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우리 또 만났네요.”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클라루스의 말에 세이런이 곧바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나무? 둘이 만난 적 있어?”
“어, 아까 상가에서. 우연히.”
“저를 구해 주셨어요. 근데… 머리색이 그땐...”
아티니스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머리로 향했다. 분명 상가에서 마주쳤을 때는 갈색이었는데, 지금은 황금빛
신들의 영역도 인간의 세계도 아닌, 이름조차 없는 허공이 끝없이 펼쳐졌다.벨루알은 그 고요한 어둠 속에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서 있었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다만 숨을 참은 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그때였다. 신들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네루실리아.—무겁고 웅장하며,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담은 것만 같은 소리였다.네루실리아는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그녀의 눈에는 오직 하나, 라이엔뿐이었다. 무너진 그의 몸 앞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신의 생명. 자신이 가진 마지막 것. 그것마저 그에게 흘려보내려 했다.그러나 생명이 그의 몸속으로 채 스며들기도 전에, 인간의 창조주 레아토르가 라이엔을 데려갔다.그제야 네루실리아는 순간 모든 동장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안 돼…! 안 돼…! 레아토르—! 제발… 라이엔을 돌려줘…!”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자신의 생명 일부가 라이엔에게 흘러든 순간, 신의 본질이 이미 금이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온전한 신도, 완전한 인간도 아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불완전한 형체로 신들을 마주 볼 수 없었기에, 그녀는 그저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만을 들었다.—어리석은 네루실리아. 너는 신으로서의 규율을 어겼다.——너의 행동으로 인해, 이제 너는 신으로도 인간으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마땅히 소멸되어야 한다.—“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네루실리아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라이엔.라이엔을 되살려야 한다. 그것뿐이었다. 신들의 웅장한 선고도, 자신의 소멸도,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네가 살리려 했던 그 인간 또한 이제 소멸되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안 돼…! 라이엔만은… 라이엔만은 살려줘. 내가 사라질게. 내가 대신 소멸될게. 제발….”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 신들의 목소리가 잠
라이엔은 그 찰나의 순간, 네루실리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그녀의 몸이 그의 뒤로 밀려났다. 한순간에 그녀의눈앞에 그의 등이 가득 들어찼다.그리고—푹.살을 꿰뚫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네루실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라이엔의 몸을 관통한 검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순간 그녀의 숨이 멎었다.“라이엔!!!!”네루실리아의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큭흐흐흐흐하하..하…아…으윽.”
“오랜만이군, 제2황자.”황제는 입꼬리를 스르르 올렸다.“짐이 널 찾느라, 제법 애를 먹었지.”“폐하…. 몇 번이고 말씀드렸듯, 전 황위를 넘본 적도, 넘볼 생각도 없습니다. 단 한 번도.”“그 말을 짐이 어떻게 믿겠느냐?”황제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아주 섬뜩하게.그는 검을 빼어 들어 검을 라이엔에게 겨눴다. 그의 뒤편 기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형님!”라이엔이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 끝은 떨리고 있었다. 손에 쥔 검도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릴 적엔, 그래도 함께 웃으며 자랐던 사이였다. 무엇보다 황제이기 전에, 그는 분명 그의 형이었다.라이엔은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여태껏 도망쳐 왔다. 싸우지 않기 위해, 피 흘리지 않기 위해.그저 조
‘나의 네루실리아님이… 저런 하찮은 인간에게…. 그런 눈빛을…?’벨루알은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렁임을 느꼈다.들어가고, 어둡고, 낯선 감정이었다.그녀의 손이 그 하찮은 인간 남자의 손을 꼭 잡았다.그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진심이 있었다. 마치 그녀를 전부 품겠다는 듯.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그녀의 미소 하나, 손끝의 온기 하나조차 자신에게만 향하길 바랐던 벨루알은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그녀는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저 인간만… 없으면… 저 인간을 그녀 곁에서 치워버린다면…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까?’질문은 곧 답이 되었다. 한순간, 단 하나의 욕망이 모든 것을 잠식했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루실리아가 말한 ‘잘생긴 인간’이 자신을 뜻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라이엔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부디 그렇다고 말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숨길 수 없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내가 본 인간 중에서는.”“세상엔 잘생긴 인간은 많아요. 그럼 잘생기기만 하면 다—”라이엔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상상도,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라이엔이라 불러주세요, 실리아님.”네루실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이엔.”네루실리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l
“짝짓기라니…. 아니, 단어도 왜 하필 짝짓기라는 거예요? 그게 뭔 줄 알고 자꾸 그러는 거예요?!”라이엔이 귀끝이 붉어진 채 외쳤다.“두 인간이 밀폐된 공간에서 옷을 벗는 거?”“그니까–”라이엔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하아…. 누가 그렇게 알려 줬어요.”“베….”“... 베?”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하지만 네루실리아는 천사인 벨루알의 이름을 그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벨… 아는… 이, 인간이….”그녀의 대답에 라이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벨? 여자인 것 같긴 한데… 여자라서 그나마
생각지도 못한 큰 키에 아티니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야만 했다. 그의 가슴팍 너머로 올라간 시선 끝에서 마주한 것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는 짙은 자주빛 눈동자였다.‘여전히 잘생겼네… 잘생… 기면 안 되는데. 거절해야돼!’그와 시선이 딱 마주치자, 아티니스는 순간 목적을 까먹을 뻔했다.당황한 그녀는 뒷걸음치며 거리를 두었다.“청, 청혼서가 마음에 들긴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말을 하려다 목소리가 꼬이고, 톤도 이상해졌다.“대공자의 청혼서를 협박이라니. 너무한걸.”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되물
청혼서라는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면식 없는 대공가에서 결혼을 제안하다니. 게다가 시골 영지에 틀어박혀 살아온 자신을 어떻게 알고 보낸 건지 아티니스는 의아했다. “설마… 예전에 황실 파티에서 우리 아티를 본 건 아닐까요?”백작부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시골 영지 영애인 제게 누가 관심을 보였겠어요… 저도 관심 없었고요.”“무슨 소리야. 우리 아티의 아름다움은 태어날 때부터였단다. 세상을 밝혀주는 따스한 아침 햇살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에, 릴리스를 쏙 빼닮은 아메랄드를 담고 있는 두 눈동자. 그 무도회에
둘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아티니스는 다시 넘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그 소년을 내려다보았고, 소년은 팔꿈치로 몸을 일으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때지 못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ㅁ… 뭘 봐.”정적을 깨는 차가운 말투였다. 그 말에 아티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나마 그에게서 느꼈던 환상이 살짝 깨지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쉽게 그 환상을 깨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그랬다. “옷 다 젖어 버렸네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과 달리, 아티니스 세레스니타의 표정은 흐린 하늘처럼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말없이 긴 숨을 내쉬며 그녀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러 가는 아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아티… 정말 혼자 가야겠니? 엄마가 같이 가 준다니까….”아티니스 뒤를 따라 나온 릴리스 백작부인의 애타는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던 글라디 백작도 걱정 어린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도무지 딸을 혼자밖에 내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3년전부터 외출은 허락해 주셨