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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작전 회의, 놀이터 시소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21:29:05

“야. 발 좀 들어.”

시소 저편에 앉은 범준이 나를 본다.

“들면 너 올라가.”

“알아. 회의 시작하려고.”

범준이 바닥에서 발을 뗀다.

내 자리가 바로 올라간다.

운동화 끝이 모래 위를 스치다가 멀어진다. 나는 손잡이를 꽉 잡는다.

“너무 들지는 말고.”

“다 들라며.”

“적당히라는 말이 빠졌잖아.”

범준이 발을 내려놓는다. 시소가 중간에서 멈춘다.

내 발은 여전히 땅에 닿지 않는다.

‘지금 도범준이 내 회의 자리 높이를 정한다.’

시작부터 마음에 안 든다.

나는 손잡이를 한 번 더 잡아당긴다. 높이는 바뀌지 않는다.

4월 12일 일요일 오후. 미나리골 어린이공원에는 우리 말고 시소를 타려는 사람이 없다.

그네 둘도 비어 있다.

앉을 자리는 많은데, 도범준이 먼저 시소에 앉아 버렸다.

“그네에서 하자니까.”

“너 올라왔잖아.”

“네가 앉아 있으니까 이쪽에 앉았지.”

“그럼 여기서 해.”

맞은편에 앉은 범준이 검은 백팩을 무릎에 올린다. 나는 큰 방수 가방을 시소 옆 모래 위에 내려놓는다.

가방까지 메고 앉았는데도 뜬다.

이건 가방 문제가 아니다.

“아홉 살 때도 이랬는데.”

내가 발끝을 뻗자 범준이 아래를 본다.

“그때는 더 높았어.”

“그때는 내려 달라고 하면 내려 줬어.”

“지금도 말하면 내려 줘.”

“내려 줘.”

범준이 무릎을 조금 편다.

내 자리가 천천히 낮아진다. 운동화 밑창이 모래에 닿는다.

나는 바로 말한다.

“됐고. 너무 낮아.”

“어디에 맞춰.”

“회의하기 좋은 데.”

범준이 한숨 대신 입으로 짧게 바람을 내보낸다.

그러고는 다시 앉는다.

나는 적당히 높아진 자리에서 손잡이를 놓는다.

“좋아. 여기.”

“정했어?”

“응.”

범준은 발바닥을 모래에 붙인 채 나를 본다.

이래서 아는 사람이 좋다.

내가 말하는 회의하기 좋은 높이가 어딘지 알아듣는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일단 주말에 한 번.”

“뭘.”

“만나야지. 잘되고 있는 걸 보여 줘야 하잖아.”

“지금도 만나는 중인데.”

“이건 회의고.”

“같이 앉아 있잖아.”

“도범준. 놀이터에 같이 앉아 있는 걸로 끝날 일이면 엄마가 나를 강 건너까지 안 보냈지.”

범준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켠다.

엄마가 보낸 글이 맨 위에 떠 있다.

『어디 가? 범준이 만나?』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화면을 옆으로 넘긴다.

“엄마들한테는 우리가 알아서 만나는 걸로.”

“알아서 만났잖아.”

“회의 말고. 밥도 먹고, 밖에도 가고.”

“어디.”

“그건 그때 정하고.”

“좋네.”

대답이 쉽게 나온다.

너무 쉽게.

나는 범준을 잠깐 본다.

범준은 내 운동화 밑에 놓인 가방을 본다.

“물병 쓰러졌다.”

“안 새.”

“모래 묻잖아.”

범준이 백팩을 옆에 놓고 몸을 숙인다.

시소가 조금 내려간다. 나는 급히 손잡이를 잡는다.

“잠깐. 회의 중에 움직이지 마.”

범준이 다시 앉는다.

“가방 네 발 쪽으로 당겨.”

나는 발끝으로 가방 끈을 건다. 가방을 가까이 끌어 놓고 물병을 세운다.

다시 휴대폰을 든다.

“주말에 한 번. 그리고 사진 한 장.”

“사진?”

“우리 엄마는 말로 하면 안 믿어.”

범준이 사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기서는 계단 아래 골목 입구만 조금 보인다.

“찍으면 믿으셔?”

“안 찍으면 더 물어봐. 어디서 만났냐. 뭐 먹었냐. 누가 먼저 가자고 했냐.”

“어제도?”

“어제는 누가 먼저 왔냐고 묻더라.”

“내가.”

“그러니까 그것도 물어봤어. 얼마나 먼저 왔냐고.”

나는 휴대폰을 무릎 위에 놓는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사진 보정 마우스를 놓지도 않고 나를 불렀다.

밥은 다 먹었느냐고 했다.

다 먹었다고 하자, 전도 다 먹었느냐고 했다.

그것까지 확인하는 이유는 묻지 못했다. 엄마가 바로 다음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범준이는 뭐래?”

나는 분명 밥 먹으러 다녀왔는데 답할 건 밥 이야기가 아니었다.

“너희 엄마는 뭐 물어보셨어?”

범준이 대답한다.

“잘 먹었냐고.”

“끝?”

“너도 잘 먹었냐고.”

“또 끝?”

“또 만날 거냐고.”

나는 손잡이를 두드린다.

“봐. 그게 나오잖아. 그래서 뭐라고 했어?”

“내일 만나기로 했다고.”

“작전 회의라고는?”

“안 물어보셨는데.”

나는 잠깐 입을 다문다.

틀린 말은 아니다.

명숙 아줌마는 필요한 걸 물어본다. 우리 엄마는 답을 듣는 동안 다음 질문을 만든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든다.

“아무튼 사진 보내면 설명할 게 줄어.”

“같이 찍어?”

“당연하지. 너 혼자 찍어서 보내면 내가 네 사진 찍어 주러 따라다니는 사람이 되잖아.”

“네 사진도 찍어 줄게.”

“그 얘기가 아니고.”

범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웃지 않으려고 입술에 힘을 준다.

회의를 시작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정한 건 주말과 사진뿐이다.

“그리고 석 달.”

범준의 발이 모래 위에서 멈춘다.

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짚는다.

“석 달쯤 잘 만나면 엄마들도 다른 사람 알아보는 걸 그만둘 거야. 그때 성격 차이로 끝내자.”

“무슨 성격 차이.”

“정하면 되지.”

“지금 정해.”

“너는 느리고 나는 빨라.”

“네가 늦게 오면 내가 기다리는데.”

나는 공원 입구를 돌아본다.

오늘도 내가 늦었다.

집에서 나올 때 엄마가 사진관으로 불러 세웠다. 돋보기 안경 끈을 만지면서 내 머리 끝을 살폈다.

바람 부는데 머리가 왜 그렇게 뻗쳤느냐고 했다.

놀이터에 간다고 했더니 그러니까 더 눌러 놓으라고 했다.

“오늘은 엄마가 잡아서 그렇지.”

“알아.”

“알면 그건 빼.”

“뭘.”

“성격 차이 후보에서.”

범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손가락 하나를 편다.

“먹는 거. 나는 가지 싫어하고 넌 먹잖아.”

“네 것만 안 시키면 돼.”

다시 접는다.

손가락 하나를 더 편다.

“노는 거. 너는 앉아 있는 거 좋아하고 나는 움직이는 거 좋아하고.”

“지금도 너 움직이고 있어.”

나는 시소 위에서 바쁘게 발을 구르고 있다.

범준은 바닥에 발을 붙이고 앉아 있다.

너무 정확해서 짜증이 난다.

“됐고. 우리가 사소한 차이를 찾자는 건 아니야.”

“그럼 큰 차이는.”

나는 대답하려다 휴대폰을 본다.

화면이 어두워져 있다.

‘하나, 둘, 셋.’

셋까지 세어도 쓸 만한 차이가 안 나온다.

20년을 알았으면 안 맞는 데 하나쯤 금방 나와야 한다.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걸 말할 때마다 도범준은 안 하면 된다고 한다.

나는 화면을 다시 켠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주말에 한 번, 사진 한 장, 석 달 뒤에 끝. 말로 하면 자꾸 다른 데로 새니까 적어야겠어.”

메모 화면을 연다.

글자를 누르려고 엄지를 올리는 순간, 범준이 손을 내민다.

“줘 봐.”

“왜.”

“잠깐.”

나는 화면을 범준 쪽으로 돌려 보여 준다.

범준이 휴대폰을 가져간다.

옆면을 누른다.

화면이 꺼진다.

“야.”

“적지 마. 적으면 네가 지켜. 난 안 지킬 거라.”

범준이 꺼진 휴대폰을 내 쪽으로 내민다.

나는 받는 대신 얼굴부터 본다.

“뭘 안 지켜?”

“석 달 뒤 얘기.”

말이 느려지지 않는다.

눈도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

나는 손바닥을 편다. 범준이 그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는다.

“작전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안 지키겠다고?”

“응.”

“너는 일을 그렇게 해?”

“일 아니잖아.”

휴대폰이 손 안에서 한 번 미끄러진다.

나는 두 손으로 잡는다.

‘지금 도범준이 내 작전에서 끝만 빼 간다.’

어제는 제대로 해 보겠다더니 오늘은 오래 해 보겠다는 건가.

나는 웃는다.

“석 달 동안 사진 보내는 게 그렇게 좋아?”

범준은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래. 엄마들이 조용해지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막상 편해지면 너도 그만하고 싶을걸.”

범준이 내 주머니를 한 번 본다.

내가 다시 꺼내는지 확인하는 눈이다.

나는 양손을 손잡이 위에 올린다.

“안 적어. 봐. 손 두 개.”

“봤어.”

“말로 한 거면 됐지.”

“응.”

범준의 발이 조금 움직인다.

시소가 올라간다.

나는 손잡이를 붙잡고 범준을 노려본다.

“너 방금 일부러 했지.”

“발 저려.”

“회의 자리 담당이 불평하면 안 되지.”

“담당은 언제 정했는데.”

“네가 여기 앉을 때.”

범준이 발을 바꿔 디딘다.

내 높이는 그대로다.

불평은 해도 내려놓지는 않는다.

· · ·

범준이 백팩에서 젤리 봉지를 꺼낸다.

나는 손을 내민다.

범준이 손바닥 위에 봉지를 놓는다.

“먹어.”

“회의 간식까지 있네.”

“배 안 고파?”

“점심 먹었어.”

“그럼 갖고 있다가.”

어제 받은 봉지도 방수 가방 옆주머니에 있다.

나는 가방을 내려다보다가 지금 받은 봉지의 끝을 잡는다.

“너 만나면 간식이 자꾸 쌓여.”

“먹으면 안 쌓여.”

“맞는 말 그만해.”

봉지를 뜯으려는데 손잡이에서 손을 뗀 만큼 몸이 뒤로 기운다.

범준이 바로 발을 눌러 디딘다.

시소가 멈춘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똑바로 앉는다.

봉지 끝은 조금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거 왜 안 뜯어져.”

“이쪽.”

범준이 손가락으로 봉지 귀퉁이를 가리킨다.

나는 뜯는 곳을 바꾼다.

이번에는 열린다.

“알아. 이쪽 먼저 확인한 거야.”

“응.”

“그렇게 대답하면 더 기분 나빠.”

범준이 웃는다.

나도 젤리 하나를 입에 넣다가 웃는다.

그때 공원 입구에서 꽃무늬 조끼가 보인다.

길 할머니다.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걸어온다. 나는 젤리를 삼키고 허리를 세운다.

“안녕하세요.”

범준도 고개를 숙인다.

길 할머니가 우리를 번갈아 본다.

그러고는 내 발을 본다.

바닥에 닿지 않는 운동화 두 짝.

“둘이 아직도 저러고 노네.”

나는 바로 대답한다.

“노는 거 아니에요. 얘기하고 있어요.”

“얘기는 내려와서 해도 되잖아.”

맞다.

나는 시소 손잡이를 내려다본다.

할머니는 범준 쪽으로 장바구니를 조금 든다.

“부동산 애, 발 함부로 떼지 마. 사진관 애 떨어진다.”

“네.”

“어릴 때도 네가 저렇게 올려 놓으면 쟤가 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어.”

“오늘도 그랬어요.”

“야.”

범준이 내 쪽을 본다.

길 할머니가 웃는다.

“목소리도 그대로네.”

나는 젤리 봉지를 무릎 위에 내려놓는다.

“저희 이제 스물아홉인데요.”

“그건 네 엄마가 더 잘 알아. 어제도 말하더라.”

나는 입을 다문다.

범준도 아무 말이 없다.

할머니는 장바구니를 고쳐 잡는다.

“그네 비었는데 왜 굳이 거기서 발을 달고 있어.”

“그러니까요.”

내 대답이 너무 빨리 나온다.

범준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할머니는 우리를 두고 공원 길을 지나간다.

꽃무늬 조끼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있다.

할머니가 공원 저편으로 가자마자 범준을 본다.

“들었지. 내려와서 얘기해도 된대.”

“내려 줄까?”

“아직.”

범준이 눈썹을 조금 올린다.

나는 젤리 봉지를 집는다.

“먹던 건 먹고.”

범준은 모래에 붙인 발을 내려다본다.

나는 젤리 하나를 꺼내 범준 쪽으로 봉지를 내민다.

“너도 먹어.”

“네가 먹어.”

“하나만. 발 저리다며.”

“발 저린 거랑 젤리가 무슨 상관인데.”

“회의 참석한 사람한테 나눠 주는 거야.”

범준이 손을 내민다.

나는 봉지를 기울인다. 젤리 하나가 범준 손바닥에 떨어진다.

범준이 받아먹는 걸 보고 나도 하나를 먹는다.

봉지 안을 들여다보는데 시소가 아주 조금 움직인다.

나는 이번에는 손잡이를 잡지 않는다.

범준의 발이 바로 바닥을 짚는 게 보인다.

“우리 진짜 어릴 때랑 똑같다.”

“너 그때도 먼저 올라갔어.”

“네가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가면 네 쪽이 올라갔잖아.”

“맞아.”

“그래서 내가 다시 앉고.”

“응.”

“그러면 또 내가 뜨고.”

범준이 내 운동화를 본다.

나는 발끝을 한 번 까딱인다.

“다 컸는데도 이러네.”

“내가 더 커서.”

“그건 눈으로 보여. 말로 확인 안 해도 돼.”

범준은 젤리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남은 봉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회의는 생각보다 조용하게 끝난다.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했고, 범준은 마지막만 안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마지막을 나중으로 미뤘다.

일단 다음 주말부터 밥을 먹으면 된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웃느라 입술이 아플 일도 없고, 내 어깨가 왜 넓은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나는 손잡이를 잡는다.

“이제 내려 줘.”

범준이 백팩을 멘다.

“가방 먼저 들어.”

나는 방수 가방 끈을 발끝으로 끌어당긴다. 허리를 숙여 손잡이를 잡고 무릎 위에 올린다.

범준이 천천히 일어난다.

내 자리가 내려온다.

운동화가 모래에 닿고, 시소 밑 고무 받침이 눌린다.

나는 두 발로 바닥을 짚는다.

“회의 끝.”

범준이 시소에서 내려 내 가방 밑을 본다.

“모래 털어.”

나는 가방을 들고 밑면을 툭툭 친다.

범준도 자기 운동화 옆을 턴다.

둘이 똑같이 신발을 털다가 눈이 마주친다.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린다.

“사진은 여기서 안 찍어.”

“왜.”

“엄마가 우리 아직도 논다고 할 거야.”

“얘기했다며.”

“그건 내가 아는 거고.”

범준이 시소를 돌아본다.

나는 앞장서 공원 입구로 걷는다.

· · ·

골목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휴대폰이 한 번 울린다.

나는 마지막 몇 칸을 내려와 화면을 본다.

『범준이랑 있어?』

엄마다.

아까 질문에 대답도 안 했는데 같은 뜻으로 다시 왔다.

나는 짧게 보낸다.

『응. 지금 내려가.』

옆에서 범준의 휴대폰도 울린다.

범준이 화면을 보고 주머니에 넣는다.

“아줌마?”

“응.”

“너도 어디냐고?”

“내려오래.”

나는 고개를 들어 안길을 본다.

사진관 유리창 너머로 엄마가 보인다.

돋보기 안경은 코끝에 걸려 있고, 한 손은 아직 보정 마우스 위에 있다.

엄마가 우리를 발견한다.

마우스를 놓는다.

그러더니 팔을 크게 든다.

사진관 손님이 부른 줄 알고 돌아볼 만큼 크게 흔든다.

나는 걸음을 늦춘다.

“야. 주말에 한 번이면 된다고 했지?”

“응.”

“사진도 한 장이면 되고.”

“응.”

“아직 사진 안 보냈는데.”

범준이 길 건너를 본다.

맞은편 명숙부동산 유리창 안에서도 손 하나가 천천히 올라온다.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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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는 네가 창가에 앉아.”범준이 손가락을 폈다 굽힌다.“그러면 안 기대?”“내가 또 넘어가면 창문이 받아 주겠지.”“아플 텐데.”“그러니까 깨우라고.”버스가 멈춘다.범준은 먼저 일어나서 내 가방을 꺼내 준다. 나는 가방끈을 왼쪽 어깨에 걸고, 아직 덜 풀린 범준 손을 본다.“너 물리치료사잖아.”“응.”“자기 팔부터 잘 돌봐.”범준이 손을 내린다.“다음에는.”나는 대꾸하려다가 앞사람을 따라 내린다.다음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나도 방금 했다.· · ·5월 23일 토요일.사진관 앞에 플라스틱 의자가 쌓여 있다.나는 맨 위 의자를 든다.엄마가 바로 손잡이를 잡는다.“그거 말고 옆에.”“의자도 자리가 정해져 있어?”“그건 다리 흔들려. 내가 앉을 거야.”“엄마는 흔들려도 돼?”“나는 일어나면 되지. 어르신들은 허리 아프시다니까?”엄마는 의자를 바닥에 놓고 눌러 본다. 한쪽 다리가 조금 뜬다.나는 멀쩡한 의자 두 개를 포갠다.경로당 봄 잔치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놀러 간다.의자를 나른다.아마 접시도 나른다.놀러 가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의 차이는 도착해서 알게 된다.“하늬야, 그거 내려놔.”길 건너에서 범준이 온다.검은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었다. 내 손에 든 의자부터 받는다.“두 개야.”“알아.”“나도 들 수 있어.”“그럼 저거.”범준이 접힌 식탁을 턱으로 가리킨다.나는 의자를 다시 잡는다.“됐고. 이쪽이 가벼워.”범준이 웃으며 식탁으로 간다.명숙 아줌마가 부동산 문을 잠그고 천천히 건너온다. 팔 아래에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가 있다.엄마가 묻는다.“명숙아. 몇 개 모자란대?”“의자 넷.”“넷? 아까는 셋이라며.”“네가 앉을 것도 있어야지. 그렇지?”엄마가 흔들리는 의자를 가리킨다.“내 거 여기 있어.”아줌마는 의자 다리를 보고, 엄마를 본다.“그건 화분 올려.”범준이 식탁을 펼치려다 잠깐 멈춘다.나는 고개를 돌린다.웃으면 엄마가 나도 일 시킨다.

  • 소꿉친구가 내 맞선 상대로 나왔다   8화. 네 번째 맞선, 수족관 매점

    “내가 열네 살 때 어디 가고 싶다고 했는데?”범준이 골목 모퉁이에서 멈춘다.내 소매 끝을 본다.돈가스 소스가 묻은 자리다.“집에 가서 먼저 씻어.”“내 질문이랑 소매가 무슨 상관인데.”“굳으면 안 지워져.”“어디냐고.”“수족관.”나는 접어 올린 소매를 놓는다.수족관.그 말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려 본다.“내가 그랬어?”“응.”“언제.”“수영부 들어갔을 때.”“너 그걸 아직 기억해?”범준은 다시 걷는다.“가고 싶다며.”나는 잠깐 뒤처졌다가 따라간다.‘도범준은 15년 전 목적지를 갖고 있다. 나는 오늘 휴대폰도 놓고 나왔다.’“그걸 이제 가?”“다음 주에 시간 되잖아.”맞는 말이다.이번에는 맞는 말인데도 곧바로 대꾸가 안 나온다.나는 소매를 더 높이 접는다.“됐고. 거기 매점 있어?”범준이 나를 본다.“있겠지.”“없으면 곤란해.”“물고기 보러 가는 거잖아.”“물고기도 밥 먹어.”범준 입가가 올라간다.나는 앞을 보고 걷는다.· · ·5월 16일 토요일.사진관 문을 열자 엄마가 내 가방을 먼저 본다.“수족관 간다며.”“응.”“수영하러 가는 거 아니지?”나는 방수 가방을 내려다본다.“거기서 내가 들어가면 직원이 꺼내 주겠지.”“가방이 너무 크다니까?”“작은 걸 들면 물병이 안 들어가.”엄마는 내 가방 안에 든 물병을 확인하고서야 비켜선다.곧바로 다시 앞을 막는다.“사진은 물고기만 찍지 말고.”“아직 출발도 안 했어.”“큰 물고기 옆에서 찍어. 둘이.”길 건너 명숙부동산 문이 열린다.범준이 나오고, 명숙 아줌마가 느리게 뒤따른다.엄마는 내 옆을 지나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명숙아. 거기 멀다며?”“지하철로 50분.”“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찾아봤지. 그렇지?”아줌마가 범준을 본다.범준은 고개를 끄덕인다.엄마도 나를 본다.나는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았다.“넌 뭐 알아봤어?”“매점 있는지.”“있대?”나는 범준을 본다.범준이 대답한다.“있어.”엄마가 고

  • 소꿉친구가 내 맞선 상대로 나왔다   7화. 세 번째 맞선, 돈가스집

    나는 거품 묻은 밥그릇을 돌려 본다.바닥까지 깨끗하다.“한 공기 먹는 애한테 왜 세 공기를 줘?”“달라니까 줬지.”“엄마가 먼저 물었잖아.”“물었는데 먹겠다잖아.”엄마가 물기를 닦은 접시를 찬장에 넣는다.나는 밥그릇을 헹군다. 밥풀 하나가 안 붙어 있다.‘도범준은 밥도 남기지 않고 내 반박할 거리도 남기지 않는다.’“다음에는 덜 줘.”“다음에도 부르게?”수돗물이 장갑 안으로 들어온다.나는 손을 든다.“그 말이 아니잖아.”“그럼 다음에는 안 불러?”“그것도 아니고.”엄마가 내 손에서 그릇을 받는다.오른손 장갑 끝을 조금 당겨 준다. 안에 든 물이 손목으로 흐른다.“그릇 그만 씻어. 수저만 마저 해.”“나 할 수 있어.”“할 수 있는 거 알아. 엄마도 할 수 있다니까?”나는 수저를 모은다.엄마는 범준이 쓰던 밥그릇을 물기까지 닦아서 올려 둔다.맨 위다.“걔 이번 주말에는 뭐 하니?”“몰라.”“만날 거 아니야?”“만날 때 물어보면 되지.”“그러면 어디 갈지도 모르니?”나는 수도꼭지를 잠근다.엄마가 나를 기다린다.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인데, 내가 어디 간다고 하면 거기까지 따라올 것 같다.“밥 먹겠지.”“뭐.”“밥.”“범준이는 밥을 잘 먹더라.”나는 젖은 장갑을 벗는다.‘이 얘기는 다시 세 공기로 돌아간다.’· · ·5월 9일 토요일.나는 신발을 신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다.엄마가 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든다.“왜? 뭐 놓고 왔어?”“휴대폰.”“그걸 놓고 가면 어떡하니. 사진 찍어야지.”“연락부터 해야지.”“연락은 길 건너 가서 하면 되잖아.”맞는 말이다.그런데 사진을 찍어야 하는 이유가 먼저 나오는 건 이상하다.나는 방에서 휴대폰을 챙긴다. 물병은 방수 가방 안에 넣는다.아래층 사진관으로 내려오자 엄마가 보정하던 화면에서 눈을 뗀다.“오늘은 어디 가?”“옛날돈가스.”“돈가스?”“응.”“둘이 먹는 거지?”“다른 사람까지 부를까?”“둘이 먹으라니까?”엄마는 내가 먼

  • 소꿉친구가 내 맞선 상대로 나왔다   6화. 집밥 초대, 홍씨 집 식탁

    물병을 내려놓자 방문 밖에서 엄마가 부른다.“하늬야. 범준이 뭐 좋아하니?”나는 거울에서 눈을 뗀다.“왜.”“밥 먹일 거야.”“지금?”“토요일에.”나는 방문을 연다. 엄마가 빨래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서 있다.“엄마, 걔는 길 건너 살잖아.”“그래서 멀리서 오는 애만 밥 먹이니?”“집에서 먹으면 되잖아.”“우리 집에서 먹으면 안 되니?”대답하려다가 물병을 다시 본다.뚜껑은 아직 느슨하다.“너 어깨는?”엄마가 묻는다.“치료받았어.”“그러니까. 고맙다고 밥 먹여야지.”“그럼 나 치료해 준 사람 다 불러?”“범준이만 부를 건데.”엄마는 빨래 바구니에서 내 수건을 꺼낸다.내 손에는 안 주고 방 안 의자에 놓는다.“토요일 저녁. 너도 어디 가지 마.”“주말마다 한 번이면 되는데.”“뭐가?”나는 물병을 든다.“만나는 거.”엄마의 손이 수건 위에서 멈춘다.그러더니 수건 모서리를 반듯하게 맞춘다.“그 한 번 우리 집에서 만나면 되겠네.”나는 입을 다문다.맞는 말이라서 더 할 말이 없다.· · ·5월 2일 토요일.저녁상을 차리기도 전에 엄마가 내 자리를 옮긴다.내 물컵은 원래 아빠 맞은편이다.지금은 옆이다.그 옆에 물컵 하나가 더 있다.나는 컵을 원래 자리로 밀어 놓는다.엄마가 다시 가져온다.“거긴 범준이.”“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자리가 있어?”“손님 자리는 있어야지.”“나는 살고 있는데 자리가 없어?”엄마가 접시를 내민다.“이거 놔.”접시에는 오이무침이 담겨 있다. 나는 왼손으로 받아 식탁에 놓는다.엄마가 내 오른팔을 본다.“무거운 건 내가 할게.”“이 정도는 들어.”“범준이가 조심하랬다며.”“내 말은 안 듣고 걔 말은 들어?”“네가 조심하라고 했으면 네 말도 듣지.”나는 오이무침을 가운데로 민다.‘지금 봉경애가 내 반박까지 미리 꺼내 놓는다. 접시 놓을 자리만 남는다.’아빠는 식탁 끝에 앉아 생선 접시를 보고 있다.“아빠. 오늘 손님 오는 거 알아?”“어.”“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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