는 생전에 오랫동안 여동생을 찾았고, 왕야 역시 수년 동안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낸 뒤 이렇게 무심히 한쪽에 따로 두는 건 이상했다.장녕은 왕야가 분명 직접 왕부로 데려와 극진히 대할 줄 알았다.“문제가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어쩌면 정말 본왕의 친이모일 수도 있고, 모비께서 평생 그리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14화

    “역병.”그 검은 옷의 사내는 낮고 쉰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 뒤, 이어 다른 일까지 덧붙였다.“태후 마마 곁의 진하빈 아가씨는 이미 섭정왕의 총애를 잃었습니다. 측비라는 이름을 유지해 봐야 이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도 영민하니 차라리 태후 마마 곁에 남겨 두고 소식을 전달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도현은 호국부인 신 씨를 맞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혼인 전에 지금의 측비 마마부터 손보려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차라리 스스로 신분을 내려놓고 태후 마마 곁에 남는 편이 좋겠습니다.”태후는 방금 전 그의 분석과 계책을 들으며, 이 사람이 범상치 않은 재주를 지녔음을 이미 알아차린 상태였다. 자연히 그의 안배에 이견이 없었다.“책사께서 준비한 모든 일은 서둘러야 하네! 이도현 그 자는 지금 신 씨에게 마음이 가 있어 언제든 호국사로 갈 수 있네. 게다가 그는 분명 전대 황성시 좌우사를 알아볼 터.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끝이네!”그러나 검은 옷의 사내는 담담히 말했다.“그럴 일은 없습니다. 요즘 조정 일이 워낙 바빠 그는 시간을 낼 수 없거든요. 게다가 신 씨 역시 그를 완전히 믿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이도현은 그 아이가 자기 친자라는 걸 믿지 않고 있고요. 곧 그 곁에 또 다른 일이 생길 것이니 당분간은 호국사로 갈 여유가 없을 겁니다.”태후는 그 말을 듣고서야 조금 안도했다.“헌데 그대는 어찌 이도현의 일을 이토록 잘 알고 있는 겐가? 애가 몇 번이나 그의 곁에 사람을 심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거늘.”검은 옷의 사내는 태연하게 답했다.“왕부 후원 안에는 이미 저희 쪽 눈이 들어가 있습니다. 태후 마마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모든 일을 정리한 뒤, 장한월과 그 사내는 밀도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장한월이 경성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단 하루뿐이었지만, 이도현은 곧바로 소식을 들었다.지금 순방영은 전부 이도현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장 가 사람들의 움직임은 금세 그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20화

    관사 환관은 머리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윤씨 부인은 죽지 않았사옵니다. 물에 들어간 그 시녀가 구해서 지금 춘진각에 있사옵니다.”태후의 손에 들린 옥빗이 무심결에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며 두 동강이 났다.“그 시녀가 물에 들어갔을 때, 호수 바닥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데 어째서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냐?”“죽은 것은 자객 환관이랍니다. 이미 섭정왕께서 건져 올려 뼛가루까지 흩뿌리셨사옵니다.”태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녀는 호수 바닥에 사람을 더 배치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신수빈 같은 연약한 여자가 물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86화

    신수빈은 눈물에 젖은 눈으로 이도현을 올려다보았다.“저는 왕야의 장난감이 아니란 말입니까?”이도현의 얼굴에 금세 노기가 스쳤다.“본왕은 분명 네게 남으라 했다. 그럼에도 네가 굳이 윤 가로 돌아가겠다 한 것 아니더냐!”신수빈은 오히려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물은 그렁그렁 매달려 속눈썹 끝에서 매혹적이게 흔들렸다."잠깐 동안의 장난감이든 아니면 영연한 장난감이든 결국은 같은 것이지요.”이도현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어졌다. 그의 각진 턱선에 힘줄이 도드라지며 노기가 점차 뚜렷해졌다. 그가 진노하기 전에, 신수빈은 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73화

    지난번 책봉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궁에 들어가 감사의 예를 올려야 했다.다음 날 이른 새벽, 궁중에서 이미 전갈이 내려왔다. 신수빈은 서둘러 일어나 청하의 시중을 받아 고명복을 단정히 입고 마차에 올라 궁궐로 향했다. 이번에는 청하를 데리고 가지 않고 은보만 동행시켰다. 궁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은보의 침착한 얼굴빛과 신중한 거동을 살펴보던 신수빈은 자신의 추측이 점점 더 확신으로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궁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녀는 그 위에 앉아 느릿느릿 영수궁을 향해 나아갔다.그 시각 바깥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7화

    후부 내의 장부들은 모두 창란원에 모여 있었으나 신수빈은 책을 뒤적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쪽이 바로 분가 이후, 이십 해 가까이 이방과 삼방의 점포와 전답에서 들어온 수지 기장입니다. 옛 평양후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십 해가 되어가죠. 그 십 해 동안은 조모님 곁을 지키던 배필 관사들이 매달, 매해의 출납을 빠짐없이 적어 두었습니다. 그중 몇몇 의복 가게들은 천하가 평정되면서 남쪽에서 진상된 촉비단과 소주 자수가 경중을 휩쓸자 진부한 양식만 내놓던 가게들은 매해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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