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주방 안에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녹진하게 퍼졌고, 고등어도 나름 노릇하게 구워졌다.은하가 젓가락을 들며 눈을 반짝였다.“생각보다 괜찮은데?”“진짜! 비주얼은 나름 볼만 해.”이현은 고등어를 찢어 잘 익은 살을 은하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많이 먹어.”“응. 너도.”그러다 된장찌개 안에 든 두부를 먹던 은하가 눈을 키웠다.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대박, 진짜 된장찌개 맛이야.""그럼 김치찌개 맛이 나겠냐고.""백이현, 너 요리 좀 한다?""푸흡."성공적인 저녁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식탁을 정리했다.식탁 위를 물티슈로 닦는 동안에도 기분 좋은 여운은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은하는 이현의 집 이곳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러다 침실 안, 작은 협탁 테이블에 위에 놓인 그림 액자를 발견했다. 천천히 다가가 액자를 손에 들었다.요트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나란히 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이거, 여기다 두기로 한 거야?”“응. 밤마다 보려고.”손끝이 액자 모서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응. 사랑이 확신이 됐지.”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미소를 머금었다.가슴 안쪽이 화하게 따뜻해졌고, 눈물도 웃음도 아닌 감정이 울컥 치밀어올랐다.그래서 그저 속으로만 생각했다.‘네가 그렇게 말해버리면, 나는… 평생 널 떠나지 못할 것 같아.’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는 은하의 모습에, 이현이 등 뒤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강은하, 기숙사 통금 몇시까지야?”“12시.”“지금 몇시게?”은하의 눈이 이현의 방 안에 놓인 시계로 향했다. “7시잖아!”“그러니까, 시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소리지.”“….”그대로 은하를 침대 위로 눕혔다.은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을 감았다. 그는 한 손으로 은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하루 종일 엄청나게 안고 싶었다고.”“…나도.
[나와. 앞이야.]메시지를 확인한 은하는 편안한 트레이닝 원피스에, 운동화를 꿰어 신은 채 기숙사 문을 나섰다.그리고 차에서 내린 이현은 곧장 은하를 향해 다가갔다.붉게 달아오른 눈두덩을 본 이현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아무 말 없이 두 팔을 벌리자, 은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많이 울었어?”“응.”“강은하, 완전 애기네. 애기.”“몰라. 그냥 엄청나게 낯설고… 꼭 혼자가 된 기분이야.”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혼자 아니야. 나 있잖아.”“…응. 다행이야 정말.”“차에 있을테니까 짐 정리하고 나와. 저녁 먹으러 가자. 응?”“알겠어. 근데 좀 오래 걸릴 것 같은데….”“괜찮으니까 천천히 해.”***한편,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우주에게는 익숙한 공기와 정적이 동시에 밀려왔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말없이 왼손으로 눈가를 훔쳤다.“아, 진짜… 주책 맞게 왜 이러냐.”흐르는 눈물을 고스란히 쏟아냈다. 어차피 혼자니까. 누구에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으니까. 홀로서기를 한 동생이 어른이 된 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숙사 안,작은 공간 한 쪽은 이제 은하의 물건들로 온전히 채워졌고, 아직은 낯설지만 조금씩 살아갈 공간이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문을 닫고 나서며, 은하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앞으로 잘 지내보자.’건물 앞에는 이현이 차에 기대 서 있었다."백이현!"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언제나처럼 든든한 안심과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끝났어?”“응.”“가자.”은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너는? 짐 정리 다 했어?”“어제 다 끝냈지.”“집은 어때? 괜찮아?”“궁금해?”“당연하지.”“아 안되는데, 한 번 들어오면 못나가는데.”“……또 시작이지?”응, 또 시작이야. 아니, 사실은 끝났던 적이 없어.“저녁은 집에서
은하는 우주와 함께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동네 마트부터 생활용품점까지, 메모장에 적어둔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조금씩 집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우주는 말은 많지 않았지만, 은하가 무거운 물건을 고르거나 망설일 때마다 먼저 손을 뻗거나 괜히 다른 브랜드를 권하며 곁을 지켰다.“기숙사 생활, 정말 괜찮겠어?”“응. 기대 되기도 하고.”“그래도 자취보단 기숙사 생활이 오빠 마음이 편해.”“알아.”“언제든 답답하거나 불편하면 오빠한테 꼭 이야기해. 알겠지?”“응. 오빠.”***이현 역시 홀로 살아갈 공간에 이것 저것 가구들을 꾸리고 짐을 정리하기 바빴다. 거실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박스들이 널려 있었다. 혼자 살기엔 꽤나 넓은 아파트. 이 역시도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누릴 수 없는 것들이겠지.어릴 때부터 제공 받았던 기준이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도 달랐다는 걸 이제서야 제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진짜 어른이 되려면, 아버지 도움 없이도 모든 걸 해내야겠지.’창밖에는 한창 꽃을 피우기 직전의 가로수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풍경은 지금의 마음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무언가 이제 막 피어나려는 시점. 막 움트기 시작한 감정과 결심. 여전히 부족할지 몰라도, 언젠가 '내가 꾸려온 인생'이라 말할 수 있는 날을 막 걷기 시작한 것이다.짐 정리가 어느정도 끝난 뒤, 침대 옆에는 은하가 선물한 그림 액자를 조심스레 올려 놓았다.지난 날 요트에서의 행복했던 순간이 떠올라, 그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간지럽혔다. '보고싶어 미치겠네.'***떠나기 전날 저녁.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봄의 끝자락은 유난히 낯익고 정겨웠다.식탁 위엔 언제나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 냄비와 정갈하게 놓인 따뜻한 밥그릇이 놓여있었다.은하는 괜스레 마음이 내려앉았다.항상 넷이서 둘러 앉아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던 그 자리에 이제는 셋이 앉아 있었고, 앞으로는 오빠 혼자 앉아 식사를 하는 날이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숨소리조차 섞여버릴 만큼 가까운 거리, 은하의 손끝이 이현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손끝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뭐냐? 왜 또 떨고 그래?"이현의 이마가 은하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은하의 떨리는 숨결 위로 입술을 포개었다.은하는 방금 전 도전처럼 주고받은 말을 금세 잊어버린 듯 자연스레 이현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끝 하나, 시선 하나. 그의 몸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마다 눈을 감고 손길을 느꼈다.목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입맞춤엔 특유의 신중함과, 감추지 못한 갈망이 섞여 있었다.결국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의 리드에 따라 움직이는 몸.그 모습이 이현에겐 여전히 귀엽고, 여전히 사랑스러웠다.“풉. 또 지는 중이네.”이현이 장난처럼 속삭였지만,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눈을 감은 채 이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손끝이 어깨를 타고, 쇄골을 지나 허리선을 따라 느릿하게 흘렀다. 양 볼은 물론 귀까지 금세 발그레하게 물들었고, 눈썹이 살짝 떨릴 정도로 달아오른 은하.이현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떨리는 반응 하나하나에 손끝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그들은 마치 처음 사랑을 나누는 이들처럼 움직였다. 서로의 심장이 맞닿는 지점에서 한참 동안이나 숨을 섞었다.“사랑해, 진짜 너무 너무 사랑해. 강은하.”이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고백은, 지금까지 은하가 듣고 싶어 했던 모든 말의 정점이었다.은하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지금의 이 감정이 사라질까 두려운 사람처럼.이현 역시 그런 은하를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온 몸으로 더 깊이, 더 뜨겁게 끌어안았다. “네가 날 이렇게까지 미치게 만들 줄은 몰랐어.”벅차오른 숨 사이에는 끝없이 밀려오는 감정이 걸쭉하게 묻어 있었다.은하 역시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숨결 같은 소리로 대답했다.“나도… 나
다음날 아침,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온 태하가 최 비서의 차 트렁크에 조심스럽게 캐리어를 실었다. 트렁크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 공기 중에는 무언가 또 하나의 시간이 접히는듯한 느낌이 감돌았다. 은하, 이현, 우주.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마음 한 켠 어딘가가 자꾸만 가라앉았다.“태하야, 부모님껜 연락 드렸고?”“네. 아까 통화 했어요.”“그래, 잘 다녀오고. 연락 자주 하고.”“…네.”이현 역시 별다른 말 대신, 특유의 담백한 목소리로 짧은 인사를 건넸다.“가라, 연락하자.”“그래.”은하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정말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사이인데 왜 이렇게 눈 앞에 흐려지냐고. “은하야?”태하의 목소리에 은하는 황급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 그냥…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좀 이상하다.”태하는 그런 은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나까지 괜히 목이 메네. 연락 자주 하자. 백이현이 힘들게 하면 바로 말하고!”“…응.”이현은 아무 말 없이 은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그는 그렇게 말 대신 손끝의 온기로 은하의 마음을 눌러주고 있었다. 태하가 마지막으로 짧은 인사를 전하곤 최 비서의 차에 올라탔다.“간다. 형님, 저 가 보겠습니다!”그렇게 그들은 크게 울지도, 떠들지도 않으면서 작은 작별을 나누었다.조금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울 이유도 없었다.***책상에 앉아 기숙사에 챙겨갈 짐 목록을 정리하던 은하는 점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메모장을 빼곡하게 채운 단어들. 정녕 이게 맞는 것인가.거주하는 곳 자체가 달라지다 보니, 챙겨야 하는 건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았다. '완전 이사 수준이잖아?'그러던 중 이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응. 백이현.”“강은하! 준비하고 나와.”“지금? 어디 가게?”“나 그 표정 또 보여줘라!”“
개강을 앞둔 그들은 서연이에게 들려 안부 인사를 전하고, 오랜만에 이현의 집에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민희가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표현했다.“이제 진짜, 다들 가는 거야?”이현이 웃으며 대답했다.“주말마다 올 건데 왜 그러냐.”“그래도….”은하 역시 이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덤한 척 노력했다.“어차피 다 서울인데 뭐.”그때, 태하가 이현을 향해 고개를 훽 돌렸다.“백이현, 너 이 집 안 뺄거야?”“주말마다 와야 되는데, 뭐하러 빼냐?”“한국대 근처에서 자취한다며. 집에 몇 개냐? 집 수집가냐?”“여기가 본가라고 치지 뭐.”은하가 이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이 곳이 더 따스한 공간이었을까.“그래도, 거의 비어 있을 텐데.”“강은하! 너까지 왜 그래? 죽어도 안 빼! 비어도 상관 없어! 추억이 얼마나 많은 곳인데.”그 말에, 은하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 특별하긴 해. 서연이도 그렇고… 아, 서연이 국문과 가고 싶어 했었는데.”“….”짧은 침묵 안, 이 집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누군가의 기억이 또렷하게 스며들었다. 잠시 내려앉은 분위기에 민희가 박수를 치며 일어났다. “아니, 잠깐만? 어차피 백이현 자취하면, 거기를 또 아지트로 쓰면 되는 거 아니야?”“야!” 거실에는 다시 웃음꽃이 퍼지기 시작했다. 잠깐 먹먹했던 가슴이 작은 소란스러움으로 다시 풀려버렸다. 이번에는 민희의 시선이 태하에게로 향했다.“너도 대학가면 연애 좀 해라? 어?”“너나 잘해.”“나는 연애보다 창업이 먼저야.”“그렇게 말 하는 사람들은, 꼭 둘 다 안 하더라.”거실 안에 다시 폭소가 터졌다.그렇게 그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 성인의 문턱을 조금은 엉성하게 맞이했다. 예전엔 막연하게 느껴졌던 어른이라는 단어.그저 숫자 하나 바뀌었을 뿐이지만 이제는 서로의 무게를 나누고, 과거를 조심스레 품고,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걷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우주.조용한 진료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업무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 하다 가도, 다시금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은하는 괜찮겠지….”정신과 의사인 우주. 사실 그가 정신 의학과라는 길을 선택한 이유도 동생, 은하 때문이었다.은하가 9살이던 그날 이후. 그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혹했던 사건이 지나간 후, 은하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활기라곤 온데간데 사라졌고, 과거의 기억을 잃었으며, 때때로 보이는 불안한 모습과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들
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저기… 선생님.”“응?”“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어느 가을날, 희뿌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하는 옷장에 걸린 새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걸려 있는 교복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속삭이는 듯했지만, 은하에게는 그저 낯설고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벌써 세 번째 전학. 이제는 익숙해야 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 순간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아직도 1년도 넘게 남아있었다.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은하를 안아들고 보건실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태하. 팔에 안긴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숨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민희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따르며 은하의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보건실로 향하자마자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놀란 보건 선생님이 급히 다가와 은하의 상태를 살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달려왔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큰 소리에 갑자기 놀란 듯 하더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어요.”“약? 무슨 약?”민희는 서둘러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은하가 먹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